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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산 물은물

작성자이뭐꼬|작성시간21.09.14|조회수351 목록 댓글 0

저는 8년전인 2013년에 이곳 교협 카페에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제목으로 7회에 걸쳐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 글들을 약간 수정하여 이곳에 하나의 글로 다시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제 독서의 계절인 가을입니다.

가을을 맞아 좋은 읽을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산은 산 물은 물>

 

나의 전공 분야는 물, 그 중에서도 수질 관리이다. 물의 과학적인 측면은 내가 공부하는 분야이지만 물의 철학적인 의미 또한 나의 관심사이다. 그래서 노자의 ⟪도덕경⟫ 제8장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 또는 ⟪논어⟫의 <옹야편>에 나오는 요산요수(樂山樂水)의 뜻을 찾아보기도 했고, 법(法)은 물 수(氵)변에 갈 거(去), 즉 물이 가는 것이 법이라는 해석 등을 연구해 본 적도 있다. 또한 우리나라 남부 해안 지방에는 물을 숭배하는 물 종교 신자가 상당수 있다는 것을 조사해 본 적도 있다. 나는 신문이나 잡지 또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물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보통 이상의 관심이 간다. 전공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는 돌아가신 성철 스님이 언젠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다. 나는 오랫동안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내가 교육 받은대로 형식 논리를 따라 과학적으로 생각할 때 물은 물이란, 즉 ‘물=물’로서 아무것도 새로이 말해 주는 것이 없는 동의어 반복일 뿐이다. 그러나 이 짧은 글귀에는 틀림없이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이 한 구절만 이해한다면 불교를 단번에 깨달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과학자답게 이 구절에 대한 탐구를 과학적으로 시작하였다.

 

2001년 4월경에 나는 인터넷 검색 엔진을 이용하여 유명한 절의 홈페이지에 접속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자우편을 보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성철스님이 말씀하신 유명한 ‘산은 산 물은 물’이 무슨 뜻이냐고 질문을 했는데, 설명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몇 사람의 불자에게 물어 보았지만 어려운 대답만 들었지, 쉽게 설명하는 대답을 구하지 못하고 이렇게 질문을 드립니다. 학생들에게 설명은 그 다음이고 우선 제가 그 뜻을 깨우치고 싶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쉬운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 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답변은 저의 전자우편 주소로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심 합장.”

(그 당시 나의 인터넷 필명이 muusim 즉 무심이었다.)

 

모든 사찰에서는 홈페이지를 잘 관리하기 때문에 한 달 이내에 대부분의 절에서 답장이 왔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한다.

 

RE : 산은 산 물은 물에 대해서

님께서 문의하신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내용을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철스님의 말씀으로 유명해진 글이긴 하지만 벌써부터 있었던 말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집착의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집착으로 인해 보이는 시각이란 본 마음에서 벗어나 보이게 된 것이랍니다. 그냥 긍정의 눈으로 본다면 산은 산이 됩니다. 그러나 부정의 부정을 더한 긍정이 된다면 어찌 그냥 긍정의 눈으로 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어요. 어떠한 사물을 볼 때 부정의 부정을 더한 긍정의 눈으로 본다면 비유가 맞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글의 내용을 알음알이로 알려고 한다면 백년이 가도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곧 수행을 통한 체험이 제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님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인연이 되어 훌륭하신 스승이 되시길 바랍니다.

(읽어 보니 앞부분은 알겠는데, 뒤로 가서 부정의 부정을 더한 긍정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RE : 산은 산 물은 물에 대해서

산천을 경계 삼아 공부하는 스님께 “도가 무엇입니까? 진리가 무엇입니까? 부처님의 진실된 가르침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는 근본 이치를 물었을 때 나온 대답입니다. 근본을 묻는 말에 근본을 대답했으니 이 말에는 무궁무진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무슨 말을 아무리 장황하게 설명하더라도 우물 안 개구리 식이고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임을 먼저 아시기 바랍니다.

 

‘산은 산’ 이 말에는 초기 불교의 향기보다는 선불교의 향기, 공(空) 사상의 향기, 노장 사상의 향기. 신선 사상의 향기가 배어 있습니다. 그러니 답변이라기보다는 스님의 견해를 밝힙니다. 학생들에게 설명하거나 본인이 인식함에 근본 교리인 삼법인(三法印)을 염두에 두고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중생이 보는 산천 또는 인생과 부처가 보는 산천은 다릅니다. 부처가 보는 산과 물은 진리 그대로의 산과 물이지만 우리 중생이 보는 산과 물은 진리가 그대로 살아있는 산천이 아닙니다. 왜 일까요? 세상의 진리가 무상하고 무아인데 우리는 그 진리를 체득하지 못했기에 자신의 편견과 고정관념과 감정이 이입된 산과 물을 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즉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는데 자기 관점에 맞추어 본다는 말입니다. 삼법인이 제행무상 제법무아의 진리가 그대로 살아있는 경지가 열반적정이라 하여 “있는 그대로의 세상”입니다. 큰스님께서 말한 ‘산은 산’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전도몽상에서 벗어나면 당신이 보는 그대로가 진리의 세상이며 부처의 세상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윤리도덕적인 가르침으로 승화시켜 본다면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친구를 대하라. 위선을 버려라, 가면을 벗어라, 벽을 허물어라, 눈높이를 맞추어라,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 세상을 바로 보라, 자신을 바로 보라” 등등의 가르침을 내포한다고 봅니다.

(앞부분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뒷부분은 알 듯도 하다.)

 

RE : 산은 산 물은 물에 대해서

안녕하십니까? 성철스님의 법문이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지만 본래의 뜻은 알지 못하고 말에 그치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합니다. 불교는 본질을 보는 것이지 현상에 얽매이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닐 진데 그것에 집착하여 부분을 전체라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본질을 보는, 그리고 아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지 손을 보지 말라는 경봉 스님의 가르침이나 부처님께서 설하신 아함경에 나오는 뗏목의 비유와 상통 한다 사료됩니다. 정진하십시오.

(변죽만 울릴 뿐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안 잡힌다.)

 

RE : 산은 산 물은 물에 대해서

이것은 성철스님의 선구입니다. 원래 선구라는 것은 범인이 간단히 해석하거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어구라고 할 수 있죠. 뭐랄까 경지에 이르신 분이 후학들에게 화두를 던지고 그 화두의 해석이나 의미 찾기에 몰두하게 하는 그런 숨은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학한 경지가 다르고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이 선구에 대해서는 해석하는 바가 조끔씩은 다르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선구에 대한 정확한 해석, 즉 정답은 없다는 거죠.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산이 물이 될 수 없고 물이 산이 될 수 없듯이 세상사 감추거나 포장한다고 해서 진리가 변할 수 없고 잠시 거짓에 현혹되거나 미혹될 수는 있어도 그것은 찰나의 현상일 뿐이지 절대 본질이 될 수 없다. 고로 산이 거기에 있고 물이 그렇게 흐르듯 삿된 포장이나 치장 없이 제 역할과 제 의미에 충실한 것이 바로 진리이며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것이 해탈에의 지향인 것이다.

 

부족한 답이나마 만족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선구의 해석에 정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도 화두를 던지시고 이런 의미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고, 또 말씀하셨다면 선구로서의 의미도 상실되어 지금 쯤 이 말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지도 모릅니다. 날마다 좋은 날 되세요.

(뜻은 알겠는데, 정답이 없다기보다는 정답은 여러 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해 평소에 알고 지내는 거사(불교에서 남자 신도를 높여서 부르는 말) 한 분에게 메일을 보내니 다음과 같은 답이 왔다.

 

RE: 산은 산 물은 물

질의해 오신 산은 산 물은 물에 대하여 약간의 이해를 말씀 드리죠. 산은 산 물은 물이다 라는 어구는 예전부터 흔히 인용하던 선구입니다. 우리는 적거나 많거나 간에 그 무엇을 가지고 인생을 걸어갑니다. 많이 가진 자는 행복해 하지만 무거워하며, 적게 가진 자는 없음에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많이 갖기는 어려울 것 없으나 아예 하나도 갖지 않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속성은 갖고자 하는 욕심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일체 분별 망상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적은 것 많은 것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경지라고나 할까요? 그 자리에서는 행.불행의 가치관도 갖지 않은 것이니 초월적인 세계라고 합니다. 이 세계는 성인이나 범부의 개념도 붙어있지 않기 때문에 무심의 경지라고 합니다. 더러움이 와도 흔적이 없으며 깨끗함이 와도 군더더기가 되는 마치 텅 비어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소위 무아의 경지입니다. 무아라면 내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으나 내가 없다는 것도 붙지 못하는 상태이니 열반의 세계입니다.

 

부처님은 이 세계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시므로 여여의 도리라고 합니다. 여여란 그대로, 그대로임을 증명하는 것이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 됩니다. 나는 나요 너는 너다. 상대적인 것이 상호 침범하지 않고 상대적인 것이 서로 돌고 나는 심오한 세계입니다. 분명히 텅 비어 신령함을 느끼게 될 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 된다고 합니다. 관련하여 백운화상의 선시를 보면,

 

이 마음 이대로 도의 경지요

보이는 모든 것이 이대로 진리네

사물은 사물을 침범치 않아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나옹화상의 선에 관한 법어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참선하여 해탈함이 대단한 것 아니니

즉시 한 생각을 돌이킴에 있다.

물 다하고 산 또한 끝난 곳에

물도 없고 산도 없는 때에

산은 산 물은 물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물을 물이다라는 것은 내가 물과 하나 되었을 때에 느끼는 세계로 나라는 관념이 사라진 순수한 객관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 세계는 절대 객관이므로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고 보아야 합니다. 비교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죠. 물 자체라고나 할까요. 그러한 물이라야 참된 물로 실상진리라고 보여집니다.

(무엇을 말하는지 알 듯 모를 듯 뚜렷하지가 않다. 다만 내가 우연히 전자우편 아이디로 선택한‘무심’이 불교에서는 대단한 경지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불광이라는 불교 잡지사에서 근무하며 내가 우연히 알게 된 보살님(불교에서 여자 신도를 높여서 부르는 말)에게 물어보니 다음과 같은 답장이 왔다.

 

RE : 산은 산 물은 물

무심 교수님께 (이 보살님은 나를 항상 무심 교수라고 불러서 당황하게 만든다.)

석촌 호수가에도 봄이 한창입니다. 이렇게 좋은 봄 날 어찌 그리도 어려운 질문을 하여 당혹스럽게 하시는지요. 하오나 제가 아는 대로 아뢰옵니다.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데 그것에 달리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요. 큰스님이라고 하시는 분이 너무나 당연한 말씀을 당연하게 말씀하시니 그것이 당혹스럽고 의아스럽게 느껴졌겠지요. 자, 그러면 함께 생각해 볼까요?

 

“(산을 가리키며) 저것은 산이라고 했는데 누가 산이라고 했습니까?”

“········.”

“언제부터 산이라고 했습니까?”

“········.”

“산이 산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습니까?”

“········.”

“입을 열어도 입을 열지 않아도 어긋납니다. 도대체 이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합니까?”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아무런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무심히 산을 그냥 바라만 보세요, 모든 생각이 완전히 끊어지고 오직 의심만이 사무쳤을 때 물론 산은 산이요 물은 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산은 본래 산이고 물은 본래 물이지요. 산이 산이라고 불러 달라고 한 적도 물이 물이라고 불러 달라고 한 적도 없어요. 다만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 붙여 그렇게 부르고 생각과 형상을 붙이기도 하지요. 그 산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을 붙이기 전에도 산이었고, 물론 산이라고 이름 붙여도 산이고, 또한 설령 다른 이름을 붙인다고 하더라도 역시 산은 산인 것이지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입니다.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 입을 여는 즉시 본래 참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또 입을 열고 말았습니다. 수박을 함께 먹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수박 맛을 설명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가능한 일도 아니지요. 한 번도 수박을 보거나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저 상상으로만 수박을 그리는 것이고요.

 

화두 공부가 안 되고 참선이 안 되고 삼매에 쉽게 들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 망상, 집착에 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생각과 몸의 느낌을 알아차리고 버리기를 하면서 화두(의심)가 들려지면 공부는 저절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만큼 쉽지 않아요, 의심이 저절로 이는 사람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만사 내려놓고 스승 밑에서 한 일주일 정도 당근질(화두문답)을 당하며 공부하다 보면 공부길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정말 재미있어요.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어떠한 경지가 있는데, 그것은 말로는 잘 표현이 안 되니 실제로 경험해 보는 수밖에 묘안이 없다는 이야기인 듯하다. 수박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에스키모인에게 수박 맛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소용이 없고, 그저 수박 한 조각을 주고 먹어 보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뜻이리라. 아울러 한 일주일 모든 것을 제쳐 놓고 스승 밑에서 공부하다 보면 깨달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데, 절에 들어가지 않으면 일반인들은 정말로 깨우칠 수 없다는 말인지 여전히 궁금증은 남는다.)

 

나는 ‘수질 오염 개론’이라는 전공 과목을 2학년 학생에게 가르치고 있다. 학기가 시작되면 첫 시간은 학생들이 아직 교재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개는 서론적인 이야기로 때우는 경우가 많다. 2002년 봄 학기 첫 시간에 나는 공학적인 연구의 대상으로서의 물이 아니고 물의 철학적인 의미에 관해서 강의를 한 뒤 과제를 내 주었다.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유명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 나름대로 연구를 하여 2주 뒤에 레포트로 제출하면 5점을 주겠노라고 선언하였다. 그런데 그 문장의 뜻을 중학교 2학년인 찬연이(우리 집 둘째 아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는 식으로 과제를 작성하라고 단서를 붙였다.

 

어리둥절해진 학생들 중에서 한 학생이 어떤 자료를 이용할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요즘 인터넷 시대이니 인터넷에 들어가서 찾아 보고, 불교에 관한 책도 빌려 보고, 사찰의 홈페이지에 메일을 보내어 물어 보기도 하고, 아는 스님이나 불교 신자가 있으면 물어보는 등 창의성을 발휘해 보라고 대답하였다.

 

2주 뒤에 과제를 받아 읽어 보니 한 학생은 다음과 같이 썼다.

 

찬연아, 우리 불교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고 가신 성철스님에 대해 한 번 알아볼까? 성철스님이 돌아가신 지 8년이 지났지만 그분에 대한 관심은 아직도 식지 않고 있단다. 괴팍한 성품의 스님, 수십 년 간 눕지 않고 또한 8년 동안은 잠도 앉은 채로 자며 철저한 수행을 한 스님, 영어 일어 중국어 불어 독일어 등 5개 외국어에 능통하고 시사잡지인 TIME지를 구독하며 물리학, 심리학, 심령학 등 현대 학문을 두루 섭렵한 스님 등등 성철스님을 따라 다니는 수식어는 참 많단다. 유명한 이야기로서 성철스님을 만나기 위해서 누구를 막론하고 3천 배를 해야 했단다. 3천 배는 예불 경험이 많은 수행보살의 경우 7~8시간 정도 걸리고 보통 사람은 15~24시간 정도 걸린단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무릎이 벗겨지고 심할 경우 몸살도 날 정도란다. 하지만 그 벼리선 엄격함 뒤에 가려진 더 없이 따뜻하고 인간적인 모습 또한 가지고 계신 분이셨지. 우리 시대에 가장 널리 알려진 스님인 만큼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는데 대표적인 것 몇 개를 살펴보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남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

“발 아래를 보고 발 아래를 보라”

“일체를 존경합시다”

 

아직까지도 우리들 입에 거론되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성철스님이 남기신 법어 중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지. 이 계송은 1981년 1월 20일 대한불교 조계종 제7대 종정 추대식 때 내리신 건데 원전은 이래.

 

원각(圓覺)이 보조하니 적멸(寂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권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사회 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뜻은 이래. 참다운 자기 소식도 남에게 전해질 때 잘못 전해지기 쉬운데 남의 소식을 다시 다른 남에게 전한다는 것은 실감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뜻도 엄청나게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우리는 자기 깨달음의 참 모습을 스스로 구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남이 한 것을 가지고 흉내 내며 사는 게 일반적이다. 이러한 중생들의 망상적 세계를 뚫어 보시고 자기 완성을 이룩할 것을 당부한 거야.

(성철 스님에 대한 설명이 충실하고 법어의 출처를 밝힌 것은 좋은데 그 구절에 대한 해석은 무슨 말인지 명백하지 않다.)

 

다른 학생은 다음과 같이 과제를 작성하였다.

 

이 법문은 성철스님께서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면서 대중에게 내린 법어입니다. 그 뒤로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맨 처음 하신 스님은 황벽스님일 것입니다. 황벽스님은 백장, 황벽, 임제로 이어지는 조사선의 정통을 이어 받은 스님으로서 ‘전심법요’ ‘완릉록’ 등의 어록이 전해져 옵니다. 황벽스님은 심외무불(心外無佛) 즉 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없다는 법문을 즐겨 하셨습니다. “그저 다른 견해만 내지 않는다면 산은 산, 물을 물, 스님은 스님, 속인은 속인일 뿐이다. 산하대지(山河大地)와 일월성신(日月星辰)이 모두 너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삼천대천 세계가 모두 너의 본디 면목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뒷날 운문스님은 황벽스님의 이 말을 이어서 “온 땅덩어리가 그대로 해탈의 문이거늘 공연히 불법이라는 견해를 일으키는구나! 어째서 산을 산으로 보지 않고 물을 물로 보지 않는가?”라고 하였던 것이다. 사실 온 땅덩어리가 곧 해탈의 법문이거늘 지견으로 알려고 하는 견해를 지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때로는 산을 보고도 산이라 부르지 않고 때로는 물을 보고도 물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 대중은 피차가 대장부이니 남의 말에 속임을 당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이 말의 출처를 성철 스님이 아니라 중국의 황벽 스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새롭다. 중간까지는 이해가 가는듯한데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무슨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처럼 여러 사람의 답변을 종합해 보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은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사례를 들어 보면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선입견에 사로 잡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를 악의 축이라고 말하면서 군대를 보내 침공했는데,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부시가 선입견에 사로 잡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라크는 보유하고 있던 미사일을 파괴했고, 또 국제 사찰단의 사찰 결과 대량 살상 무기를 발견할 수 없다는데, 이라크가 어째서 악의 축인가?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으로서, 종교가 서로 다른 사람들의 선입견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절에서 부처님께 절하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몰아 부치는 일부 기독교인들, 그리고 천주교는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는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선입견에 사로잡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구체적인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찍이 교육에 의해 사물에 대한 개념과 가치 판단을 배우기 때문에 선입견이 없이 사물을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아마도 사물에 대한 관념이 생기기 전의 갓난아기는 벌거벗은 자기 몸을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은 교육을 받은 일반인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가치 판단을 하고, 싫어하고, 좋아하고, 비난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선입견을 떨치고서 산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산은 그저 산일 뿐이다. 아니, 사실은 산이라는 이름도 있는 그대로 보는 데 방해가 된다. 산에 가까이 가야만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산에 들어가서 있는 그대로 본다면 산이라는 이름까지도 의미가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선입견을 넓은 뜻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법칙이나 진리도 일종의 선입견으로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데 방해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집착 중에서 가장 큰 집착을 법집(法執)이라고 한다. 세상에 유일한 진리가 있다거나, 이것만이 진리라거나 하는 것은 모두 법집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은 ⟪법구경⟫에 나오는 그 유명한 뗏목의 비유이다.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서 지혜의 저편 언덕에 도달한 사람이 뗏목을 메고 간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뗏목을 버리고 지혜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뗏목을 붙잡고 살아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두 번째 사례는 사물을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경우이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듯이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잘 살기 위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부자로 잘 살아 보겠다는 목표를 두고 살아간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잘 나타내는 예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이 장기간 베스트셀러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중심의 인생관이 놓치는 것은, 돈이란 행복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수단과 목적을 구별하지 못하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주변을 보면 돈이 많아져도 행복하게 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언젠가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생을 만났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돈 번 이야기만 하여 식상했던 적이 있다. 어디에다 땅을 사두었는데 얼마가 올랐고, 아파트 평수를 늘려 몇 번 이사하다 얼마를 벌었고, 남들은 증권을 하면 손해를 본다지만 자기는 일 년에 한번 사고 팔았는 데도 얼마를 벌었다는 등등. 사실 내가 친구를 만났을 때에 관심이 있는 것은 어떤 부인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아이들은 무엇을 잘 하는지, 요즘 건강을 위해서는 무슨 운동을 하는지 등인데, 그와는 돈 이야기만 듣다가 헤어졌다.

 

이처럼 돈이라는 안경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고, 또한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사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렵다. 이러한 사람은 산을 ‘광물을 캐낼 수 있는 광산’으로 볼 것이며, 강물을 바라볼 때에 ‘강가에 매운탕 집을 차리면 돈벌이가 될까’하고 생각한다. 또한 물을 수자원으로, 나무를 산림 자원으로 보며, 심지어는 사람을 소중한 인격체라기보다는 인적 자원으로 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라고 개명한 것을 개탄하고 있다.) 경제라는 관점에서만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산이 주는 의미, 물이 가진 또 다른 의미를 놓치기 십상이다.

 

산이 주는 다른 의미가 무엇인지 달리 설명할 길이 마땅치 않다. 그저 산에 들어가 보는 수밖에. 산과 계곡에 관한 재미있는 문자 풀이를 본 적이 있다. 仙(신선 선)이란 사람 인 변에 뫼 산으로, 산에 있는 사람이다. 俗人(속인)이라는 단어에 나오는 俗(풍속 속)이란 사람 인 변에 골 곡(谷)으로서 사람이 산에서 내려와 골짜기에 있는, 즉 다시 말해서 마을 또는 도시에 사는 것을 나타낸다. 사람이 도시를 떠나 산에 들어가면 신선이 되는 것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세 번째 사례로서 이성(理性)의 함정 또는 한계를 들 수 있다. 이성이란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으로서 서양 철학에서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이라는 명저를 남겼다. 중국의 임어당은 일찍이 칸트의 철학 책은 어려워서 3장 이상을 읽지 못하겠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나 역시 서양철학에 대해서는 임어당과 동감하는 바가 많으며, 칸트의 책을 구경은 했지만 어려워서 끝까지 읽지는 못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참된 진리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쉬운 것임을 느끼게 된다.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서양 철학사를 장식하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책을 다 읽어 보아야 이해할 수 있는 진리라면 그러한 진리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진리가 아닐까 한다. 나는 요즘에 점점 동양 철학에 매력을 느낀다. 읽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서양 철학자의 저서들은 노자가 ⟪도덕경⟫ 첫머리에서 지적한 대로 “도를 도라고 하면 참된 도가 아니다(道可非常道)”라는 한 구절에 모두 날아가 버리고 만다. 특정인을 지칭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처음에는 도올 김용옥 교수를 학자로서 존경하였는데, 요즘에는 오히려 불만스럽다. 도올은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그가 연구한 그렇게 어려운 내용들을 모두 알아야 진리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한마디로 도올의 저서들은 너무 현학적이어서 오히려 진리를 설명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 든다. 진리는 의외로 간단하며 쉽지 않을까?

 

어째서 이성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데에 방해가 되는가?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몇 년 전인가 매직아이(magic eye)라고 해서 이상한 책이 유행한 적이 있다. 책을 펼치면 그림이 나오는데 여러 가지 이상한 모양의 천연색 무늬가 종이 전체를 채우고 있다. 그림 자체는 우리가 아는 어떤 형태를 나타내고 있지 않다. 그저 무질서한 무늬의 혼합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서 그림을 5센티미터 정도에서 시작하여 점점 멀리하면서 바라보면 어느 순간 3차원의 새로운 형태가 나타난다. 아무것도 없던 그림에서 송아지가 보이기도 하고, 토끼가 보이기도 하고, 글자가 나타나기도 한다. 나도 숨겨진 그림을 보기 위하여 오랫동안 노력을 하였으나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성공을 하여 숨겨진 그림들을 볼 수 있었다. 매직아이를 볼 때에 주의할 점은 뚜렷하게 보려고 하면 할수록,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흐릿한 눈으로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그림을 바라보아야 한다. 냉철하게 깨어 있는 이성은 매직아이 그림을 볼 때에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성철 스님의 법어에 대한 ‘있는 그대로 보라’라는 주석은, 내가 해석하는 바로는 사물을 볼 때에 우리가 지금까지 갈고 닦은 이성은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선지식들이 본 세상은 매우 아름답고 장엄하며 모든 생명들이 살아 있음을 노래하는 환희에 찬 세상이라고 한다. 이성을 통하여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 속에 숨겨져 있는, 아름답고 환희에 찬 다른 차원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세상을 보려면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현재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교육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가르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그저 잡다한 지식, 암기용 지식만을 가르칠 뿐 아름다운 세상을 보는 데 필요한 감성 교육은 도외시하고 있다. 우리의 아이들은 살아 있는 꽃을 들여다보고 만져 보고 냄새 맡고 느끼는 경험 없이 인터넷에 떠 있는 꽃의 모습과 이름만을 외울 뿐이다. 사람과 꽃과의 접촉이 빠져 있다. 현재의 교육 제도는 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결과 대부분의 아이들은 꽃을 좋아하고 사랑할 수가 없으며 꽃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라”라는 말에서 ‘본다’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본다는 것은 꼭 눈으로 본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말은 매우 시사적이다. 알아 보라, 먹어 보라, 들어 보라, 가 보라, 와 보라, 살아 보라 등등 동사의 뒤에 보조용언으로 사용되는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알아 보라’를 영어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 ‘know and see'’ 정도로 어색하게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에서 알아 보라는 표현은 안다는 것보다 본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사물을 지식으로서 아는 것보다는 알고서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 보라’는 우리말 표현은 정확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이다. 불교의 ⟪화엄경⟫에서 화엄이란 화려장엄한 세상을 말한다. 만공(滿空) 스님은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표현하여 이 세상을 하나의 꽃으로 비유하고 다음과 같은 법문을 남겼다.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다.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의 꽃

어리석은 자들은 온 세상이 꽃인 줄을 모른다.

그래서 나와 너를 구별하고, 내 것과 네 것을 분별하고,

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다투고 빼앗고 죽인다.

허나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아라.

흙이 있어야 풀이 있고, 풀이 있어야 짐승이 있고,

네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네가 있는 법.

남편이 있어야 아내가 있고, 아내가 있어야 남편이 있고,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 부모가 있는 법.

남편이 편해야 아내가 편하고, 아내가 편해야 남편이 편한 법.

남편도 아내도 한 송이 꽃이요, 부모와 자식도 한 송이 꽃이요,

이웃과 이웃도 한 송이 꽃이요, 나라와 나라도 한 송이 꽃이거늘.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는

이 생각을 바로 지니면 세상은 편한 것이요,

세상은 한 송이 꽃이 아니라고 그릇되게 생각하면

세상은 늘 시비하고 다투고 피 흘리고

빼앗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래서 世界一花라는 참 뜻을 펴려면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참새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심지어 저 미웠던 원수들마저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요,

다른 교를 믿는 사람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하나의 아름다운 꽃으로 보는 것을 방해하는 3가지 안경 즉 선입견의 안경, 돈의 안경, 이성의 안경을 벗어야 한다. 우리가 3가지 안경을 벗고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 보면 세상은 감탄할 정도로 장엄한 하나의 꽃과 같은 세계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다.

 

우리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임금님을 보고서 어른들은 옷이 근사하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있는 그대로 보고서 “임금님은 벌거 벗었다”라고 외쳤다. 이야기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어른들은 있는 그대로 보지도 말하지도 않는다. 자꾸 여러 가지 안경을 통하여 굴절된 세상을 보고 말한다.

 

그러므로 진리는 어린아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유치원에서 이미 다 배웠다는 말이 있다. 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지식을 자꾸 늘려가지만 세상의 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에서는 점점 멀어져 간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슬픈 일이다!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부처님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꽃과 새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다.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 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릴 수 있겠느냐? 또 너희는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입지 못하였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느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오 7:19-34)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가장 생태적이고 감동적인 구절이어서 다소 인용이 길어졌다. 불교에서는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며 살아가는 모습을 간단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날이 좋은 날!(日日是好日)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법어의 결론은 나날이 좋은 날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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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항>

 

성철 스님의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가 유행했던 배경을 이해하려면 역사적인 사건들을 이해해야 한다.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후 일부 군부세력은 12월 12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그 후 신군부는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이어서 10월 27일 새벽에 "범법자 색출"과 "불교계 정화"라는 미명 아래 조계종 총무원과 전국 주요 사찰과 암자 5,731곳에 군인들이 난입하여 스님 및 불교 관련자 153명을 강제 연행해 수사 및 고문과 구타 등을 자행한다. 불교계에서는 이 사건을 “10.27 법란”이라고 부르며, 불교계가 민주화운동에 동참하는 계기가 된다.

 

치욕적인 10.27 법란 이후 불교계는 혼란과 절망에 빠졌다. 당시 세상은 참으로 흉흉했다. 모든 언론은 보도지침에 따라 신군부가 적어주는 대로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보안사와 중정 요원들은 백주에도 영장 없이 사람을 붙잡아가 고문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말조심을 하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캄캄하였다. 이러한 때에 성철 스님은 1981년 1월 20일에 조계종 제7대 종정에 추대되었고,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를 내리신 것이다.

 

요즘에 개그 콘서트에 나오는 말이 금방 유행하듯이 이 법어는 당시에 엄청나게 유행했다. 동창회에서도, 술자리에서도, 각종 토론회에서도, 이 법어는 여러 상황에 인용되었다. 사람들은 이 법어를 인용하면서 은근히 신군부를 비난하는 쾌감을 느꼈고, 캄캄한 현실 속에서도 세상이 결국은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가 있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듯이 진리는 진리로서 존재하고 그 진리에 따라 세상은 반드시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나면 성철스님의 법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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