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회원사랑방

새내기 교사의 죽음을 접하고

작성자이수부|작성시간23.07.26|조회수38 목록 댓글 0

-새내기 교사의 죽음을 접하고-

▷강금복 여사를 회고(回顧)하다◁
    -새내기 교사의 죽음을 접하고-

강금복(姜今福:1911~2001) 여사는 서울대 총장ㆍ국무총리를 지낸 이수성(李壽成:1939~)씨의 모친이다. 

강 여사는 울산 갑부집의 1남2녀 중 맏딸로 태어나 경북고녀와 일본여대를 나왔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엘리트 여성이었다. 24세 때 경기여고에서 교생실습을 하던 중

오빠(강정택 전 농림부 차관, 납북)의 중매로 동경제대 법학과를 나온 이충영(李忠榮)변호사와 결혼한다.

이 변호사는 일제 치하에서 판사로 재직하면서도 법정에서 꼭 한복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은 채 재판을 했고, 1943년엔 창씨 개명을 거부하고 법복을 벗었을 정도로 강직했다.


  강금복 여사의 일생에는 이 땅 보통 어머니들의 인고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강 여사는 신교육을 받은 엘리트임에도 불구하고 결혼과 함께 교사의 꿈을 접고 남편 뒷바라지에 전념했다. 

화장은 커녕 파마 한 번 하지 않았고 늘 쪽진 머리에 한복차림이었다. 


  그러던 중 발발한 6ㆍ25전쟁은 그녀의 삶을 바꿔놓았다. 남편인 이 변호사가 납북된 것이다. 

이 변호사는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끌려가면서 당시 중학생이던 큰아들 이수성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에 가서 살라” 는 한마디를 남겼다. 졸지에 남편과 생이별한 강 여사는 

4남4녀의 생계를 떠맡아야 했다. 53년 보건사회부 산하 여성문제상담소장직에 촉탁으로 근무했으나 

이내 그만두고 물려받은 재산을 하나씩 처분하며서 자녀들을 키워나갔다. 


  강 여사의 네 아들은 서울대 네 딸은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둘째 이수인(李壽仁, 작고)은 생전 인터뷰에서

 “어머님은 신여성이셨지만 한국적인 전통과 따뜻함과 헌신으로 우리 형제와 가족들을 가르치신 분” 이라며

 “우리 가족의 모든 생활은 어머님께서 가르치고 보여주신 모습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고 말했다. 

이수성씨는 저서  『신뢰와 희망』에서 "고생을 하면서도 어머니에게 배운 것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옳지 않은 

일에는 머리를 숙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 적었다. 


  셋째 수윤(壽允, 전 교원대 교수)씨는 고교 시절 '싸움은 1등 공부는 꼴찌' 였던 문제아였다. 

강 여사는 그런 아들을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다. 하루는 어머니(강 여사)가 학교에 불려가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봤고 그때부터 마음을 다잡아 전교 1등으로 졸업했다.

공부하라는 질책 대신 선생님 앞에서 흘린 어머니의 눈물이 그 어느 가르침보다 컸던 것이다.

/강금복 여사 일생은 중앙일보(2001년 5월28일자 ‘삶과 추억’ 참조)


  여기서 눈 여겨 볼 부분이 강금복 여사가 선생님을 대하는 태도다. 당시 강 여사는 여자로서는 최고의 학력을

지녔으나 아들의 선생님 앞에서는 한없이 낮은 자세로 임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아들이 어머니와 선생님이

다투는 것을 봤다면 감복(感服)은 커녕 오히려 반항심만 키웠을 것이다.

자신 때문에 머리를 숙이는 어머니의 태도와 자세에서 인생의 전환이 이뤄졌다. 


  지난 21일 서울 서이초등학교 새내기 교사(A)의 극단적 선택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서이초 교사에 따르면 학부모들의 심각한 ‘갑질’이 있었다고 한다. 서울교사노동조합이 최근 2~3년간 

서이초에서 근무했거나 현재 근무 중인 교사들의 제보를 취합한 자료에 따르면 A씨의 학급 학생이 연필로 

뒷자리 학생의 이마를 긋는 일이 있고 난 뒤, 가해자 혹은 피해자의 학부모가 A씨에게 수십 통의 전화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일과 관련해 학부모가 교무실로 찾아와 A씨에게 “애들 케어를 어떻게 하는 거냐” “당신은 교사 자격이 없다” 

등의 폭언을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자신의 자녀를 탓하기 전 모든 책임을 교사에게 돌린 것이다. 

또 한 교사는 학폭 사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한 학부모로부터 “나 00아빠인데 나 뭐하는 사람인지 알지? 

나 변호사야”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이쯤 되면 교권을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하다. 

선생님을 교사가 아닌 자신의 고용인으로 여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요즘 학부모의 학력은 교사와 동등하거나 오히려 높다. 과거처럼 선생님을 하늘처럼 받드는 시대는 아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라는 시대는 지났다. 하지만 학부모의 학력이 아무리 높고 사회적 지위가 

올랐어도 자녀의 선생님을 대하는 태도는 별개 문제다. 자신의 부모가 선생님을 존중하면 교사도 학부모를 

존중한다. 이러한 선순환의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는 선생님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모도 존경할 수 밖에 없다.

 이럴 때 자녀는 건전한 사회인으로 태어날 기반을 형성한다. 선생님을 살면서 겪을 인생의 멘토나 가이드로

 여긴다. 

 

강금복 여사의 아들처럼 어머니를 거울삼아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하나의 사례이긴 하지만 강금복 여사의 아들 이수윤씨가 이걸 증명하고 있다.  

 

당시 여자로서 최고의 학력과 갑부의 딸로서 재산을 지녔음에도 아들의 선생님 앞에서 자신을 한없이 낮춘

강금복 여사야말로 진정 이 시대 학부모의 표상이다. 자신이 좀 배웠다고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자녀의

선생님을 마치 하수인처럼 대하는 몇몇 천민적(賤民的) 사고의 학부모 때문에 우리 사회가 멍들어 간다.

 

덩달아 자신의 자녀도 비뚤어진 가치관을 안고 살아간다. 성장해서 돈과 지위로 세상을 재단(裁斷)하고

힘없는 자를 멸시한다. 우리 사회를 좀먹는 암적 존재로 커가는 것이다. 


  교권이 추락하다 보니 교사가 ‘교권침해보험상품’에 가입하는 현실이다. 이건 정상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시대가 원하는 보험상품이 개발된다고 해도 이런 상품은 나오지 말아야 한다. 

 

교사가 악성 민원의 총알받이로 전락한 시대에 나라의 장래를 운운할 수 있겠는가?

시대가 아무리 바뀌고 달라도 교권은 불가침의 영역이다. 교권이 무너진 사회, 스승이 부재(不在)인 사회는

미래가 암울하다.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가치가 우리 사회를 떠받들고 국가를 지탱한다. 


  이번 새내기 교사의 안타까운 죽음을 접하면서 20여 년전 별세한 강금복 여사의 일생이 떠올랐다. 

아울러 이런 훌륭한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끝으로 강금복 여사가 일흔두번째 생일에 자신의 일생을 정리한 시를 소개한다.

無爲虛送好光陰 
七十二年今日時 
新年悲歎將何益 
自向余年修厥己 
“좋은 세월 하는 일 없이 다 보내고/

72년이 흘러 오늘을 맞았네/

그러나 신년에 비탄에 잠긴들 무슨 도움이 되랴/

여생 수양이나 더 하리"

 

<받은 글>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