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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가 오홍탁선생 묘비제막식(2016.10.22.해남우리신문)

작성자사무처|작성시간16.11.01|조회수134 목록 댓글 1

순사로 재직하며 독립운동…오홍탁선생 묘비 제막식

김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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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0.28 16:5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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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면 신흥리 선영에
전남협의회 사건 연류돼 실형

▲ 일제강점기 순사로 재직하면서 항일운동을 했던 남헌 오홍탁선생의 묘비가 산이면 신흥리 동복 오씨 송암공 문중 선영에 건립됐다.

일제강점기 시절 순사로 재직하면서 항일운동을 했던 남헌 오홍탁선생 묘비 제막식이 지난 22일 산이면 신흥리 동복 오씨 송암공 문중 선영에서 열렸다.
오홍탁은 경찰신분으로 1932년 호남 최대 항일운동 조직인 ‘전남운동협의회’ 산이면 지부장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현직 경찰이 지하조직인 전남운동협의회 소속 회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에 일본경찰은 경악했다.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이 발각되자 조선일보는 호외까지 발행하며 몇 개월에 걸쳐 이 사건을 다룬다.
1934년 7월9일 조선일보 호외에는 오홍탁을, ‘순사로 재직하면서 적색농민조합 멤버로 활약/학생시절 독서회의 조직자, 서내에서는 모범경관’이라는 표제를 달고 소개한다. 이어 조선일보는 ‘오홍탁은 산이면 상공출신으로 해남농업실습학교를 졸업했다. 재학시절에는 독서회를 조직해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했고 졸업 후에는 각 마을에 독서회를 조직해 소작쟁의를 주도했다. 그는 비밀을 탐지할 목적으로 전남순사교습소에 들어가 소화 8년 12월에 졸업하고 강진서에 근무하게 된다. 강진 경찰서에 근무하면서 전남운동협의회 산이면 책임자로 활동한다. 오홍탁은 성격이 양호해 상관의 신임을 받은 모범경관이었고 고향 주민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는 주민들의 신임을 이용해 자주 고향에 드나들면서 적색사상을 선전하고 오던 중 검거됐다. ‘현직 경관으로서 공산주의 운동에 참가한 예는 경북 예천 사건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선이나 일본 내지 공산운동사에 보기 드문 일로 매우 주목된다’고 적고 있다.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은 북평면 이진과 산이 상공, 완도가 중심이 된 호남 최대 항일운동 조직체였다.
1932년 결성돼 2년여간 활동하다 1934년 일본경찰에 적발되고 검거자 558명 중 58명이 구속된다. 오홍탁은 실형을 선고받고 3년 10개월 간 교도소 생활을 한 후 출소한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해남군 초대 내무과장을 역임했고 미군정의 식량정책과 친일경찰을 척결하라는 이슈로 발발한 해남추수봉기를 주도한 혐의로 또다시 구속 수감된다.
목포 형무소와 공주 형무수, 김천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그는 6․25발발직후 석방돼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진도 갈매기섬으로 끌려가 경찰에 의해 총살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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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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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budda0714 | 작성시간 16.11.05 수고하셨습니다.
    선친께서도 크게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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