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묵상노트

[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21)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5.05|조회수32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21)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3:7-9)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 빌 3:7-8 방금 우리는 “개들”, “행악하는 자들”, “몸을 상해하는 일”을 하는 유대주의자들이 자랑하는 것에 대하여, 바울 자신도 자랑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들보다 더 철저히 육체의 일을 신뢰할만하다고 합니다. 이것만 보면 바울도 유대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바울에 크게 오해한 것이겠지요. 모두 잘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결코 육체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7절에 보는 바와 같이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ἅτινα ἦν μοι κέρδη)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뿐더러(ταῦτα ἥγημαι, διὰ τὸν Χριστὸν, ζημίαν),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διὰ τὸ ὑπερέχον τῆς γνώσεω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τοῦ Κυρίου μου)이라 합니다.

바울사도의 학문의 수준, 가문 및 그의 열심을 생각한다면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오늘의 경우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알고 있는 학문, 그의 율법에 따른 열심, 그리고 그의 가문에 대한 긍지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여기 “해”(ζημίαν, loss), “유익”(κέρδη, gain)이라는 단어는 모두 회계 용어로 사업으로 인하여 손익이 발생할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바울은 이 용어들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가 그를 구속하셨을 때 영적인 손익계산이 발생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여긴다”(ἥγημαι, esteem)는 의미는 단순히 그렇게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자신의 열심을 위하여 동분서주 하던 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철저히 생각하다” 또는 “철저히 심사숙고 하여” 회계 장부를 통하여 손익을 계산해 평가해 보았다는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 말도 동일하게 회계학적인 측면에서 대차대조표를 통하여 확인을 해 볼 때, 이전 그가 알고 있었던 그리고 그가 지녔던 지위 등을 모두 해(손실)로 여기는 대신에, 그는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γνώσεω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이 “가장 고상하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 할 때의 “안다”(γνώσεως)는 개념은 두 말할 것 없이 단순히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또한 인격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상하다”(ὑπερέχον)는 의미는 “뛰어난”, “우월적인” 또는 “최고”(superiority, surpass, supreme)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영역에서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배우면 배울수록 모르겠다는 부분이 더 많은 것이 세상의 학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이성은 타락으로 인하여 부패될 때로 부패되었습니다. 아무리 하늘의 법을 이성으로 분석하고 알려고 해도 분명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igbang 이론을 펼치거나 진화론을 펼치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갖은 방법으로 이성을 동원하여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 세상의 학문입니다. 그리고 남들이 조금 알지 못한 부분을 스스로 알게 되었을 때는 그의 자만심과 자랑은 극에 달하는 것이 오늘의 학문 세계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이와 같은 학문을 그가 당시의 상황에서 모두 섭렵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더라도”(πάντα ἐζημιώθην, καὶ ἡγοῦμαι σκύβαλα)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배설물”(σκύβαλα)이란 똥, 쓰레기를 말합니다.

[2] 빌 3:8-9 그렇다면 왜 바울사도는 자신의 학문과 가문, 그리고 그의 열심 모두를 배설물로 여긴 것일까요? 여기서 바울은 바로 복음의 본질 문제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학문이, 가문이 또한 그의 열심히 결코 그를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간은 도덕으로도 윤리적인 행위로도, 돈이나 명예나 권세로도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바울사도가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합니다(롬 3:10-12).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그렇습니다. 바울은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以信稱義).

바울은 이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더라도 문제없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바로 8절 끝과 9절 서두에서 그는 이제 “그리스도를 얻었기 때문”(ἵνα Χριστὸν κερδήσω)이며,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καὶ εὑρεθῶ ἐν αὐτῷ)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손익계산 면에서 볼 때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얻었으니, 흔히 하는 말로 땡잡았다는 것입니다. 절대 손해를 본 장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그에게 전가시켜(imputation), 그의 의를 바울의 의로 여기셨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μὴ ἔχων ἐμὴν δικαιοσύνην, τὴν ἐκ νόμου, ἀλλὰ τὴν διὰ πίστεως Χριστοῦ, τὴν ἐκ Θεοῦ δικαιοσύνην ἐπὶ τῇ πίστει)고 9절에서 말합니다. 그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고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 우리 모두도 이제 땡잡은 사람들입니다. 바울과 같이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얻은 사람들”이며, “그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많은 것을 잃는다 할지라도…. 바울처럼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하겠지요.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