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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고찰

역사탐방-세계문화유산 서울 종묘

작성자탄천|작성시간16.09.29|조회수56 목록 댓글 1

[歷史探訪] 종묘(宗廟)

                                                                              

 


 




  조선왕실의 사당 

종묘는 유학을 통치기반으로 하여 건국한 조선왕조가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봉행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정전(正殿)을 종묘라 하였으나, 현재는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모두 합쳐 종묘(宗廟)라 부른다.

정전과 여녕전은 장식과 기교를 절제하여 단조로 보이지만, 이는 왈실의 제사를 모시는 공간이

기에 존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위한 의도적인 장치이다.

 

정전에는 태조의 신주를 비롯하여 공덕이 있는 역대 왕과 왕비 49분의 신주를 모시고 있고, 영년전

에는 태조의 4대조를 비롯하여 조선의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 34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종묘는 건물과 더불어 제례 및 제례악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유로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에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종묘하마비(宗廟下馬碑)

하마비(下馬碑)는 조선시대 종묘 및 궐문 앞에 세워놓아, 누구나 이곳을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리라

는 명(命)이 적힌 비석(碑石)이다. 기록에 의하면 태종13년(1413) 2월에 처음으로 예조의 건의에

의하여 종묘와 궐문 앞에 설치하였던 것이 하마비(下馬碑)의 시원(始原)이 되었다. 처음에는 나무로 제작되었으나, 현종(顯宗) 4년(1663)에 종묘전교(宗廟前橋)를 개수하면서 석비(石碑)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하마비(下馬碑)의 전면에 새겨진 내용이 "大小人員皆下馬" 또는 "下馬碑" 라고 한 것이 하마비의 계

 되었다. 이후 하마비(下馬碑)는 종묘 및 궁궐 외에도 문묘, 성현, 명사, 고관의 출생지 등 여러

곳에 세워져 있는데, 이는 선열(先烈)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종묘어정(宗廟御井)

 

  지정번호: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6호.

  시      대:조선시대초기.

  소  재 지: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2번지.

 

  종묘 정문인 창엽문(蒼葉門) 앞에 보존되어 있는 우물이며, 조선 역대 왕들이 종묘에 왈래할

  때 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하여 '종묘어정(宗廟御井)'이라고 불리었다. 이 우물의 규모는 지름

  이 1.5m 깊이가 8m 내외이다. 이후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이 우물에 콘크리트 관을 묻어 이용

  함으로써, 원형이 훼손되었으나 1983년11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제56호)로 지정하면서 

  우물 지상부분의 없어진 부분을 장대석(長大石)으로 정비해 놓았다.

  지금은 우물로서 기능은 하지 못하나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항상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였으며,

  여름에는 물이 어름처럼 차고 겨울에는 김이 오를만큼 따스하였으며, 물맛도 좋았다고 한다.

  이 우물로 인해 이 지역을 훈정동(熏井洞)이라고 하는 동명(洞名)이 유래하게 되었다.  

   




 


 



 



 



 



 



 



 


 




신로(神路)

 

신로는  종묘제례 의식을 위해 낸 것으로 신(神)이 다니는 길을 말한다.

종묘에는 신로 외에도 신향로(神香路), 향로(香路), 어로(御路), 세자로(世子路) 등이 있다.

종묘 외대문(外大門)을 들어서면 곧바로 거칠고 넓적한 박석이 세가닥 길로 깔려 있다.

가운데 길이 약간 높고 양옆은 약간 낮다. 가운데 길은 혼령이 다니는 신로(神路)와향,죽문,폐백 등 제사 예물이 오가는 향로(香路)가 합쳐진 신향로이고, 오른쪽 길은 왕이 다니는 어로(御路), 왼쪽 길은 왕세자가 다니는 세자로(世子路)이다.




 


 



 



 


 




 

   종묘 교육홍보관

  종묘 교육홍보관은 종묘제례 및 제례악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설치된 전시

  공간이다. 교육홍보관의 제1전시실은 종묘제례 영상물을 상영하며, 제2전시실은 종묘 신실과

  제수진설을 재현하여 전시하고 있다.

 




 


 



 


 




향대청 일원(香大廳 一員) 

 제례에 바칠 향, 축문,폐백(香祝弊)을 보관하고 제례를 주관하는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이다.

 또한 제례에 종사하는 집사들의 집사청(執事廳)도 딸려 있다. 정면 9.5칸의 긴 건물이 앞에는 행

 각이 놓여있어 남북으로 긴 뜰이 만들어져 있다. 남쪽의 맘묘루(望廟樓)는 제례를 지낼 때 임금이

 잠시 머물며 앞선 임금들의 공덕을 기리던 곳이다.

 망묘루 앞쪽에 연못을 만들었고, 뒤쪽에 공민왕 신당을 두었다. 

                                            




 


 



 



 



 


 




 

   재궁 일원(齋宮 一員)

   재궁은 임금이 세자와 함께 제사를 준비하던 곳으로 어재실(御齋室) 또는 어숙실(御

  肅室)이라고 불린다. 북쪽에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 동쪽에 세자가 머무는 세자실, 서

  쪽에 어목욕청이 있다. 임금과 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서문으로 나와서 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정전 일원(正殿 一員) 

종묘의 중심부분으로 길게 지은 정전의 앞에는 넓은 월대를 두었고, 사방으로 담장을

둘렀다.남쪽 신문으로 혼령이, 동문으로 임금을 비롯한 제관들이, 서문으로 제례악을

연주하는 악공과 춤을 추는 일무원들이 출입했다. 1395년에 신실 7칸의 규모로 창건

했고, 여러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는 19칸에 이르러 매우 긴 목조 건물이 되었다.

몸체인 신실의 양쪽에는 창고와 부속실들을 마련했다. 거친 월대 바닥과 그 위로 육

중한 지붕이 떠 있는 모습은 숭고하고 고전적인 건축미의 극치를 이룬다.

남쪽 담장 안에는 공신당(功臣堂)과 칠사당(七祀堂)을 각각 동쪽과 서쪽에 세웠으며,

서문 밖에 제례악을 준비하는 악공청(樂工聽)을 두었다.




 



 



 



 



 


 




  영녕전 일원(永寧殿 一員)

 

  정전의 신위를 ㅇㅗㄼ겨 모시기 위해 1421년에 새로 지은 별묘로 건물 이름은 "왕가

  의 자손과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이다. 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 일원과 유사

  하지만 정전보다 규모가 작고 좀 더 치밀하게 지어졌다.

  정전 일원과 유사하게 2중으로 된 월대 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동,남,서 세곳에 문

  을 두었다. 원래 6칸 규모였으나. 여러 차례 좌우 협실을 늘려서 현재 신실은 모 

  두 16칸이다. 가운데 4칸은 태조의 4대조를 모신 곳으로 좌우 협실보다 지붕이

  높다. 동쪽에 제사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를, 서남쪽 바깥에 제례악을 준비하는

  소악공청(小樂工聽)을 두었다.




 


 



 



 



 




 



 


 


▼ 요즘 종묘공원의 달라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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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탄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9.29 서울사람들은 종묘 많이 다녀오셨을테지만 종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재입니다. 사직과 조묘가 한 나라의 상징이잖아요. 중요한 문화재 잘 보고 내력은 꼭들 알고 있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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