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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18) 바울과 에바브로디도(2:25-30)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5.02|조회수28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18)
바울과 에바브로디도(2:25-30)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1] 빌 2:25-30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의 교인으로 빌립보교회가 바울사도가 갇혀 있음을 듣고 그를 도우기 위하여 교회의 “사자”(ἀπόστολον, messenger)로 파송된 사람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에바브로디도는 어떤 사람일까요? 바울이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로 보내기 전에 이 편지를 가지고 빌립보 교회로 갔던 그에 대하여, 우리는 여기 이외에는 그의 대한 정보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바울이 그를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의 섬김과 그의 됨됨이에 대하여 배워야 할 것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이제 에바브로디도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그는 바울의 “형제이며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ἀδελφὸν καὶ συνεργὸν καὶ συστρατιώτην)입니다(2:25). 바울사도는 “그는 나의 형제요”(τὸν ἀδελφὸν μου)라고 했습니다. 형제란 말은 기독교에서 생긴 말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형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성(姓)이 같기 때문에 가문이 같기 때문에 형제가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때문에 형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냐고 질문하시면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고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을 때 주님이 아나니아를 보내어 그를 안수케 하시매 보게 되고 성령이 충만케 하셨는데, 이 때 아나니아는 사울을 가리켜 “형제 사울아”(행 9:17)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에서 형제는 가장 친밀하고 가장 가까운 사이입니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사이입니다. 기도를 함께 나누고 교제를 함께 나누고 봉사를 함께 나누고 물건도 함께 나누고 생명도 함께 나누는 사이입니다.

에바브로디도 그는 빌립보 교회의 어떤 직분자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유력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며 사도 바울은 그를 형제로 부르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와 모든 것을 함께하며 나눌 수 있는 형제가 되어준다면 나는 얼마나 기쁘고 행복할까요? 누군가가 나에게 가까이 와서 나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형제가 되어 준다면, 나는 가장 행복하고 가장 기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에게 형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형제가 되어주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 하는 것이 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5). 에바브로디도는 사도바울에게 형제가 되었기 때문에 또한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기 “함께 수고한 자”(συνεργὸν)라는 말은 동역자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 누구보다도 수고를 많이 했는데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수고를 많이 한 바울의 형제였고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바울과 “함께 군사”(συστρατιώτην)가 되어서 영적인 전쟁을 함께 수행했습니다. 즉 그는 바울사도와 함께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전파를 위해 헌신한 그리스도의 용맹한 군사가 되었습니다.

둘째,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의 사자(ἀπόστολον, 使者)였습니다(2:25). 그는 “너희 사자”(ὑμῶν δὲ ἀπόστολον)라고 했습니다. 영어로는 메신저, 심부름꾼이라는 말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신임과 신뢰를 받아 그들의 사자가 되었고 그들의 심부름꾼이 되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의 사랑의 편지들과 사랑의 선물 보따리를 그에게 다 맡겨버렸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사신으로서 저들의 사랑의 편지들과 사랑의 선물들을 가지고 와서 바울에게 그대로 다 전달했습니다. 자기의 일을 다 제쳐놓고 교회의 일을 했습니다. 자기의 일을 다 제쳐놓고 배를 타고 먼 길을 항해해서 로마까지 왔습니다. 교회의 사자가 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기의 직업을 제쳐놓고 러시아나 중국이나 방글라데시나 그리스나 헝가리에 있는 선교사에게 사랑의 선물을 가지고 며칠 동안 여행을 하고, 그리고 거기 몇 달을 머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의 충성스러운 사자였습니다. 바울은 너무 기뻤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πεπλήρωμαι, δεξάμενος παρὰ Ἐπαφροδίτου τὰ παρ’ ὑμῶν, 빌 4:18). 편지와 선물을 받은 바울은 너무 기뻤습니다. 인생은 편지요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바울의 쓸 것을 도왔습니다. 의식주(衣食住)의 필요한 것들을 도왔습니다. 마치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부부가 사도 바울의 의식주를 도왔던 것처럼 에바브로디도는 로마 감옥에서 사도 바울의 의식주를 도왔습니다. 바울은 그의 사역으로 인하여 큰 위로와 기쁨을 누렸습니다. 인생은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충실한 교회의 사자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에는 주인 노릇 하려는 사람보다는 메신저와 심부름꾼 노릇 하려는 사람들이 더 필요합니다. 사실 바울 자신도 예수님의 사자였고 예수님의 심부름꾼이었는데 에바브로디도도 빌립보교회의 사자였고 빌립보교회의 심부름꾼이었습니다.

셋째, 에바브로디도는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닮아, 온유와 겸손으로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또한 세상 사람들도 원합니다. 그러나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 같이 아주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는 악평을 받고 있습니다. 주의 계명을 지키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면 사람이 아주 모질고 독한 사람이 되어야할까요? 에바브로디도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병이 들었습니다. 그의 병세는 아주 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근심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바울사도를 도우기 위하여 파송된 자신이 자식의 직무를 올바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하여 심히 근심한 사람입니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ἐπειδὴ ἐπιποθῶν ἦν πάντας ὑμᾶς (ἰδεῖν) καὶ ἀδημονῶν διότι ἠκούσατε ὅτι ἠσθένησεν, 2:26). 이러한 에바브로디도의 모습은 그의 인간됨이 잘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이 병들어서 고통 하는 것보다도 빌립보 교인들의 근심하는 일에 더 마음이 쓰였던 것입니다. 혹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왜 이런 어려움들이 있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은 아닌가, 바울사도는 갇혀있고, 에바브로디도는 죽을병이 들었고….” 얼마든지 인간적으로 보면 근심이 지나쳐서 이런 시험에 들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아무런 사고나 질병이나 그런 것들이 없다고 성경이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걱정하고 근심할 일들이 없어서 기뻐하고, 항상 승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 때문에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근심도 이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와 에바브로디도 때문에 걱정하는 것과 혹 이 일로 시험들 일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하루 빨리 에바브로디도를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를 하므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므로 그 병을 낫게 하셨습니다.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καὶ γὰρ ἠσθένησεν παραπλήσιον θανάτῳ, ἀλλὰ ὁ Θεὸς ἠλέησεν αὐτόν; οὐκ αὐτὸν δὲ μόνον, ἀλλὰ καὶ ἐμέ, ἵνα μὴ λύπην ἐπὶ λύπην σχῶ, 2:27). 그래서 바울이나 에바브로디도는 이 소식을 빌립보 교회에 전해야할 필요를 강하게 느낍니다. 어떻게 하면 빌립보 교회의 근심을 없애주고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믿음의 의심이 일어난다면 큰 손해가 될 것이니 디모데 보다는 빨리 에바브로디도를 보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Σπουδαιοτέρως οὖν ἔπεμψα αὐτὸν, ἵνα ἰδόντες αὐτὸν πάλιν, χαρῆτε, κἀγὼ ἀλυπότερος ὦ, 2:28).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빌립보 교회나, 바울이나 에바브로디도나 다 자기 생각보다는 주님 생각이요, 형제를 자기보다 먼저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것은 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돕기 위해서 헌금하여 에바브로디도를 바울에게로 로마까지 보낸 일, 에바브로디도로 인하여 근심하는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다시 이 사람을 돌려보내는 일, 이 일을 주님의 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이라면 두드러지게 큰일을 떠 올리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 작은 일들, 작은 섬김들이 주님의 일입니다. 내 이웃의 신앙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권면하여 믿음으로 바로 잡아주는 일, 이 일보다 귀한 일이 없습니다.

넷째,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쓸 것을 돕는 자”(λειτουργὸν τῆς χρείας μου)라고 했습니다(2:25). 복음 사역하는 영적인 일에는 육적인 면으로 부족한 것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돕는 사람”(λειτουργὸν, servant)이 있어야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복음으로 함께 수고하고 함께 고난을 받을 뿐 아니라, 바울의 선교사역에 모자라는 세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돕는 봉사의 일을 했습니다. 교회에는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순수하게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곳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 물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데에 경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육적인 면의 부족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돕는 사람이 바로 에바브로디도였습니다. 그가 한 일은 바울의 선교를 위해서 협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앞에 설 때에 바울과 함께 상을 받을 것입니다. 바울을 도왔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바울의 생활을 도운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 복음 사역을 도운 것입니다.

다섯째,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 목숨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ὅτι διὰ τὸ ἔργον
Χριστοῦ, μέχρι θανάτου ἤγγισεν, παραβολευσάμενος τῇ ψυχῇ ἵνα ἀναπληρώσῃ τὸ ὑμῶν ὑστέρημα τῆς πρός με λειτουργίας, 2:30). 바울의 선교 사역을 돕는 일, 곧 그리스도의 일이라면 물질 뿐 아닙니다. 그는 시간도 내어 놓았고, 그의 귀한 목숨까지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의 달리신 것 같이 에바브로 디도 역시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는 물론 빌립보 교회에게도 에바브로디도는 보물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잡고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2] 미국의 데이빗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목숨을 바친 사람입니다. 그는 이들을 위하여 수고의 수고를 하다가 온 몸에 갖가지 병을 얻게 되어, 결국 29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참으로 값진 삶을 산 사람으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적었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구할 수만 있다면/ 어디를 가든/ 어떻게 살든/ 무엇을 참아내야 하든 상관이 없다/ 꿈 속에서도 그들을 생각하고/ 깨어있을 때에도/ 가장 먼저 그들을 떠 올린다(I care not where I go, or how I live, or what I endure so that I may save souls. When I sleep I dream of them; when I awake they are first in my thoughts. David Brainerd).

“죽으면 죽으리라”(에 4:16)라고 외쳤던 왕후 에스더와 같이 자기를 희생하는 사역자가 오늘날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보면 에스더가 아니라 한 때의 베드로처럼 멀찍이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믿음과 봉사의 제물이 되기를 기뻐하여 자기 일을 구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며,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아깝지 않고, 목숨까지 돌아보지 않는 사람, 자기 보다는 형제를 먼저 생각하는 인간미가 넘치는 에바브로디도 같은 신실한 일군을 꿈꾸지만 매일 결심만 할 뿐입니다. 에바브로디도, 바울사도는 “이러한 사람을 존귀하게 여겨라”(τοὺς τοιούτους ἐντίμους ἔχετε) 라고 합니다. 즉, 29절은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하게 여기라”(προσδέχεσθε οὖν ἐν Κυρίῳ μετὰ πάσης χαρᾶς, καὶ τοὺς τοιούτους ἐντίμους ἔχετε, 2:29).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자 한다면, 에바브로디도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교회의 에바브로디도가 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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