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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19)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5.03|조회수30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19)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3:1-3)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1] 빌 3:1 바울사도는 1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성도들에게 권면을 하였고, 2장에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본보기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및 자신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3장에서 이런 삶을 이끌어나갈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교훈을 말하는데, 그 시작을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로 열고 있습니다. 특히 빌립보서는 바울의 다른 서신서와 비교를 해 보면 3:1에도 있는 바와 같이 기뻐하라는 말이 매우 많다는 것입니다(1:18, 2:17-18, 3:1, 4:4, 10 총 8번). 거듭 말씀드리지만 현재 바울의 처한 상황에서 보면 전혀 기뻐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로마에 의한 감금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는 기뻐하라고 할 때, 이미 앞에서도 보았고 이곳에서도 동일하게 “주 안에서”(ἐν Κυρίῳ)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바울의 기쁨이란 결코 세상적인 가치관에 의하여 판단할 수 없는 일로 인한 기쁨인 것입니다. 자녀가 좋은 회사에 취직하여, 훌륭한 규수와 결혼하였기 때문에, 명성을 얻었기 때문에, 또는 자신이 부귀영화를 얻었기 때문에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기쁨은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1절은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ἀδελφοί μου, χαίρετε ἐν Κυρίῳ)고 합니다. 상황을 뛰어넘는 기쁨입니다.

바울사도는 이처럼 “기뻐하라”고 한 뒤, 분위기를 조금 바꾸어 “너희에게 같은 말을 하는 것”이 성가실 수 있지만, 결코 “수고로움이 아니다”(ἐμοὶ μὲν οὐκ ὀκνηρόν)라고 하면서, 뭔가 중요한 말이 이어질 것임을 느끼게 합니다. 가끔 우리는 어떤 말을 반복적으로 들을 때 지겹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는 사람은 어쩌면 그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에 신신당부(申申當付)를 한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요. 이처럼 바울사도는 “같은 말로” 여러 차례 반복을 한다고 할지라도, 이 교훈을 통하여 그들의 신앙이 견고해지고 안전해 질 수 있다면 결코 수고로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같은 말을 쓰는 것”(αὐτὰ γράφειν ὑμῖν)이란 “ 주 안에서 기뻐하라”,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중심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1:27-30). 진리는 변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거짓 교사들의 다양한 변명과는 달리 일관성을 지니고 있어 반복적으로 새겨듣는 것이 더욱 “안전하기 때문일 것”(ὑμῖν δὲ ἀσφαλές)입니다.

[2] 빌 3:2 행 16:11-15 이렇게 시작한 바울의 교훈은 이제 율법주의에 대한 비판과 경고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즉, 빌립보교회 안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본래 빌립보교회는 다른 교회와 달리 유대인들이 거의 거주하지 않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회당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복음전도 때에는 강변에서 전도를 하였고 이 때 자주장사 루디아가 복음을 받고 그의 집을 예배처소로 제공한 것이 빌립보교회의 시작이라 봅니다. 따라서 빌립보교회의 경우 다른 지역의 교회보다는 유대 율법주의에 의한 문제는 적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중에 일부 유대주의자들은 복음을 순수 그대로 가르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개들”(κύνας)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쩜 이들은 복음전파가 그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편이 되는 물질을 탐하여 스승으로 자처하고 돌아다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복음을 잘 몰랐으며, 심지어 복음까지 손상을 입히는 노릇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이들을 개에 비교하여 이렇게 “개들”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들을 “행악 하는 자들”(κακοὺς ἐργάτας)이며 또한 “몸을 상해하는 일”(κατατομήν, 이전 성경은 損割禮黨)이라 비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사도가 말하는 “몸을 상해하는 일”이란 육체에 할례를 자랑하며 마치 이러한 육체적인 표시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보증수표인 양 율법주의를 내세우며 순수 복음을 훼손시키는 무리들의 행위를 말합니다. 이는 구약성경에 바알 선지자들(왕상 18:28)과 이교도들이 광란의 의식을 치르며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한 것(레 19:28, 21:5; 신 14:1; 사 15:2; 호 7:14)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빌 3:3 바울 사도는 이러한 “개들”, “행악 하는 자들”, 그리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Βλέπετε, 조심 또는 경계하다)면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ἡμεῖς γάρ ἐσμεν ἡ περιτομή, οἱ Πνεύματι Θεοῦ λατρεύοντες καὶ καυχώμενοι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καὶ οὐκ ἐν σαρκὶ πεποιθότες)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말하는 참 할례파는 어떠한 존재일까요“? (1) 진정한 할례는 양피를 자르는 육체에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 10:16).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 2:29). 따라서 참 할례파는 육체를 자랑하거나 신뢰하지 않습니다(οὐκ ἐν σαρκὶ πεποιθότες)는 것입니다. (2) 그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Πνεύματι Θεοῦ λατρεύοντες)라고 할 때의 ”봉사“(λατρεύοντες)란 물론 몸의 헌신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더 정확히는 정중하게 드리는 영적 예배(worshiping)에 더 가까운 개념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3) 그들이 자랑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라는 것입니다. 즉, 유대주의자들이나 유대인들처럼 인간이 행한 것을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 자랑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대소요리문답 제1번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답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특히 여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καυχώμενοι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한다고 할 때의 “자랑”(καυχώμενοι)은 “넘치는 기쁨으로 자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를 달리 표현하면 “영광을 돌린다”(glorying)는 의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모든 공로를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라고 합니다(고후 10:17). 나의 나 된 것은 다 주의 은혜입니다(고후 15:10 참조).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하면서 개들, 행악하는 자들, 몸을 상해하는 일을 경계하고, 변하지 않고 동일한 진리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될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여기에 예외일 수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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