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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산행/여행 후기

인도 네팔 배낭여행(9)....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지 사르나트(녹야원)에서 인도에서의 불교의 흥망과 쇠락의 흔적을 보다

작성자왕뿅망치|작성시간22.04.23|조회수63 목록 댓글 0

불교신자라면 꼭 읽어보시길...

사르나트는 바라나시 시가지와 10키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사르나트는 불교의 4대 성지 중의 하나로 부처님이 제일 먼저 설법을 행한 곳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녹야원(鹿野園)

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참고로 불교의 4대성지는 태어난 곳인 룸비니(誕生)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成道) 그리고 최초의 설법을 

행한 사르나트(初轉法輪) 그리고 입적에 드신 쿠시나가라(涅槃)이다. 

 

28세에 출가하여 수행을 하며 남행을 하여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을 혼자만의 깨달음으로 간직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도 전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와 같이 수행하던 다섯 비구(比丘)에게 제일먼저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르나트로 간 그들을 찾아가

서 최초로 설법을 하여 그들이 제자가 되어 비로소 불교가 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던 탑이나 현재는 터만 남아 있고 다메크 스투파는 일부가 복원

되어 있는데 진리를 보는 탑이라는 의미라고 하며 아쇼칸 필러는 아쇼카왕의 석주가 발견된 곳이다.

스투파의 의미는 알이라는 뜻이며 그 안에 사리를 모시는 것은 자궁과 같은 곳에 들어있는 사리가 깨어나서 부처

님의 말씀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를 기원하기 위해서 스투파(탑)에  사리를 모신 것이라고 한다.

  

사르나트가 녹야원(鹿野苑)으로 된 유래....

 

옛날 사르나트 숲 속에는 각각 500마리로 이루어진 두 패의 사슴 떼가 있었다. 이중 한 사슴 떼의 왕이 바로 전생의

 부처였다.

당시 바라나시의 마하라자(왕을 지칭함)는 사냥과 사슴고기를 즐겼는데 매일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사슴왕은 마하

라자를 찾아가 사슴들이 순번을 정해서 매일 한 마리씩 죽을 테니 사냥을 중지해 달라고 부탁한다. 감동한 마하라

자는 그러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사슴 중 한 마리가 죽을 차례가 되었는데 새끼 밴 사슴이었다.

 자비심 많던 사슴왕은 어미를 위해 자신이 죽기로 결심하고 마하라자를 찾아가서 자신이 온 사연을 전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하라자는 자신이 사슴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후 사르나트에 있는 사슴을 잡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사르나트의 한자 이름은 녹야원 즉 사슴정원이 되었다.

 

사르나트는 폐허 속에 있던 것을 1835년 영국의 왕립협회가 발굴하면서 사르나트가 불교의 유적지라는 것은 발견

했지만 결정적인 했지만 프레드릭 와르텔이라는 사람이 1905년 아쇼카왕의 석주와 4머리 사자상 그리고 설법하는

 붓다상(像) 등 500여점 이상의 유물을 발굴하여 사르나트가 최초의 설법을 한 곳이라는 것을 밝힌 셈이다.

 

  프레드릭 와르텔이라는 사람이 발굴한 1905년 아쇼카왕의 석주와 4머리 사자상 


그러나 인도는 국교가 힌두교이다시피 하고 또 이슬람의 지배를 받으면서 불교는 잊혀진 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불교는 과거에 있었던 종교일 뿐 현재 자신들의 종교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사르나트의 이런 유물들도 그냥 유물

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리는 하지만 참배하는 사람들도 없고 종교적인 의미로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외국의 불교인들

이 찾아와서 참배를 하고 갈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쇼카왕의 석주의 머리에 있던 4사사상이 인도의 국장(國章)이 되고 인도의 국기에 법륜이 

들어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아쇼카왕에 대해서 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아쇼카왕은 기원전 3세경의

 사람으로 마우리아 왕조의 세 번째 왕이다.

 


인도의 국장인 아쇼카왕의 사자상과  인도의 국기

황색은 용기와 헌신을, 하얀색은 진리와 평화를, 초록색은 믿음과 번영을 의미하며, 파란색 법륜은 마우리아 제국

의 왕이었던 아소카의 사자상에 새겨져 있는 법륜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아쇼카왕은 인도역사에서 가장 많은 영토를 확장한 왕으로 수많은 정복전쟁을 통해서 아프카니스탄과 인도대륙의

 대부분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던 왕이다. 그러므로 인도의 입장에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인 셈이다.

성격도 강인하고 잔인하여 자신의 형을 비롯하여 전쟁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불교를 접하게 되고 자신

의 무자비함을 뉘우치면서 불교의 전파에 온 힘을 기울였던 왕이다.

 

현재 인도의 종교인 힌두교가 아닌 불교를 융성시키고 전파한 왕이지만 인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기 때

문에 아쇼카왕의 석주가 국장(國章)이 되고 국장의 법륜(法輪)이 인도의 국기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어디까지나 본인의 추측일 뿐 사실을 알 수는 없다.

 

인도에서 불교의 유적지가 철저하게 파괴되어 없어지게 된 것은 불교의 유적지를 파괴하여 후세인들이 찾지 못하

도록 땅 속에 묻었던 이슬람 국가의 등장 때문이라고 한다.

불교유적지를 대포로 파괴하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인 아프가니스탄의 텔레반 들의 행위를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본래는 석주가 이렇게 생겼으나 힌두교와 이슬람교에서 파괴하여 위의 모습이 되었다(바이살리 사원의 아쇼카왕

의 석주로 다른 곳에서 빌려 온 사진임 아쇼카왕은  불교를 위해서 이런 석주를 많이 세웠다고 함)

  

사르나트가 발굴된 것이 불교인들이 입장에서 본다면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지만 자신들과 상관이 없는 종교가 

되어버린 인도인의 입장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 곳이며 과거의 유적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곳 사르나트에서 발굴된 유물과 다른 곳에서 발굴된 불교의 유물을 사르나트의 녹야원 옆에 있는 사

르나트 박물관에 전시해 놓았다.

 

현재 인도에서 불교 인구는 2% 불과하지만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이 불교에 귀의 하면

서 부처님의 진신 사리가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 곳을 일일이 답사를 하여 그곳에 석주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불교의 포교에 힘을 써서 인도 전역은 물론 서양에 까지 선교사를 파견하였는데 그리스 이집트까지 불교의

 선교사가 파견되었다고 한다. 그 때가 기원전 270~230년경으로 불교에서 아쇼카왕이 한 역할은 기독교에서 사도

 바울이 한 역할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180년경에 마우리아왕조가 멸망하면서 불교는 인도에서 힌두교로부터 핍박을 받고 나중에 이슬람으로부터

 유적이 파괴당하면서 인도에서는 불교가 자취를 감추게 되고 말았다고 한다.

 

불교가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다른 종교가 정교가 일치되거나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반변은 불교

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힌두교와 경쟁관계 비슷하게 있었던 불교는 힌두교를 믿는 왕권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되었고 정치적으로 힘이 없던 불교는 주변 나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른 아침 고즈넉한 사르나트는 각국에서 온 순례객들과 가이들이 중요한 유적지 앞에서 설명을 하는 광경과 

유적지를 돌면서 묵상을 하는 사람 그리고 조용히 앉아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시끄러운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은 없다.  


유적지와 주변을 둘러보는데  동남아의 불교국가인 태국 사람들과 미얀마 그리고 대만 사람들이 사르나트에 순례

를 와 있고 인도 사람들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외국인들만 찾는 불교의 유적지를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과 더불어 신기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그렇게 까맣게 잊혀질 수 있었을까 하는...

  

유적지마다 각 나라에서 온 그룹들이 법회를 보고 있다.

동남아 쪽에서 온 사람인 듯

주변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아직 아침 안개가 걷히지 않고 있고 고즈넉하다.


아쇼카왕의 석주..이슬람이 파괴하여 땅속에 묻어버리고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했다고 하니...

아쇼카왕의 석주에 대한 영어설명문


어쨌든 인도에는 불교의 유적은 땅에서 발굴해낸 유적지 밖에 없는 셈이다.

사르나트가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한 곳이라는 것이 확인된 것은 아쇼카왕의 석주 때문인데 그 석주에 그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녹야원의 땅속에서 발굴된 유적지와 다메크 탑 그리고 아쇼카왕의 석주를 보면서 2천년이라는 시간의 의미도 또한 생각해 보게 된다.

 

폐허는 무심하지만 무심한 폐허 위에서 인간이 세월의 무상과 종교의 배타성을 괜히 생각해 본다.

  

기도를 하면서 거니는 비구니

단체로 오는 사람들은 순례객들이다.

설명하는 사람의 복장과 앉아 있는 사람들의 복장을 보면 한국사람들이다.

다메크 스투파(탑)으로 진리를 보는 탑이라는 뜻이며 최초로 다섯 제자들에게 설법한 자리라고 한다.

다메크 탑의 기단에는 순례자들이 공양의 의미로 붙인 금박자국이 있다.

기념 사진을 찍는 미얀마에서 온 순례자들과  각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미얀마는 불교국가이다.

 

불교의 교리와 힌두교의 교리는 공통점이 많은데 방법은 다르지만 윤회와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카스트제도를 부정하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모든 인간 안에는 불성이 있어서 누구나 성불을 할 수 있지만 힌두교에는 카스트제도가 철저하며 브라만 이외의 자들은 수행을 통한 해탈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

카스트끼리는 교류가 금지될 정도로 엄격하게 구분하며 불가촉천민은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

 

기원을 하면서 다메크 스투파를 도는 사람들


바라나시라는 도시가 인도의 힌두교를 상징하는 도시인데 그 도시에 불교의 4대 성지의 하나인 초전법륜지가 있다

는 것이 참으로 이채롭다.

사르나트 근처에는 불교가 성한 나라에서 세운 가지들 나라의 사찰의 형식을 본뜬 사찰들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조

계종에서 세운 세운 절이 있다고 한다.

가까운 곳에 있는 동남아의 절과 인도의 또 하나의 종교인 자이나교의 사찰이 있는데 가까이 있는 동남아에서 세운

 절만 구경하고 시간이 없어서 조계종에서 세운 절은 보지 못했다.

사르나트 옆에 있는 불교박물관을 들러서 불교의 유물을 구경하는데 사진 촬영은 하지 못하게 한다.

사르나트 주변에 있는 자이나교의 사원

동남아 불교의 사원들

주변의 모습들..모델은 일행 중의 한 사람

다메크 스투파가 보이는 뒷길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있는 불교사찰의 서 있는 여래상..입구에서 사진만 찍고 들어가서 볼 시간이 없다. 아마도

 이곳도 불교의 유적지 였던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오후에는 갠지스강과 바라나시 시내를 구경하고 저녁에는 인도의 음악인 시타르와 타블라를 감상하고 네팔에 있는

 룸비니 쪽으로 밤차를 타고 가는 일정이어서 호텔로 돌아와서 오후 일정을 준비한다.


사르나트의 모습


다메크 스투파와 사람들

돌아오는 길의 불교사원에 있는 부처님의 입상...아마도 이곳도 불교의 유적지가 있던 곳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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