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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무기류

[스크랩] 군사강국 영국군이 이라크전에서 게릴라전을?

작성자영업부장 형곤|작성시간11.02.14|조회수2,107 목록 댓글 0

테러와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그동안 ‘현대전’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진귀한 기록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착검돌격’이라면 꽤나 낡은 개념처럼 보이지만, 사실 1982년의 포클랜드 전쟁에서도 조직적으로 실시된 바 있는, 의외로 명맥이 (가늘게나마) 유지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걸 21세기에, 그것도 군사강국이라는 영국군에서, 그것도 전선 개념조차 없는 이라크에서의 게릴라전에서 실시했다면?

바로 이런 경우가 벌어졌다. 영국으로서는 포클랜드 전쟁 이후 최초의 부대 단위 착검 돌격이 이라크 남부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또한 2009년에는 비록 부대 단위의 착검돌격은 아니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착검한 소총으로 적을 찔러 처치한 영국군 장교가 훈장을 받은 일도 있었다.

이런 사례들은 돌격소총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왜 아직도 소총들이 착검이 되도록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왜 대검이 보병에게 지급되는지를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될지도 모르겠다.

 

 

 

▲ 걸프전 당시, SA80A1소총으로 훈련중인 영국군 병사. 착검중인 것을 알 수 있다.

 

 


- 착검돌격에 이르기까지

 5월, 약 20명의 영국군 병사들이 바스라 주변에서 100명 정도의 시아파 민병대 세력의 매복에 부딪혀 포위당한 것으로 이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여기까지 도달한 배경은 과연 무엇일까?


당시 이라크의 정세는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후세인을 쫓아낸 해방군’으로서의 다국적군의 이미지도 잠시뿐, 곧 이라크 전역에서 영-미군 주도의 다국적군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2004년 봄에 이르면 팔루자에서 미 해병대와 현지 저항세력 사이의 대규모 전투 -악명높은 ‘팔루자 전투’- 가 벌어지기에 이른다.

영국군이 관할하는 남부지방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태가 악화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과격한 시아파 성직자 무크타다 알 사드르가 이끄는 마흐디 민병대는 연일 바스라에 주둔한 영국군을 상대로 공격을 퍼부었고, 2004년 봄에 이르면 바스라 지역에서만도 하루 평균 5차례의 공격이 있을 정도였다.

 

다국적군 측은 알 사드르를 체포하기 위해 몇차례나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고, 마흐디 민병대의 공격은 갈수록 치열해지기만 했다.

특히 도로, 그 중에서도 바그다드와 바스라를 잇는 도로는 중요한 공격 목표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다국적군의 수송차량 대부분은 장갑도 없었는데다 무장 호송차량 역시 지금과 비교하면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당연히 당시의 이라크 저항세력에 대해서는 취약했고 늘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영국군 현용 대검

 

 

 

 

▲영국군 대검은 손잡이를 직접 소염기에 끼우지만, 총탄이 발사되는데 지장이 없도록 손잡이 앞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손잡이 재질은 금속.

 

 

 

-사태의 시작

5월 21일, 아가일 & 서덜랜드 하이랜더 연대 소속의 병사 20명이 두 대의 랜드로버 차량으로 구성된 차량 행렬을 이용해 6번 고속도로를 타고 이동하던 중 사건이 시작됐다.

바스라 북부 약 88km 떨어진 곳에서 영국군의 차량 대열은 마흐디 민병대가 중심이 된 저항세력 약 100명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RPG와 AK, PKM, 박격포등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저항세력의 기세에 영국군 차량대열은 정지했고, 장갑이 없는 이들 차량에서 병사들은 급히 뛰어내려 엄폐물을 찾아 방어대형을 형성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미 저항세력은 도로 주변에 여러 곳의 참호를 파 놓고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퇴로는 차단당했고, 영국군은 곧 포위당해 치열한 공격에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자료에 따라서는 당시 기습당한 영국군 전체 병력은 2개 소대라고도 묘사된다- 설령 이것이 사실이라 해도, 결국 실제로 외부로부터 차단되어 포위당한 끝에 착검돌격을 펼쳐야 했던 영국군 병력이 20명인 것은 분명한 듯 하다.


포위된 하이랜더 병사들은 무전으로 가장 가까운 영국군 부대인 프린세스 오브 웨일즈 연대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간신히 현장에 도착한 구원 병력은 고작 1개 분대. 그나마도 이들 역시 함께 포위되면서 사태는 점점 악화됐다.

강력한 이라크 저항세력의 공격에도 영국군 병사들은 방어대형을 풀지 않고 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탄약은 점점 떨어져갔고, 사태는 절망적으로만 보였다.

 

 

 

 

 ▲ SA80용 현용 대검 사진

 

 

 

- 착검, 적진으로 돌격!

그러던 중 포위된 영국군 병력의 지휘관은 결단을 내렸다.


“착검!”


자동화기로 무장한 압도적인 적 병력 앞에서 착검하고 돌격이라도 하자는 말인가?

그러나 바로 그랬다. 영국군 병사들은 명령대로 착검했고, 곧 적진을 향해 일제히 돌격을 시작했다!


약 200m에 가까운 개활지를 단숨에 내달린 병사들은 눈앞에 나타다는 마흐디 민병대원들을 닥치는대로 찌르거나 쏴 버렸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처음에는 당황하던 민병대원들 사이에는 곧 공포가 퍼졌다.

 

돌진하는 영국군의 기세에 눌려 많은 민병대원이 도망쳤고, 결국 포위망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거의 세 시간에 달하는 교전이 끝난 뒤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압도적 열세에 몰린 끝에 얼핏 생각하면 ‘자살행위’처럼 보이는 착검 돌격을 실시했던 -그것도 넓은 공터를 가로질러- 영국군측의 전사자는 0. 부상자도 경상 세 명 뿐, 사실상 피해가 없었다.

반면 현장에서 압도적 우위를 자랑했던 마흐디 민병대는 최소 28명, 최대 35명이 숨졌고 9명(자료에 따라서는 12명)이 포로로 잡혔다.

 

알려지지 않은 부상자의 숫자까지 따지면 현장에 있던 마흐디 민병대원의 대부분이 사상자가 되거나 포로가 된 셈이다- 착검 돌격 한번에 포위했던 병력이 거꾸로 궤멸당하는, 그야말로 대 역전극이 벌어진 셈이다.

착검돌격 과정에서 죽은 마흐디 민병대원의 숫자는 대략 20명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전부 대검이 찔리거나 SA80A2의 개머리판에 맞아 죽은건지, 아니면 착검돌격 과정에 영국군이 쏜 총에 맞아 죽은건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착검 돌격이 아니었다면 설령 영국군이 탈출에 성공했다 해도 이런 놀라운 전과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미군의 M9처럼 대검과 칼집을 이용, 와이어 커터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 어째서 이런 일이?

세기에 벌어지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부대 단위의 착검 돌격이 놀랍게도 실시됐을 뿐 아니라 유래 없는 대성공까지 거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영국군으로서도 착검 돌격은 포클랜드 전쟁 이래 22년만에 벌어진 일이었고, 미군 역시 이 사례를 시가지 및 근접 전투에서의 주요 참고사항으로 연구했을 정도였다.


물론 세상 모든 일에는 우연은 없다. 무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이 착검 돌격도 나름대로 성공할 이유가 다 있었다.

먼저 영국군의 훈련수준이 높았다. 영국군 보병은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 군대로 높은 훈련수준을 유지하기로 명성이 높고, 특히 현대의 주요국 군대 중에서도 손 꼽히게 총검술 훈련을 중시하는 군대이기도 하다.

 

따라서 착검돌격을 실시해 일단 ‘대검으로 적을 찌를’ 거리까지 접근할 수 있다면 영국군측에 확실한 우위가 있을 것이었다.

물론 영국군이 가진 SA80A2는 빈말로라도 ‘백병전에 유리한’총은 아니다. 모양도 백병전을 위한 파지에는 아무래도 불편하고, 길이도 길지 않다. 다만 무게가 무거워 적을 타격할 때 대미지가 클수는 있겠다.

 

만약 AK로 무장한 상대가 제대로 백병전을 연마했다면 착검 전투에서 영국군이 우위를 보인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착검 전투는 게릴라들이 가장 못 하는 일 중 하나다- 잘 하고 못하고를 떠나, ‘착검이 가능한 대검’을 휴대하는(그냥 나이프라면 몰라도) 게릴라가 얼마나 될까? 아무리 SA80A2가 백병전에 불편하다 쳐도 착검한 상태에서라면 착검하지 않은 AK보다는 백병전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설령 착검한 AK가 있다 해도 마흐디 민병대원들 중 영국군과 맞서 싸울 수준의 백병전 기술을 연마한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게다가 영국군 지휘관의 선택도 탁월했다. 단순히 절망적인 상태에서 최후의 자살돌격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성공할 가능성을 높이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비록 공터를 가로질러야 하지만 현장 지휘관은 적의 총격이 가장 약한 쪽, 즉 적의 박격포 진지 방향으로 내달리게 했고 덕분에 200m에 가까운 공터를 내달렸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명도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지 않았다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명령에 복종하는 영국군의 ‘군기’도 중요했다.

 

선진국 군대의 ‘군기’는 우리가 보기에는 매우 ‘빠져있는’ 것처럼 보이고, 영국군 역시 미군 만큼은 아니지만 그렇게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군기’에 대한 기준이 다를 뿐, 오히려 이들은 일단 내려진 명령에는 철저하게 따른다.

 

실제로 착검 돌격이라는 무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명령에도 현장의 병사들은 묵묵하게 따랐고, 그 결과 부대는 전멸 직전의 상황에서 아무도 죽지 않고 승리를 거두는 대성공을 거뒀다.

 

 

 

 

 ▲ SA80용 대검의 손잡이에는 톱날도 포함되어있다

 

 

- 훈련 수준의 문제

반면, 착검 돌격의 칼날을 받아내야 했던 마흐디 민병대는 어떨까?


일단 초기에 5:1, 영국측 증원병력이 도착한 뒤에도 3:1이 넘는 수적 우위는 물론 박격포, RPG, PKM등 화력면에서도 압도적 우위에 있는데다 현지 지리에 밝고 선제 공격의 우위까지 누리는, 말 그대로 어느 것 하나 영국군에게 질 일이 없는 압도적 우세를 누렸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었다. 바로 ‘훈련’이었다.

물론 자체적인 훈련시설과 훈련교관등은 있지만 게릴라가 정규군, 그것도 영국군 같은 주요국의 훈련 수준을 따라가기는 어렵다.

 

실제로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민병대 병력의 공격은 그렇게 잘 통제된 편이 아니었고, 따라서 영국군에게 끼치는 피해도 예상외로 적었다.

무엇보다도 게릴라측의 선입관도 실패를 부추겼다. 마흐디 민병대를 비롯한 당시의 저항세력 대부분은 영국군이나 다국적군이 ‘무기와 물자만 좋을 뿐, 정신력이 약해 빠진 군대’라고 믿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저항세력들의 수뇌부가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전형적으로 써 먹은 아이템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인식이 널리 퍼진 것도 사실이다(중동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따라서 마흐디 민병대측도 문제의 차량 대열은 기습을 받으면 그대로 도망치거나 병사들이 흩어져 지리멸렬하리라고 생각했다고 하는데(이는 포로로 잡힌 대원들을 취조하면서 밝혀진 사실이라고 한다), 거꾸로 영국군은 방어 대열을 형성하고 반격에 나선 것이다. 하물며 착검 돌격까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야말로 훈련받은 군대와 그렇지 못한 군대의 차이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착검 돌격이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많은 민병대원들은 당황하다가 그 자리에서 칼에 찔리거나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고 한다.

 

그리고 공포는 쉽게 전염되는 법이고, 결국 대열 전체가 지리멸렬에 빠지는 사태를 낳았다. 영국군도 당연히 기습효과를 노리고 착검돌격을 감행했겠지만 그 효과가 당사자들의 예상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착검’의 효과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을 중심으로 한 주요국 군대들은 착검의 필요성을 다시 느꼈을 것이다.

사실 착검 전투, 특히 조직적인 착검 돌격은 현대전에서는 매우 드문 것이 사실이며 그 때문에 종종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많이 듣는다. 영국군에서도 지난 30년 사이에 착검 돌격은 딱 두 차례 벌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번처럼 놀라운 성공을 거두게 만들기도 하는데, 물론 ‘착검된 소총’ 그 자체가 상대를 때리거나 찌르는 무기로서 거둔 성과가 예상보다는 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착검돌격 과정에서 약 20명을 죽였다고는 하지만 과연 이들이 전부 ‘찔리거나 맞은’ 시체인지, 아니면 대부분이 착검돌격 과정에서 총에 맞은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현장의 병사들도 그런 것까지 셀 겨를이 없었을 듯).

그러나 중요한 것은 대검의 무기로서의 가치 그 자체 이상의 심리적 가치다.

 

사실 적진을 향해 돌격해야만 한다고 할 때, 과연 당신은 당신의 소총에 착검이 된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별 것 아닌 차이 같지만, 설령 총에 달린 대검으로 실제로 적을 찌를 일이 없다 쳐도 ‘내 앞을 가로막는 놈은 다 찔러버리겠어’라는 심리 상태로 싸울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만만치 않은 차이일 것이다.

실용적인 면에서도 착검은 아직 무시할 수 없다.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난 적’을 상대할 때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착검한 총으로 적을 찌르는 편이 더 효과적일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없지는 않은데, 문제는 그 가능성이 필요할 때가 그야말로 목숨이 위험할 때라는 점이다.


실제로 2009년에는 딱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왕립 스코틀랜드 연대의 제임스 애덤슨 중위는 부하들과 함께 탈레반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교전을 펼쳤다.

 

적은 말 그대로 코 앞까지 닥쳐왔고, 바로 앞의 탈레반 한명을 사살한 애덤슨의 탄약이 다 떨어진 순간 또 한 명의 탈레반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마침 애덤슨의 SA80A2는 착검되어 있었고, 그는 주저하지 않고 적을 찔러 죽여 버렸다.

이 전과로 그는 밀리터리 크로스(Military Cross) 훈장을 수여받았는데, 만약 그의 총이 착검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물론 개머리판으로 후려 친다거나 하는 선택도 가능하기야 했겠지만 어쩌면 그가 자세를 바꿔 후려치기 전에 탈레반의 AK탄이 먼저 발사됐을지도 모른다.

 

반면 착검된 소총은 총구를 앞으로 뻗기만 해도 칼날이 닿는 범위 안에 있는 적은 그대로 찔리거나 최소한 그것을 피하기 위해 반응을 취해야 하고, 그것만으로도 내 목숨을 살릴 귀중한 시간을 벌지도 모른다.

즉 아무리 사용할 기회가 적어도 착검한 소총은 여전히 근접전에서 무시할 수 없는 무기다. 물론 그것 때문에 소총의 디자인에 백병전에 필요한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시대착오적이지만, 적어도 착검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는 필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실제로 2004년의 바스라 착검돌격은 미군의 시가전 분석 센터에서도 중요한 실전사례중 하나로 연구분석한 일이 있는데, 아마 이 결과만으로도 앞으로 20년간 나올 소총 대부분에서 착검장치가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출처     http://news.bemil.chosun.com/bbs/view.html?b_bbs_id=10004&pn=1&num=20   홍희범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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