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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산행/여행 후기

인도 네팔 배낭여행기(5).... 파테푸르시크리의 폐허로 남아진 왕궁

작성자왕뿅망치|작성시간22.04.17|조회수31 목록 댓글 0

자이푸르와 파테푸르시크리 그리고 아그라로 가는 길

 

오전 열한 시 경에 암베르성을 출발하여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로 가는 길의 주변은 건기라서 풀도 다 말라버렸

고 산에 나무도 없어서 황량한 모습이다.

인도에도 건기와 우기가 있는데 건기는 11월부터 3월까지로 건기에는 우리나라의 겨울에 해당하기 때문에 덜 덥

기는 하지만 땅도 풀도 메말라 있어서 바람이 불면 먼지가 많이 날린다.

    

길 가에 있는 채소와 과일을 파는 가게

 

길가에서 보이는 집들...집이라고 할 수 없다.

 

 

아무렇지도 않게 버스위에 타고 가는 사람들

 

 

황량한 들판..건기라서 풀이 다 말랐다.

 

길 가에 보이는 과일을 파는 가게나 집들 그리고 간간이 만나는 차들을 보더라도 인공위성과 핵무기를 가지고 있

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가난한 나라임을 실감할 수 있다.

동쪽으로 한 시간 반쯤 달리자 들판이 나오는데 들판에는 유채꽃이 끝없이 피어 있다.

이 때가 1.15일 경으로 황량한 산만 보다가 넓은 들에 있은 유채 꽃을 보면서 이 나라는 언제나 더운 나라라는 것

도 또한 실감을 하게 된다.

 

톨게이트에 잠깐 서 있는 동안 길에 보이는 인도청년들

 

갈 가에는 이런 곳들이 가끔 보인다....돌인지 옹기인지...등이나 장식류를 파는 곳이다.

길 가에 보이는 유채 밭과 밀밭...이런 들판을 몇 시간을 동쪽으로 간다.

 

 

소똥을 말리고 있다....이런 집들도 마을을 지나갈 때면 보인다.

 

야자수 나무 잎을 길에서 말리고 있는데...용도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늦은 점심을 먹는 식당...델리와 자이푸르에서 보는 식당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화장실을 가는 길목에 기념품과 생필품도 파는 것은 어디나 같다.

 

오늘은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렌트카를 사용하기 때문에 출발해서부터 도착할 때까지 편하게 가는 셈이다.

세 시간을 달려서 길가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그 때까지 길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넓은 들에 벽돌공

장을 한 번 본 것이고 작은 도시 몇 개를 본 것뿐이다.

식사를 하고 다시 두 시간을 달려서 파테푸르 시크리라는 곳에 도착을 하였다. 파테푸르시크리는 무굴제국의 수

도였으나 40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는 곳이다.

   

 

이런 유채의 들판을 지나고

자이푸를 떠마면서 처음 보는 굴뚝인데 벽돌공장인 듯

파테르푸르시크리의 주차장...기념품가게의 건물도 고풍스럽다.

 

 

이곳에 왕궁이 세워지게 된 배경과 폐허가 된 내용은 요즈음 같으면 어림도 없지만 절대왕권시대였었기 때문에

 일어났던 일인 셈이다.

무굴제국의 3대 황제인 악바르는 북부 인도 전 지역을 점령하여 대제국의 면모를 확립하였지만 근심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나이가 서른 살이 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영험하고 신통력이 있다고

 소문이 난 파테푸르시크리의 수피 성자(聖者) 셰이크 살림 치스띠를 찾아간 황제는 성자에게서 곧 큰 부인에게서

 아들을 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되는데 그의 말은 적중하여 약 1년 후 왕비 조다 바이(Jodhi Bai)가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가 바로 술탄 살림(후에 제항기르 황제) 왕자로 후대의 일부 호사가들에 의해 그가 혹시 그 수피 성자의 혈통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절에 불공을 들여서 아이를 가지면 주시의

 아들이라고 의심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 이런 의혹이 제기되었는가 하면 당시 악바르는 수없이 많은 전쟁터를 전전하는 과정에서 신체가 부실해졌거

나 이방의 많은 여인들과의 문란한 관계에 의한 성적 부작용 증세를 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난 후 악바르 황제는 파테푸르시크리를 번성하게 해달라는 그 성자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이곳에

다 궁전을 짓고 1571년에 아그라에서 이곳으로 천도(遷都)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 수도를 옮긴 이곳에는 강이 인접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인원이 거주하기 위한 필수 요소인 식수

와 용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고 그 물을 끌어오는데 너무 힘이 들게 되자 수피 성자 셰이크 살림 치스띠가 죽

자 그 불편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1585년에 다시 아그라로 재천도하고 말았다.

 

이곳은 14년 동안 무굴제국의 수도로 있었는데 이 후부터 이곳은 인도 역사에서 그들의 즉흥성을 설명하기 위한

 예로 거론되는 대표적 장소가 되었고, 대황제 악바르의 유일한 실책을 제기하기 위한 근거지로 거론되는 불운의

 땅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록 14년 동안 유지된 비운의 수도였지만 파테푸르시크리성은 악바르 황제가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무

굴제국 건축의 백미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그가 유난히 좋아했던 붉은 사암과 대리석을 이용하여 건축한 많은

 건물들은 그 아름다움이 경이로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왕궁

을 비롯하여 거대한 자미마스지드 구역을 둘러보게 되면 여러 가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파테푸르시크리의 위성사진

 

인도의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보러 가는 사람이라면 이곳을 반드시 들러서 보아야 할 정도로 매력도 있고 인상이

 깊은 곳이다. 먼저 매표소를 지나 왕궁 안으로 들어서면, 왼편으로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이 악바르의 장남 제항

기르를 낳은 조다 바이 왕비의 궁전인데 조다 바이는 그녀는 원래 라자스탄 암베르의 마하라자 자이싱 2세(Mahar

ajah Jai Singh II)의 여동생으로 자이싱 2세가 악바르로부터 자치권을 얻기 위해서 정략결혼을 시킨 왕비이다.

 

우리는 조다바이의 궁부터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다바이의 궁전...악바르에게는 이슬람교를 믿는 왕비, 힌두교를 믿는 왕비 기독교를 믿는 왕비가 있었는데 힌두

교 출신의 조다바이가 왕자를 낳았기 때문에 제일 크고 화려한 궁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조다바이 왕비는 자이푸르의 자이싱 2세의 동생으로 살림이라는 왕자를 비롯하여 세왕자를 낳았다

 

다른 왕비들의 궁전에 비해 가장 화려한 이 건물은 이슬람 황제와 힌두 왕비의 이질적인 결합을 상징하듯 이슬람

 양식의 돔형 지붕과 힌두 양식의 기둥이 혼합되어 있으며 악바르(무굴제국의 3대황제로 무굴제국은 이슬람제국

이다)는 타 종교에 대해 너그러운 포용 정책을 썼다고 한다.

 

그가 여러 종교 지도자들을 궁전 안으로 불러 들여 토론을 벌이는 장소로 활용하였다는 특별 접견실 디와니카스

가 있다는 것이 이슬람으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 오른쪽의 디와니암은 대중 접견실로서 황제가 나라의

 공식 업무를 보던 곳이다.

   

 

디아니카스 건물과 그 건물을 바치고 있는 기둥...기둥의 아래로부터 이슬람교, 힌두교, 자이나교,조로아스터, 기독

교.불교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인터넷) 

 

 

외부 사람들을 맞이하는 디와니 암(인터넷)

 

그리고 이 두 건물 옆에는 황제가 시녀들을 말로 사용하여 인도식 체스 놀이인 파치시를 즐겼다고 전해지는 거대

한 놀이판 정원인 파치시 코트야드(Pachisi Courtyard)가 펼쳐져 있고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면적이 좁아지는 5층

 궁전인 판츠마할(Panch Mahal)은 궁녀들이 사용했던 건물로서 지금은 벽체가 사라지고 다만 1층에는 각기 다른

 모양을 한 84개의 기둥들이 서 있다.

 

 

핀치 마할...후궁들의 궁전이다 800명의 후궁이 있었다고....

 

규모가 비교적 작은 황금 궁전(Golden Palace)은 고아 주 출신으로 기독교도였던 미리암 왕비를 위해 지은 건물이

다. 마치 하나의 커다란 보석 상자처럼 아름답다는 칭송을 받고 있는 버발 바반(Birbal Bhavan)은 황제의 총애를

 받던 당대의 신하 라자 버발을 위해 지은 건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버벌 바반을 위한 건물

 

 왕궁 구역을 빠져나가 남서쪽으로 가면 이슬람식의 거대한 아치형 문이 있는데 높이가 무려 54m에 달하는 이 웅

장한 문은 1576년 악바르 황제의 구자라트 지역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일종의 개선문이라고 한다. 블랜드 다

와자(Buland Darwaza)라 불리는 이 건물의 아치 안에는 “세상은 다리다. 그 위에 집을 지으려 하지 말고 건너가

라. 순간을 원하는 자는 영원을 얻을 수 있다”라는 코란의 의미심장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이슬람 글씨

를 모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다. 이 문을 통과하면 광장이 나오고, 그 왼편에 있는 건물이 메카의 모스

크를 본떠서 지었다는 자미마스지드(이슬람교 사원) 본당이다.

 

  블랜드 다자와라고 불리는 개선문

 

 

 

밖에서 보면 그 규모에 압도를 당하게 된다.

 

 

  안에 시커먼  것은 새집인 듯

 

광장의 북쪽에 있는 아름다운 흰 대리석 건물은 1570년에 지어진 수피 성자 셰이크 살림 치스띠의 무덤인데 조

다 바이의 득남을 예지한 신통력을 믿고 있는 인도 여인들은 지금도 이곳에 와서 열심히 소원을 비는 것을 볼 수

 있다.

 

  

수피 성자 셰이크 살림 치스띠의 무덤과 내부..지금도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죽은 도시 답게 이 곳은 왕족들의 무덤이 많이 있다.

 

 

개선문의 뒤쪽 광장... 광장 안에서는 신발을 신을 수가 없다.

 

 

 

이곳도 시간이 없어서 1시간 반 정도에 다 훑어보고 지나가다가 보면 남아있는 건물이 아름다움이나 허물어져서

 폐허가 된 곳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이나 허무함을 느낄 시간이 없다.

암베르성도 지금은 사용을 하지 않는 폐성이고 이곳도 폐성이지만 이곳의 파테푸르시크성의 느낌은 암베르성에

서 느끼는 느낌과는 많이 다르다.

만약 인도에 가는 길이 있다면 그리고 북부지역을 가게 된다면 두 성을 보게 될 것인데 그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왕궁이 어떻게 건설되었다가 어떻게 버려지게 된 것을 알고 성의 허물어진 담장 사이로 멀리 들판을 보거나 폐

허의 잔해를 보게 되면 통속적인 단어인 세월의 무상이나 권력의 무상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허물어진 성벽사이로 바깥의 풍경이 보인다.

 

 

지금 소 때가 지나가는 곳도 왕궁이 있었던 곳일 터....

 

회랑 안에 있는 둥그런 고리는 말고삐를 맨 곳이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성 안에서 보이는 외부의 풍경들...성이 허물어진 곳에서...기둥 같이 보이는 것이 히란(사슴) 미나르(탑)로 제항기

르가 폴로경기장을 사슴보호구역으로 바꾸는 바람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인도 여행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을 꼽으라면  이곳을 꼽을 수가 있는데 이곳이 폐허가 되어 있기 때문이기

도 하고 타지마할이나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은 매스컴에서 많이 봐서일 수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행지에 대한 느낌이나 정보가 없이 사진 몇 장으로 여행기를 대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다가

 보니 말이 많아지게 된다.

말이 많아지는 여행기는 사실 인기도 없고 읽기가 힘들기도 하겠지만 어차피 여행기가 정보를 제공하거나 공감을 하기 위한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시간 반 동안 주마간산으로 구경을 마친 일행이 차를 기다리는 중이다.

 

 

파테푸르시크리를 떠나면서... 해가 지기 시작하는 파테푸르시크리포르의 모습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길을 떠나서 아그라로 가는데 거리는 37㎞라고 하는데 길이 막히고 하여 두 시간이 걸려서

아그라의 숙소에 도착하였다.

아그라는 인도를 오는 목적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타지마할이 있는 곳으로 기대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자이푸르의 변두리 모습

 

아그라로 가는 도로의 풍경..유채밭이 몇 시간을 가도 끝이 없다.

 

타테푸르시크리의 왕궁

 

파테푸르시크리의 성채 안

 

 

허물어진 왕궁에서 보는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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