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향녀의 눈물
“홍제천에서 목욕하고 들어오면 사(赦)하는 것으로 하자”
“그것이 무슨 한강의 뱃자국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라”
자기들이 지켜주지 못한 여자들의 정절 타령이나 하는 나라 조선.
폭력에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자는 물론
죽음을 무릅쓰고 절개를 지킨 여자들마저
훼절한 것으로 치부하고 내치려는 조선의 사대부들.
그토록 절의가 중하다면
명나라를 배신한 임금이 먼저 구차한 목숨을 버려야 할 것이며
대명일월을 신앙처럼 떠받드는 사대부들 또한 죽어야 마땅할 것이다.
헌데, 정작 자기들은 살아남아서 애꿎은 여자들을 두 번 죽이려는 후안무치.
화냥년의 어원은 화랑에서 찾을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 화랑은 무당이었으며
남자 무당은 지위가 낮아 여자 무당들을 쫓아다니며 일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행실이 좋지 못한 남자 무당을 ‘화냥이’ ‘화냥놈’이라고 불렀으며
원래 남자에게 쓰이던 말이 여자에게 쓰이면서 ‘서방질을 한 계집’을 뜻하게 되었다.
심양에 붙잡혀간 여자들이 돌아오기 이전 신라시대부터 쓰이던 말이
환향녀들에게 전가된 것이다.
압록강 푸른물
나라를 말아먹은 자들의 정절 타령
포로들이 압록강에서 배를 탔다.
나룻배에 몸을 실은 포로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야 비로소 지옥 같은 청나라를 벗어났다는 안도의 눈빛이었다.
살아생전 다시는 못 볼 것 같았던 부모형제를 만날 수 있다는 희열이 뱃전을 달구었다.
가까워오는 고국산천을 바라보며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포로들이 있는가 하면
한숨을 쉬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자들은 기쁨에 들떠 흥분하였고 여인네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끌려갈 때는 그저 돌아올 수 있기만을 바랐는데 막상 돌아오는 길목에서는 걱정이 앞섰다.
물결이 부서지는 뱃머리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수심에 잠긴 여인이 있었다.
한이겸의 딸이다.
사대부가에서 곱게 자라 장래가 촉망되는 신랑을 맞이하여 대감댁으로 시집갔다.
청나라 군대가 양철평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도성에 퍼지자 피난길에 나섰다.
목적지는 강화도. 당시 강화도는 가장 안전한 곳이었고 선택된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피난처였다.
세자빈을 비롯한 궁실 여인들과 함께 강화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잠시,
청군이 바다를 건너 강화도에 들이닥쳤다.
병조판서 이성구의 아내 권씨와 아들 상규의 아내 구씨 그리고 그의 두 딸 이일상과 한오상의 아내가 ‘오랑캐에게 욕을 보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목을 매어 죽는 것을 보았다. 헌납 홍명일의 아내 이씨는 배를 타고 강화도를 빠져 나가려다 청군이 가까워오자 남편의 생질 박세상의 아내 나씨와 겨우 예닐곱 살 된 두 아들 자의와 자동을 서로 껴안고 물에 빠져 죽었다. 수많은 조선의 여인들이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는데 질긴 게 목숨이라고 죽지도 못하고 살아 돌아간다는 것이 무슨 죄를 지은 것만 같았다.
흘러가는 물결이 뱃전에 부서졌다.
고국에 돌아가는 길이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강물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강물을 바라보았다.
압록빛 푸른 물이 가슴시리도록 차갑다.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한이겸이 지켜보고 있었다.
강물을 바라보던 한씨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강물에 떨어진 눈물을 압록강은 흔적도 없이 삼켜버렸다.
배가 의주에 닿았다.
뛰어내린 포로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조국의 흙을 두 손에 움켜쥐고 환호하는 사람도 있었다.
살아생전 다시는 못 밟을 줄 알았던 조국 땅을 밟은 포로들은 기쁨에 충만해 있었다.
한씨는 아버지와 함께 남행길에 올랐다.
보고 싶은 지아비와 아들이 한양에 있지 않은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청나라에 잡혀간 포로들이 돌아온다는 소문에 도성이 술렁거렸다.
일반 백성들은 반기는 정서였으나 사대부집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 뒤숭숭했다.
돌아온 부녀자들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가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신풍부원군 장유가 선수를 치고 나왔다.
“우리 아들은 외아들인데 그대로 조상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이혼하고 새장가 들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장유의 상소는 환향녀(還鄕女) 논쟁에 불을 붙였다.
이미 더럽혀진 여자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으니 아들 장선징을 새로 장가보내겠다는 것이다.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사족의 부녀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정귀의 아내 권씨, 여이징의 아내 한씨, 서평군 서준겸의 딸이며 김반의 아내 서씨, 이소한의 아내 김씨, 한흥일의 아내 강씨, 한준겸의 첩 최씨, 이호민의 첩 한씨가 모두 자결하였습니다. 그 밖에 부인들이 절개를 위하여 죽은 것은 모두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적에게 사로잡혀 욕을 보지 않으려고 죽은 자의 혼령을 위로해주어야 합니다.”
“부녀자들이 붙잡혀간 것은 그들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나라가 힘이 없어서였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나라에서 따뜻하게 보듬어주어야 합니다.”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여론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자의 훼절(毁節)은 용납할 수 없으니 전쟁 상황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여자를 스스로 죽도록 유도하여 목을 매게 하는 나무가 자녀목이다.
물에 젖은 한지를 얼굴에 발라 질식사시키는 것이 도모지다.
자녀안은 품행이 바르지 않거나 세 번 이상 결혼한 여자의 행적을 기록한 대장이다.
자녀목(恣女木)과 도모지(塗貌紙)가 상존하고 있는 나라가 조선이다.
자녀안(姿女案)은 국가에서 관리했다.
자녀안에 오르면 그 가문의 불명예는 물론 배우자의 승진과 자손의 과거시험에도 불이익을 받았다.
여자의 정조는 곧 예와 직결되었고 여자의 품행일탈은 풍속사범으로 사헌부의 단속 대상이었다.
가부장제의 나라 조선은 부녀자들의 풍속 문란을 개인 문제가 아니라
사대부가 지배하는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나라를 말아먹은 자들이 자기들이 지켜주지 못한 여자들의 정절 타령이나 하고 있는 나라가 조선이다.
청나라에 끌려가 겁간을 당한 여자들은 물론이려니와
죽음을 무릅쓰고 절개를 지킨 여자들마저 훼절한 것으로 치부하고 내치려는 것이 조선의 사대부였다.
그토록 절개가 중하다면 오랑캐 앞에 무릎 꿇고 명나라와의 배신을 맹세한 임금이 먼저
구차한 목숨을 버려야 할 것이며 대명일월을 신앙처럼 떠받드는 사대부들 또한 죽어야 할 것이다.
헌데 정작 자기들은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남아서
아무 죄 없이 희생당한 여자들을 두 번 죽이고자 하는 그 후안무치가 놀라울 따름이다.
“임진왜란 때 사대부의 부녀들이 적진에 잡혀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자를 남자 집에서 내치고 새장가 들것을 청하니 선왕이 하교하기를 ‘음탕한 행동으로 절개를 잃은 것이 아니니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선조에서 정한 규례에 따라 시행하라.”
인조가 소방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우리나라는 해동예의지국입니다. 이호선의 아내 한씨는 토굴 안에 숨어 있었는데 적병이 불을 질러도 나오지 않고 타 죽었습니다. 심정함의 아내 박씨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고 최필의 아내 정씨, 이중언의 아내 양씨, 황식의 아내 구씨, 이사성의 아내 이씨, 하함의 아내 이씨, 김계문의 아내 박씨 등이 절개를 지키려다 죽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헛되게 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자들의 영혼도 받들어주어야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도 숨통을 터주어야 합니다. 끌려갔다 돌아온 그들도 다 우리의 딸들입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자결하기를 바라지는 않지 않습니까? 사천(沙川)에서 목욕하고 도성에 들어오는 것으로 모든 것을 사(赦)하여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최명길이 절충안을 내놓았다.
사천은 홍제천의 또 다른 이름이다.
북한산 남장대에서 발원하여 세검정을 거쳐 연희동을 지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서교에서 도성으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있는 하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