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유족 자료실

아르헨티나의 과거사 청산

작성자윤호상|작성시간14.12.26|조회수75 목록 댓글 2

아르헨티나의 《눈카 마스》

과거사 청산

 

《눈카 마스》

알폰신 대통령이 설치한 '실종자 진상조사 국가위원회'가 1984년 9월에 펴낸 보고서 《눈카 마스》에는, 16세부터 65세가량의 실종자 8,960명의 명단과 비밀 수용소 약 340곳의 위치 및 특성이 수록되었고, 불법적인 탄압에 가담한 군인의 수는 1만 5,000명 이상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이 보고서에는 누가 어떤 방식으로 납치되었는지, 수감자들에게 어떻게 고문이 자행되었는지, 육·해·공군과 경찰관할의 비밀 수용소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눈카 마스》가 확인한 실종자 9,000여 명 가운데 86%가 35세 이하의 청년층이었고, 30%가량이 여성이었으며 그 중 10%가 임신 중이었다. 실종자 가운데는 노조활동가들뿐만 아니라 변호사, 지역상공회의소 의장, 지방 판사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는 군부 통치자들이, 사회혁명을 원했던 불순분자, 단순히 임금인상을 요구한 노조 지도자, 신부, 목사, 가톨릭 신자는 물론, 평화주의자와 인권단체 활동가들까지도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나 '기독교와 서구 문명의 적'으로 규정하여 모두 없애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

《눈카 마스》는 또한 게릴라 조직과 관련이 없는 임산부와 아이들까지 고문당했다는 사실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수감된 임산부가 출산한 영아나 납치된 부부의 어린아이들을 강제로 입양시키는 엽기적인 범죄의 유형도 밝혀냈다. 이러한 강제입양은 "나쁜 환경으로 인해서 불순한 저항자가 생겼다"라는 잘못된 확신을 가진 군사정권이 '좌익사범'을 양성하는 불온한 가정환경으로부터 영, 유아들을 분리시키고자 한 만행이었다.

이처럼 《눈카 마스》는 군부독재의 무차별적인 납치와 수감, 고문과 살인 등의 실상을 낱낱이 폭로하면서 당시에 국가 폭력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가해자 처벌과 '카라 핀타다'의 반란

그러나 《눈카 마스》에서 밝힌 가해자들의 만행에 대한 처벌과 판결은 '실종자 진상조사 국가위원회'의 권한 밖이었다. 이 위원회는 단지 그들이 자행한 탄압의 유형이 어떠했고 피해자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만 조사하고 후속 재판의 필요성을 권고하는 기관일 뿐이었다.

1985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연방항소 법원은, 비델라 장군을 비롯한 9명의 군사통치위원회 지도부에게 종신형부터 징역 3년 9개월까지 중형을 선고했다. 이에 대법원은 1986년 12월 이 결정을 최종 승인했다. 이에 따라 2,000 명가량의 중, 하급 장교들은 자신들에 대한 처벌을 걱정해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특히 향후 60일 이내에 모든 기소절차를 마무리해야 하는 일종의 제한규정이었던 '기소종결법(Punto final)'이 1986년에 통과된 후, 300여 명에 이르는 장교들이 기소되었다. 그러나 이 법은 수많은 사건들을 처리하기에는 기간이 매우 짧아서, 상당수의 납치와 학살의 책임자들은 이 법으로 인해서 오히려 처벌받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고문과 억압행위를 자행한 명령계통의 말단에 있었던 장교들에게 인권유린의 책임이 전가되는 분위기가 감돌자, 일부 장교는 크게 반발했다. 이들의 반발은 특전부대인 카라 핀타다(Cara Pintada)의 반란으로 표면화됐다. 이들의 반란으로 1987년 의회에서 '강제명령에 따른 복종법(Obediencia debida)'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 '더러운 전쟁'을 수행한 중, 하급 장교의 대다수가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군부의 위협 앞에서 원칙을 못 세우고 크게 흔들린 알폰신 정부는, 임기를 6개월 앞두고 조기 퇴진했다.

내 자녀들은 어디에 있는가? - 오월광장 어머니회

군부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1977년 4월 30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월광장에 14명의 어머니가 비델라 대통령에게 아이들의 행방을 묻는 서신을 전달하고자 모였다. 경찰들의 해산 요구에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경찰서, 내무부, 사법부 등 관계되는 모든 기관의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이들은 '오월광장의 미치광이들'이라고 조롱받기도 했고, 이들의 행동은 '반()애국적 캠페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조롱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머리에 흰 손수건을 두르고 목에는 실종자 아이들의 사진을 담은 패를 걸어, 침묵하는 권력에 저항하려 했다. 이렇게 실종자의 어머니들은 대다수의 무관심 속에 '오월광장 어머니회(AMPM)'를 결성해 매주 목요일 오후 3시 30분에 오월광장에 모였다.

그 후 말비나스 전쟁의 패배로 군사정권이 퇴진하고 1983년 12월에 알폰신 정부가 들어서자, '오월광장 어머니회'는 민주화의 상징으로 우뚝 솟았다. 이들은 1986년 군사정권의 인권탄압에 책임 있는 상당수의 지휘관에게 책임을 면해주는 '기소종결법'과 '강제명령에 따른 복종법' 폐지를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또한 '오월광장 어머니회'는 알폰신 정권과 메넴 정권의 정치적 타협을 수용하지 않고, 실종자 문제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죽음의 비행

'죽음의 비행'의 증언자 아돌포 실링고. 2005년 3월, 스페인 검찰은 아르헨티나 전직 해군 대위 실링고에게 군부독재 시절 저지른 반인륜 범죄혐의로 9,138년의 형량을 구형했고, 그 해 4월 스페인 법원은 640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아르헨티나 민주화의 상징 알폰신 대통령 사망

 

알폰신 대통령에 이어 등장한 메넴 대통령은 화합을 언급하며 기소 중이거나 복역 중인 군인을 특사로 풀어주었다. 메넴은 어두운 과거는 덮어두자며 국민에게 망각을 호소했다. 그는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선진국에 진입하겠다는 황당한 슬로건으로 국민을 호도하는 한편, 1991년 비델라 장군까지 특사로 풀어주었다. 또한 비밀 구금, 고문과 살인으로 4,000명이 희생된 해군기술학교를 추모와 국민화합 기념공원으로 개조하려 했다.

 

이에 '오월광장 어머니회'를 비롯한 많은 인권단체가 강하게 항의했다. 이들은 이곳을 군부의 만행을 고발하는 일종의 박물관으로 보존할 것을 주장해 결국 정부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대신에 라플라타 강둑을 기념공원 및 조형물 예정지로 선정했는데, 이곳은 '죽음의 비행'이라고 알려진 사체 유기의 현장이었다. 1995년 한 전직 해군 대위는, 해군기술학교 수용소에 근무하면서 살해되거나 의식을 잃은 수감자를 한 번에 15~20명씩 비행기에 태워 바다에 던지는 끔찍한 임무를 맡았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이런 식으로 그가 처리한 사람의 수는 1,75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렇게 '오월광장 어머니회'의 끊임없는 문제 제기와 항의, 반발이 여러 가지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알폰신과 메넴 정권하에서 진상규명과 처벌에 대한 관심과 의지는 점점 약해졌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새로운 입법 활동이 뒤따르면서 '더러운 전쟁'에 대한 청산논의는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2003년 아르헨티나 의회는 알폰신과 메넴 정부의 사면법 폐기를 결의해 또다시 사법적 판결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윤호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12.26 아르헨티나의 알폰신 대통령은 군부독재시절에 저질러진 만행을 규명한 진정한 아르헨티나의 민주화의 실천적 영웅입니다.
  • 작성자문철 작성시간 14.12.26 정보 감사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