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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학교 갑진년 2월 답사기 (4)

작성자무심거사|작성시간24.03.08|조회수190 목록 댓글 0

국토학교 갑진년 2월 답사기 (4)

 

정조대왕의 개혁 사상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아보았다.

 

정조는 24년 재위 기간(1776~1800) 동안 양반 사대부 중심의 사회를 백성 중심의 사회로 만들려고 노력한 왕이다. 정조의 개혁 의지는 1778년(정조 2)에 국정 방향을 선포한 <경장대고(更張大誥)>에 잘 들어나 있다. 정조가 구상하고 실천한 개혁 과제는 민산(民産), 인재(人才), 융정(戎政), 재용(財用)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민산을 통한 경제적 안정: 민산이란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정책이다. 이를 위해 혁신적인 농업 개혁을 추진했다. 토지가 없는 백성도 국가 소유의 토지를 임대받아 안정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균전법(均田法)을 실시했다.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다른 정책은 상업 정책이다. 정조는 시전(市廛: 성읍에 있던 허가받은 상설시장) 상인들의 독점권을 폐지하고 물가 안정과 상업 자유의 확대를 위해 백성 모두가 난전(亂廛: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 물건을 판매하는 시장)을 차릴 수 있도록 허용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선포했다.

 

둘째, 인재 육성과 평등 사회: 정조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서얼허통법(庶孼許通法: 첩이 낳은 서자와 얼자, 그 자손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법)을 실시했다. 백성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향교 교육을 강화했다. 엘리트 교육을 위해서는 규장각을 설립하여 서적을 편찬하고 학문 진흥과 인재 교육에 힘썼다.

 

정조는 대신들에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찌 귀한 자가 있고, 천한 자가 있겠느냐? 이 세상에는 노비보다 슬픈 존재는 없다. 고로 마땅히 노비는 혁파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노비제도 철폐의 전 단계로 도망간 노비들을 쫓아가 잡아오는 노비추쇄관(奴婢推刷官) 제도를 없앴다. 정조는 노비신분을 상속하지 못한다는 법을 만들려고 추진하다가 1800년에 죽었다. 그렇지만 정조 노력의 결과로 1801년에 중앙 관청의 모든 공노비가 해방되었다. 링컨의 1863년 노예해방선언과 비교하면 62년이나 빠른 셈이다.

 

셋째 융정과 국방 개혁: 정조는 친위 부대인 장용위를 장용영(壯勇營)으로 확대 개편하여 군권을 장악했다. 장용영의 군사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普通志)>로 모범을 삼아 훈련하였다. 정조는 5군영을 3군영으로 축소 통합하고 모든 지휘권을 병조판서에게 주었다. 국방비를 아끼고 군사를 정예화하는 군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정조는 군권을 장악한 후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화산으로 옮기기 위해 신도시인 수원화성을 건설하게 한다. 화성을 축조하면서 만든 동장대는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썼다. 팔달산 정상에 자리 잡은 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위소로 썼다. 정조 스스로 무술을 연마하였는데, 특히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화살을 50발 쏘면 49발을 명중시키고 한 방은 일부러 날려버렸다고 한다.

 

넷째, 재용과 국가 재정의 안정: 조선 왕실 재정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궁방전(宮房田: 왕실에서 소유하거나 세금을 받는 토지)이었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병신정식(丙申定式)을 반포하였다. 이 조치로 왕실이 규정 외로 보유하고 있는 궁방전을 조사하여 세금을 내게 하고 여러 궁방의 전결을 호조로 이속시키는 등 다양한 조치를 취하였다. 무분별하게 확장되었던 왕실 재정을 제한하고 궁방전을 국가에서 관리하게 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안정시켰다.

 

정조는 궁녀들에게 많은 녹봉이 지급되어 나라 재정을 축내고 있으며, 아울러 궁녀들이 시집을 못 가는 처지를 불쌍히 여겼다. 정조는 대전(大殿: 임금이 있는 곳)의 궁녀를 없애 버렸다. 중전 소속의 궁녀도 없애려 하였으나 반대에 부딪혀 궁녀제도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그림15> 수원 화성 (앞줄 중앙이 최호운 회장)

 

우리는 최 회장의 흥미로운 설명을 들으며 성곽의 북쪽에 있는 산책길 따라 걷다가 장안문에서 성곽으로 올라섰다. 복원된 장안문 벽에는 6.25 전쟁 때의 총탄 흔적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답사 후에 자료를 찾아보니 서울을 뺏긴 후 국군이 수원성에 진을 쳤다. 그러나 수원성은 탱크와 야포가 있는 현대전에서 별로 효과가 없었나보다. 국군은 남하하는 공산군을 수원성에서 단 하루 지연시키다가 퇴각하였다. 정조가 화성을 건설할 때에는 한양의 남쪽을 지키려는 목적도 있었는데, 6.25 전쟁 전까지 수원성에서 전투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림16> 탄환 흔적

 

성곽길은 말 탄 두 사람이 교차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당시에 군사 지휘는 모든 성곽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팔달산 위 서장대에서 장수가 하였는데, 무전기가 없던 시절인지라 깃발을 흔드는 횟수로 신호를 전달하였다고 한다.

 

화성을 건설할 때, 설계도에는 화서문과 화홍문을 일직선으로 하는 중간에 장안문을 만들게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체제공의 안내로 직접 현장 점검을 나온 정조가 이렇게 말했다. “전체적인 설계상 장안문을 이곳에 세우는 것은 마땅한 일이요. 그러나 이곳에 성문을 짓는다면 여기 사는 백성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야만 하오. 그것은 안 될 말이니 민가를 벗어나 성문을 쌓도록 하시오.”

 

일직선 상에는 옛 수원읍에서 살다가 신도시로 이사 온 219호의 민가가 있었다. 정조는 성곽을 북쪽으로 비틀어서 민가가 다른 곳으로 이사가는 것을 막으라고 지시한 것이다. 정조가 성곽 예정지를 둘러보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장안문은 화서문과 화홍문을 직선으로 잇는 중간 지점에 세워졌을 것이다. 구불어진 성곽은 정조의 애민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북수문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華虹門)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는 군사 시설이지만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도 쓰였다. 수문을 통해 흘러온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장쾌하게 떨어지는 모습인 화홍관창(華虹觀漲)은 화성에서 꼭 보아야 할 아름다운 경치이다.

 

북수문을 지나 화성에서 가장 멋진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에 도착했다. 방화수류정은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라는 뜻을 가진 정자이다. ㄱ자 모양의 이 건축물은 주변을 감시하는 망루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 북문인 장안문과 동문인 창룡문 사이에 있어서 동북각루(角樓)로도 불린다. 방화수류정은 단청이 아름답고 지붕과 기둥들의 구조도 매우 독창적이어서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림17> 방화수류정

 

<그림18> 방화수류정의 단청 (사진: 국토학교 회원 Deborah Law Hu Young)

 

방화수류정 아래에는 용연(龍淵)이라고, 수원천과 연결되는 작은 연못이 있다. 성곽을 배경으로 연못 주변의 경치를 사진 찍으면 멋진 사진이 나온다고 한다. 꽃피는 봄이나 단풍지는 가을에 꼭 한번 와 보라고, 해설을 하는 최 원장이 적극 추천을 한다.

 

성곽 따라 걷다가 연무대에서 시내 쪽으로 내려왔다. 일행은 점심을 먹으러 가까이에 있는 지동시장으로 걸어갔다. 오전 11시 50분에 시장에 도착하여 순대국으로 점심을 먹으면서 막걸리를 곁들였다. 식사를 끝내고 오후 1시에 해산하였다.

 

이번 국토학교 답사의 주제는 ‘삼봉대감과 정조대왕의 발자취를 따라서’이다. 부제는 “언론개혁/검찰개혁/국가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환경공학을 전공한 내가 국가개혁에 관한 의견을 개진한다는 것은 나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다.

 

이 답사기를 쓰기 위하여 나는 인터넷을 검색하고, 전문가에게 전화하고, 사전을 찾아보고 등등 많은 시간을 투입하였다. 내가 이해한 삼봉과 정조의 개혁 사상은 “국민의 뜻을 따르고 국민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최근 몇 달 동안 언론 기사들을 읽어 본 나는 격심한 혼란을 느낀다. 기사들을 순서대로 나열해 보겠다.

 

2023년 10월 18일, 윤석열 대통령은 서울 강서구청장 선거 패배 후 열린 용산 대통령실 참모회의에서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 어떤 비판에도 변명해서는 안 된다.”라고 발언했다. 12월 10일, 한국갤럽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의 70%는 김건희 여사 특검법에 대해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말아야 한다고 응답했다.

 

<그림19> 한국갤럽 여론 조사 결과

 

12월 28일, 국민의 대변자들로 구성된 국회 본회의에서 ‘김건희 여사 주가 조작 의혹 특검법’이 과반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해가 바뀌어 2024년 1월 5일, 윤석열 대통령은 특검법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했다. 2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김건희 여사 특검법은 3분의 2 이상 찬성을 얻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이러한 정치 현실에 대해서 삼봉 대감과 정조 대왕이 환생한다면 뭐라고 말씀하실까 궁금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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