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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양민학살사건

작성자사무처|작성시간14.11.30|조회수83 목록 댓글 0

지심도와 옥녀봉의 증언


- 거제 양민학살사건


서북청년단, “섬사람 80%가 좌익에 물들었다”


한려해상공원의 동쪽 관문에 자리한 남해의 아름다운 섬 거제도. 제주도에 이은 남한 제2의 섬으로 주변에 60여 개의 작은 섬을 거느리고 7백 리를 구비구비 물길에 둘러싸인 거제도는 겉으로 보아 아릅다고 평온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오늘의 외관상의 평온을 넘어 누군가 굳이 이 섬나라에서 비극적인 분단역사의 족적을 찾으라고 한다면 으레 6․25전쟁중의 포로수용소를 꼽기 마련일 것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거제도에서는 1950년 11월 27일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돼  인민군과 중국군 포로 17만 3천여 명이 수용됨으로써 금세기의 한동안을 한국전쟁의 한 상징으로 국내외에 조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제도가 민족분단의 상흔과 근원을 간직하고 있는 까닭은 비단 포로수용소 설치지역이었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또하나의 증언대로서의 ‘거제도’가 가지는 진실은 40년 동안 철저히 역사의 베일 속에 가려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알려지지 못한 채 하나의 ‘전설’로 남기만을 강요받고 있는 그 진실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섬에서 6․25 전쟁 이전부터 약 7백여명의 양민이 서북청년단 소속 비정규군에 의하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총살․수장되었다는 사실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1950년 4월과 1950년 7월에서 8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거제도 주민에게 들씌워진 혐의는 ‘전체 섬사람 80%가 좌익에 물들었다’는 심증뿐이었다.


“앞 사람과 서로 뺨을 때린다. 실시!”


가난한지만 평화로웠던 거제도가 저주의 섬으로 돌변한 것은 1950년 4월 장승포에 2개 부대의 무장군인들이 상륙하고서부터였다. 이들은 당시 마산에 주둔하고 있던 호림부대와 백골부대로서 주로 월남한 서북청년단 출신들과 제주 4․3 항쟁때 피해를 입은 우익진영의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부대는 거제도내 몇몇 인사들의 안내를 받고 산악지역에 잠복중인 빨치산들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김위종 소령의 지휘 아래 진주했다고 한다.


이튿날부터 이 부대에 의한 학살이 시작됐다. 그들은 먼저 장승포에 근접한 부락들을 샅샅이 뒤져 ‘빨갱이’라고 막연하게 지목되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장승포 뒷산 속칭 무동골에 끌고가 총살시킨 것이다. 계속해서 양부대는 거제도 각지에 일정 기간씩 주둔하면서 일체의 주민출입을 통제하고 젊은이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다 학살했다.


1950년 5월 6일 거제도 일운면 구조라부락에는 백골부대 소속 군인 60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들어서자마자 마을 입구를 완전히 차단한 뒤 이 마을 구장이던 노길필(81․현재 구조라리 거주)씨를 불러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로 ‘앞으로 작전이 끝날 때까지 60명의 군인 먹을 식사를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구장 노씨는 극심한 흉년에 해초와 고구마로 연명해나가는 주민들이 무슨수로 60명의 밥을 끼니마다 지어 바칠 수 있겠느냐며 도저히 곤란하도 통사정을 했다. 이것이 화근이 됐다. 화가 난 부대 인솔자는 노씨를 카빈소총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내리쳐버린 다음 “국방군들을 냉대하는 이 부락을 빨갱이 터밭이다”고 외치며 전체 마을주민들을 속칭 울보막이라는 마을 옆 바닷가로 끌어냈다. 그리고 모두 바다속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1처녀 주민들이 전부 바다물 속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군인들은 주민들에게 그 자세로 두사람씩 짝을 지어 마주보도록 명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무조건 두 사람씩 마주보자 한 군인이 명령했다. “앞에 서 있는 사람과 서로 뺨을 때린다. 실시!”주민들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물가에 서 있던 군인들의 개머리판이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이렇게해서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장모와 사위가 서로의 뺨을 치면서 눈물과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1시간가량 계속되던 뺨때리기는 한 군인이 총을 쏘아대는 것을 신호로 끝났다. 이제 물에서 나오라고 명령받은 주민들은 다시 군인들의 총부리에 밀려 마을에 있는 어업조합창고에 갇혔다. 창고에다 3일간을 가둬놓은 뒤 마을의 청년 8명을 가려냈다. 그리고는 그들을 바닷가에 나란히 세운 뒤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5월 8일의 일이었다.

이날 학살로 남편 강정수(당시 23세)씨를 잃고 40년 세월을 피맺힌 한으로 살아온 진수금(62․현재 일운면 학동 거주)씨는 그날의 참상을 이렇게 떠올린다.


“바깥양반은 그때 어장에서 서기를 맡아 하고 있었지예. 내가 열여덟살에 결혼해가지고 스물둘에 그 꼴을 당했어예. 첫 애 놓고 둘째 애 밴 때인데 아무 사상도 없는데 고마 백골부대 들어와 어느 거석도 모르고 젊다해서 끌려가 총살당했어예. 바깥양반이 젊은 나이에 그꼴을 당해노니 마 하늘이 캄캄하고, 장례라도 치러야 하는데 군인들은 장례도 못 치르게 해노니 그 서러븜 말도 몬했지예. 그때 거제도에서 젊고 똑똑한 사람은 모다 안 죽었심니꺼.”


이 부대는 그 무렵 다시 구조라리 인근에 있는 지세포리로 넘어갔다. 부대는 지세포 주민들로 하여금 ‘빨갱이’색출에 협조하지 않으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한 뒤 부락 젊은이들을 데리고 산야를 누벼댔다. 군인들은 총을 들고 주민들에게는 몽둥이를 들린 채 매일같이 산속을 찾아헤매다 내려오곤 했던 것이다. 그러다 별 성과도 없고 높은 사람들에게 욕이라도 듣는 날에는 어김없이 그 여파가 주민들에게 불똥으로 떨어졌다. 어느날 군인들은 마을 젊은이들을 끌어낸 뒤 “이 새끼들, 우리를 이리저리 끌고다니면서 괜히 고생만 시킨다”며  “요것들 다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그런 뒤 청년들을 마을 구석진 집 마굿간으로 끌고갔다.


“마굿간에 들어간 우리 부락 청년들은 군인들에게 등짝이고 허벅지고 마구 내리때리는 몽둥이질을 당했지요. 빨갱이들 숨은 곳은 바른대로 말하라고요.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우리로서는 피투성이가 된 채 맞고만 있었어요. 그런데 당시 제게는 동생되던 주양림(당시 20세)이라는 사람이 뭇매에 못 이겨 소문으로만 나돌도 서말이등대를 빨갱이 은신처라고 말한 겁니다. 군인들은 몽둥이질을 멈추고 주양림이를 데리고 서말이등대로 향했지요.매질을 못 견뎌 억지로 댄 장소인데 빨갱이가 나올 턱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군인들은 ‘감히 국군을 놀렸다’는 이유로 부락민 전부를 모아놓고 지서 앞 백사장에서 주양림이를 사살시켜버렸어요.”


장승포에서부터 시작된 백골․호림 양부대의 학살만행이 거제도 각지로 확대되면서 섬내 곳곳에는 흉흉한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공포의 나날이 계속됐다. ‘절믄이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소식이 꼬리를 물고 번지자 이곳저곳에서 집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하는 청년들이 늘어갔다. 그러나 군대는 계속해서 이 마을 저 마을을 수색하며 산에서나 들에서 붙들리 장정들을 덮어놓고 그 자리에서 총살시켭저렸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그해 봄에만 동백꽃처럼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간 청년이 2백여 명. 6․25전쟁 전부터 이렇게 시작된 거제도의 양민학살은 그 무법성과 악랄함이 다른 지역에 비할 바 아니었고, 앞으로 전쟁기간에 전개될 새로운 양민학살에 있어서도 악의 선구적인 본보기가 되는 것이었다.


왜 전쟁 전부터 거제도가 학살표적이 되었는가


그러면 똑같이 전쟁 전에 있었던 제주도민의 항쟁이나 여수․순천 14연대의 반란사건에 대한 무력대응과는 달리 비무장 양민이 수없이 학살된 거제도 지역의 당시 상황은 어떠했는가.


일제 강점 36년 동안 민족의 독립을 향한 끊임없는 투쟁이 전개된 고장이라면 경상남도 거제군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에서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기 전에 3․1운동청년회를 비롯한 수많은 민족주의자들의 단체가 자생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보아 섬내에서 약간 높은지대에만 올라가더라도 맑은 날이면 대마도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일본과 가장 가까운 위치라는 점에서 거제도 주민들이 겪고 느꼈던 피압박 식민지 국민의 설움은 남달랐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거제도에서는 일제에 항거했던 많은 민족주의자들을 배출했고, 주민들의 의식 또한 독립국가의 어민으로서 떳떳하게 살고자 하는 바람이 항시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지역주민들의 뇌리에 남은 지역내 항일 투사들로는 윤일씨, 노상선씨, 이상윤씨 등을 꼽을 수 있다.


1945년 8․15해방으로 거제도 주민들은 이제 자주독립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됐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리하여 전국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 섬나라에서도 일제가 물러간 자리의 치안과 행정력을 건국준비위원회가 접수했다. 일제 때 항일운동을 했던 지역 청년단체들이 주민들의 신망을 등에 업고 치안대를 조직하여 일본경찰이 장악하고 있던 지서를 접수, 거제지역 치안을 맡았다. 이밖에도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군인민위원회등을 꾸린 사람들 역시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에 앞장 서 지역주민들의 신망을 얻은 인사들이었다는 것이 현지 주민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사정이 이랬던 터라 거제도 지역의 많은 젊은이들은 지역유지들과 뜻을 같이해 치안유지 활동을 도왔고 새로운 민주독립국가 건설을 염원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들어서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군정 당국은 건국준비위원회를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인민위원회를 해산할 것을 명한 것이다. 이어 군인과 경찰을 파견하여 거제도지역 치안을 자신들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지역주민들의 자치를 토대로 운영되던 이들 행정조직과 치안대는 하루아침에 들이닥친 신생정부의 요구를 수용하려 들지 않았고, 이렇게 되자 군과 경찰은 자신들의 요구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수배령을 내렸다. 이때 거제도 인민위원회, 치안대 등을 꾸렸던 사람들은 군․의경의 무력행사에 밀려 섬 각지의 산속으로 들어간다.


거제도는 해발 556m인 동부면 노자산을 주봉으로 하여 554m의 계룡산이 섬 중앙에 자리하면서 동서로 깊은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다. 앞서의 계룡산을 비롯한 옥녀봉, 산반산, 대금산, 국사봉 등이 당시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했던 세력이 은거하게 되었던 주요 산들이었다. 이를테면 빨치산이 된것으로서는 그 숫자는 대략 50여명 정도였지만 1949년 당시로서는 여수․순천 반란 잔류병들이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던 경우를 제외하고는 드문 예에 속한 일이었다.


그들이 산속으로 잠적하자 그 뒤 지역 기관들을 장악한 이승만 정부의 군․경은 입산자들의 가족을 끌어다 고문을 일삼는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입산자 체포에 혈안이 됐다. 궁지에 몰리게 된 빨치산들은 식량확보를 위해 밤이면 민간에 내려가 음식제공을 요구했고 자신들의 가족에 대한 극심한 탄압에 대응해 그 보복으로 경찰서, 지서 등을 습격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러한 모든 일련의 사태는 거제도민들을 인위적인 좌․우 적대개념으로 갈라놓은 결과를 빚었는데 그 결과 신생 이승만 정부가 “거제도민 80%는 좌익이다”라고 규정, 토벌전에 나서게 된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30여 년간을 거제도에서만 해안경찰로 근무했다는 거제군 사등면 성포리 거주 정병준(59)씨는 당시의 지역실정을 이렇게 잘라 말했다.


“그때 대한민국 전체로 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고 공비가 습격해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토벌작전이 이루어진 곳은 거제도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정부 입장에서는 거제도 주민의 80%가 불온한 사람들이었다고 했다더군요. 백골사단과 호림사단이 와서 그 당시 참변당한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우리 마을(성포리)만 해도 그렇습니다. 8․15해방 이튿날인 16일날 아침이 되니까 일본경찰이 물러간 사등면 지서에 지역 독립운동유지이던 이상윤이라는 분이 들어앉아 죽창부대로 질서를 잡아갔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존경했던 분이 치안대장으로 앉아계셨으니 다들 그렇게 되는 것이 순리라고 받아들였지요. 그래 그분이 하는 일에 주민들이 도장을 찍어줬거든요. 나도 해방되던 해에 열다섯 살 먹었는데 도장을 찍어준겁니다. 그런데 정부수립이 되고 나서 나는 군에 지원입대를 했고, 그것이 날 살려준 셈이었어요. 당시 도장을 찍었던 사람들은 6․25를 맞으면서 죄다 학살명부에 올랐다고 보면 될겁니다.“


정병준씨의 증언으로는 결국 그 무렵 학살당한 대다수의 주민들은 우익이나 좌익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일제가 물러간 뒤 독립국가 주민으로서 떳떳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일에 찬동했을 뿐이데, 그것이 어마어마한 참극을 몰고왔다는 것이다.


더욱이 소규모 야산대가 산악지역에 있었다고는 하나 별다른 접전조차 없었던 이 섬에서 전쟁전부터 ‘공비소탕’을 목적으로 전개했다는 군작전은 그 명분과는 달리 지역내 몇몇 부호들의 개인감정에 의해 자행되었음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이때의 학살은 그 부호들이 마산에 주둔하고 있던 비정규군을 끌어들임으로써 자행되었던 만큼 지극히 사적인 만행의 성격이 짙었다는 것이다.


‘사형수 36호’의 생환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당시의 양민학살이 순전히 거제도 지역주민만을 상대로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마산 주둔군은 부산, 마산 등지에서도 불온한 사람이라고 점찍은 사람은 거제도를 학살장소로 삼아 끌어갔다.


부산에서 당시 경남신문 기자로 있다가 호림부대에 끌려와 거제도 토박이 주민들과 함께 살육의 현장으로 내몰렸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백운삼(75․현재 부산시 초량동 거주)씨는 그때의 처절한 상황을 기억에 떠올리며 이렇게 말문을 연다.


“아름다운 사연이라면 죽는 날까지 기억 속에 남겨두고 싶지만 두 번 겪지 못할 흉칙하고 몸서리쳐지는 곤욕은 쉬이 잊어버리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그러나 사무친 원한은 40년이 하루같으니 딱한 일이기도 합니다. 거제도에 감꽃이 한창 필 무렵 그 감꽃처럼 떨어져버린 수많은 생목숨……. 그래도 모진 것은 사람 목숨이라고 사형수 36호는 죽지 않고 이날까지 모질게 살아 또 그말을 하게 되다니…….”


백씨가 급습한 호림부대에 체포된 곳은 경남신문사 편집실에서였다. 그는 계급장도 없는 군복차림의 두 사람에게 붙들려 순식간에 수갑이 채워진채 부산 제빙회사 앞의 부둣가로 끌려갔다. 그로서는 백주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곤경에 처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비참한 모습으로 끌려가면서 한가지 짚히는 게 있었다. 과거에 그가 알고 지내던 몇몇 친구들이 좌익운동에 가담했다가 정부수립 후 쫓기는 몸이 되자 그들에게 생활비를 몇 번 대준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 친구 중 누군가가 군기관에 잡혀 자신의 이름이 나왔기때문일 것이라는 생가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불온한 혐의자’라고는 하지만 자신을 대낮에 직장에서까지 이런식으로 끌어가는 것은 뭔가 심상치 않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실제로 그는 이때부터 사지에 내몰렸던 것이다.


그가 군인들에 붙들려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는 20여 톤쯤 되는 발동선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다짜고짜로 배 안에 내동댕이쳐졌다.


“갑판 뚜껑이 열려젖혀지고 속으로 떨어지니 한마디로 아비규환이요 생지옥이었지요. 서른 명 정도 되는 젊은이들이 눈 뜨고는 못 볼 구타를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 살려’하는 아우성소리와 게글거리며 피를 토하고 바닥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로 꽉 차있었거든요.”


백씨도 이런 고문에서 제외될 리는 없었다. 삽시간에, 끌려와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인사불성의 참혹한 형체로 변했다. 이윽고 배가 떠나자 이제는 고문 방법이 바뀌었다. 군인들은 사람들을 한 명씩 로프로 매달아 달리는 배위에서 바다에 처넣었다가 들어올리는 물고문을 시작한 것이다. 무릇 고문을 가하는 데는 목적이 있으련만 이들에게는 그런 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누구를 대라든지 무엇을 했느냐라든지를 묻는 법도 없이 잡힌 자는 무조건 빨갱이요, 그러니 반송장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저주의 목소리뿐이었다.


백씨는 그때 자신이 태워졌던 배를 ‘지옥선’이라고 불렀다.


“밤낮을 달리던 배가 또 다음날 밤을 맞이할 때였어요. 우리는 모두 몸을 뒤척일 수조차 없는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이 배가 어디로 가는지 생각할 기력도 없이 차라리 어서 죽여줬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꼬박 옆방 기관실에서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더군요. 그리고 간간히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려요. 다음날 아침에 알고 보니 빨갱이로 지목된 그 여자들은 부대원들에게 온갖 난행을 당했던 겁니다. 그 수라장 속에 있다보니 이제는 비참하다는 생각마저도 일지 않았어요. 그날 낮에는 신사적으로 보이는 젊은 부대장이 우리 앞에 나타나요. 나중에 알았지만 갑판에 끌어올려져 멀리 육지를 보았는데 그곳이 거제도였더군요. 그 신사풍을 한 젊은 부대장은 얼굴에 웃음을 짓더니 기진맥진한 우리 일행에게 감상을 물어요. 칼에 찔리고 바닷물에 빠지고 몽둥이에 맞아 반죽음이 된 우리더러 그 부대장은 노래를 시켰어요. 고문이 두려워 한 명씩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는데 처음에는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만 나와요. 그러니까는 목청껏 부르지 않으면 죽을 줄 알라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죽지 않으려는 생각으로 악을 써댔지요. 이미 그 대장도 우리도 사람이 아니었던 거요.”


그날 밤 늦게 배는 어느 항구에 도착했다. 장승포였다. 어두운 선창가에 내린 백씨 일행은 그 자리에서 포승줄에 꽉 묶인 채 군용트럭에 실렸다. 트럭이 어디론가 향해 막 떠나려는 순간에 장승포 주둔 호림부대장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백씨 일행을 데리고 온 군인들을 향해 “이 새끼들! 배안에서 적당히 처치해버릴것이지 뭣하러 여기까지 끌고왔나. 가다가 적당한 산에서 다 쏴죽여버려”라며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트럭에 실린 사람들은 ‘이제 영낙없이 죽는거나’ 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모두가 말없이 공포에 떨고 있는데 차는 어느새 출발해 구부러진 산길을 줄곧 달렸다. 트럭이 멈춘 곳은 호림부대 일부가 작전상 주둔하고 있던 산속의 부락이었다.


“우리가 도착하자마다 ㄷ 자 형으로 생긴 객주집에서 군인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빙 둘러쌌어요. 그러더니 우리 일행이 트럭에서 내리는 대로 몽둥이로 마구 내리패면서 한 명씩 번호표를 붙여주고는 마굿간을 막아서 만든 임시감옥으로 처넣더군요. 그 안에는 한 일흔 명은 될까말까한 거제도 주민들이 잡혀와 있었지요. 이때 내가 받은 번호가 36번이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번호는 사형집행순서였어요.”


백운삼씨 일행 30여명이 비좁은 감방 안에 들어갔으니 이제 1백 명 이상이 꽉 들어차 숨도 쉬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이 되었지요. 아침 점호시간에 거제도 토박이인 듯한 젊은 수감자 한 사람이 부대장을 향해서 ‘수용자 중에 생명이 위독한 사람이 있으니 달리 넓은 데로 이 사람을 옮겨 주시오’라고 건의를 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대장은 대번에 ‘이 새끼, 넓은 방이 그립거든 이리 나와. 그리고 위독하다는 놈도’하고 호통을 친 뒤 문을 따 그들을 끌고갔어요. 한참 뒤에 몇 발의 총소리가 울리더군요. 그리고 영영 두사람은 안 들어왔어요.”


하루를 더 보내고 난 다음날 아침 백씨는 의외의 조처를 받게 되었다. 부대장의 명령으로 백씨가 부대 취사부 보조원으로 임명된 것이다. 그 이유는 이승만 대통령의 3남 순시 때 백씨가 경남신문에서 대통령 수행․취재를 해 기사가 보돈된 적이 있는데 어떻게 그걸 입수했는지 부대장이 보기에 그 기사가 빨갱이로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것과 당장 죽이기에는 아까운 머리이니 부대 식사를 준비하면서 사무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늘이 도운 셈이지요. 보통 사람이 생각하기로는 자신을 죽도록 고생시킨 놈들의 뒷바라지를 한다는 것이 역겨운 일이 아닐 수 없겠지만 죽음 앞에서 그게 어디 문제였겠소?


사무서류를 들춰보고 놀란 것은 피의조서라는 서류가 그저 적당히 얼버무려 만든 것이요, 국방부에 보고할 목적으로 작성한 전과라는 것도 총살대상자 전부가 산에서 잡은 빨치산으로 꾸며놓은 것이었어요.”


이윽고 ‘죄수’들에 대한 사형집행이 하루하루 이루어졌다. 기적적으로 당장의 총살은 모면한 백씨는 그때 같이 붙들려온 일행이 죽어가던 과정을 낱낱이 지켜볼 수 있었다고 한다.


“총살은 하루에 20명 단위로 집행했어요. 뒷산에 미리 구덩이를 파놓고 아침 주먹밥을 나눠준 후 아홉 시경에 대상자 명단을 불러 못줄을 가지고 굴비 엮듯이 엮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군인 한 사람이 앞서서 길을 안내하고 그뒤로 총살대상자들이 줄지어 따르지요. 또 그 뒤에는 총을 맨 집행자들과 시체처리를 위해 동원된 부락민들이 줄을 잇습니다. 구덩이 앞에 도착하면 군인이 ‘할 말 없느냐’고 물어본 뒤 일제히 총을 쏘아댑니다.”


백씨가 보기에 당시 학살된 사람들은 거의가 어부나 농부차림의 거제도 주민이었고 자신과 함께 부산등지에서 배에 실려와 섞인 사람도 간혹 있었다고 한다. 발포 직전에 그들은 마지막 할말을 묻는 군인의 질문에 축 늘어진 채 말을 잊고 있거나 이왕 죽는 몸이니 ‘대한민국 만세’나 부르고 죽겠다고 한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한평생 어부로 살아왔다는 어떤 중늙은이는 ‘영명하신 성주님, 살려달라’는 울부짖음으로 ‘최후진술’을 대신한 경우도 있었다.


형식적인 질문 순서가 끝나면 집총한 총살 집행자들의 총구에서는 일제히 불이 뿜어졌고, 처형장은 이내 비명과 아우성, 총소리가 뒤범벅되곤 하였다. 붉은 피를 쏟는 시체는 아직도 꿈틀거린 채 호 속에 던져져가고 그 위에다 동원된 인근 부락주민들이 흙을 덮었다.


“한번은 구덩이 속에서 애타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자기는 아직도 총을 안 맞았으니 그냥 흙을 덮어버리지 말고 죽여준 뒤 묻어달라는 소리였지요. 그때 군인들은 다시 소리나는 쪽에다 대고 총을 쏘아댔어요.”


이렇게 총살이 집행되는 가운데 새로이 많은 거제도 주민들이 붙들려왔다. 유예된 자신의 총살집행에 조마조마한 나날을 보내며 부대 일을 돕고 있던 백씨는 어느날 젊은 여인이 끌려들어온 것을 보았다고 한다. 들리는 말로는 그녀의 남편이 거제도에서 좌익운동을 했던 사람인데 그가 피신해 버리자 아내가 볼모로 붙잡혀왔다는 것이었다. 부대원들에게 끌려온 그 부인은 남편이 있는 곳을 불지 않는다고 추상 같은 고문을 받게 되었다.


“온갖 협박과 고문을 동원해도 입을 열지 않자 군인들은 그녀를 완전히 발가벗겼어요. 그리고는 부대 마당 가에 서 있는 감나무에다 양다리를 각각묶어 거꾸로 매달았지요. 그런 상태로 지금 여기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행패를 부리다가 마지막에는 그녀를 반듯하게 뉘어놓고 물을 쏟아 흐르는 물이 배를 타고 여자의 하복부로 흘러내리게 하며 그들은 만족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그들은 소위 ‘산부인과 고문’이라고 부르더군요.”


백씨가 지켜보는 동안 일부대원들은 부산이나 마산 출장이 잦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정보수집활동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그게 아니라 주민들에게서 총살을 면해주는 대가로 얻은 뇌물로 흠뻑 놀고 오는 위로작전이었다. 섬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보리밥과 고구마가 주식이었던 지독한 춘궁기임에도 불구하고 주둔군에게 모든 것을 털어 뇌물로 바치지 않을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1950년 5월. 백씨가 부산에서 끌려온 뒤로 그 참혹했던 살육의 도가니에서 지낸 지 1개월쯤 됐을까. 그는 어느날 호림부대가 임무를 끝내고 철수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끝내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그때까지 총살당하지 않은 유치인 수십 명은 부대 철수명령이 떨어지자 마지막으로 죽었지요. 그때 죽음을 면하고 살아난 사람은 내가 유일한 경우였습니다. 철수하는 호림부대의 마지막 쓰리쿼터에 태워져 죽음의 늪에서 벗어났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순간 동구 밖에서 마음사람들이 초점없는 눈으로 떠나는 부대 일행을 멍하니 바라보던 일을 내내 잊을 수 없더군요.”


40년 전의 지옥 같은 경험을 증언하는 백씨의 얼굴에는 시종 경련이 멈추질 않았다. 그는 그후로 심한 악몽에 시달리며 오늘까지 살아왔다고 한다.


“해변으로 매일 사체 10~15구가 떠밀려왔다”


6․25가 터지기 두 달 전부터 불과 한 달의 기간 동안 2백여 목숨이 무참히 날아간 거제도에서는 한바탕 괴질이 휩쓸고 지나간 지방처럼 민심이 흉흉해지고 공포와 불안만 남아 있었다. 이때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토벌군의 시달림 속에 재물마저 갖다 바치느라고 완전히 피폐해버렸고, 군대가 철수한 뒤로는 말 한마디 하소연 못한 채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어 겉으로는 어느 정도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개월간의 평온은 ‘폭풍전야의 고요’에 불과한 셈이었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섬에서는 봄에 살육당한 지역주민들의 피내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더욱 참혹한 학살극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가 거제도 주민 80%를 좌익으로 낙인찍었다는 데서도 나타난 듯이 호림․백골 양부대의 토벌기간에 희생되지 않은 대부분의 지역주민들은 이른바 ‘보도연맹’이라는 단체에 강제로 가입되었다.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 정확한 숫자는 파악할 수 없지만 당시 거제지역의 보도연맹 가입자는 유난히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제지역 보도연맹은 창설 당시 조금이라도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치안대 등과 관련이 있었다든지 그 세력을 도와준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해 억지로 가입시키려 했다. 그러나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곧 불이익을 받는다는 소문이 퍼져 어느 누구도 순순히 가입하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상부에서는 지역경찰에 지시해 할당식의 가입을 명했고, 공무원과 경찰은 이때부터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아무 주민이나 억지로 가입시키려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억지 가입조치도 별 효과가 없자 그들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당시 거제도에는 농민, 청년, 부녀, 노조 등 각종 주민자치 조직이 활성화되어서 주민이면 누구든지 한두 단체에 소속해 있었는데, 경찰과 군청에서는 이들 단체에 압력을 넣어 지원을 조건으로 명단을 입수해간 것이다. 당사자들도 이때 들어간 명단 때문에 불어닥칠 비극을 예감하지 못한 채 6․25소식은 거제도에 전해졌다.


새로운 학살은 우선 1950년 7월부터 8월 사이에 이들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거제경찰서 사찰계에서 보도연맹원들은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거제경찰서에서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60톤짜리 어선 한 척을 경비정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승만 정권의 ‘보련학살’ 비밀지령과 함께 경찰서에 가둬놓은 보도연맹원 수백 명을 3~4명씩 철사줄로 묶어 이 배에 태웠다. 이때부터 보련맹원을 실은 경비정은 쉴 새 없이 장승포에서 지심도 앞바다까지 오갔다. 이들을 모조리 수장시킨 것이다. 경비정에 실린 수장대상자들은 거제도 동남쪽 지심도 앞바다에서 돌이 매달린 철사줄에 묶인 채 바다에 처 넣어졌고 허우적거리는 경우는 어김없이 총탄세례까지 받아 고기밥이 되어야 했다.


3년 전 경향신문사 사장을 지낸 후 지금은 쌍룡해운 사장으로 있는 노철용(56)씨도 바로 그 현장에서 부친 노상선씨를 잃고 고향을 등진 경우이다. 노철용씨는 필자로부터 당시의 참상에 대한 증언을 요청받고 “한이 맺히고 기가 막혀 회상하는 것조차 끔찍하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6․25가 터지고 그 해 7월에 일이 벌어졌지요.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는데 선친께서는 갑자기 집에 들이닥친 경찰들에게 끌려가신 뒤 영영 소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뒤 경찰로부터 바다에 수장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와 나는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 울며불며 시신을 찾아 헤맸지요. 지심도가 거제도 동쪽에 위치하므로 거제도 동남쪽 해안은 이 잡듯이 샅샅이 훑고 다녔습니다. 혹시나 조류에 밀려 해안으로 시신이 떠밀려오지 않을까 해서였지요. 그러나 결국 시신은 못 찾고 얘기로 들은 수장날짜를 제삿날로 잡았습니다. 그 뒤 민심이 너무 흉흉해져서 우리 모자는 고향을 등지고 아직껏 찾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씨의 선친 노상선씨는 해방 직후 지역주민들의 추대 속에 건국준비위원회 일운면 인민위원장을 맡았다가 단독정부 수립과 함께 활동을 봉쇄당하고 보도연맹에 억지로 가입됐다고 한다. 당국에서는 그에게 거제도 보도연맹위원장이라는 직함을 들씌워줬고, 탈없이 살게 해준다고 끌여들였다가 그대로 수장시켜버린 것이다.


당시 그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죽음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 있었다. 그는 3년 전 세상을 하직한 이학근씨이다. 이씨는 수십 명의 보도연맹원과 함께 경찰 경비정에 실려 지심도 앞바다에서 물에 처넣어졌다. 그런데 그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배 위에서 경찰들이 쏜 총탄이 어깨를 스치면서 그의 손목에 묶인 철사줄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는 풀어진 손목을 움직여 죽을 힘을 다해 바다속으로 헤엄쳐나갔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살아나온 이학근씨는 파도에 떠밀리다시피해 장승포에 위치한 속칭 ‘까시밭구미’까지 가게 되었다. 기진맥진한 그는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가 캄캄해진 후 옥림리에 있던 자기집으로 돌아갔다. 경찰서 유치장에서부터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시간을 이씨는 살아 생전에 항상 “그런 무서움은 처음이었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다는 것이 옥림리 주민들의 전언이다.


당시의 가공할 양민수장이 무차별하게 자행되었음은 거제군 사등면의 경우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서는 면장이던 박성환씨와 면 사업계장이었던 김대봉씨가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끌려가 수장되었다. 초대 대한민국정권은 지역내의 행정기관 간부들까지 무차별 수장시켜 그 광기의 극치를 보여준 셈이다. 이런 터에 선량하고 건설적인 거제도 민중들이었음에라…….


한편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시기에 지심도 해상으로 끌려가 수장된 사람들의 시신들은 동풍이 불 때마다 바닷가에 떠밀려왔다고 한다. 주로 일운면 교황부락, 학동부락, 미조라 자갈밭과 선창부락 동백고랑 해변에서는 매일같이 사체 10-15구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50년 4월 백골부대의 학살만행으로 남편 강정수씨를 잃고 친정에 돌아와 살아온 학동부락의 진수금씨는 자신이 목격한 광경을 이렇게 말했다.


“수많은 사람을 물에다 쥑있다는 소식이 있고 난 뒤 요 앞바다에도 시체들이 말도 몬하게 많이 밀려왔지예. 고기가 다 뜯어먹었느지 머리와 발이 없는 시체가 많고 밀려왔지예. 다섯 사람씩 철사줄로 묶어놓고는 사람 사이사이에 돌덩이를 달았데예. 고기가 다 뜯어먹었는지 머리와 발이 없는 시체가 많고, 몸통도 살이 다 썩어서 헐렁헐렁했던기지요. 마을 장정들이 그때마다 나가서 묻고 묻고 했어예.”


형체를 식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족들이 알았던들 가족을 확인하지 못할 것은 뻔했다. 더구나 공포분위기로 인해 이 소문은 뒤늦게야 다른 마을에 퍼졌으니 알고 찾아오는 유족조차 없었던 시절이었다.


시신이 떠밀려왔던 바닷가 주민들은 그들의 손으로 거둔 것만도 수백 구쯤 됐었다고 하며 한곳에 합장시켜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숲이 너무나 울창해 어느 곳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어 유족들을 가슴 아프게 하고 있다.


G2와 민보단의 무법천지


1950년 8월 들어 전세가 급격히 밀리자 거제도 일원의 해역은 해군 G2(첩보대)가 주둔해 삼엄한 퉁제 아래 들어갔다. 거제도 전지역에서 한 척의 배도 바다에 뜰 수 없게 된 가운데 각지에서 쏟아져 들어왔던 피난민들로 섬내 사정이 복잡해지자 G2는 지역 치안까지 맡게 된다. 바로 이런 상황과 때를 같이해서 거제도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무시무시한 살육음모가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학살자 지목은 주로 현지에 사는 해군 G2 앞잡이들의 손가락질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고한 양민이 개인감정에 의해 무수하게 사라져가는 양상을 띠었다. 그리고 학살방법 역시 보도연맹원 수장사건과 맞물리면서 총을 사용하는 일 없이 인근 바다에 끌고가 돌을 매달아 처넣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당시 거제군 동부면 가배리에 거주하다 부친 김관수씨와 백부 김영수씨를 바다에 잃고 고향을 등진 김용안(67․현재 충무시 거주)씨는 학살 진상을 이렇게 고발했다.


“6․25가 일어나기 한 달 약간 안됐을 무렵인 1950년 5우러 30일에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지요. 거제도에서는 이채오 후보와 서순영 후보가 대결했는데 이때 선친과 백부님께서는 서순영 후보의 선겨운동을 하셨고, 결국 서순영 후보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채 못 돼 터진 6․25전쟁은 선거에서 패한 이채오 후보 진영으로 하여금 상대 후보의 선거운동을 했던 사람들에게 비열한 보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이채오씨의 동생 이채완씨가 해군 G2의 앞잡이였던 민보단장을 맡으면서 제 선친과 백부님을 G2에 학살대상자로 지목․고발한 것이지요. 그 내막을 모른 두 분은 8월 13일 아침 일찍 장승포에 있는 거제경찰서로부터 출두해달라는 통지를 받고 가셨는데 그 길로 대기중이던 배에 끌려가 지심도 앞 10마일 해상에서 수장되셨습니다. 그 뒤 별 수를 다 써봤지만 시신을 찾지 못해 고향 언덕에 비석만 세워두고 한을 달래왔어요.”


당시 나이 스물일곱이었던 김용안씨는 고향인 거제도 가배리마을에서 수없이 몰려드는 피난인파를 보았다고 한다. 거제경찰서장은 그때 인민군이 쳐들어올 것을 겁내 도망해버린 상태라서 치안은 거제경찰서 사찰주임으로 있던 강화봉이 맡고 있었는데 강화봉주임은 CIC(특무대)대장이던 황창록과 손잡고 그 기회를 통해 평소 마음이 맞던 이채완(선거에서 패한 이채오 후보의 동생), 배삼식, 유기봉 등 지역내 부호들과 함께 거제도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재산을 ‘학살대상자 제외’라는 조건으로 갈취했으며 지역내 미모의 여성들은 그 등쌀에 남아나질 못했다. 이런 와중에 이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군대(G2)에 밀고되어 수장된 지역주민이 수백명, 유족들은 그러한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수장된 혈육의 시신을 찾을 수 있기는커녕 공포에 가위눌린 채 이 사실을 숨기고 살거나 고향을 등지기 다반사였다.


그러나 앞서의 김용안씨는 그런 억울한 사연을 그냥 덮어두지 않고 부산으로 달려가 당시 부산주둔 계엄사령부에 탄원서를 냈다. 계엄당국에서 이를 선 듯 받아들여줄 리 만무했다. 그에 굴하지 않고 사제를 털어 부산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계엄사령부에 찾아다니기를 3개월, 그렇게 해서야 탄원서 내용을 훑어본 부산 계엄사령부에서는 거제도 지역의 양민학살이 그들이 보기에도 너무나 어처구니 없음을 인정했는지 김용안씨 가족의  비극만으로 축소시킨 채 부산 고등군법회의에 사건을 이첩했다.


이렇게 해서 체포된 가해자 황창록(거제 CIC대장), G2첩자 유기봉, 배삼식, 이채완, 강화봉 등은 구속됐고, 1951년 초 이들은 유죄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이들 중 황창록과 배삼식은 어찌된 일인지 감옥 안에서 목을 매 자살했고 나머지 세 사람은 1년도 안돼 줄줄이 특사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거제도에서 저지른 죄악에는 아랑곳없이 오늘날까지도 섬내에서 유지행세를 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김용안씨 가족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학살만행이 공개적으로 드러난 경우는 아직 없었다. 가해자들은 자신의 죄악상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감추고 줄곧 반민중적 지배구조에 기생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굳이 그들이 잘못을 시인한 흔적을 찾는다면 학살 후 문제가 확대될 것을 두려워한 가해 부대장들이 몇몇 유족들을 찾아와 “억울하겠지만 난리통에 일어난 일이니 운명으로 알고 살도록 하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유족들에게는 이 말조차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큰 애가 네 살이고 작은 애를 뱃속에 두었을 때  바깥양반을 잃어 살길이 막막했지예. 한참 후에 군인이라는 사람이 와서 운명으로 알라고 했을때는 살아갈 걱정보다 악이 받쳤어요. 내 그놈 멱살을 잡고 ‘너나 백골부대나 이승만이는 내 적이고 원수대이. 다시는 너희놈들 사는 서울 근처에는 발도 안 딛겠다 이놈아’하고 울부짖었고마요. 그라고 진짜로 볼일 있어도 서울은 안 갔심다.”


한맺힌 세월을 회고하는 일운면 학동부락 진수금씨의 볼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고향을 찾지 않는 사람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안으로는 첩첩 산악으로 이루어진 거제도 곳곳은 당시의 피해와 무관한 데가 없었다. 그러나 통곡은 공포의 포구로 변했던 이 섬의 장승포, 지세포, 옥포, 성포 등은 40년 세월의 침묵에 짓눌린 채 진실의 드러냄을 머뭇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세월의 두께가 너무 커서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때나 지금이나 별 변화가 없는 현실적인 벽의 두께가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거제도 양민학살사건은 우리 현대사에서 동족상잔의 시작이 굳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였다고 못박는 일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크게 보아 거제도도 역시 은폐된 채 같은 세월을 보내온 전국 각지의 비극적 역사 중에 하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 진상이 가려진 점이 그랬고 유족들과 지역주민들에게 안겨진 상처가 오늘날까지 방치되고 있다는 점이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우리 시대의 상처를 그냥 묻어둔 채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민족에게 뿌려진 비극의 씨앗은 반드시 우리 시대에 거두어야 하며 그것은 어쩌면 역사가 오늘을 사는 양심들에게 지워준 책무인지도 모른다. 80년 동안 거제도 토박이로 살아왔다는 사등면 성포리 한 주민의 하소연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이산가족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것 아니다. 그때 일로 민심이 말이 아녀. 고향을 영영 떠나 말 끊는 사람 수태 봤다. 시절만 좋음사 지금이라도 몬 돌릴 일도 없을끼구만 우째 한을 그래 몬 풀어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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