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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26)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5.11|조회수35 목록 댓글 0

[구모영 묵상노트]
기쁨과 감사의 복음 빌립보서(26)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4:8-9)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1] 빌 4:8 바울사도는 마지막으로 빌립보교회의 성도들께 권면을 합니다. 그런데 먼저 주목할 것은 이미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여”라고 말하지 않고 바울사도는 “형제들아”(ἀδελφοί )라고 합니다. 전자의 표현은 다분히 사무적인 표현이지만, 후자의 표현은 극히 개인적이며 관계적이며 또한 친밀성을 명확히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바울사도는 그의 서신에 이와 같이 “형제들아”라는 말을 즐거이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성도들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 구성원들 간에는 이와 같은 신분관계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사도는 이러한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은 8가지의 덕목을 열거하며, 이러한 덕을 세워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인간에게 부여된 책임을 하나님께 맡겨 버리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책임 있는 행위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먼저 무엇에든지 “참되며”(ἀληθῆ)라고 합니다. 여기 ‘참되다’는 말은 거짓이 없다는 것으로, 이 말은 하나님 안에서(딤후 2:25), 그리스도 안에서(엡 4:20, 21), 성령 안에서(요 16:13),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요 17:17)에서 발견되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여기 “참되며”라는 요청은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가 깊이 새기고 삶으로 드러내길 바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무엇에든지 “경건하며”(σεμνά)라고 합니다. 여기 “경건하다”라는 말은 바울사도가 자주 사용하는데(딤전 3:8, 11, 딛 2:2), 이 말은 “존경받을 만한”(venerable)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하여 이 말을 사용할 때에는 경외와 흠모함을 의미한다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사용할 때에는 예법과 자중(自重)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무엇에든지 “옳으며”(δίκαια), “정결하며”(ἁγνά), “사랑받을 만하며”(προσφιλῆ), 또한 “칭찬받을 만하며”(εὔφημα)라고 합니다. 이는 자신의 행위가 곧고 발라야 하며, 도덕적으로 순결하여 죄 없어야 하고, 어딘지 모르게 끌리며 상냥스러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도 받아야겠지만, 사람에게도 역시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흠이 없어 타인의 모범이 되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다만 이것의 동기가 타인으로부터 칭찬 받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서 그 동기를 찾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무슨 “덕”(ἀρετὴ)이나 “기림”(ἔπαινος)이 있든지 이것들을 항상 생각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덕”이란 타인에 대한 후덕함과 관대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성품을 지진 것을 의미하며, “기림”(praise)이란 원뜻은 ‘칭송’, ‘칭찬할 만한 것’이라는 의미로, 여기서는 도덕적이거나 영적으로 칭찬받을 만하도록 하라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상과 같은 덕목은 성도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것이기에, “이것들을 생각하라”(ταῦτα λογίζεσθε)고 합니다. 여기 “생각하다”라는 말은 “세어보다, 계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허투루 하지 말고 이것들을 곰곰이 상고해 보라는 것입니다.

[2] 빌 4:9 바울사도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생각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러한 것은 생각들을 올바른 행동으로 이어가라(행하라, πράσσετε)는 것입니다. 머리만 클 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동안 자신으로부터 듣고 배운 바를 아는데 그치지 말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함이 있을 때에 “평강의 하나님”(ὁ Θεὸς τῆς εἰρήνης)이 빌립보 교회의 형제 된 성도들에게 함께(μεθ’) 계실 것이라 합니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계실 것이라”(ἔσται)는 의미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임을 보장하고 약속하는 의미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같은 말을 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1-26). 그런데 여기 논외의 것이기는 하지만, 야고보는 바울과 믿음와 행함에 있어 충돌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의문이 듭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야고보의 가르침은 바울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에 대한 완벽한 보완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가요? 야고보의 행함을 강조하는 믿음은 아브라함과 라합 및 인간의 몸과 영혼에 대한 예증을 통하여 설명을 하고 있는데, 바울이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가르침과(롬 3;20, 4:1-25, 갈 3:6, 11) 충돌하지 않습니다. 야고보가 아브라함이 자신의 선행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것이라 말할 수 없는 근거를 본다면, (1) 야고보는 이미 구원이 은혜의 선물임을 강조했고(1:17, 18), (2) 앞의 단락 중간에(23) 창세기 15:6을 인용했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만을 근거로 의롭다고 선언한 구절이기 때문이며, (3) 야고보가 이삭을 바친 것을 근거로 행위를 강조하지만 이삭은 아브라함이 믿음을 발휘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 사건 한참 후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창 12:1-7, 15-16). 그러므로 위의 야고보의 가르침은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이 다른 사람 앞에서 인정받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도 야고보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해 상호 충돌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완적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결정되며(엡 2:8, 9)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신실한 순종에 의해서만 입증된다고 보아야 합니다(엡 2:10).

빛의 자녀가 되었다면 빛을 감추지 말고 드러내어야 하는 것처럼, 은혜로 의롭게 된 사람이라면 자연히 그의 삶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순서가 뒤바뀌어 거룩한 삶을 행위로 드러내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우리의 노력 덕분으로 얻게 되는 복음의 왜곡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값싼 은혜라는 말을 하면서, 성도들이 이처럼 믿음으로 의롭다고 함으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밝히지 못하며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져도 구원은 떼 논 당상이라 비판을 하면서, 유보된 칭의론을 주장하기도 하며, 중생을 위한 논의도 연속적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분명 하나님의 주권을 우습게 보는 논쟁들이며,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이는 알 수 없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 100%에 사람 100%라고…. 이것 역시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말의 성찬에 불과합니다. 구원은 전적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입니다. 나의 의는 1도 없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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