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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칼럼

강학종 / 우리 역시 보냄을 받았는데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4.05.08|조회수35 목록 댓글 0

우리 역시 보냄을 받았는데

강학종 / 하늘교회 목사


어떤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잠시 귀국했습니다.
그 선교사를 강사로 해서 선교헌신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헌금을 하기 전에 담임목사가 광고를 합니다.
“오늘 나온 헌금은 전액 아무개 선교사님 후원계좌로 입금됩니다. 주님께 헌신하는 마음으로 헌금에 동참해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헌금을 인색하게 하는 분은 제가 그 아들을 아무개 선교사님의 후임으로 삼아달라고 기도할 생각입니다.”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지어낸 얘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있었던 얘기입니다.
선교헌금을 안 하는 사람은 따로 기억했다가 나중에 그 아들을 선교사로 보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면, 선교사로 파송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손해를 보는 사람입니까?

길에 떨어진 휴지를 줍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제가 학교 다닐 적에는 그것을 공중도덕의 일환으로 배웠는데 요즘은 그런 의식이 많이 퇴색된 것 같습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어떤 아이가 휴지를 주우면 같이 있던 엄마가 왜 더러운 것을 만지느냐고 합니다.
다른 아이가 휴지를 주우면 착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애 손이 더러워지는 것은 싫습니다.

선교사를 대하는 시선도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선교사에게는 누구나 기본적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 인정합니다.
하지만 자기 아들이 선교사를 자원한다면 펄쩍 뜁니다.

선교사로 가는 사람과 선교사로 가지 않는 사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언젠가 ‘가는 선교사와 보내는 선교사’ 얘기를 했습니다.
‘보내는 선교사’라는 말을 정말로 쓸 수 있으려면 적어도 예수님을 나타내려는 마음은 ‘가는 선교사’와 아무런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선교사로 파송되는 사람은 인생 전부를 희생해서 예수님을 나타내야 하지만 선교사로 파송되지 않은 사람은 적당히 자기 인생을 즐겨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어야 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예배에 참석하고 십일조만 하면 되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어차피 같은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열심도 똑같아야 합니다.

유아세례를 하게 되면 부모가 세례문답을 합니다.
“이 아이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과 예수 외에는 소망이 없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이 아이를 신앙 원칙에 입각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으로 양육하기로 서약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이 아이 인생의 주인 되심을 믿으십니까?”

이런 질문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예’라고 답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이 아이가 자라서 해외선교사를 지원해도 반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에는 누구나 머뭇거릴 것입니다.
앞의 세 질문과 네 번째 질문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앞의 질문에 ‘예’라고 했으면 네 번째 질문에도 ‘예’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쩌면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너무 건성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얼마나 심각한 말인지, 예수를 믿으면 자기 인생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얘기는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보냄 받았고, 바울이 보냄 받은 것처럼 우리 역시 보냄 받았습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은 실제 선교사로 나간 사람이나 나가지 않은 사람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우리를 보내신 분을 위하여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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