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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濟暗,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작성시간24.04.27|조회수201 목록 댓글 9

 

 

 

 

On Reading

 

濟暗

 

 

 

 

12년 만에 재출간된 책이 있다. 사사키 아타루(佐々木 中)라는 철학자가 썼는데, 검정고시 따고 도쿄대 나온 뒤에 『야전과 영원 (夜戰と永遠)』이라는 간지나는 이름의 책을 펴내면서 '일본의 니체'라는 명성을 얻었다. 나도 이 책이 집에 있지만, 너무 두꺼워서 모셔만 두고 있다. 다만 여기서 말해보고 싶은 것은 그 밤의 싸움이 여러 날과 해를 거듭하며 이어지는 더 얇고 가벼운 책에 관한 것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

 

이 책을 눈여겨 본 이유는 별게 없다. 순전히 책 이름이 '멋있어서'다. 서점에 가면 으레 보이는 '몇 억 부자! 지금 당장 이것부터 시작하라!' 류의 책처럼, 호기심은 가지만 남들 앞에서 꺼내 읽기에는 부담스러운 책들과는 다르게 제목도 표지도 단순해서 더 근사했다. 무엇보다 쥐뿔 없어도 자존심은 센 나로서는 그냥 命令도 아니고 손을 자르라는 도발적인 제목 앞에, '어디 한번 잘라 봐라!' 하는 객기마저 생겼다. 나는 기꺼이 두 손을 내놓았다.

 

 

 

 

읽는다는 것

 

부제인 ― 책과 혁명에 관한 다섯 밤의 기록(〈本〉と〈革命〉をめぐる五つの夜話)' ― 처럼, 저자는 하고 싶은 말을 다섯 장으로 나누어 편지글로 전한다.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며 初夜를 밝힌 후엔, 책을 '읽어 버리게 될' 사람들을 위해 책을 '읽어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로 여명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반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信條로 삼는다'는 작가의 말마따나 일관되게 반복되는 말을 계속 접해서 그런지 나도 한마디 해본다.

 

읽는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상, 책을 읽어 버린 이상, 책을 읽기 전과는 달리 변한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령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狂人으로 보일지라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읽어 버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下命과 革命

 

이처럼 이 책은 책을 읽어 '버린다'면,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린다'고 말한다. 보다 소박하게 말하자면 읽음의 본질은 感化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정도라기엔 저자가 소개하는 '읽어 버린 사람들'의 면면이 너무나도 드라마틱하다. 그래서 나도 저자처럼 반복하며 보강해 본다. 읽는다는 것은 革命이다. 이 책은 읽어 버린 사람들, 그러니까 革命家들과 그들이 초래한 돌이킬 수 없는 變革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텍스트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가? 심히 자의적일 수 있으나, 나는 이것을 두 갈래로 설명해 보겠다. 下命과 革命으로.

 

 

 

 

受命으로서의 下命

 

막 읽고 머리가 따끈따끈한 상태에서 글을 써서 그런지, 얘기가 너무 거창해진 면도 있는 것 같아 힘을 좀 빼 본다. 그러니 무시무시한 읽기로서의 革命에 대해 얘기해 보기 전에 下命부터 말해본다. 하라고 시키는 것, 어떤 책이 命令을 내리는가? 단적으로는 앞서 언급했던 '몇 억 부자! ~' 류의 책이 그렇다. 이런 책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나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준다. 그런데 이런 자기개발서나 재테크 류의 책만 방법이나 의미를 일러주는 것은 아니다.

 

말의 의미를 알고 싶을 때는 사전을, 글을 잘 쓰고 싶을 때는 작법서를 읽고, 바다를 헤엄치는 돌고래부터 하늘을 나는 나비에 이르기까지 내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는 도감과 백과를 찾으며, 질서를 세우려 할 때는 법전을 펼치고, 질서를 무너뜨리고자 할 때는 병법을 살핀다. 이처럼 無知의 장막을 거두거나 길을 헤맬 때 방향을 알려주는 책은 많다. 아니, 그것은 널렸으며 도처에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책을 펴서 命을 받든다. 알게 되고, 하게 된다. 이것이 下命의 텍스트이며, 그것을 읽는 것은 受命이다.

 

 

 

 

下命에 대한 革命

 

그렇다면 革命의 텍스트는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없다. 그렇다, 그런 건 없다. 다만 그러한 것이 있다면, 그러한 텍스트가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러하다'라고 말하는 텍스트를 읽는 행위, 정확히는 그것을 읽어 버렸던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暴力을 수반하는 革命을 일으키기 위해 퍼뜨리는 宣言文이 그러한 텍스트가 아닐까 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受命의 이면으로서의 下命에 다름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나 같은 下手로서는 이 책의 본문을 떼어내 설명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의 고난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무슨 일일까요?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이 세계에는,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을. 성서에는 교황이 높은 사람이라는 따위의 이야기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추기경을, 대주교 자리를, 주교 자리를 마련하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황제가 높은 사람이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교회법을 지키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십계명을 지켜라'라고 쓰여 있을 뿐입니다. 수도원을 지으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공의회를 열라고도, 그 결정에 따르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성직자는 결혼해서는 안된다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면죄부는 논할 계제도 못 됩니다. 몇 번을 읽어도 그런 것은 쓰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p78"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그렇다고 하는 것, 도무지 그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읽기다. 읽어버렸기 때문에,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革命이다.

 

 

"역설적이게도 무신론이란 성직자밖에 짊어질 수 없는 것이다. ― 자크 라캉" 

 

 

 

 

革命으로서의 受命

 

소화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맛을 논하려는 욕심이 앞서서일까. 革命적인 읽기에 대해서는 그저 위대한 것이고, 受命하는 읽기에 대해서는 하찮은 것처럼 되어버린 면이 있는 것 같다. 말장난 같지만, 반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저자를 모방하여 下手로서의 辨明을 덧붙이자면, 下命과 革命은 命을 같이한다. 옹색하지만 다시 한번, 루터를 인용해 보겠다.

 

 

"성서의 증언이나 명백한 이유를 가지고 따르게 하지 못 한다면, 나는 계속 내가 든 聖句를 따르겠다. 나의 양심은 신의 말에 사로잡혀 있다. 왜냐하면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교황이나 공의회는 자주 잘못을 저질렀고, 서로 모순된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주장을 철회할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는 것은, 확실하기는 해도 得策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 p84"

 

 

오직 있는 그대로의 命을 받드는 것, 그것은 受命일 수도, 革命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受命이라면, 그것은 革命이다.

 

 

 

 

Luther at the Diet of Worms, by Anton von Werner, 1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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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濟暗,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5.09
    However, the law is a rule that all humans should adhere to as a common boundary. So, the law is meant to neutrally resolve ambiguous situations. Even in situations that seem obvious and unproblematic to others, they exhaust themselves by strictly adhering to the law.

    For instance, eating only one portion isn't a problem from 'their' perspective, but it's a damn nuisanc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restaurant owner. They fail to understand tasks like setting tables and grills in a restaurant and instead become agitated, believing it's not their responsibility.
  • 답댓글 작성자濟暗,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5.09 濟暗,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They stubbornly assert their inflexible beliefs without consideration for others, demanding others accommodate their views. Those individuals lack the need for mutual respect and etiquette in society, which these individuals lack due to their one-dimensional viewpoint. It concludes by noting the prevalence of such behavior, especially among young people influenced by social media trends like smartphones and short-form content platforms.
  • 작성자濟暗,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5.09
    文學의 영어사전 정의는 'written works'다. 文學은 무엇을 쓰는가? 삶이다. 단순하지만 사사키 아타루가 革命을 受胎하는 것으로써 文學을 예찬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그걸 풀어본다.

    우선 삶이란, 일상이다. 한 무리의 소녀들이 잘생긴 남학생에 대해 이야기 하는 광경이 있다고 해보자. 소녀들은 풋풋한 감정을 만끽한다. 그때 그 모습을 관찰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자, 혹은 상상했다고 하자. 그러고 그는 소녀들과 소년이 얽힌 청춘 스토리를 글로 썼다고 하자. 삶이 文學이 되는 것이다.

    시시한가? 그럼 이번엔 빅토르 위고나 찰스 디킨스가 쓴 저작들은 어떤가? 물론 文學이 거대한 변혁을 전담하진 않는다. 다만 어제와 오늘 같은 시간적 연속선상에서의 삶을, 다른 차원처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수단이나 효용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는 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누구도 혁명을 예상할 수 없듯이, 있는 것을 느낀 대로 쓴 것이, 그것을 읽어 버리는 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文學이라 하는 것이다. 굳이 글로 안 써도, 일상을 진하게 느낀다면, 그것이야말로 文學이다. 느끼는 것이 文學의 본질이다.
  • 답댓글 작성자濟暗,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5.11
    p.s.

    文學은 世界를 創造한다.
  • 작성자濟暗,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5.09
    韓國人의 哲學적 삶과

    頂上을 향한 치열한 鬪爭에 대해 언젠가 써보겠다.

    그리하여 내가 사는 巨視적 世界의 地形을 밝히는 등불을 켜보겠다.


    _ 『韓国は一個の哲学である 〈理〉と〈気〉の社会システム』 / 小倉 紀蔵

    _ 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Henderson, Gr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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