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비전칼럼

강학종 /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4.03.19|조회수36 목록 댓글 0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강학종 / 하늘교회 목사


빌 2:29-30>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면서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히 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에바브로디도처럼 사는 사람을 존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뿐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람직한 모델로 얘기합니다.

<삼국지연의>에 관도대전이 나옵니다.
조조의 2만 군사가 원소의 10만 군사를 이긴 전투입니다.
원소 수하에 순우경이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군량이 있는 오소를 지키게 했는데 그만 조조의 야습에 당하고 말았습니다.
군량은 다 불에 타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조조가 순우경의 코와 귀를 자르고 원소 진영으로 돌려보냅니다만 원소가 참하고 맙니다.

그런데 로마는 전투에서 진 지휘관을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패전 경험을 다음 전투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론입니다.
“이런 이점이 있으니까 처벌하지 말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처벌하지 않았더니 이런 이점이 있더라.”입니다.

로마 사람한테는 전쟁에 진 사람에게 불이익을 줘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명예를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귀족, 평민 구별 없이 모든 것을 내던지고 국토방위에 나섭니다.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패전의 책임자가 된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굴욕입니다.
죽고 싶을 정도로 치욕스럽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한테 굳이 패전의 책임을 물을 이유는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신상필벌을 말합니다.
하지만 명예를 존중히 여기는 풍토에서는 신상필벌이 필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상을 주거나 벌을 주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상을 받고 벌을 받습니다.
로마가 그랬습니다.
바로 그런 풍토에서 바울이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것이 에바브로디도의 삶의 원칙입니다.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히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원칙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존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로마에서는 명예가 가장 귀한 가치를 갖습니다.
누구나 명예를 추구합니다.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일반적인 방법은 전쟁에 나가서 공을 세우거나 국가에 많은 기부를 하거나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입니다.
“내가 공을 세웠는데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거냐?”라는 말도 할 수 있고 “내가 이만큼 출세했다. 다 나를 알아 모셔라.”라고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세상에서는 지금도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전혀 다른 얘기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이야말로 가장 존중받아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돌보지 않았다고 할 때 ‘돌보지 않다’로 번역된 ‘파라볼류에스다이’는 본래 도박 용어입니다.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 돈을 걸고 주사위를 던지는 것을 말합니다.
돈을 걸면 더 이상 자기 돈이 아닙니다.
그 돈의 운명을 주사위가 결정합니다.

에바브로디도가 그처럼 자기 목숨을 예수님께 걸었다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의 목숨은 더 이상 에바브로디도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사는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라고 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