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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논평 및 논단

유한영 / 장애인의 날, 장애인 주일 BIBLE MESSAGE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4.04.21|조회수37 목록 댓글 0

장애인의 날, 장애인 주일 BIBLE MESSAGE

유한영 / 세대로교회 동사목사, 부산기윤실 장애인 사역팀장


레위기 19:13-16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신다>

13 이웃을 억압하지 마라. 이웃의 것을 빼앗지 마라. 품꾼의 삯을 그 날 주지 않고, 밤새 갖고 있지 마라. 14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하지 마라. 눈먼 자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지 마라. 너희는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나는 여호와이다. 15 재판을 할 때는 공정하게 하여라.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감싸 주거나, 힘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편들어 주지 마라. 이웃을 재판할 때는 공정하게 하여라. 16 다른 사람을 헐뜯는 말을 하고 다니지 마라. 이웃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일을 하지 마라. 나는 여호와이다.

Ⅰ 장애인의 날에 대하여

매년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입니다. ‘장애인의 날’은 1972년부터 민간단체에서 개최해 오던 4월 20일 ‘재활의 날’을 1981년부터는 국가에서 ‘장애인의 날’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법정기념일 축소 방침에 따라 법정기념일로 지정받지 못하다가, 1989년 12월 개정된 「장애인복지법」에 의거 1991년부터 4월 20일이 ‘장애인의 날’ 법정기념일로 공식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이전 재활의 날)로 정한 것은, 4월이 1년 중 모든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어서 장애인의 재활의지를 부각시킬 수 있다는 데 의미를 둔 것이라고 합니다.

2022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장애유형은 15가지로 구분(지체, 청각, 뇌병변, 언어, 시각, 안면, 호흡기, 신장, 심장, 간, 장루/요루, 뇌전증, 지적, 자폐성, 정신장애)되어 있는데요, 장애를 두 유형으로 나눈다면, 신체적장애와 정신적장애로.
장애인구는 전체 인구의 5.2%인 약265만 3000명입니다. 2021년 보다 약 8000명이 증가했습니다. 2022년 한 해만 떼어서 보면 새로 장애인으로 등록된 인구가 8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런 통계에 대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현실은 등록장애인 중에서 65세 이상이 전체 장애인구 중 52%를 차지할 정도로 장애인도 고령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장애인구 중 약90%가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다가 질병이나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중도장애인이라는 것입니다. 장애는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어떤 날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장애인의 날’ 역시, 이날 방송에서는 장애인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지자체에서는 장애인관련 행사를, 몇몇 교회에서는 다음 주를 ‘장애인 주일’로 정하여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물론 어느 한 날만 반짝하는 행사들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이런 행사나 프로그램이라도 있기 때문에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요즘에는 공공기관이나 학교에서는 ‘장애인식개선교육’이 의무교육으로 되어 있어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변화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바뀌지 않고, 늦게 바뀌는 것이 ‘교회’인 것 같습니다.

Ⅱ 장애인도 사랑해야 할 이웃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레위기 19장의 나오는 율법들은 대체로 요즘 강조하고 중요시하는 인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공동체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사회적 약자들, 특히 장애인의 대해서는 차별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구성원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생학’이 등장하면서부터 장애인은 차별의 대상, 제거의 대상, 제외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여전히 ‘장애’는 장애인 스스로가 극복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갈지라도 장애로 인하여 삶이 불편하지 않도록 사회가 장애물을 제거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레위기 19장은 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해서 성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13절 말씀처럼 “이웃을 억압하지 마라. 이웃의 것을 빼앗지 마라. 품꾼의 삯을 그 날 주지 않고, 밤새 갖고 있지 마라.” 합니다. 우리는 일부 사람들이 장애인이나 외국인들을 억압하고 그들에게 강제로 일을 시켰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하여 접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장애인들이나 외국인들이 신체적, 정신적, 언어 소통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강제로 일을 시켰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지급해야 하는 정당한 품삯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거나, 때로는 착취와 폭행도 서슴없이 자행했습니다. 품삯 뿐 아니라, 여성 장애인을 향한 성(性)범죄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은 드라마 속에 소재로 사용되거나,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 등장하여 그 때에 일을 재구성하여 방송합니다.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당한 고통은 어땠을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장애를 지녔다는 이유로 노동을 착취하고, 장애인 앞으로 나오는 기초생활수급비나 장애연금 등 물질을 빼앗고, 성 범죄의 대상으로 쉽게 여기는 일들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장애로 인하여 일의 효율과 능률이 조금 뒤쳐진다 하더라도 그들의 노동력을 빼앗을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장애인일지라도 일을 시켰다면 정당한 품삯을 지불해야 합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웃집을 탐내지 마라.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그 밖에 이웃의 어떠한 것도 탐내지 마라(출애굽기 20:17)”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새겨 두어야겠습니다.

레위기 13:14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하지 마라. 눈먼 자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지 마라. 너희는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나는 여호와이다.

듣지 못하는 자를 예전에는 ‘귀머거리’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잘 알아듣지 못할 때에 “귓구멍이 막혔나?”라며 청각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을 하며 화를 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청각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합니다. 청각장애인은 말 그대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자를 말합니다. 물론 청각장애인 모두가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들리는 사람도 있고, 보청기나 인공와우 수술을 통해서 청인들과 소통하는 데에 지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섣불리 그 사람에 대해 비방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조롱하거나, 그 사람이 가진 장애에 대하여 저주하지 말 것을 말합니다. 참고로 농인들이 쓰는 언어를 ‘수어’라고 부릅니다. 물론 수어를 못하는 농인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필담이나 문자메시지를 통해서 대화를 주고받을 수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근에 농인과 청인에 이야기를 담은 <사랑한다고 말해줘>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는데, 저는 이 드라마를 통해 농인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시각장애인 앞에는 걸려 넘어질 수 있는 장애물을 놓아두지 말라”고 합니다. 시각장애인은 시각에 이상이 생겨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는 사람도 있고,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앞에 장애물을 놓아두는 것은 그들에게 불편함과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또한 시각장애인을 위해서 사용한 물건은 제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14절에 이 말씀은 시각장애인 뿐만 아니라, 저처럼 신체가 불편한 지체장애인들이나, 어린이, 노인, 유아차를 끄는 엄마들을 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애물을 조금 더 확장하면 무엇이 있을까요? 계단이나 턱, 있기는 있는데 잘못 설치되어 전혀 사용할 수 없는 경사로나, 장애인 화장실을 차지하고 있는 청소도구들일 것입니다. 또한 인도 위로 올라온 차량이나, 인도 중간에 설치된 표지판이나 전봇대, 그리고 휠체어가 다니기에 좁고 울퉁불퉁한 보도블럭, 잘못 설치된 시각장애인 유도블럭 역시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가치관 역시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장애인들을 위해 차별이 아닌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작정 배려를 하는 것이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15절에서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라고 말합니다. 재판할 때에는 불의를 행하지 말고 오직 공의와 정의가 살아 숨 쉬어야 합니다. 가난하다고, 장애가 있다고 하여, 권세와 명예가 있다고 하여 그 사람을 두둔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애가 있다고 하여 무작정 모든 것에서 배려를 하는 것은 그들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 배려를 가장한 또 하나의 차별입니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차이를 인정한 배려이지, 차별이 아닙니다. 우리는 배려와 차별을 구별해야 합니다. 차별과 차이 또한 구별해야 합니다.

Ⅲ 불편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많은 장애인들은 사회에 깊숙이 뿌리박힌 편견과 시선을 견뎌야 했고, 앞으로도 견뎌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동안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시선,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많은 장애인 단체들이 수고와 노력을 했습니다. 그들에 수고와 노력 속에 장애인들을 향한 차별과 불편들이 많이 사라졌고, 학교나 공공기관, 사업장 등에서 행해진 장애인식개선교육으로 장애인을 대하고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제가 부산에 와서 휠체어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장애인의 대한 시선과 배려가 좋아졌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장애인을 향한 차별은 존재하고 장애인을 그저 도움을 받아야만 시혜에 대상이나,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무능력한 자로 바라보는 시각은 곳곳에 존재합니다. 물론 장애를 갖고 산다는 것은 불편합니다. 어디를 한 번 나가려고 하면 이동 동선이나 화장실은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늘 먼저 체크합니다. 때로는 나의 신체를 타인에게 보이거나 의지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쌍하거나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장애인들을 불쌍하거나 불행한 존재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불편을 겪고 있는 우리의 이웃이자, 하나님의 자녀로 보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대해 주시는 것처럼 말이죠.

Ⅳ 그렇다면 교회들은 어떤가?

교회에서 장애인들을 향해 전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지 않으면 그들은 절대로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편의 시설을 갖추지 않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환경적인 문제도 있을 수도 있지만, 지금 현재 교회 내의 장애인이 없기 때문에 설치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장애인이 없기 때문에 편의 시설 설치를 미루는 것이 아니라, 편의 시설 설치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장애인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하나 학교, 공공기관, 사업장에서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 ‘장애인식개선교육’이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평등하게 바라보고 사랑해야 할 교회는 교육의무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보니, 교회는 장애인의 대한 인식이 세상 보다 뒤처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전히 교회 안에서 장애인을 비하하는 용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고, 장애인의 대한 인식 역시 그저 시혜자로 여기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장애인 목회자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이 저를 ‘장애인식개선교육’ 강사 양성과정으로 이끌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장애인들을 차별하기 보다는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함에 신경을 써야 하지만 그들의 영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베데스다 연못이 나옵니다. 이 연못에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누워 있었지만 모두들 자신만 생각하여 그를 연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요 5:1-9).
한편 마가복음 2장에서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 때 네 명의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로 오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 앞으로 갈 수 없게 되자, 그 집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낫게 해 주시고 죄사함의 은혜도 베풀어 주셨습니다(막 12:1-12).
첫 번째 요한복음 5장의 사건은 장애인 당사자가 열심히 재활을 해서 자기 힘으로 연못에 들어가야 하는 ‘의료적 모델’입니다. 즉 장애는 개인이 재활을 열심히 해서 극복해야 하는 문제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2장에 사건은 장애로 인한 불편을 장애인 개인의 문제로만 국한시키는 ‘의료적 모델’이 아니라, 사회가 나서서 장애물을 제거해준다면 장애인이 좀 더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모델’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둘 중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규모가 좀 있는 교회들은 장애인 부서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교회 현실은 장애인 부서가 있어도 그 부서를 담당하는 목회자는 비장애인 목회자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무조건 장애인 부서는 장애인 목회자가 담당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부서들은 그 부서에 적합하고 관심 있는 목회자를 세우면서도 장애인 부서에는 장애인과 장애에 대해 잘 아는 목회자를 세우지 않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문제는 우리의 생각이 먼저 바뀌지 않는 한 결코 해결될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장애인들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의 형제이고 자매이자, 이웃입니다.

Ⅴ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신다

여러분! 우리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며, 모든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 수 있도록 환경적으로 심리적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야고보서 2장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하지 말기 바랍니다(1절).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여 대한다면 죄를 짓는 것이며, 이 율법에 따라 여러분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됩니다(9절).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십시오. 우리 주변 곳곳에 차별이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남녀 성차별, 지역 차별, 학벌 차별, 나이 차별, 인종 차별, 장애인 차별 등등. 수많은 차별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차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내 자신이 어느 위치, 어느 상황에 서 있느냐에 따라서 내가 차별을 받을 수도 있지만, 나도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차별과 차이는 한 글자 다르지만 그 한 글자로 인한 결과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그 차별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실 때 조건을 보시고 차별하여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역시 우리의 조건의 따라 죄 사함에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살아가면서 서로가 서로를 차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개인의 차이를 인정하셔서 달란트를 서로 다르게 주셨듯이, 우리도 서로가 서로를 차별하기 보다는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해야 할 일은 차별을 더 많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을 갖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하는 것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어느 한 날만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1년 365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붙들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live/Y_F-wKUSM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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