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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

포은 정몽주의 탄생과 업적 재조명

작성자탄천|작성시간16.11.18|조회수42 목록 댓글 1

포은 정몽주의 탄생과 업적 재조명


 


포은 정몽주 (圃隱 鄭夢周)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 (圃隱),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으로


경북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민왕 시절, 1360년에 문과에 장원하였다. 


지금 포항과 영천이 다투고 있다. 자기들 지역이 정몽주의 고향이라고...


  



 


정몽주는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의 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쓰러져가는고려의 국운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신흥 세력인 이성계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 하였다.


 



 


 


 신도비      神道碑


 


 



 


            정몽주의 신도비. 비문은 송시열이 썼다.


 



 


 



  


정몽주의 과거시험 답안지. 홍건적 침입에 대한 대책 


 



 


 



 


 



 


하여가 (何如歌). 이방원


 


 


차역하여피역하여          (此亦何如被亦何如)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성황당후원퇴락역하여    (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  만수산 드렁칡이 얽힌들 그 어떠리


아배약차위불사역하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까지 누리리


 


 단심가 (丹心歌). 정몽주


 


 


 차신사료사료    (此身死了死了)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갱사료    (一百番更死了)   일 백번 고쳐 죽어


백골위진토       (白骨爲塵土)      벡골이 진토되어


혼백유야무       (魂魄有也無)      넋이라도 있고 없고


향주일편단심    (向主一片丹心)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영유개리여지    (寧有改理與之)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와 이성계, 이방원

  

정몽주와 이성계는 원래 친밀한 관계이었으며,

이성계 스스로 정몽주를 친구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친원(親元)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던 시절에

같은 친명파(親明派)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유교를 바탕으로한 개혁을 함께 주도하였던

동지관계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서로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

정몽주는 개혁을 통하여 유교 정치의 실현과 고려왕조의 발전을 기대하였지만,

이성계는  혁명을 통하여 새로운 왕조를 일으키려 하였던 것이다.

 

 

 

정몽주와 이성계는 두 사람 모두 유교적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유교정치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면, 이성계는

새로운사회에 비중을두었다.

그리고 그 것은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통하여 새 시대를 여는것이었다.

유교적 충절을 중요시하는 정몽주는 혁명을 생각할 수 없었다.

이성계가 정몽주를 제거해야 할 이유이었다.

 

 

선  죽 교

 

하지만 이성계는 정몽주의 충절(忠節)을 폄하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친밀함도 잇었지만, 어차피 그가 개창하는 유교사회가 신하들의

충절을 기반으로 유지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몽주를 살해한 이방원도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하여가(何如歌) 등으로

그를 회유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그를 죽인다,

그러나 이방원 역시 그의 충절을 높이 사, 후일 여러 벼슬을

추증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조성한듯한 석물(石物)들이 지나치게 많아 어지럽다.


李石亨 가문의 번창에 대한 질투 아닌가 싶어 씁쓸한 기분이다. 그래야 하는지?  


  



 


 



 


 큰 그릇, 이방원 


 


비문(碑文)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라고 적혀 있다.


정몽주는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에 의해 살해된 후,


개성 근처 공동묘지에 묻혔다. 


 


 


 후일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한 후,


정몽주의 묘를 고향인 경북 영천(永川)으로 이장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리고 정몽주를 영의정으로 추증(追贈)한다.


 


 


정몽주를 죽이기는 하였지만, 처음에는 서로를 인정하는 동지관계이었다.


이러한 관계 때문인지,또는 자신도 왕위에 올라 신하들에게


충절을 강조하기 위하여인지, 고려시대 벼슬만을 기록하는것을 양해한다.


그를 죽일 수 밖에 없었지만, 그를 인정하였던 큰 그릇 이방원이었다.


 



 



           


단심가(丹心歌)의 임 향한  일편단심의 "임"은 누구인가? 무엇인가?

 


 


 


정몽주는 공민왕시절부터 벼슬을 한 사람이다.


이성계는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감행하며, 두 차례나 고려의 왕을 바꾼다.


이 때 정몽주는 무엇을 하였을까? 의문으로 남는다.


  


 


위화도회군에서 정몽주가 어떤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곧 대제학(大提學)에 오르는 것을 보면 이성계를


지지하였던 사실은 분명하다. 이런 의미로 정몽주와 이성계는


고려말의 권문세족을 제거하는 일에는 同志었다.


유교적 價値에도 합치하는 일이었다. 개혁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위화도회군을 지나 최영(崔榮)장군과 우왕(禑王)을


제거하는 경우에도 여전히 동지이었다,


우왕을 제거하고 창왕(彰王)을 내세운 후, 1년 만에 다시 彰王을 제거하고


공양왕을 내세우는 일에도 정몽주는 반대는 커녕 오히려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므로 정몽주의 "임"은 고려의 왕은 분명 아니었다.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잡은 사대부세력은 강경 개혁파와


온건 개혁파의 둘로 나뉜다. 고려말,


극도의 무인정치에 대항하는 세력은 최영장군과 사대부들이었다.


위화도회군 이후, 최영과 함께 우왕,창왕이 모두 제거되었는데,


이제 남은 세력은 사대부들 뿐이었다.


  



 


 


결론적으로 정몽주의  "임"은 고려의 왕을 향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고려왕조를 위한 충성심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 시대의 상황에서 그가 옳다고 생각한,


믿은 그의 정치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몽주를 마치 사심(私心)이 없는 오로지 충절로 가득한


사람이었다고 이해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지키려고 한 그의 政治 路線이


역사적으로 판단할 때 반드시 옳았다고 평가할 수도 없고,


그래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정치노선을 위하여 어떠한 회유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 후세의 본보기가 될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지조(志燥)나  충절의 차원에서만 보아서는


안된다는 점일 것이다.


 



 



 



 


 


 

정몽주 묘에 얽힌 전설 

 

언덕을 올라 왼쪽이 정몽주의 묘이고 오른쪽은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의 묘이다.

이석형은 정몽주의 손녀 사위이며,

세종시절에 과거에 급제하여 세조 때에 신숙주,한명회와 더불어

 훈구세력의 대표 인물이다.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하여 개성 선죽교에서 격살된 후,

근처의 공동묘지에 묻힌다. 후일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

정몽주의 후손에 의하여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의 이장(移葬)을

건의받고 이를  허락한다.

 

 

그리하여 경북 영천으로 가던 중, 이 곳 수지근처에서

명정(銘楨 ..상여 맨 앞의 벼슬을 나타내는 깃발)이 바람에 날려 이석형의

묘자리에 떨어진다.

  

 

정몽주의 후손들은 이 곳이 하늘이 정해 준 명당으로 알고 상여를 멈춘다.

이 곳이 명당임을 알게 된 정몽주의 손녀는 친정보다는

시댁과 자손들이 더욱 번창하기를 비는 마음에서 ..

밤새워 물을 퍼다가 이 자리에 뿌렸다.

다음 날 묘자리를 파보니 물이 많이 나와서, 정몽주의 후손들은

곁의 지금의 정몽주 묘터로 바꾸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정몽주의 묘에서 바라 본 이석형의 묘 )

 

 

 

이 덕분인지 이석형의 연안이씨(延安李氏) 가문은 번창하여 후손들은

수 많은 벼슬을 하게 되며, 달성 서씨(達成徐氏), 광산 김씨(光山金氏)와 

더불어 조선의 3대 명문 가문이 된다. 정몽주의 후손들은 

그다지 번성하지 못한다.

  

 

지금도 풍수지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론이 분분한 것 같지만,

정몽주와 이석형의 살아가는 방식의 극명한 차이에서

오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될 수 있었던 정몽주이었지만,

그의 선택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석형 앞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는데,

그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찬성,참여함으로써 죽음의 길을 외면하고,

훈구파의 일원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가 오늘을 사는 후손들에게 교훈을 주려면,

정몽주와 이석형의 처지가 반대이었어야 하는 것...

일제시대에 親日勢力들의 후손은 지금도 기득권층이 되어있고,

반대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끼니를 걱정하고 있다.

  

 

이석형의 묘에서 바라 본 정몽주의 묘

 


 



 


 


        정몽주 묘역 입구에 조성해 놓은 연안이씨(延安李氏)들의 위세... 


자랑이 심히 유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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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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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푸른잔디 | 작성시간 16.11.18 옛 선비들의 이야기 경청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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