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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손호철 칼럼] "진중권이 바뀌었다고 진보의 정의가 바뀌나?"

작성자다른세상|작성시간11.04.08|조회수52 목록 댓글 3

[야! 한국사회] 좀더 양식 있게 / 김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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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규항

<고래가그랬어> 발행인

 



몇해 전 새사연(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손석춘 선생에게서 들은 이야기. 손 선생이 연구소를 구상할 무렵 박원순 선생에게 함께하면 어떨지 의논했던 모양이다. 구상을 들어본 박원순 선생이 그러더란다. “손 선생이 하시려는 건 민중 기반의 운동이고 제가 하는 건 시민 기반의 운동이니 따로 하는 게 효율적이지 싶습니다.” ‘민중 기반의 운동’에 속한 나는 박원순 선생과 견해가 종종 달랐고 두어 번 직접적인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고 박 선생이 매우 양식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태도는 적어도 한국 사회에선 매우 특별한 것이다.

박원순 선생 말마따나 사회엔 시민 기반 운동(개혁이라 불리는)도 필요하고 민중 기반 운동(진보라 불리는)도 필요하다. 시민 기반 운동이 민중 영역까지 포괄하기 어렵고 민중 기반 운동이 시민 영역까지 포괄하긴 어려우며,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서로를 존중하며 각자의 역할을 해내면 된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급부상한 시민 기반 운동엔 민중까지 포괄하는 운동인 양 과장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즐겨 사용해온 말이 ‘진보 개혁 세력’이라는 말이다. 그 말은 대세가 된 시민 기반의 운동에 민중 기반의 운동을 귀속시키기 위해 사용되어왔다.

그런데 근래 들어선 아예 ‘개혁’을 떼버리고 ‘진보’로 가는 형국이다. 이를테면 오연호, 조국 선생이 얼마 전 낸 책의 제목은 <진보집권플랜>이다. 이런저런 지당하고 좋은 이야기들이 들었지만 결국 골자는 이명박 정권 교체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선거 연합, 즉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을 중심으로 하는 정권교체를 주장하는 책이다. 과연 그런 정권교체가 ‘진보집권’인가? 며칠 전 한 노동운동가가 나에게 보내온 편지를 읽어보자.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노무현이나 이명박은 그 밥에 그 나물입니다. 저는 ‘열혈 노사모’였습니다. 노무현이 대통령 되니 세상 좋아진 줄 알고 노조 가입해서 비정규직 투쟁하다 노무현 정부에 의해 구속되고 해고되었습니다. 저야 구속 정도로 끝났지만 수많은 노동자들은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아직 그 노동자들의 유언과 얼굴을 가슴에 박고 사는 저 같은 사람들은 혼란스럽습니다. 함께했던 동지들도 ‘통합과 연합’이 ‘현실이고 대세’라고 합니다. 그쪽으로 안 가면 영원히 낙오할 것 같은 불안감마저 듭니다.”

물론 오연호, 조국 같은 분들에게, 즉 개혁적인 중산층 엘리트들에게 이명박인가 노무현인가는 ‘그 밥에 그 나물’이 아니다. 그들에게 이명박인가 노무현인가는 정권은 물론 학술, 문화, 방송, 엔지오(NGO) 등의 헤게모니를 ‘우리가 갖는가 저들이 갖는가’가 달린 절체절명의 일이다. 그들에게 그런 정권교체가 세상이 뒤집히는 수준의 변화라는 것, 그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변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을 존중한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정권교체를 굳이 ‘진보집권’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 정권교체를 진보집권이라 부르는 건 그런 정권교체로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이명박이냐 노무현이냐가 그 밥에 그 나물인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폭력이다. 진보란 먹고사는 데 별 걱정이 없는 중산층 엘리트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변화를 대다수 인민들을 위한 변화라 과장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에겐 충분한 변화더라도 대다수 인민들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면 변화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오연호, 조국 선생이 이제라도 <진보집권플랜>이라는 책 제목을 좀더 양식 있게 바꿔주길 정중하게 요청한다. ‘시민집권플랜’ 혹은 ‘민주집권플랜’쯤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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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국사회] 철인좌파의 딱지치기 / 진중권
26면2단| 기사입력 2011-02-28 19:15 | 최종수정 2011-02-28 19:25  

 



플라톤은 세계를 세 등급으로 나눈다. A급은 이데아 세계, B급은 이데아를 모방한 현실계, C급은 현실계를 흉내 낸 유사계(=시뮐라크르)다. 정치인에도 세 등급이 있다. A급은 ‘이상적’ 정치인. 하지만 이상은 현실이 아니기에, 실존하는 것은 이데아를 모방한 B급과, 다시 이를 흉내 낸 C급뿐이다.

민주정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개나 소나 정치를 한다고 나서는 것. 이런 상황에서 플라톤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과제를 자임한다. A급이 실존할 수 없다면, 불완전하게나마 그 이상형을 닮은 B급에라도 폴리스의 정치를 맡겨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철인정치론’이다.

플라톤의 환생일까? 이 사회에도 ‘좌파’를 세 등급으로 나누는 이들이 있다. 물론 A급 좌파는 존재하지 않거나, 이념형으로만 존재한다. 고로 실제로 존재하는 건 B급과 C급. 이 둘을 구별하는 게 이들에게 좌파정치의 핵심 과제가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을 “B급 좌파”라 부르는 철인좌파가 있다. 최근 C급 가짜 시뮐라크르 좌파를 폭로하는 일에 단단히 맛을 들였다.

유감스럽게도 그 일을 하는 데에 그는 이 지면을 활용하곤 한다. 그는 얼마 전 내 이마에 ‘자유주의자’ 딱지를 붙였다. 이번엔 조국·오연호에게 ‘중산층 엘리트’ 딱지를 붙인다. 그 딱지가 우리 사회를 “좀더 양식 있게” 만들어줄 거란다. 그의 비판의 요지는 상표권 도용. 왜 자기 허락 없이 ‘진보’나 ‘좌파’라는 상표를 쓰냐는 것.

그가 남의 이마에 딱지 붙이는 데 쓰는 접착제는 공허하기가 허무할 정도. 양당제가 고착되면 복지국가는 없다? 그래서 남들은 지난 10년간 맨땅에 헤딩하며 진보정당 만들었다. 반한나라 전선에 매몰되지 말라? 그래서 남들은 선거 때마다 표 분산시킨다고 몰매를 맞았다.

그동안 철인은 ‘B급’의 이미지를 위해 진보정당보다 늘 “조금 더 왼쪽”에 계시느라 이 모든 번거로움을 모르고 지내셨다. 그러던 분이 지난 10년 동안 올림포스 산정에 오르사 전능하신 플라톤 선생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가짜와 진짜를 심판하러 오셨다.

현재 진보정당은 집권 전망도, 수권 능력도 없다. 이것이 철인좌파마저 모자 눌러쓰고 진보정당을 외면해온 바람에 생긴 빌어먹을 현실이다. 하지만 그보다 암울한 것은 앞날. 딱지치기로 ‘진보’하는 좌파정치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게다가 진보정당의 상황을 제대로 알고나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다가올 연합 속에서 되도록 진보의 가치를 많이 관철시키는 것이지, 그 연합에 딱지나 갈아붙이는 것은 확실히 아니리라.

“오연호, 조국 같은 중산층 엘리트들에게 이명박인가 노무현인가는 학술, 문화, 방송, 엔지오 등의 헤게모니를 ‘우리가 갖는가 저들이 갖는가’가 달린 절체절명의 일이다.”

이 어법은 그의 입에 되물리는 게 좋겠다. 정권이 바뀐다고 조국 교수의 팔자가 설마 획기적으로 바뀌겠는가. “중산층”에 “엘리트”쯤 되면 굳이 ‘좌파’ 딱지 없어도 먹고산다. ‘진보’로 먹고사는 이들은 따로 있을 게다. 그런 이들일수록 생존권 차원에서 상표권 문제를 “절체절명의 일”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좌파’ 딱지를 허락받고 써야 한다면 차라리 반납하자. 좌파증은 좌파등급심사위원회로 보내면 되나? 그러니 이제 상표권 걱정은 마시되, 그저 우리를 C급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자신을 A급으로 구하소서. 그래야 고래와 권세와 영광이 아저씨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소망교회에서 집사 10년이면 장로 한다. B급 좌파 10년, 이제 영전하실 때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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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국사회] 난감한 풍경 / 김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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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진중권씨의 ‘철인좌파의 딱지치기’는 아쉬운 글이다. 진씨가 ‘김규항이 틀렸다’는 비아냥거림만 반복할 게 아니라 ‘김규항이 왜 틀렸는가’를 말했다면 모두에게 좀더 유익했을 것이다. 공적 논쟁은 사적 다툼과 다른 것이니. 어쨌거나, 진씨는 현재 개혁우파 세력과 일부 진보정치 세력이 진행중인 선거연합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진씨는 꽤 오랫동안 진보정당 활동을 하면서 이런 선거연합을 반대해왔는데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하긴 그는 몇달 전 나와 진보정당의 정체성에 관한 논쟁 뒤에 진보신당을 탈당하며 “다시는 좌파니 진보니 안 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부러 밝히자면, 나는 이명박 정권 교체를 위한 선거연합을 찬성한다. 중국 공산당은 일제를 물리치기 위해 원수인 국민당과도 연합했는데 그깟 이명박 정권 교체를 위한 연합을 못하겠는가. 진씨는 말한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다가올 연합 속에서 되도록 진보의 가치를 많이 관철시키는 것이다.” 내 말이 그 말이다. 내가 문제 삼는 건 선거연합 자체가 아니라 지금 진행중인 선거연합이 과연 진보의 가치를 관철시킬 수 있는 선거연합인가 하는 것이다.

본디 연합이란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걸 전제로 정체성이 다른 집단과 힘을 모으는 전략적 행위다.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는 연합은 ‘연합을 빙자한 흡수통합’일 뿐이다. 극우세력의 집권(혹은 재집권)을 막기 위한 선거연합은 ‘비판적 지지’의 이름으로 지난 20년 동안 반복되어왔다. 처음이라면 모를까 20년을 반복한 일이라면 당연히 그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비판적 지지는 언제나 ‘가장 현실적인 진보의 방법’이라 선전되곤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20년만큼의 진보’가 아니라 이명박 정권의 탄생, 그리고 진보정치 세력의 쇠락이다.

우리는 선거연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어리석은 역사를 또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현재의 선거연합은 ‘정권교체’만 강조될 뿐 정작 진보의 가치를 관철시킬 수 있는 물리적 방안이 없다. 정치는 냉혹한 것이다. 이런 선거연합은 개혁우파 세력의 집권욕에 진보정치의 자원과 가능성을 헌납하는 절차일 뿐이다. 그래도 이명박 정권보다야 낫지 않겠냐고? 물론 그렇긴 하겠지만 이명박 정권에 대한 우리의 반감이 개혁우파 세력을 턱없이 미화하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이란 당장의 통증이 지나버린 통증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개혁우파 세력이 집권하면 세상이 어떨까는 전주를 보면 된다. 버스 노동자들이 86일째 추위와 폭력 속에 파업하고 있는데 민주당이 장악한 전주시와 전주시의회는 이명박보다 덜하지 않다. 법원이 합법 파업임을 인정했음에도 전주시와 전주시의회는 불법 파업으로 매도하며 자본가 편에 서 왔다. 선거연합을 통해 진보정치를 구현한다는 민주노동당이 중앙당 차원의 논평 하나 없다는 건 선거연합의 정체를 보여준다. 개혁우파 세력이 집권한다면 전주의 상황은 전국의 상황이 될 것이다. 그들이 집권했던 10년이 그랬듯 말이다.

그런 무작정한 선거연합을 ‘진보집권 플랜’이라 주장하는 게 양식 있는 행동일까? 그런 선거연합을 진보라 부르면 제대로 된 선거연합을 모색하는 진보는 뭐라고 불러야 하나? 순진보, 원조 진보라 할까? 진보가 참기름, 족발인가? 그걸 지적했더니 도리어 ‘진보를 전세 냈느냐’ ‘딱지를 붙인다’ 성을 내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태도다. 그런 태도는 심지어 진씨 자신의 활동과도 배치된다. 지난 10여년 진중권씨가 해온 활동이란 대개 ‘보수 행세하는 극우’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진보 행세하는 개혁’을 저리 옹호하는 풍경은 참으로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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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진보를 생각한다

[손호철 칼럼] "진중권이 바뀌었다고 진보의 정의가 바뀌나?"

기사입력 2011-03-09 오전 11:58:21

 

최근 들어 한국정치에서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진보논쟁이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너 빨갱이지"라고 몰아세우는 색깔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보의 불모지인 대한민국에서 모두가 자신들이 진보라고 주장하는 기이한 '진보 쟁탈전'이 주기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말기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에 대해 진보세력은 신자유주의자라고, 한나라당 등은 좌파라고 비판한다면서 자신의 노선을 '유연한 진보'라는 표현으로 옹호한 바 있다. 즉 자신의 노선이 유연하지만 진보라는 주장이다. 이에 따라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한미 FTA, 비정규직 확대 등이 진보일수 있느냐는 논쟁이 벌어진 바 있다. 그 과정에서 정권초기 청와대 경제비서관을 지낸 정태인 박사까지 나서 "유연한 진보란 없다"고 유연한 진보론을 비판한 바 있다.

자유주의세력 10년의 실정으로 이명박 정부가 집권하고 뉴라이트와 같은 냉전적 보수세력의 영향력이 커지던 2009년 자유주의진보연합이라는
단체가 등장해 신문에 대대적인 광고공세를 벌였다. 반북, 반공주의야말로 진정한 진보라는 주장이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필자는 이 지면에 쓴 "'진보'가 그렇게 그리운가"(2009년 8월 3일자)라는 글을 통해 진보에 대한 네 가지 용법(변화에 대한 태도, 상대평가, 절대이념 평가, 해체주의)을 중심으로 비판한 바 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또 한 번 진보논쟁에 휩싸여 있다. 그 기폭제가 된 것은 미국 민주당의 집권플랜을 담은 <더 플랜>을 응용한 조국 교수의 <진보집권플랜>의 출간과 진보개혁진영에서 논의되고 있는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겨냥한 다양한 진보대통합 논의이다.

특히 'B급 좌파'를 자처해온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이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을 중심으로 하는 정권교체를 골자로 하는 조국 교수의 정권교체 계획이 민주집권 플랜이나 시민집권 플랜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진보집권이냐고 비판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이에 대표적인 논객인
문화평론가 진중권씨가 김규항씨가 진보와 사이비진보를 판단하는 심사권을 가지고 있느냐고 반박했고 이에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 조국 서울대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물론 진 교수가 잘 지적했듯이 현재 "필요한 것은 다가올 연합 속에서 되도록 진보의 가치를 많이 관철하는 것이지, 그 연합에 딱지나 갈아 붙이는 것은 확실히 아니다." 그리고 현재의 진보정당들에 대한 그의 통렬한 비판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남는다. 그것은 누가 특정정당이나 세력이 진보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권리를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진보의 가치가 무엇이며 우리 시대에 진보가 무엇이냐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한미 FTA가 진보인가? 또 비정규직 확대가 진보인가를 따져야 한다.

나아가 그 같은 진보의 가치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현재 논의되는 다양한 연합 중 어떠한 연합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냐를 논의해야 한다. 즉 조국 식의 연합이 가장 바람직한 연합인지, 아니면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이 먼저 진보대연합을 하고 이에
기초해 민주당 등 자유주의 세력의 좌경화와 탈패권주의를 조건으로 조건부 반한나라당 '민주대연합'을 하는 것이 더 옳은 것인지 등 다양한 시나리오를 놓고 논쟁해야 한다.

나아가
순수가정으로 조국 식의 연합에 의한 정권교체가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진보집권이 아니라 민주집권이라는 김규항씨의 문제제기는 귀담아 들어야 하다. 왜냐하면 정권교체가 아무리 시급해도 진보는 진보고 민주는 민주다. 진 교수가 잘 지적했듯이 "다가올 연합 속에서 되도록 진보의 가치를 많이 관철"하기 위해서라도 그 연합의 성격이 무엇인지, 즉 진보연합에 의한 진보정권교체인지 반MB연합에 의한 민주정권교체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나아가 이 집권이 김규항씨의 주장처럼 진보집권이 아니라 민주집권이라고 해서 그 의미가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진보주의자가 아닌 입장에서 보자면, 오히려 민주집권이 더 의미 있는 것 아닌가?

사실 김규항씨가 우려했고 나 역시 우려하는 것은 진보라는 용어가 남용되면서 진보에 대한 허무주의가 확산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무현 정부의 유연한 진보와 관련해 진보가
대중들에게 연대와 평등, 생태가 아니라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와 스팩전쟁, 그리고 이에 따른 군사독재 시절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과 환경파괴(새만금과 부안사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진보'가 그렇게 그리운가"에서 지적했듯이 진보가
영어의 liberal을 의미하는지, progressive를 의미하는지 명확히 해야 한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진보를 둘러싼 논쟁과 오해는 이 둘을 구별하지 않으면서 생긴 것이 대부분이다. 구체적으로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 등 자유주의세력을 진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liberal를 진보로 번역해 이들이 진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지지했던 한 학자는 "진보주의는 오늘날 미국의 민주당 등 정강, 정책의 기조를 이루고 있고, 이러한 이념적 사조를 자유주의(liberalism)이라고 칭하기도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같은 용법은 잘못이다. 진보란 자유주의나 리버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좌파사상을 의미하며, 한국정치는 진보 대 보수의 이분법이 아니라 진보(progressive), 자유주의(liberal), 보수(conservative)라는 삼분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liberal를 진보로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국가
보안법 폐지투쟁 등이 보여주듯이 진보와 자유주의는 민주개혁에서는 같이 싸워왔지만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과 손을 잡고 날치기 통과했던 비정규직 확대법안, 한미 FTA 등 신자유주의정책(소위 '경제개혁')에서는 자유주의세력과 냉전적 보수세력, 즉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재벌, 조중동이 손을 잡고 진보세력과 대립해 왔다. 다시 말해, 두 개의 개혁(민주개혁, 신자유주의개혁)을 둘러싸고 세 세력 간에는 두 개의 전선(반민주전선, 반신자유주의전선)이 존재한다.

이와 관련, '기우뚱한 균형'을 추구하는 김진석 교수 역시 최근 한
컬럼에서 다음과 같이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지적한 바 있다. "최근 '진보가 집권해야 한다'는 구호를 내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모든 구호에서, '진보'라는 말은 극심한 오해와 왜곡을 조장하고 있다. '진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진보라기보다는 중도좌파 혹은 '리버럴(liberal)'에 가깝다. 그런데 그들은 왜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고 '진보'라 자칭할까? 일종의 '진보 인플레이션'이다".

사실
진중권씨는 2010년 지방선거 당시 진보대연합을 거부하고 민주당과의 소위 반MB민주대연합에 나서 구청장 등 실속을 챙긴 민주노동당에 대해 "진보는 뭘 먹고 사느냐고?"라고 화두를 던진 뒤 "테이블 밑에서 민주당이 흘리는 음식 찌끄레기 먹으며 살아야지요"라고 특유의 필체로 비꼰 바 있다. 만일 민주당이 진보라면 이 글은 애당초 문장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진 교수는 1년전만 해도 김규항씨와 마찬가지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진보로 보았지만 민주당은 진보로 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진 교수가 진보신당을 탈당하고 정치노선에 변화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진 교수가 한국의 진보정당 발전을 위해 고전분투하며 기여한 점을 고려하면 안타
까운 일이지만 그의 결정을 충분히 존중한다. 그러나 그의 정치노선이 바뀌었다고 진보의 정의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정치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시민 참여정책연구원장은
얼마 전 열린 '2012년 야권연대, 연합을 위한 대토론회'에서 "열린우리당이라는 자유주의연합정당의 비극적 종말을 볼 때 그 당보다 폭이 넓은 연합정당의 성공적인 운영은 불가능"하며 "진보대통합은 우리가 대의에 입각해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왜 진보정당이 국민들로부터 신뢰와 사랑을 받지 못하느냐. 자유주의를 적대시하기 때문"이라며 "진보대통합을 진보의 확장으로 보고 자유주의 토대를 획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열린우리당이라는 자유주의 연합정당이라는 비극적 종말"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유 원장 역시 자신과 국민참여당이 진보세력이 아니라 자유주의세력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진보가 자유주의를 적대시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자유주의와 통합해 진보의 확장을 기해야 한다는 주장역시 진보와 자유주의는 다른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그러면서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그리고 국민참여당의 연합내지 통합을 '진보대통합'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 진보세력과 자유주의적 개혁세력이 합치는 '진보개혁대연합' 내지 '진보개혁통합'이라고 부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한미FTA, 비정규직 확대와 같은 자유주의적 정책도 더 이상 적대시하지 말고
수용하면서 이를 '진보의 확장'과 '진보대통합'이라고 부르면 되는 것인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의 통합을 원천적으로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설사 통합을 하더라도 이를 진보개혁대통합이라고 부르면 되지 이를 진보대통합이라고 부르기 위해 진보의 개념을 자의적으로 왜곡시키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나아가 유 원장의 주장처럼 진보정당이 자유주의를 적대시하지 말고 자유주의세력과 통합해 자유주의의 토대를 획득해야 한다면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이 민주당을 빼고 국민참여당과 통합할 이유가 없다. 사실 민주당은 무상
급식 시리즈와 같은 보편적 복지노선으로 좌경화해 진보에 가까워진 반면 유 원장은 오히려 이를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이념적으로 본다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국민참여당이 아니라 민주당과 손을 잡는 것이 옳다.

진 교수 등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진보는 위기이고 뼈를 깎는
혁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liberal이 진보라고 진보의 정의를 바꿔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liberal은 liberal이고 progressive는 progressive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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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다른세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4.08 민주당이 바뀌는 것을 전제로 단일정당을 추진하는것도 어패가 있다. 민주당을 왜 개혁하나? 만에 하나 민주당을 개혁했다 치자. 그럼 민주당에 있는 쓰레기들은 어디로 가나? 그대로 남아 있겠나? (주식회사)민주당이 개혁을 하던 말든 그냥 두고 가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 본다. 민주당의 대주주들은 어디를 가든 대주주 지위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분이 트위터에 올린 글인데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대주주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이 취한 기득권을 내놓지 못하는 법입니다. 에쿠우스 타던 사람이 국민차 모닝을 탈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 작성자쥐사냥꾼 | 작성시간 11.04.09 정말 그럴까요?
    정동영이 그럴 수 있을까요?
    손학규가 정권잡으면 바뀔까요?
  • 답댓글 작성자다른세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4.10 자본가 정당, 민주당의 정동영이나 손학규는 언급할 가치도 없겠지요.
    김대중과 노무현 10년의 쓰라린 경험을 망각하지 않았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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