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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23)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5.08|조회수31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23)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3:17-21)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1] 빌 3:17-19 우리는 앞에서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라고 한 말씀을 살핀 적 있습니다. 이제 이곳에서는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 된 삶이 아니라, “나를 본받으라”(Συμμιμηταί μου γίνεσθε)라고 말합니다. 보통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너희들, 나 좀 본받아봐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도는 용감할 정도로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말을 사도가 한다는 것은 빌립보교회와 전혀 거리감이 없는, 매우 친숙한 사이이기 때문에 가능하였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 인정하는 바와 같이 바울사도는 분명히 본 받을만한 사람임에도 틀림이 없지만….

바울은 이 말을 한 후에, 이어서 자신을 본받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본받아 살고 있는 “그와 같은 사람을 눈여겨보라”(σκοπεῖτε τοὺς οὕτω* περιπατοῦντας)고 합니다. 앞서 언급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물론이거니와, 지금 빌립보 교회에 모범을 보이고 있는 경건한 자들의 그리스도를 향한 섬김에 대하여 눈여겨 잘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본받기를 원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대강 추측을 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하여 갖은 고난과 고통도 감내하며 복음을 위하여 진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바울사도를 본받아 사는 사람이라면 분명 어디가 달라도 다를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을 오늘 우리 자신에게 적용한다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어쩌면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숨고 싶은 마음이 드시지 않나요? 사실 우리 모두는 허물 많은 사람들이기에 감히 이렇게 모범을 보이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그렇게 살도록 노력은 게으르지 않아야겠지요.

바울은 앞서 자신을 본받으라,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아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통하여 무언가 비교를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여러 차례 말하였던 것처럼(행 20:28-30), 18절에 보는 바와 같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동일한 경고를 하였던 것은 바로 거짓 교사의 위험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였습니다”(ἐχθροὺς τοῦ σταυροῦ τοῦ Χριστοῦ). 따라서 그들은 비록 십자가를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고 할지라도, 유대주의자들과 같이 행위구원을 강조하였거나 아니면 이방인 자유주의자들처럼 복음에 더하여 철학을 끌어들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왜곡시켰을 가능성이 큽니다. 바울은 이들을 향하여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ὧν ὁ θεὸς ἡ κοιλία, καὶ ἡ δόξα ἐν τῇ αἰσχύνῃ αὐτῶν, οἱ τὰ ἐπίγεια φρονοῦντες)라고 합니다. 즉, 이들은 바울과 달리 복음을 빙자하여 자신의 배만 불리며 땅에 것만 찾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왜곡케 하는 삯꾼과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결국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닮아서는 결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이와 같은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도록 단순히 권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그리고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νῦν δὲ καὶ κλαίων λέγω)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진심을 읽을 수 있지요.또한 그가 얼마나 빌립보교회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2] 빌 3: 20-21 바울사도는 자신을 본받아 사는 인생은 또한 배만 불리는 어리석은 무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Ἡμῶν γὰρ τὸ πολίτευμα ἐν οὐρανοῖς ὑπάρχει, ἐξ οὗ καὶ Σωτῆρα ἀπεκδεχόμεθα, Κύριον Ἰησοῦν Χριστόν)라고 합니다. 즉,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시민이라면 하늘시민에 걸 맞는 행동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땅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시민권을 가진 자, 로마시대에는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는 어디를 가나 우월적인 보호를 받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시민권을 가진 자는 세상의 통치권에 의하여 영향을 받기 보다는 하늘의 통치권자인 하나님 아버지의 통치하에 있는 자들입니다. 특히 이러한 통치를 받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는 온전히 구원받는 반열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ἀπεκδεχόμεθα, Κύριον Ἰησοῦν Χριστόν)라고 함으로써,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참고 인내할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즉, 비록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각종 시련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또한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정말 보잘 것 없는 미천한 자 내지 낮은 자로 분류될는지 모르지만, 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영화롭게 되었던 것처럼 주님께서 오실 때 성도들은 영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즉,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κατὰ τὴν ἐνέργειαν τοῦ δύνασθαι αὐτὸν καὶ ὑποτάξαι αὑτῷ τὰ πάντα)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σύμμορφον τῷ σώματι τῆς δόξης αὐτοῦ) 변하게 하시리라”는 희망과 확신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시민으로, 변화된 몸으로 영광의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 할(딤후 2:10-12 참조) 그날을 소망하며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시민은 과거나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영화를 생각하며 현재를 살고 있는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 이하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예화를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부자는 과거와 현재인 오늘을 살았지만 거지 나사로는 미래를 위하여 현재인 오늘을 산 사람입니다(눅 16:19-31). 히브리서 기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라고 적고 있습니다. 얼마나 소망적입니까? 소망의 날을 고대하면서, 장래의 영광의 날을 위하여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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