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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학살]

작성자윤호상|작성시간14.12.26|조회수2,426 목록 댓글 1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

독일 vs 아르헨티나  

더러운 전쟁

아르헨티나는 1975년, 석유파동의 여파로 수출이 감소하고 외환위기에 직면했다. 이로 인한 경제파탄과 사회불안은 좌우익 테러와 전국적인 파업, 더 나아가서 군부 쿠데타를 불러왔다. 1976년에 군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여 의회를 해산시키고 페론정권을 붕괴시켰다.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ón, 1895년 10월 8일 ~ 1974년 7월 1일)은 아르헨티나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1943년의 군사 쿠데타에 참여하여 군사정부의 내각에 입각, 노동부장관을 지냈다.1944년 ~ 1946년 부통령, 1946년 ~ 1955년, 1973년 ~ 1974년 대통령을 지냈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은 에비타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에바 페론이다. 후안 페론은 정치적으로 페론주의 운동을 창시했으며, 아르헨티나 현대사에서 가장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Peron tomando un caf

후안 도밍고 페론

 

1883년 페론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남부 로케 페레스의 오두막집에서 태어났다. 마리오 토마스 페론과 후아나 소사 톨레도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이탈리아계 이민자의 후손이었다. 아버지 마리오 토마스 페론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의학도였는데, 결핵 치료를 위해 로케 페레스라는 작은 마을로 요양을 갔다.

 

이 곳에서 마리오 토마스 페론은 떼우엘체족 원주민 소녀 후아나 소사 톨레도를 만나 후안 페론을 낳고 동거생활을 했다. 당시 아르헨티나가 원주민을 적대시 했기 때문에, 마리오 토마스 페론의 본가는 그들의 동거 사실과 후안 페론의 존재를 숨겼다. 페론은 9세에 어머니와 떨어져 살게됐다. 1911년 페론은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초기 경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복무하여 육군 대령에 이르렀다. 1929년 1월 5일 아우렐리아 티손과 결혼했다. 1938년 후안 페론은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독일, 알바니아의 아르헨티나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했다. 이탈리아의 부임지에서 첫 부인 아우렐리아 티손이 결혼생활 9년 만에 자궁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1943년 아르헨티나 군사정부

1943년 아르헨티나에서 1943년 혁명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쿠데타가 발생했다. 아르투로 라우손의 지휘 하에서 일어난 이 쿠데타는 보수 성향의 라몬 카스티요 대통령에 반대했다.

후안 도밍고 페론은 육군 대령으로 군사 쿠테타에 참여했다. 페론은 대령으로서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결국 노동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으로 승진했다.

 

노동부 장관 재임 시절, 아르헨티나 노동조합 내부의 생디칼리즘 세력과 사회주의 운동 세력이 연합하도록 했다. 페론은 노동부 장관을 하면서 노조와 밀접해졌고 급기야는 노조를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에바 두아르테와의 만남

에바 두아르테와 함께

 

1944년, 산후안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6000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당시 후안 페론은 육군 대령 출신으로 군사정부의 노동부 장관이었다. 에바 두아르테와 후안 페론은 산후안 지진참사의 이재민 구호를 위한 기금 모금회에서 처음 만났다. 페론은 그해 에델미로 파레이 정권에서 부통령에 선임된다.

 

첫 번째 부인을 잃고 독신으로 살던 후안 페론은 에바 두아르테의 젊음과 미모에 빠져들었고, 곧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다. 기금 마련으로 하층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후안 페론은 부통령을 역임하면서 군부와 대중의 지지를 동시에 확보하고 후안 페론과 에바 두아르테는 1945년 정식으로 결혼했으며, 그 다음해 대통령 선거를 준비했다. 그러나 후안 페론의 정치적 역량이 확장되고 있는 것에 위협을 느낀 다른 군부 세력들은 후안 페론을 경계한다.

 

페론의 야심과 대중 선동 능력에 경계심을 느끼고, 페론에 대한 미국 대사의 적대감에 영향을 받은 데다가, 하층 계급에 속하는 에바와의 공공연한 관계 등을 불편하게 여긴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부전복 혐의를 적용해서 페론의 지위를 빼앗고 체포해버렸다.[5] 페론 석방운동은 1945년 9월 17일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된다. 1945년 10월 17일 페론은 석방됐다.

첫 번째 대통령 집권

1946년, 페론은 오르텐시오 키하노를 부통령으로 지명하고 아르헨티나 대선에 출마했다. 페론은 라 보카 등 노동자 밀집거주지역의 대규모 지지에 힘입어 54%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조만이 아니라 산업가 세력도 페론을 지지했다. 이들은 페론이 전통적 지배세력인 농업 세력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할 것을 희망했다. 그는 집권 시기 동안 사회정의와 자립경제를 동시에 추구했다. 이 두가지 목표를 내세우면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냉전 참여를 거부했다.

 

노동자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업고 대통령직에 오른 그는 구 파시즘 정권보다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이 강했고, 구 지배층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페론은 CGT라는 거대하고 조직된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1947년 7월 모든 외채를 갚았다. 산업화와 사회자본의 국유화 정책을 통해 자립경제를 추진했다. 집권하는 동안 사회보장제도를 확충했다. 특히 병원 4000여개, 학교 8000여개를 설립했다.

퇴진과 망명

1952년 에바 페론을 부통령으로 지명하고 대선에 출마해 대통령 연임에 성공했다. 1952년 부인 에바의 사후에 급격히 단행하였던 모든 개혁의 파탄이 차차 표면화되고, 이는 야당 인사들과 언론에 의해 집중공세를 받았다. 그는 가톨릭 교회와 군부와 반목했는데, 1955년 가톨릭 교회 억압을 계기로 하여 가톨릭교도와 군부의 지지를 잃게 되어 1955년 9월에 군부 쿠데타가 발생해 정권을 잃고 망명했다.

 

1956년파나마로 망명한 후안 페론은 이 곳에서 이사벨 마르티네스를 만났다. 후안 페론은 이사벨의 젊음과 미모에 빠져들었고, 이사벨을 자신의 개인 비서로 채용했다. 1960년 후안 페론은 망명지를 스페인으로 바꿨는데, 이사벨은 그와 함께 스페인으로 건너갔다. 이듬해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는 망명 기간 여러 전투적인 좌익 조직을 지원했고 극좌페론주의 조직인 몬토네로스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반공주의 성향을 띠고 있는 극우 및 보수 세력도 지원했다. 특히 경찰 간부와 군 장교로 구성된 반페론주의 조직의 실질적 책임자였던 로페스 레가는 충성스러운 페론당원의 가면을 쓰고 페론 부부의 신임을 얻게됐다.

두 번째 대통령 집권과 사망

1973년 3월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페론의 개인비서 출신이자, 페론주의 좌익 분파에 속하는 엑토르 캄포라가 승리했다. 후안 페론은 이사벨 페론과 자신의 개인비서인 호세 로페스 레가를 아르헨티나로 보내면서 사회복지부 장관으로 지명했다.

 

같은 해 6월 호세 로페스 레가에세이사 학살을 일으켜 좌우익간의 갈등을 부추겼다. 1973년 7월 13일 엑토르 캄포라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사임하고, 라울 라스티리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라울 라스티리가 임시 대통령을 맡는 동안 호세 로페스 레가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을 설립해 국가 주도로 좌익 세력을 탄압했으며, 이로 인해 페론이 재집권할 때즈음 좌우익간 갈등과 정치폭력으로 사회가 매우 혼란해졌다.

 

같은 해 10월 12일에 라울 라스티리 마저 사임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직위는 공석이 되었다. 후안 페론은 아내 이사벨 데 페론을 부통령으로 지명하고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대선 결과 후안 페론이 대통령, 이사벨 페론이 부통령으로 당선됐고, 1973년 10월 12일 취임했다. 후안 페론은 취임 직후, 페론주의 좌익 세력을 "국가변란", "폭동"을 기도하는 세력이라고 지칭하면서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좌익 페론주의자와 후안 페론의 갈등은 페론주의 청년단(Juventud Peronista)에 속한 의원 8명이 사임하는 사태로 나타났다.

 

고령의 후안은 건강이 악화되어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이사벨이 대통령직을 대행해야 했으며, 결국 후안 페론은 1974년에 사망하고 이사벨 페론이 부통령의 자격으로 대통령의 직위를 승계했다.

페론의 손목절단 사건

1987년 6월 10일 누군가 페론 가족의 묘에서 페론의 시신의 손목을 절단하고 달아났다. 이 사건의 범인과 동기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를 두고 다양한 가설이 있으며, 민주화에 불만을 품은 장교들이 당시 라울 알폰신 대통령을 위협하기 위해 저질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대한민국의 언론은 일명 '포퓰리즘'으로 대표되는 '페론주의'가 아르헨티나 경제를 망쳤다고 평가를 한다. '페론주의'에 따라 이루어진 매년 20%에 달하는 높은 임금 인상과 과도한 사회보장정책이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파탄시켰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경제의 파탄의 실질적 책임은 후안 페론에 있지 않고,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로 집권한 아르헨티나 군사정부와 군사정부가 도입한 신자유주의에 있다는 주장도 있다. 아르헨티나 군사정부는 무분별하게 외자 유치를 했고, 자신들의 집권에 협력한 다국적기업을 불러들였다. 어느 정도 실속을 챙긴 해외자본과 기업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리자 천문학적인 외채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파탄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페론 집권 시기의 산업화와 경제 업적을 재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1949년부터 1976년까지 아르헨티나의 국민총생산은 127%의 성장을 기록했고, 개인소득은 232%가 증가했다. 페론은 가장 많은 산업투자를 단행했고, 아르헨티나가 농업국가에서 공업화로 가는 데 이바지 했다.

 

페론 집권 기간동안 아르헨티나 국민 가운데 60%를 차지했던 극빈층이 전체 국가소득의 33%를 분배 받았다. 아르헨티나 역사상 처음 있는 부의 재분배 현상이었는데, 이는 60%에 가까운 두터운 중산층을 형성했다.

1943년 쿠데타에 참여하여 입각한 점과 재임기간 언론탄압을 행한 점은 비판받고 있다.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 페론(스페인어: María Eva Duarte de Perón, 1919년 5월 7일 ~ 1952년 7월 26일)는 아르헨티나대통령 후안 페론의 두 번째 부인이다. 애칭인 에비타(Evita)로 불린다.

 

에바 페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작은 마을 로스톨도스의 농장에서 부유한 농장주인 후안 두아르테와 그의 정부인 후아나 이바르구엔 사이에서 태어났다.아버지 후안 두아르테는 정식 부인이 따로 있었고, 후아나와의 사이에서 난 에바 및 다른 딸들을 법적으로 딸로 인정하지 않았다. 생부에게서 버림받은 에바는 모친 및 다른 자매들과 함께 곧 후닌으로 옮겨 그 곳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며 지냈다.

 

그들은 후닌에서 한동안 방 한칸짜리 아파트에서 매우 가난하게 살았으나, 생모의 가족의 도움으로 더 큰 집으로 옮길 수 있었다. 에바는 학창 시절, 학교 연극과 연주회에서 재능을 발휘하며 주목을 받으며, 영화배우가 될 꿈을 키웠다. 에바는 15살인 1935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옮겨 연예계 진출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모델로 활동하다가, 연극배우, 영화배우, 라디오 성우 등으로 차츰 이름을 알려 1940년 경부터 유명 연예인이 되었고, 라디오 방송국을 소유하는 등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후안 페론과의 만남

후안 페론과 함께

 

1944년, 산후안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6천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육군 대령 출신으로 당시 정부의 노동부 장관이던 후안 페론은 이재민 구호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려고 했으며, 이때 에바 두아르테와 후안 페론은 처음 만났다. 첫 번째 부인을 잃고 독신으로 살던 후안 페론은 에바 두아르테의 젊음과 미모에 빠져들었으며, 두 사람은 곧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기금 마련으로 하층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후안 페론은 곧 부통령 자리에 오르며 군부와 대중의 지지를 동시에 확보했다. 후안 페론과 에바 두아르테는 1945년 정식으로 결혼했으며, 그 다음해 대통령 선거를 준비했다.

자선 사업과 여성 운동

에바 페론 재단에서의 활동
연설하는 에바 페론

 

에바는 남편의 선거 유세 자리에 동행하며 대중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불린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후안 페론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 1946년 6월 정식으로 취임했다.

 

에바는 정부 내에서 공식적인 직책에 오른 적은 없으나, 노동자 및 하층민들에게 후한 정책을 펼칠 수 있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며 사실상의 보건부 장관 자리에 있었다. 1947년에는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하였으며, 대통령인 남편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스페인에서는 가난한 아동들에게 구호 활동을 펼쳤고, 프랑스에서는 샤를 드 골을 만나 식량 지원을 약속했다.

 

한편 정의당의 분파인 여성 페론당을 결성하여 그 대표로 있었으며, 이를 통하여 여성 참정권 도입 등의 여성 운동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노동단체, 기업 등의 헌금으로 운영되는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그 대표를 겸했다. 에바 페론 재단의 기금은 학교, 병원, 양로원 등을 건립하고 각종 자선사업을 하는 데 쓰여지며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상류층 및 군부와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사망

차츰 그의 개혁에 대한 모순이 드러나는 가운데, 그는 1950년, 자궁암 진단을 받았다. 건강이 차츰 악화되어 가는 가운데, 1951년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군부는 부통령 지명을 철회하도록 강요하여, 10월 부통령 후보 자리에서 물러났다. 11월 대선에서 남편은 재선에 성공했으나, 에바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그 다음해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되기 전에 남편은 그를 '영적 지도자'의 자리에 올렸다. 그러면서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위해 자신의 병마를 이를 악물고 숨겨왔다. 그러나 그의 암은 상태가 더욱 악화돼, 1952년 7월 26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사망 이후

에바 페론의 장례식

 

국민의 애도 속에 국장이 치러졌고, 이후로도 국민들은 그를 외경스러운 존재로 기억했다. 아르헨티나는 그에 대한 평가로 이후 큰 혼란을 겪게 되며 노동자와 민중에서는 그를 성녀로 추대하려는 시도를 한 반면, 그의 정적들은 국민들에게서 그의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노력했다. 이런 가운데 개혁의 모순으로 인하여 남편은 정치적 궁지에 몰렸으며, 결국 1955년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새 정부에서 먼저 한 일은 페론주의의 상징인 그를 아르헨티나 정계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방부 처리되어 있던 그의 시신을 은닉하여 이탈리아로 빼돌렸다. 1971년 시신은 스페인에 망명중이던 후안 페론측에 인도되었고, 1975년 후안 페론의 다음 부인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이 된 후 아르헨티나로 송환하여 대통령궁에 안치하였다.

 

그러나 다시 쿠데타가 일어난 후 군사정권은 유해를 제거했으며, 유해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레콜레타 구역의 공동묘지의 두아르테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에바 페론의 묘
 
후안 페론이 에바에게 권력을 향한 길을 열어주었다면, 에바는 노동자와 빈민들을 본능적으로 이해하여 후안 페론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페론 부부는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권력을 지닌 부부였지만, 그들의 부부 관계가 원만했던 것은 아니며, 그들이 남긴 발자취로 가장 논쟁의 여지가 많은 커플로 기억된다. 에바 페론에 대해서는 찬성과 반대 의견이 크게 공존하고 있으며, 세상을 떠난지 5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추모 열기는 계속되고 있다. 약자를 위한 복지 정책을 내놓아 대중의 칭송을 받았으나, 아르헨티나 경제를 망친 장본인이며, 후안 페론의 독재를 위한 방패막이었다는 비판도 많다.

 

 

아르헨티나 국민은 이 군부 쿠데타가 지난 20년간 혼란에 빠져 있던 아르헨티나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아르헨티나 국민과 대다수 정당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은 군사정권은, 국민의 생존권을 위협했던 페론시대의 경제적 혼란과 정치적 폭력을 종식시키고 만성적인 정치적 위기와 '아르헨티나 병'이라고까지 불린 만성적인 경제침체를 종식시킬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장군은, 고문이나 살인과 같은 행위들을 '공산주의, 체 게바라주의, 비()기독교적 생활양식으로부터 아르헨티나를 보호하기 위한 필수 조치'로 정당화했다. 또한 군대, 경찰, 정보기관, 아르헨티나 반공동맹과 같은 준()군사조직들이 좌익 게릴라를 소탕하는 데 앞장섰고, 페론파를 비롯한 반정부단체에 대해서는 폭력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소위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이라 불리는 비델라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3,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재판 없이 사형에 처해졌고, 수만 명의 시민이 실종되거나 국가보안군에 의해 비밀리에 살해되었다.

이 '더러운 전쟁'으로 말미암아 군부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바뀌었다. 아르헨티나의 중산층들은 군사정권을 사회적 혼란에 대처할 수 있는 집단으로 생각했지만, 그들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전제적이고 강압적인 행위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 군사정권은 이러한 국민의 거부감이 엄존함에도 불구하고, 경제회복을 위해 국영기업의 축소 및 민영화, 긴축 재정, 자율적인 가격제도 등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해외 금융자본이 엄청나게 유입되었고, 제조업 부문의 수출이 감소되어 무역수지가 악화되었다. 1978년에는 월드컵 대회를 개최하면서 새로운 스타디움 건설과 도시개발사업으로 경제를 활성화하려 했지만, 1980년이 되면서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섰고 외채도 급증했다.

 

'실종자들을 산 채로 돌려달라!'. 1981년 군부독재에 의해서 실종된 사람들의 가족들이 대책을 요구하며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괴이하고 불필요한 전쟁 - 포클랜드 전쟁

군사정권의 강압정치와 '더러운 전쟁'으로 이어지는 인권탄압, 그리고 악화되는 경제상황 속에서 1980년에 비델라에 이어 비올라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경제상황의 악화와 정권내부의 분열로 인해서 1981년 12월, 비올라는 그의 정적이었던 레오폴도 갈티에리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었다. 하지만 레오폴도 갈티에리 역시 집권 후 군부의 분열을 극복하지 못했다.

 

경제상황에 있어서도 450억 달러의 외채, 1000%에 달하는 인플레이션, 15%의 실업률이라는 총체적인 경제난국을 해결하지 못해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레오폴도 갈티에리 정권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국민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려 했다. 이것이 바로 아르헨티나의 오랜 숙원이던 '영국령 포클랜드(Falkland, 아르헨티나인은 말비나스(Malvinas)라고 부른다)의 탈환'이었다.

포클랜드는 아르헨티나 남쪽 끝에서 동쪽으로 약 400킬로미터, 영국에서 1만 4,000킬로미터 떨어진 섬이다. 지리적으로 아르헨티나에서 비행기로 1시간이 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반면에, 영국으로부터는 무려 2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야 갈 수 있는 섬이다. 이 섬은 1600년 네덜란드인 세발드가 발견한 후 프랑스군이 점령했다. 그러나 1765년 영국이 원정대를 파견하여 국왕 조지 3세의 소유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프랑스는 영유권을 스페인에 양도했다. 스페인은 1770년, 이 섬에 사는 영국인을 축출했다.

 

그 후 영국과 스페인은 이 섬을 서로 자신의 소유라며 주장해왔다. 1828년 아르헨티나는 말비나스 섬에 정착촌을 건설하여 자신의 영토권을 주장하는 법적 근거로 삼았고, 1833년에 아르헨티나군이 말비나스를 점령하자 영국 원정군이 아르헨티나군을 축출하여 영국이 현재까지 점령해왔다. 비록 아르헨티나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유권 문제를 제기하여 영국과 협상을 계속했지만, 섬에 거주하는 영국인의 반대로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2년 4월 2일에 아르헨티나 군부는 말비나스 섬을 기습 공격해 소수의 영국 왕실 경비대원들을 쉽게 물리쳤다. 이 공격은 영국인을 경악시켰고 아르헨티나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이에 대해서 당시 경제문제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영국의 대처정부는, 석유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영역을 확보하고 국토를 방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국민에게 보여주고자 아르헨티나에 대한 공격에 단호한 의지를 보이면서 반격에 나섰다. 이 전쟁은 영국군도 250여 명이 전사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지만, 2,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아르헨티나가 영국에 항복하면서 개전 75일 만에 끝났다.

이 포클랜드 전쟁으로 인해서 아르헨티나는 약 20억 달러의 전비 지출과 이로 인한 경제악화는 물론 외채문제가 더욱 심각해졌고, 국민의 원성은 높아만 갔다. 정치적으로도 군부 내의 분열은 갈수록 더 커졌다.

알폰신 대통령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은 말비나스 전쟁의 패배로 불명예 퇴진하고, 레이날도 비그노네 장군이 그의 뒤를 이었다. 그리고 1983년 선거에서 급진시민연맹(UCR)의 알폰신이 세력이 약해진 페론당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군사정권으로부터 460억 달러의 외채와 600%의 인플레이션 등을 이어받은 알폰신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아우스트랄(Austral)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민간부문의 가격, 임금, 공공요금률, 환율의 동결, 강제저축을 통한 세수의 증대, 새로운 화폐 아우스트랄 도입 등을 골자로 하는 경제정책이었다. 하지만 초기에 약간의 효과만 있었을 뿐 이익집단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이에 알폰신 대통령은 기업과 노동자들 모두에게 뼈를 깎는 희생을 요구했으나 노조는 총파업으로 대응했다. 알폰신 집권 내내 노조는 정부와 대결하기 위해 자본가 단체들과 손잡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이기도 했다. 이는 노조와 기업이 경제구조의 개혁과정에서 고통은 분담하지 않으면서 개혁에 무임승차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갖고 시작 알폰신 정부는 결국 1987년 선거에서 야당인 페론당에 패했다. 1988년에 아르헨티나의 외채는 600억 달러에 달했고, 1989년에는 인플레이션이 5,000%에 육박할 정도였다.

이러한 경제정책의 실패와는 반대로 알폰신 대통령은 대통령 직속으로 작가 에르네스토 사바토를 위원장으로 한 '실종자 진상조사 국가위원회(CONADEP)1)'를 설치하여, 실종자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을 실시하게 했다. '실종자 진상조사 국가위원회'는 아르헨티나 주요 지방도시에 지부를 두어 진상조사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멕시코시티, 카라카스, 뉴욕, 파리, 마드리드 등지에서도 증언을 채록했다. 이 위원회는 증언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비밀수용소가 있다고 알려진 경찰서나 군사시설들을 조사했고, 비밀 공동묘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법적 청산작업은 엄청난 음모를 자행한 자들로부터 수많은 협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5만여 쪽에 달하는 최종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했고, 《눈카 마스(Nunca Más, 더 이상은 안 돼)》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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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문철 작성시간 14.12.26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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