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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학교 갑진년 2월 답사기 (3)

작성자무심거사|작성시간24.03.08|조회수108 목록 댓글 0

국토학교 갑진년 2월 답사기 (3)

 

융건릉 답사를 마치고 우리는 4시 40분에 왕릉 앞의 커피숍에서 차를 마셨다. 담소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이동하였다. 오후 6시 20분에 화성 행궁 가까이에 있는 수원호스텔에 도착하였다. 방 배정을 끝내고 짐만 내려놓고 나와서 저녁식사로 갈비찜 정식을 먹었다. 가성비가 높은 식사였다. 수원호스텔로 돌아와 지하 회의실에서 7시 10분부터 두 차례 강연을 들었다.

 

첫 번째 연사는 시민 언론 민들레의 발행인 이명재 대표였다. 민들레는 2022년 11월 15일에 창간된 진보 성향의 인터넷 언론이다. 민들레는 언론사 중에서는 최초로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단을 ‘1029 참사 명단’이라는 제목으로 공개하였다. 그 후 하루 만에 이종배 서울시 의원에 의하여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으로 고발을 당하고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이명재 대표는 외모로 보아서는 매우 유한 인상을 주었다. 동아일보 기자 생활을 10년 하다가 퇴사 후 언론계에서 일하였다고 한다. 요즘 대부분의 언론이 권력에 굽히는 모습을 보이는데, 민들레는 대안 언론이자 대항 언론을 표방하면서 진실 보도를 추구하고 있다.

 

이명재 대표는 언론 현실에 대한 개탄을 쏟아내었다. 검찰총장이 대통령이 된 이후 언론 보도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가 압수수색이다. 진보 성향의 언론인 민들레, 뉴스타파, 더탐사 등은 여러 차례 압수수색을 당하였다. 검찰이 언론 기관을 압수수색하는 일은 전두환 정권 이후 정말로 오랜만이라고 한다. 일부 누리꾼들은 인터넷 상에서 현 정부를 윤두환 정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명재 대표는 많은 보수 언론들이 권언유착을 넘어서서 권언일체화 현상을 보인다고 비판하였다. 언론 자유 측면에서 보면 세상이 거꾸로 가고 있다.

 

이명재 대표가 지적한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경제 권력인 재벌이 돈(광고비)으로 언론을 조종한다는 것이다. 재벌 관련 큰 사건이 발생한 후에 재벌에 불리한 보도를 내는 언론사에는 광고비를 대폭 줄여서 무언의 신호를 보낸다는 것이다. 그런 현상이 반복되자 광고비가 아쉬운 언론사는 ‘알아서 기는’ 보도를 한다는 것이다. 아래 도표는 이러한 현상이 추측이 아니라 합리적인 근거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림12> 삼성 전자의 광고비 지출

 

마지막으로 이명재 대표가 지적한 언론의 문제점은, 민감한 사건에 대해서 언론사가 최소한의 사실 보도조차 안 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김건희 여사(주: 여사라고 표시하지 않으면 문제가 될 수도 있음)의 명품백 사건을 들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김 여사가 명품백을 받았다는 최 목사의 주장을 아예 보도조차 안 했다는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에, 친구들과 무슨 문제로 서로 옳다고 다투다가 한 사람이 “그거 어제 신문에 그렇게 났어”라고 말하면 쉽게 결론이 났다. 당시에 신문에 나는 것은 모두 사실이자 진실이었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서 신문이나 유튜브에 난 모든 기사를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 그 시절에 언론은 사회의 등불이었다. 기자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기사를 썼다. 요즘에는 어떤가? 일부 누리꾼은 기자를 기레기라고 부른다고 한다. 슬프고도 아픈 언론계의 자화상이다.

 

시민 언론 민들레는 창간사에서 “우리는 양비론을 취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대단한 결기이다.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서 예상되는 불이익을 피해 가는 애매모호한 입장 표명이 양비론, 또는 양시론이다. 양비론은 난세를 살아가는 소시민의 현명한 처세술일지는 모르나 직필 언론이 취할 자세는 아니다.

 

두 번째 강연 주제는 “검찰 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연사는 박인호 원장인데, 뜻밖에도 서울 도봉구에서 개업 중인 치과의사라고 한다. 박 원장은 본인을 “한명숙 총리 모해 위증 사건을 계기로 사법 개혁을 화두로 정진 중인 치과의사”라고 소개하였다.

 

치과 의사와 사법 개혁은 ‘빵과 고추장’처럼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누군가 “치과 의사가 사법 개혁 공부는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다. 박 원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검사, 판사로 근무하다가 나와서 변호사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용감한 사람들이 사법개혁에 대해서 쓴 수많은 책이 있다. 퇴근 후에 육법전서를 공부한 것이 아니고, 이분들이 쓴 책을 모두 사서 열심히 읽었다.” 귀감이 되는 답변이었다.

 

박 원장이 주장하는 사법개혁 방안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우리나라만 있는 검찰의 영장독점주의와 기소편의주의(주: 검사에게 기소, 불기소를 결정할 재량을 인정하는 제도)를 깨야 한다. 오직 검사만이 기소할 수 있는 현 제도가 문제이다. 검사가 기소를 하지 않으면 죄인을 처벌할 방법이 없다.

 

둘째, 재판 3심제에 문제가 있다. 1심과 2심의 판결이 바뀌는 경우에, 어느 판사의 판결이 맞다는 말인가? 현행 제도에서는 2심 재판을 사실심으로 해서 1심 판결을 무력화한다. 2심을 사후심으로 전환하면 항소율은 크게 줄어들고 재판 지연도 해결될 것이다.

 

셋째, 전관예우 제도를 없애야 한다. 검사나 판사가 퇴직하여 변호사가 되면 일반 변호사보다 훨씬 많은 수임료를 받는다. 그러므로 검사나 판사가 퇴임하면 3년 동안 국선변호인으로 일한 후에 변호사 개업을 허가한다든가, 어쨋든 연구를 잘 하면 개선 방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승진 평가제도를 고쳐서 검사가 잘못된 기소를 하거나 판사가 잘못된 판결을 했을 경우에 불리하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현행 제도에서 검사나 판사의 처벌은 공수처 설치로 가능해졌지만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현행법을 고쳐야 한다. 법은 국회에서 만든다. 그러므로 국민들이 국회의원을 잘 뽑아야 한다. 사법개혁을 공약하는 국회의원들을 많이 뽑아주어야 한다.

 

박 원장 강연을 들은 후에 내가 내린 결론은 “깨어있는 시민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행동하는 양심을 가진 깨시민들이 많아질 때에 정치가 바뀌고, 언론이 바뀌고, 궁극적으로 사법제도가 바뀔 것이다.

 

저녁 9시 50분에 강연이 끝났다. 국토학교 회원이 되려면 낮에는 답사하고 밤에는 2시간 40분 정도의 강연은 졸지 않고 들을 수 있는 체력과 열성이 있어야 한다. 다른 열성 회원들은 강연이 끝난 후 뒷풀이 한다고 수원의 밤거리로 나갔지만, 나는 피곤해서 그냥 잤다.

 

2월 17일(토)

 

아침 식사를 마치고 걸어서 9시 쯤 수원 행궁에 도착했다. 어제 밤에 일부 회원은 집으로 돌아가고 9명이 남았다. 수원시청에서 오랫동안 도시계획 업무를 담당하다가 퇴직 후에 한국문화재지킴이단체 연합회장을 맡아서 활동하고 있는 최호운 회장이 행궁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원 행궁(사적 제478호)은 정조가 융건릉에 행차할 때에 머물기 위한 궁궐로서 1796년에 화성 축조와 함께 지어졌다. 일제 때에 여러 공공 건물을 지으면서 행궁이 모두 사라졌다. 1989년에 화성행궁복원 추진위원회가 설립되고, 1995년에 복원 사업을 시작하였다. 무려 28년 동안 사업을 진행하여 2023년에 복원공사를 모두 마치고 수원 행궁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최 회장의 해설에 의하면 행궁은 시설물이 103개나 되고 전체 크기는 576칸이라고 한다. 행궁을 이처럼 크게 지은 까닭은 효자인 정조가 나중에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성에서 살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림13> 수원 행궁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우리는 행궁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행궁이 있는 지역이 행궁동(行宮洞)인데, 염태영 시장 시절인 2013년에 행궁동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였다. 당시 최호운 회장이 실무를 맡았는데, 단 3개월 동안에 성공적으로 사업을 완료했다고 한다. 이때에 적용한 원칙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면, 가게에 간판은 하나만 단다. 간판 조명은 간접조명으로 한다. 생태교통거리를 만들어 주말과 행사 때에는 차량 통행을 금지한다. 화분을 만들어 인도에 차가 들어올 수 없게 한다, 등등. 그 후 행궁동 도시재생사업은 고층 건물을 지을 수 없는 문화재 보호구역이 지역개발의 걸림돌이 아니고 주춧돌이 되는 시범 사례로서 전국의 지자체에서 견학을 온다고 한다.

 

최 회장은 본인의 사견이라면서 도시계획가의 입장에서 볼 때에 박정희 대통령의 3대 업적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그린벨트 지정, 수원성 복원이라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수원성을 복원시켰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답사가 끝나고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맞는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에 ‘국방 유적 보존 및 정비 지시’를 내린다. 이 때에 서울 도성, 강화도 군사 유적, 이순신 장군 유적, 이율곡 유적, 그리고 화성이 복원된다. 화성은 1974년에서 1979년까지 실시된 ‘화성복원 정화사업’에 의해 1차로 복원된다. 그 후 1995년에 시작된 행궁복원사업에 화성 복원이 포함되어 2차 복원이 완성된다.

 

수원 화성(사적 제3호)은 정식 명칭이 화성(華城)이고 별칭으로는 수원성이라고 불린다. 화성은 정조가 정약용을 시켜서 1794년에 공사를 착공, 1796년(정조 20)에 완공한 성곽이다. 길이는 5.7 km인데 6.25 전쟁 때 성문과 성곽이 포격으로 파괴되었다. 화성이 1997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될 수 있었던 것은 최초의 설계도와 작업진행기록이 <화성성역의궤>에 남아 있어서 온전한 유지보수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의궤(儀軌)는 왕실이나 국가 행사가 끝난 후에 논의와 준비과정, 의식 절차, 진행, 행사, 논공행상 등을 자세히 기록한 책을 말한다.

 

<그림14> 조선 왕조 22대 임금 정조

 

정조는 정약용(1762~1836)을 시켜서 수원 화성을 건설하게 하였다. 정약용은 거중기, 녹로, 유형거 등을 발명하여 10년 예상했던 공사 기간을 28개월로 단축하였다. 정조는 <수원화성의궤>를 만들게 하여 후대 사람들에게 화성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자세한 기록으로 남겼다. 의궤에는 사용한 장비의 설계도는 물론 부역에 동원된 백성에게 지불한 임금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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