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유족 자료실

산청군 시천면외공리 학살사건

작성자사무처|작성시간14.11.30|조회수68 목록 댓글 0

 산청군 시천면외공리 학살사건

 

외공리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里)이다. 1951년 2~3월 무렵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곳이다. 2008년 268구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군인들이 10대 이상의 버스에 태우고 온 민간인을 외공리 소정골에서 집단학살해 매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건이다.1천 명 가까운 인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나 유골은 있되 유족은 나타나지 않는 기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 땅에 전쟁이 남기고 간 깊은 상처들

 

하지만 전쟁을 이데올로기적인 시각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한 참상들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진주 외공리에서 600여구의 유골이 머리에 총탄자국이 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유골의 의복에 달린 명찰로 경기도의 모 상고 학생도 포함된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대부분은 부녀자였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누가 이들을 정확히 언제 죽였고, 이들이 왜 죽었는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한국전쟁의 미해결 사건들이 많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초기 남한 정부에서는 평택 이남의 형무소에 있는 사상범을 모두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1500명이 처형되고 도합 3천여명이 처형된 사건이 보도연맹 사건입니다. 또한 전쟁 중에 많은 피난민들이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한편 전쟁 초기 북측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잔류파 국회의원 중 54인의 국회의원이 전향했다고 합니다. 잔류파 국회의원들 중 김규식, 조소암과 같은 민족주의자는 자의로 남고 나머지는 한강다리가 폭파되어 못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인민군의 공작도 있었지만 전향한 사람들은 공산당 지지성명을 했습니다.

 

반면에 일반 민중들은 살기위해 부역을 했습니다. 이들은 훗날 북진할 때 공산당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처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역 혐의로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들이 오늘날 많이 밝혀졌는데, 고양시 금정굴에서는 1천여명의 민간인이 부역혐의로 굴 안에서 처형되었고 그 유골이 발굴되었습니다.

 

3434.jpg

 

학생·여성·어린이 등 순수 민간인…서울·경기지역민 추정

유해발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민간인 유해발굴과 관련해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집단 희생지역인 경남 산청군 외공리에서유해 260여 구가 발굴됐다.

발굴을 담당한 경남대학교 박물관 이상길 교수는 최종 보고회를 열고 산청군 외공리 집단매장지 6곳에서 모두 268구의 유해와 유품 등을 발굴했다고 21일 밝혔다.

또 유해와 함께 발굴된 탄피와 탄두는 권총탄피 3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카빈소총용 실탄으로 밝혀졌으며 처형과 같은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상길 교수는 "외공리에서 학살된 민간인은 단추나 신발 등의 유품으로 볼때 죄수 신분이 아닌 순수 민간인이었으며, 교복이나 제복을 입은 사람이 다수였고 여성과 어린아이도 포함됐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

특히, 유품으로 발굴된 단추에 한자로 인상(仁商), 인중(仁中), 경농(京農), 해관(海關) 등이 적혀 있어 학살된 민간인들이 서울이나 경기지역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BestNocut_R]이 교수는 외공리 학살사건이 발생한 시기가 1951년 초라는 점 등을 감안할 때 한국전쟁 발발 무렵에 있었던 보도연맹원 학살사건과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유해발굴을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번 발굴결과를 토대로 신원확인 작업에 나서기로 했으며, 진실규명 결정이 나면 위령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한편, 산청군 외공리 학살사건은 1951년 2, 3월 무렵 군인들이 10대 이상의 버스에 태우고 온 민간인을 산청군 외공리 소정골에서 집단학살해 매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건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