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쉬어 가는 곳

국토학교 갑진년 2월 답사기 (2)

작성자무심거사|작성시간24.03.08|조회수110 목록 댓글 0

국토학교 갑진년 2월 답사기 (2)

 

삼봉의 가장 개혁적인 정책은 토지 정책인 계민수전(計民授田)이다. 계민수전은 국가가 전국의 모든 토지를 회수하여 공전(公田)으로 만든 다음, 백성의 수대로 땅을 무상으로 분배하여 경작케 하고 국가는 일정한 세금을 걷는 제도이다. 이러한 급진적인 토지 정책은 당시 사대부와 권세가들, 요즘 말로 하면 기득권 세력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삼봉기념관에서 역사 속의 삼봉을 만난 후 11시 10분에 우리는 버스를 타고 남양읍으로 이동하였다. 11시 50분에 두원손두부 식당에 도착하여 점심 식사를 하였다.

 

마침 나와 같은 식탁에 앉은 분이 김영숙씨였다. 이 분은 어느 날 수원촛불집회에 참석하였다가 병산이 “왜 조선일보를 폐간 시켜야하는가”를 역설하는 사자후 10분 연설을 듣고서 공감한 후 국토학교 회원이 되었다. 이 분은 병산이 주도하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 반대 운동에도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식사 후에 우리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12시 50분에 남양 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4호)에 도착하였다. 조선 시대 향교는 지방의 교육을 담당했던 관학 교육기관이자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제례와 분향을 지내는 곳이다.

 

내가 병산에게 “우리가 남양 향교에 왜 왔느냐”고 물었다. 병산은 이렇게 대답했다. “삼봉은 46세 때에 자원하여 남양부사로 부임하였다. 신임 부사로 부임하면 향교에 와서 절을 하였을 것이다. 삼봉이 밟은 땅을 우리가 지금 밟고 있다.” 그러면서 병산은 우리에게 삼봉의 개혁 기운을 받기 위하여 묵념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림6> 남양 향교에서

 

이어서 병산은 “왜 삼봉이 남양부사를 자청하였을까”를 생각해 보았다고 한다. 병산은 남양반도의 지리적 특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배를 띄우면 서풍을 타고 항해하여 남양반도에 도착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남양반도는 중국의 정보를 가장 빨리 얻을 수 있는 통로라는 것이다. 듣고 보니 수긍이 가는 해석이었다.

 

오후 1시 20분에 우리는 화성 당성(唐城: 국가 사적 제217호)에 도착하였다. 당성(唐城)은 구봉산 정상을 감싸고 있는 산성으로서 삼국시대의 군사요충지이다. 이 지역은 처음에는 백제에 속하였다. 한때 고구려가 차지하면서 당성군이라는 지명을 얻었다. 이후 신라 진흥왕이 이 지역을 점령한 후 당과 직접적인 교류를 하면서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그림7> 신라 전성기의 삼국 영토 지도

 

우리는 문화해설사와 함께 당성을 걸어서 답사하였다. 현지인인 문화해설사는 자기 집안 이야기와 역사이야기를 뒤섞으며 재미있게 해설을 하였다. 은행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 산길을 따라 조금 오르니 언덕이 나타났다. 언덕에서 남동쪽을 내려다보니 능선 사이로 고갯길이 보인다. 그 고갯길이 원효(617~686)와 의상(625~702)이 당나라로 공부하러 가기 위해 걸어왔던 길이란다. 고갯길 근처 어딘가에 두 사람이 하룻밤 잠을 잤던 토굴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원효 대사의 그 유명한 해골 바가지 감로수 이야기의 현장이 이곳이라는 해설이다.

 

<그림8> 화성 당성

 

서기 661년, 원효는 45세의 나이에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불교를 공부하러 유학을 떠났다. 당항성으로 가는 중 비오는 밤에 어느 토굴에서 자게 되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바가지에 담긴 물을 달게 마셨는데, 이튿날 아침에 깨어 보니 토굴이 아니라 오래된 무덤이었다. 마신 물이 해골 바가지 물이었음을 알고 나서 토하다가 원효는 깨달음을 얻었다.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 원효는 유학 가기를 포기했다. 원효의 깨달음을 한마디로 제법일체유심조(諸法一切有心造)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더 쉽게 표현하면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원효는 서라벌로 되돌아와 불교 관련 저술과 대중 교화에 힘썼다.

 

<그림9> 경주 분황사 원효대사 영정

 

삼봉이 남양부사 하던 시절에는 남양이 바다로 튀어나온 반도였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먼 바다에서 배가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어서, 당성은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가 당성 제일 높은 곳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오른편과 왼편에 넓은 들이 보이고 군데 군데 건물도 보인다. 원래 양쪽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이었는데, 근래에 방조제를 막아서 간척지가 된 것이다.

 

<그림10> 당성에서 가장 높은 곳

 

오후 2시 30분에 당성을 출발하여 3시 10분에 융건릉(국가사적 제206호)에 도착했다. 융건릉은 내가 2015년에 정년 퇴임할 때까지 근무하던 수원대학교 바로 옆에 있어서 여러 번 와 본 장소이다. 환경과학 시간에 학생들을 데리고 산책 삼아 답사를 한 장소이다. 이제는 지나간 옛날 일이다. 그 시절이 그립다.

 

여기에서도 문화해설사가 우리를 인도하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하였다. 융릉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 장조(莊祖)와 현경의왕후(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다. 건릉은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正祖)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융릉과 건릉을 포함하여 18개 지역 총 40기의 조선 왕릉이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장조(1735~1762)는 영조와 영빈 이씨의 아들로 태어난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5세 때인 영조 25년에 늙은 영조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았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불화로 병을 얻었다. 또한 노론 세력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다. 영조 38년에 왕세자의 신분에서 폐위되어 뒤주에 갇힌 후 8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막상 아들이 죽은 후 생각해 보니 슬펐나 보다. 아들의 왕세자 신분을 회복시켜 사도세자(思 생각할 사, 悼 슬퍼할 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현재의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 무덤을 만들어 수은묘(垂恩墓)라 하였다.

 

정조(1752~1800)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영조 35년에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영조 51년에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정사를 보았고, 다음 해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짐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하여 노론 계열 신하들을 놀라게 하였다. 정조 13년에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현재의 자리인 화산(花山)으로 옮겨 새로 조성하고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었다. 1899년(광무 3) 원을 능으로 높여 지금의 융릉이 되었다.

 

<그림11> 융릉

 

왕릉이 만들어지면 주변 10리 내에는 사람이 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정조는 수원읍의 주민을 현재의 수원성 자리에 이주시키고 성곽과 행궁을 건설하였다. 수원성은 요즘 말로 하면 신도시인 셈이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한 왕조의 왕릉이 훼손 없이 남아 있는 예는 세계적으로 조선 왕릉이 유일하다. 조선 왕릉은 다른 나라의 왕릉에 비하여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조선 왕릉은 <왕릉상설제도>라는 책에 따라 만들어져서 42기 모든 왕릉의 구조와 설계가 비슷하다. 똑같은 설계도를 따라서 조성하므로 모양이 같을 수 밖에 없다.

 

둘째, 조선 왕릉에는 부장된 유물이 없다. 중국의 왕릉이나 이집트의 왕릉은 세월이 흐르면서 도굴 피해를 입었는데, 조선 왕릉 안에는 귀중품이 없으므로 도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제의 관리들이 의심을 품고 헌릉을 시험 삼아 파보았는데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셋째, 조선 왕릉에서는 아직까지도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주도로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문화해설사의 설명 중에서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왕릉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물의 위치는 진설도에 나와 있는데, 제사 음식이 종류는 많지만 소박하다고 한다. 특히 일반인의 제사상과 달리 왕릉 제사상에는 고기와 생선이 없다고 한다. 조선 초 어느 정승이 임금에게, 제사상에 비싼 고기나 생선을 진설하면 왕조가 계속되면서 왕릉의 수가 계속 늘어날 터인데 제사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고기와 생선을 제외하자고 건의했다고 한다.

 

내가 해설 중간에 그 정승이 누구인가 질문을 하였다. 문화 해설사는 황희 정승이라고 대답했다. 황희(1363~1452) 정승은 청백리로 유명하다. 태조부터 세종에 이르도록 4명의 임금 아래에서 일한 인물이다. 특히 세종 치세에서 18년간 영의정을 지내면서 왕과 대신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조선 왕조 최고의 태평성대를 누리게 하였다. 짐작컨대 황희 정승의 제안을 받아들여 왕릉 제사상에서 고기와 생선을 제외시키도록 한 왕은 세종일 것이다.

 

(계속)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