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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칼럼

강학종 / ‘떠나다’는 ‘아날뤼오’ 의미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4.02.22|조회수28 목록 댓글 0

‘떠나다’는 ‘아날뤼오’ 의미

강학종 / 하늘교회 목사

빌 1:23-24>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양손에 떡을 쥐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쪽을 택할지 고민하는 행복한 상황을 비유한 말입니다.
반대의 경우라면 어떻게 될까요?
양손에 떡을 쥐고 어느 쪽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 있는 떡이 호시탐탐 사람을 노리고 있으면요?

말도 안 되는 비유입니다만 바울이 그런 신세입니다.
자기는 삶과 죽음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습니다.
어느 쪽이 자기를 차지할지 모릅니다.

그런 형편이면 죽는 게 나은지, 사는 게 나은지를 생각할 것입니다.
바울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결론이 특이합니다.
자기만 생각하면 죽는 게 낫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자기 일만 생각합니까?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생각하면 사는 게 낫습니다.

극심한 빈곤과 가정 폭력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여인이 있습니다.
집에는 쌀 한 톨 없는데 남편은 허구한 날 술과 노름에 찌들어 살다가 집에만 들어오면 노름 자본 구해오라고 행패를 부립니다.

그런 여인이 무슨 낙으로 살까요?
하루에도 몇 번씩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자식 때문입니다. 자기 처지를 생각하면 당장 죽고 싶지만 자기 목숨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모진 운명을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감옥 생활이 어느 만큼 힘든지에 대한 얘기는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바울한테 죽음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끝내고 싶은 마음은 없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만 있습니다.

‘떠나다’는 ‘아날뤼오’를 번역한 말인데, ‘위로’라는 ‘아나’와 ‘풀다’라는 ‘뤼오’의 합성어입니다.
묶여 있는 것을 푸는데 그냥 풀지 않고 위로 푸는 것이 ‘아날뤼오’하는 것입니다.
주로 두 가지 경우에 이 말을 썼습니다.

하나는 천막을 걷을 때입니다.
군인들이 훈련을 나가면 천막을 치고 지내다가 훈련이 끝나면 천막을 걷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날뤼오’하는 것입니다.
천막을 치고 생활하는 것은 그곳이 자기들의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막은 모든 면이 불편합니다.
집이 훨씬 좋습니다.
이스라엘은 초막절을 지킬 때마다 멀쩡한 집을 놔두고 초막에서 지내곤 합니다.
자기들한테는 본향이 따로 있고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고백입니다.

또 배에 닻을 올릴 때도 이 말을 썼습니다.
정박 중에는 닻을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배는 정박해 두려고 만든 것이 아닙니다.
배가 배 구실을 제대로 하려면 바다를 항해해야 합니다.
닻을 올려서 출항해야 합니다.
일단 ‘아날뤼오’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영원한 터전이 아닙니다.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마지못해서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나요?
할 수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데 그것이 안 되니까 별수 없이 떠나는 것 아닌가요?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마치 천막을 걷는 것처럼, 배가 닻을 올리는 것처럼 세상을 떠난다고 합니다.
떠날 준비가 늘 되어 있습니다.
항상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떠나서 도착하는 곳이 진짜 자기 인생을 살아갈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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