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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스크립트/ 단편

경성 실장석

작성자666try|작성시간16.11.01|조회수37,026 목록 댓글 80
다방의 불이 아직 밝다. 내지(일본) 유학갔던 K가 도오꾜오에서 돌아왔다 하여 환영회를 하는 것이다. 나는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다. 또 이것들이 무슨 작당을 하는구나. 과연 테-블에서 왁자지껄 하는 것은 K와 김 군, 그리고 Y였다. 한 읍내에서 같이 자란 친구며 선후배인 관계로 언제나 항상 이렇게 모였던것이다.

"그래 내지 미쓰코시도 다녀와봤나?"
"에라, 미쓰코시는 경성(* 주: 현재 신세계 본사 건물로 사용중)에도 있지 않소."
"어째 경성 미쓰코시하고 비교하시오? 스케루가 다릅디다, 스케루가."
"스케루는 또 무어야?" Y가 되묻는다. "급이 다르단 말이오." 하고 젠체하며 대답하는 K.

"거 외국물좀 먹었다고 외국말 쓰면서 유식한 척 하는구먼." 하고 혀를 차는 것은 김 군이다.

"아, 저기 오셨소. 윤 형!" K가 이내 나를 발견하고 소리치며 손을 흔든다. 다방에 사람은 그다지 없지만, 조금 부끄러워 고개를 파묻고 재빠르게 테-블에 합석했다. "내가 좀 늦었어. K는 언제 왔나?" "괜찮소. 모두 방금 왔소." 하고 대답하는 Y.

"그것보다, 여러분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하고 꽤 큰 가방에서 상자를 꺼내는 K. "거 약장수같은 소릴 하는구만. 도오꾜오에선 약장수 되는 법도 가르치남?" 김 군이 실없는 소릴 하자 모두 와 하며 웃는다. "내가 약장수는 아니지만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있소. 보시오."

K가 상자를 여니 거기서 녹색의 인형같은 것들이 나온다. "이게 뭔지 아시오?"
"계집아이들 가지고 노는 인형 아닌가."
"아니오. 이것이 내지에서 유행하는 것이랍니다. 짓소오세끼라고 하는 짐승이오."
"짐승인데 이리 생겼나? 참 희한타. 내지인들은 이상한 걸 가지고 노는구먼." Y가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자 짓소오세끼라고 불린 것들이 일제히 Y를 쳐다본다. 그리고 오른손을 뺨에 대더니 고개를 기우뚱한다. 4마리가 완전히 똑같은 동작을 하는 것이 퍽 신기하다.

"혹시 가라쿠리(자동인형) 아닌가?" "어째 이런 가라쿠리가 있단 말이오? 살아있소. 한번 만져보면 아실 거 아니오?" 하고 K는 짓소오세끼 하나를 들어 건네준다. 따뜻하다. 손에서 버둥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확실히 살아있는 듯 하다.

"내지인들이 이걸로 뭘 하나?"

"내기를 하덥디다." "내기?" 김 군이 무슨 내기를 한다는 것인지 묻는다는 눈치다. "짓소오세끼를 오랫동안 기르는 내기요. 가장 오래 살게하는 쪽이 이기는 것이오." "그렇게 잘 죽나? 용케도 내지에서 조선까지 가져왔구먼." 혀를 차는 Y. "그렇지 않소. 잘 죽진 않소. 하지만 잘 죽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길러보면 알게 될거요. 나는 내지에서 두 마리쯤 길렀는데, 모두 죽었소. 가져온 것은 형들과 내기 하고 싶어서 그러오."

"내기라면 무얼 거나?" "술 내기나 하는 것이 좋지않소?" "청요릿집은?" "예끼, 요릿집은 얼어죽을." "탁주 한잔 돌리는 것으로 하지. 무어 커다란 것 걸 것이나 있소?" 내가 말하자 모두 숙연해진다. 다들 주머니 사정이 썩 좋지는 않은것이다. "그럼 그걸로." "좋소. 한 마리씩 나누어 가지시오." 하고 K는 우리에게 짓소오세끼를 한 마리씩 건네준다. 자그마한게 포켓에도 용케 들어간다. 짓소오세끼는 포켓에서 고개를 내밀더니 무어라 재잘거리며 고개를 흔든다. "말 이라도 하는 것 같구먼."

"무얼 먹여 기르면 되나?" "내지에선 보통 금평당을 먹여 길렀소." "금평당이 몇 전인데 짐승 먹이로 주나? 있으면 내가 다 먹지." "아무거나 먹어도 잘 먹긴 하는데..." 하고 말끝을 흐리는 K. "어째, 상관없소. 그럼 다음 주 이 시간에 다시 이곳에서 뵙도록 합죠." "그렇게 하세." 라고 말하고 모두들 흩어졌다.

* * * * * * *

"윤 상, 밤 늦게 한 잔 걸쳤소?" 하고 말을 거는 것은 이웃 사람인 민명(도시아끼) 선생이다. 내지에서 살다가 공장이 들어서자 사람 살 곳이 못된다며 조선으로 건너왔다. 내가 알기론 환을 친다고 하였는데, 그의 작품을 본 적은 아직 없다.
"걸치긴 뭘 걸치오, 도시아끼 상은 어딜 다녀 옵니까?"
"나는 도모다찌(친구들)가 집에 와서 방금 떠났는데 배웅하러 다녀오는 길이오."
"그렇소." "그래." "나도 친구 보고 오는길이오. 내지 유학 갔다가 돌아온 후배가 있어서요."

"내지는 사람 살 곳이 못된다니까." 하고 혀를 차는 것은 도시아끼 선생. 그러더니 갑자기 도시아끼 선생은 코를 크게 벌름거린다. 나는 무슨 내음이라도 맡는 것인가 물었다. "무슨 일이오?" "윤 상, 혹시 짓소오세끼 기르시오?" "네?"
"짓소오세끼 악취가 나지 않는단 말이오? 이상타." 하고 내 포켓에 함부로 손을 넣더니 이내 꺼낸다. "요 보시오. 있지 않소." "하이(네). 그걸 내지 다녀온 후배가 하나 주었소." "짓소오세끼를?" "그렇소."
"왜 받아왔소?" 하고 도시아끼 선생이 쏘아붙인다.
"받아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소?" 나는 괜시리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내지에 이런 말이 있소. 짓소오세끼를 가까이 하면 이내 불행해진다고."

그렇게 말하는 도시아끼 선생의 눈을 보고있자니 조금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불행이라? 이런 작은 짐승이 사람을 어디까지 불행하게 할 수 있기에 그래 말한단 말인가? 나는 무섭다기보단 오히려 오기가 들었다. 도시아끼 선생에게서 짓소오세끼를 빼앗듯 받아내고 대답했다. "요 작은 금수때문에 불행해진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내 말을 들으래도." "허튼 소리 말아요. 난 들어갑니다." 난 발길을 돌려 집 문을 열었다.

"언제고 후회할 날이 올 거요." 하고 도시아끼 선생이 내 뒤통수에 한 마디 했다.

* * * * * * *

좁은 내 방에 들어와 짓소오세끼를 평상 위에 내려놓았다. 한참 빨갛고 녹색인 눈알을 데룩데룩 굴리며 짓소오세끼는 두리번거리더니 테에 하고 울었다.

'불행은 무어가 불행이란 말인가. 이리 작고 앙증맞은 짐승이 또 있을까.' 하고 나는 짓소오세끼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커다란 머리를 기우뚱하고 작은 팔다리로 바동거리며 아장아장 뛰는 것이 퍽 앙증맞다.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또 오른손을 뺨에 대고 머리를 기울인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자 테치테치 하면서 기분 좋은 듯하게 말하더니 드러눕곤 손가락을 잡으며 논다. 살결이 헝겊인형같이 보드랍고 따끈한 것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다. 도시아끼 선생이 내음이 난다 한 말이 생각나 조금 맡아보니... 확실히 이상한 내음이 나긴 한다. 그래도 싫지는 않다.

짓소오세끼를 내버려두고 나는 밥을 먹으러 일어섰다. 그러자 짓소오세끼가 금새 세상이 떠나갈 듯 테에에 하고 소리지르며 내 다리를 쫓는다. 일부러 느릿느릿 걸었더니 종아리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 구슬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는것을 보니 여간 내 마음도 아픈 것이 아니다. 나는 짓소오세끼의 머리를 연거푸 쓰다듬었다. 그제서야 울음을 그치고 다시 방긋방긋 웃는다.

"옳지, 이제 네 이름은 나미다(눈물)다." 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울보에게 딱 맞는 이름이 아닌가. 나미다, 나미다, 하고 불러주니 또 테에 하고 이내 자기 이름이라 알아들은 모양이다. 퍽 영특하다. 이런 것이 있는데 어째 불행해진단 말인가.

내려가 밥을 먹고, 문득 생각이 나 나미다에게도 밥을 조금 가져다주었다. 굳은 찬밥이지만 짐승이 먹기에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과연 나미다는 찬밥덩이를 들고 연신 기쁜듯 울며 갉았다. 정말로 앙증맞다.

* * * * * * *

"짓소오세끼는 빨리 버릴수록 좋소." 하고 말하는 것은 또 도시아끼 선생이다. 이번엔 숫제 내 집 앞까지 와서 하는 말이다.

"아직도 기르고있소?" "어찌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마구 버립니까?" 나는 신경질이 나 쏘아붙였다. 도시아끼 선생은 요 며칠간을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아직도 짓소오세끼를 기르고 있소?', 아니면 '즉시 버리는게 좋소' 두 말만 하였다. 난 어째서 그렇게 도시아끼 선생이 충동질을 하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찌 입만 열면 짓소오세끼 이야기요? 조선인이라고 괄시하는거요?" "내가 어찌 윤 상을 괄시합니까? 모두 윤 상을 걱정해 하는 말이오. 새겨들으면 좋소." "짐승을 버리라고 충동질하는것이 무어가 걱정이고 무어를 새겨들으란 말이오? 아무튼 도시아끼 상과는 일없소." 도시아끼 선생은 노골적으로 조선인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조선말도 할 줄 안다. 허나 내지인인 이상 분명 조선인에 대해 그 어떤 차별적인 마음가짐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선생이 날 볼때마다 하는 충동질이 이해가 되었다. 도시아끼 선생은 필시 이 짓소오세끼가 몹시 부러운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쩐지, 도시아끼 선생에게 나미다를 보여줄 때마다 선생은 벌레라도 보는 것 같은 눈깔을 하고 쳐다보곤 했다.

나미다는 일주일 간 극진히 보살폈다. 혹여 바람이 들어오면 추울까 헝겊을 덮어주고, 내 밥을 약간 덜어서 함께 먹고, 뽈을 던져주어 함께 놀았다. 뽈이 굴러가면 굴러가는대로 총총 따라가서는 팔로 냉큼 집는 것이 정말 귀엽다. 변을 아무데나 보는 것이 다소 지저분하지만 그것은 내가 치우면 될 것이고, 짐승에게 그런 것까지 가르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여겼다.

그렇게 약조한대로 일주일이 지나 김 군, 후배 K, Y와 함께 다방에서 모였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Y였다.

"내가 짓소오세끼를 죽이고 말았네."

* * * * * * *

Y가 상황을 설명하길 다음과 같았다.

"일전에 미도리(녹색)-그러니까 나의 짓소오세끼-를 김칫독에 빠뜨렸소." Y의 미도리는 식탐이 심해 김칫독을 탐내다가 그만 발을 헛딛고 김칫독에 빠졌다. "그래서 국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건져내려 했는데, 눈이 뻘겋지 뭔가. 그러더니 소리를 지르면서 텀벙대는거요." 그 다음 미도리는 김칫독의 국물이 눈에 들어가 충혈되고 허우적대다가 "이내 뭐가 김칫독 위로 떠오르는데, 미도리처럼 녹색인... 구더기... 버러지가 막 떠오르는 것이 아니오? 김칫독에 구더기가 들어가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어찌 그것이 녹색인지-녹색인 구더기는 듣도보도 못하였다-여튼 변괴로다 하고 미도리를 건져냈더니 이내 죽었소. 그리고 미도리의 요 사타구니 사이에서 계속 그 구더기 버러지가 나오지 뭐요."

"기생충인가?" "사람이나 짐승 몸 속에 산다는 버러지 말이오?" "그래요." "그럼 K가 잘못했구먼. 건강치 못한 걸 주어서는." "기다려보시오. 내가 짓소오세끼 전문가도 아니고, 엇지 그것의 뱃속에 버러지가 있는지 안단 말이오? 내 잘못임은 맞지만 그것에 대해 내 책임은 없소." K가 잡아뗀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서 다들 말이 없다.

"괘념치 마시오. 그래도 술은 한 사발씩 돌리겠소." 하고 Y가 정적을 깨자, 그제서야 공짜 술 생각에 회가 동하는 사내들이 다시 왁자왁자 떠든다.

그 날의 주연회는 꽤 늦게 끝났다. 문득 단 것이 먹고 싶어지는 마음이라, 저녁에도 여는 과자가게가 있어 살펴보니 이미 가게 문 닫을 시간에 남은 것이라곤 금평당 뿐이었다. 금평당도 나쁘지 않다. 작으니까 나미다가 먹기도 편할 것이다. 나는 금평당 한 봉을 사서 집에 와 나미다와 나누어먹었다. 그러고보니 K가 내지에서 짓소오세끼는 금평당을 먹여 기른다 했었다. 과연 나미다는 금평당 한 알을 핥더니 탄성을 지르며 빠르게 먹기 시작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절로 웃음이 나왔다.

* * * * * * *

"명태-김 군이 짓소오세끼에 붙인 이름-도 죽었소." 다음 주에는 또 김 군이었다.

"내가 저녁에 먹으려고 고로께 한 봉을 사서 상 위에 놓았소. 그리고 잠시 변소에 다녀오니, 글쎄 짓소오세끼놈이 제 몸집보다 3배는 많은 것을 그 사이 전부 먹어치운 것이 아니오? 5개나 사왔는데 말이오. 괘씸해서 한대 쳤더니만 똥을 온 사방에 흩뿌리더이다. 꼴을 보고 정나미가 떨어져 개천에 던져버렸소. 필시 죽었을 것이오."

"내다버렸으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지않나?" "짓소오세끼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했으니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요." "가타부타 하러 온 것은 아니오. 어쨌건 약속은 약속이니 술 한잔씩 돌리겠소." 김 군은 짓소오세끼를 버린 일로 울적해진 마음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 거하게 차려먹었다. 김 군은 옛날부터 성질이 불같아서 금새 화내고 또 금새 후회하곤 했다. 이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집에 돌아가니 다소 커진 나미다가 날 보면서 팔을 흔들며 달려온다. "이크, 기다리게 하였구나." 하고 괜히 말을 걸고, 찬밥덩이를 하나 넣어주었다. 그러자 나미다는 날 노려보며 밥덩이를 내던지고는 버둥거리며 울기 시작한다. 울보라는 이름이 정말 어울리는 녀석이다. 나미다는 지난 번 금평당을 사다 준 이후로는 어째 금평당만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 먹어버렸고, 이 시간에 열려있는 과자가게는 없다. 배가 고프면 이내 먹겠지 싶어 그냥 찬밥덩이를 내밀어놓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그 날은 하루종일 잠을 자지 못했다. 나미다가 밤 내내 집이 떠내려가기라도 하는 것 마냥 크게 울어 잠을 몽땅 깨워버렸다. 어르고 달래어도 계속 울었다. 결국 꼬박 밤을 새고, 나는 아침이 되자마자 금평당 한 봉지를 사와 나미다에게 몽땅 주고는 송장 모양으로 쓰러졌다.

* * * * * * *

하오 2시 조금 지나서 잠이 깨었다. 잠을 걸러서 그런지, 똥이라도 삼킨 것 마냥 입 안이 텁텁한 것이 기분나쁘다. 옆을 보니 나미다가 날 보면서 웃고있다. 짓소오세끼는 짐승이면서 감정표현이라는 걸 할 줄 안다. 내가 무사한 걸 보고 기쁜 모양이다. 영특하다. 나미다를 쓰다듬어주고 물을 삼켰다. 조금 개운해졌다.

"꼴을 보니 결국 일이 벌어졌군." 문을 나서니 또 도시아끼 선생이 날 보고 한마디 한다. "일은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거요?" "윤 상 입에서 혹여 불쾌한 내음 나지 않나?" "짓소오세끼 냄새라면 질리도록 맡고 있소." "그게 아니고, 짓소오세끼의 똥 냄새가 난단 말이오." 똥이라니, 이 영감이 무슨 똥같은 소릴 하는 것인가. 나는 부아가 치밀었다.

"하다하다 이젠 나를 짓소오세끼 똥이나 먹는 작자로 본단 말이오? 자꾸 그렇게 말하면 나도 참지 않소." 면상을 칠듯 주먹을 치켜들고 도시아끼 선생을 위협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시오?" 그랬더니 도시아끼 선생이 이제는 숫제 울상이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조금 화를 누그러뜨렸다. 그러더니 도시아끼 선생은 집에 들어가, 냉수 한 잔을 떠준다. "입을 헹구고 뱉아보시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도시아끼 선생이 하라는대로 했다. 그러자 입에선 연녹색 물이 나왔다. 녹색? 배추벌레도 아닌데 어찌 녹색이란 말인가? 그걸 보고 도시아끼 선생이 한숨을 쉬었다. "윤 상이 자는 사이 짓소오세끼가 똥을 먹였구먼." "네??"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 짓소오세끼가 윤 상을 노예로 본다는 말이오." "노예?"

도시아끼 선생은 짓소오세끼의 생태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짓소오세끼는 자신보다 낮은 존재에게 똥을 먹이거나 똥을 펴발라 모욕감을 주고, 이내 함부로 대한다네. 근래에 혹여 짓소오세끼가 윤 상에게 무례하게 군 적은 없소?" 나는 떠올렸다. 근래 나미다가 금평당이 아니면 먹지도 아니하고, 밥덩이를 주인에게 던지고... "그건 짓소오세끼가 윤 상을 노예로 본다는 증거들이오.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하고 끌끌끌 혀를 찬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혹여 윤 상의 면상을 보고 웃거나 하지 않았소?" "그랬소." "이제 완전히 틀렸구먼."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게 아껴주었던 나미다가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했단 말인가?

"그런데 도시아끼 상은 어째서 그렇게 짓소오세끼에 대해 잘 아십니까?"

도시아끼 선생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제는 숨길 것 뭐가 있겠소. 난 짓소오세끼를 5년째 치고 있소."

* * * * * * *

도시아끼 선생은 집에 날 들였다. "이리로." 하고 따라가니 지하로 가는 계단이 나온다. 도시아끼 선생이 전깃불을 밝히고 앞서 내려간다. 집에서 지겹게 맡았던 짓소오세끼 냄새가 난다. 그리고 짓소오세끼의... 똥 냄새다. 지하의 큰 방에는 마치 고문도구같은 섬뜩한 연장들이 벽마다 늘어져있고 유리 어항 여러개가 있다. 유리 어항에 들어있는 살구색 덩어리는 확실히 짓소오세끼다. 옷을 벗겨놓은 것 같다. 그걸 보여주며 도시아끼 선생이 설명을 이어간다.

"이것이 무어냐면 '하게하다까(알몸대머리)'라는 것인데, 짓소오세끼의 머리카락을 뽑고 옷을 벗긴 것이오. 그러면 짓소오세끼는 치욕감을 느끼게 된다오." 도시아끼 선생이 다른 어항 앞에 서자 안의 짓소오세끼가 어항벽을 두드리며 뭐라고 외친다. 그러자 도시아끼 선생은 가까이 있는 막대를 집어들고

"다마레, 고노 쿠소무시야로우가!!(닥쳐라, 이 똥벌레가!!)"

라고 노성을 지르더니 봉으로 짓소오세끼를 마구 찔러댄다. 한 대 찌를 때마다 피가 솟구쳐 어항벽이 물들고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울려퍼진다. 짓소오세끼는 맞으면서 빤츠를 부풀리고 똥을 마구 흩뿌린다. 도시아끼 선생의 봉에 같은 곳을 계속 맞은 짓소오세끼의 팔은 이내 찢어져 떨어져버린다. 나는 그걸 보고 침을 삼켰다. "괜찮소. 짓소오세끼는 이렇게 다쳐도 금방 낫소." 도시아끼 선생은 별거 아니라는 듯 봉을 내려놓고 계속 걷는다. "저렇게 똥으로 빤츠를 부풀리는 것을 빤츠 콘모리(봉긋), 줄여서 빵콘이라고 한다오. 짓소오세끼의 바보같은 습성 중 하나요."

그 다음에 보여준 것은 벽에 매여있는 짓소오세끼. 역시나 하게하다까다. "짓소오세끼가 어떻게 새끼를 치는 지 아시오? 그야말로 엉터리가 따로없소." 하고 붉은 물감을 찍은 붓을 짓소오세끼의 녹색 눈에 바른다. 그러자 갑자기 짓소오세끼가 비명을 지르고 배가 불룩불룩해진다. "무슨 일이오?" "보이시오? 임신했소. 곧 새끼를 낳는거요." 고작 눈에 붉은 물을 들였다고 새끼를 낳는단 말인가?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사실이었다. 이내 짓소오세끼의 사타구니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버러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짓소오세끼의 새끼요. 우지(구더기)짓소오라고 하는 놈인데, 자라면 짓소오세끼가 되지." "엉터리군요." "엉터리요." 짓소오세끼는 계속 울부짖고, 새끼는 계속 태어나고 있었다. "이래 놓아두면 죽을 때까지 새끼를 낳소." 하더니 다시 눈에 녹색 물을 들여 돌려놓는다. 이게 대체 무엇인가, 혹시 내가 꿈을 꾸는 것인가? 하는 생각만이 자꾸 들었다.

"내지인들이 짓소오세끼를 뭐라 부르는지 아시오?" 내 얼굴을 보며 도시아끼 선생이 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뭐라고 부릅니까?"
"쿠소무시. 조선말로 하면 똥버러지라오."

똥버러지.
똥버러지.
똥버러지...

...짓소오세끼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똥버러지는 탐욕스러워 한 번 진귀한 것을 먹으면 두 번 다시 그보다 못한 것은 먹으려 하지 않고, 자신을 길러주고 재워주는 이에 대해 감사는 커녕 그것이 당연하다 여기며 노예처럼 부리는 놈들이오. 그래서 짓소오세끼를 기르는 이는 불행해진다 한 것이오. 나는 그렇게 파멸한 이를 몇 번이고 보았소."

"그럼 어째서 도시아끼 상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기르면 된다오." 하고는 가위를 들고 짓소오세끼 하나를 들어 마구잡이로 자르기 시작하는 도시아끼 선생. "짓소오세끼는 재생능력만큼은 남부럽지 않은 놈들이니, 매일매일 이처럼 즐거이 괴롭히고 즐겨도 다음 날이면 생채기 하나 없다오. 어떻소? 윤 상도 한번 즐겨보시오." 짓소오세끼, 아니 똥버러지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 비명소리를... 나미다의 입에서 들을 수 있다면...

"좋소."

* * * * * * *

집에 돌아오니 나미다가 날 쳐다보고 웃는다. 아침에 보았던 그 웃음이다. 그리고는 날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아무것도 들고있지 않은 것을 깨닫고 이내 성난 소리를 낸다. 화가 치민다. 나미다는, 고작 나를 밥 주는 노예 정도로 생각했던 것인가. 일단 도시아끼 선생이 말한대로 '하게하다까'. 짓소오세끼의 옷을 어떻게 벗기는지는 모르고, 다시 입혀줄 생각도 들지 아니하므로 좌우로 잡아당겨 찢었다. 알몸이 되자 놀란 듯 멈춘 나미다의 머리카락까지 남김없이 몽땅 뽑아버렸다. 그러자 이내 기분나쁜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다.

버둥거리면서 우는 나미다를 옛날 읍내에서 도야지 불알주머니 차듯 이리저리 걷어찼다. 나미다는 그리 넓지 않은 방 벽 여기저기에 부딪히며 녹색 자국을 남긴다. 빤츠가 부풀어있는 것을 보니 이것이 도시아끼 선생이 말한 '빵콘'이렷다. 발길질을 멈추자 나미다는 축 늘어졌다. 그렇지만 "나미다, 이리 오렴." 하고 금평당을 흔드니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일어나 달려온다. 그것을 회초리로 마구 쳤다. 한대 칠 때마다 살구빛 살거죽에 빨간 자국이 남는다. 나미다는 이제 적색과 녹색의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있다. 전엔 투명한 눈물만 흘렸는데, 뭐가 다른 것인지 나중에 도시아끼 선생에게 물어봐야겠다.

한참을 치고 나니 나도 지쳤다. 그렇지만 나미다에게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정도는 분에 풀리지 않는다. 지금 시간이라면 괜찮겠지 싶어 나미다를 들고 도시아끼 선생의 집에 찾아갔다. "도시아끼 상, 주무십니까?" "윤 상, 올 줄 알았소." 도시아끼 선생이 기다렸다는 듯 빙긋 웃으며 나를 들여보낸다.

"이놈이 윤 상의 짓소오세끼요?"
"그렇소."
"돌은 뺐소?"
"돌?" 하고 묻자 도시아끼 선생이 말한다. 짓소오세끼의 몸 속엔 돌이 있는데, 그 돌이 깨지면 이내 죽는다 한다. 반대로 돌이 깨지지 않게 하면 짓소오세끼는 아무리 고통받아도 절대 죽지 않는다고 한다. 뭐가 뭔지 나는 더이상 알 수 없게 되고말았다. 대체 이런 생물이 어째서 세상에 있는가. 조물주는 무얼 생각하는가.

"돌은 내가 빼주겠소." 하더니 도시아끼 선생은 늘어져있는 나미다의 가슴 부분을 능숙하게 가른다. 칼을 대자 나미다가 비명을 지르고 울지만 도시아끼 선생이 단단히 붙잡는다. "그러고보니, 짓소오세끼가 흘리는 눈물 말입니다." "말하시오." "투명한 눈물은 무어고 물든 눈물은 무업니까?"

"투명한 눈물은 니세모노(가짜)고 물든 눈물이 혼모노(진짜)요. 여지껏 투명한 것만 흘렸소?"

나는 면상을 후려맞은듯 한 충격을 받았다. 그냥 울보인줄로만 알았는데, 나미다는 그 눈물로 날 조종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미다라는 이름조차 싫어졌다.

"돌을 빼내었소. 이제 어찌하실거요?" 도시아끼 선생은 빼낸 돌을 무슨 노르스름한 물이 채워진 고뿌에 담는다.
"나 이제 짓소오세끼는 꼴도 뵈기 싫소. 그러니 당분간 도시아끼 상이 맡아주실 수 있습니까?"
"좋소. 생각 나거든 놀러오시오."

* * * * * * *

"그렇게 되었구먼..." Y가 혀를 찬다.
"짓소오세끼라는 놈, 건방지기 짝이 없어." 김 군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나도 이리 될 줄은 몰랐소..." K가 고개를 숙인다.

"내 그리 성나진 않았소. K가 술이나 산다면야 이내 화도 풀리겠지." 내가 넉살스럽게 대답했다. 도시아끼 선생에게 짓소오세끼를 맡긴 이후로, 나는 때때로 찾아가 나미다를 만나서 즐기곤 했다. 이빨을 몽땅 뽑고, 팔다리를 자르고, 생몸에 불을 붙이고, 똥을 먹이고, 회초리로 때리고, 칼로 껍질을 벗기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미다는 이름처럼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한때 좋은 '노예'였던 나를 더 속이지 못한것에 대한 후회인지, 죽어야 하는데 죽을 수 없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서러움인지, 하여튼 반성하는 눈물은 아닐 것이다. 나도, 도시아끼 선생도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그 날은 K가 술값을 냈다. 오랜만에 기분좋게 취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도시아끼 선생이 날 불렀다. "윤 상, 기분 좋아 보이는구먼." "선생 덕분이오, 도시아끼 상." "좀 더 여흥이라도 즐기는 게 어떤가?" 하고 내 손에 회초리를 쥐어주는 것은 도시아끼 선생이다.

"거 좋죠. 갑시다."

나는 흔쾌히 지하실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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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1930~40년대)문학 풍으로 쓴 실장석 스크립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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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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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tops93 작성시간 19.07.29 와 이건 진짜... 대단하다는 말 밖에 안 나오네요... 근대 소설에 정통하신게 느껴집니다
  • 작성자겸손한자 작성시간 20.02.16 대박입니다 예전 한국단편문학들이 생각납니다~!!!!
  • 작성자towkill 작성시간 20.06.07 대단하십니다
  • 작성자구름만 가득히 작성시간 21.02.20 역시 실장석 특유의 일본에서 직수입된 분위기(어휘 등)을 한국 배경으로 쓰려면 일제시대 배경이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ㅎㅎ
  • 작성자염제 작성시간 21.06.25 와우 모던한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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