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이상 쫄병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없는 단계에 접어 들어 어쩔 수 없이 씨리즈 제목을 ‘쫄병’을 빼고 ‘카투사 일기’로 바꿨습니다.
처음 글을 읽는 분들은 현재의 카투사 생활이 이런가 의문을 갖으실 수 있는데, 반백년 가까이 된 케케 묵은 옛날 카투사병의 극히 제한적인 한 부분의 얘기임을 알아 주시고 정사(正史)가 아닌 야사(野史)를 읽는 기분으로 가볍게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생각이 안나는 부분은 허구로 연결하여 썼으므로 다소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훈련병 일기) → (카투사 쫄병일기) → (카투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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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Mess Clerk 이 되어서
내가 총 32개월 정도를 김포공항 옆 미군부대인 304 통신대대에서 근무하는 동안 미군에게 크게 바뀐 제도가 3가지가 있다.
첫째, 미군 징집제도가 징병제(=의무병제)에서 모병제(=지원제)로 바뀐 것이다. 징집병은 Draftee, 지원병은 Enlistee 라고 한다. 장기 복무하는 사람을 흔히 ‘Lifer’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종신형을 사는 죄수’를 뜻하는 말로 표준말이 아니고, 우리의 직업하사관을 ‘말뚝’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속어이다. 신병은 ‘New Bee’라고 부른다.
70년 경 바뀐 것으로 아는데 우리와 같이 전입 온 GI 신병들은 징병제와 모병제가 섞여있었다. 당연히 징병제가 수준이 높다. 대학을 다니다 징집된 신병들도 나와 여러명 같이 근무한 적이 있었고 같은 방에도 있었다. 나와 가장 오래 친했던 흑인 PFC(일병) Grimsley가 생각이 난다.
지원제로 바뀌고 부터는 군인이 하나의 직업이 되다보니 사회에서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지원을 하게 되어 학력이 낮게 되었다. 내가 만난 지원병 중에는 영어의 읽고 쓰기 및 수학의 간단한 분수 계산도 잘 하지 못하는 GI도 있었다. 우리 부대는 대대급의 작은 부대임에도 부대 내에 Education Center가 있어서 매일 일정한 시간 교육을 받는데 한번 지나가다 보니 1/2 + 1/3 같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당연히 교양 수준도 낮아서 대화속에 욕설이나 비속어를 더 많이 쓴다. 일정한 수준으로 교육정도가 높아지면 정해진 시간에 용산South Post에 있는 학교로 학습을 하러 다녔다.
둘째, 국기게양대에 한국 태극기와 미국 성조기의 가운데에 게양되어 있던 유엔기가 내려졌다. 아마 지금은 한미연합사기가 유엔기의 자리에 게양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주한유엔군사령관과 주한미군사령관을 겸직하고 있던 미8군사령관의 직책 중 주한유엔군사령관이 제외되었다. 이것 역시 지금은 한미연합사령관도 겸직 하고 있을 것이다.
별건 아니지만 주한미군의 격이 다국적인 유엔군에서 한 단계 낮아진 것이다.
셋째, 미군에게 보수로 지급되던 MPC(Military Payment Certificate, 군표)가 미국 본토불(Green Back Dollar)로 바뀌었다. 군표는 돈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유가증권으로 해외에서 달러의 유출을 막고자 발행되었던 듯 한데 국내에서도 달러화와 비슷하게 유통이 되었다.
(월남 파병 때 한국군에게도 MPC가 지급되었던 것 같다.)
모든 달러가 뒷면이 녹색 일색이어서 Green Back Dollar라고도 불리는 본토불로 바뀌던 날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전 미군의 외출을 금지하고 한 밤중에 미군들이 소지하고 있던 모든 군표를 달러로 바꿔 주었다.
그 바람에 시내에서 군표를 많이 가지고 있던 암달러상과 가게들이 군표가 하루 아침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려 큰 손해를 본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식당 사무실에 가보니 식당 책임자(Mess Sergeant)는 Kenton 중사(SFC)로 부책임자로 Roser라는 하사(SSG) 하나와 많은 쿡들, 운전병 하나 사무원(Mess Clerk)을 거느리고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에게 OJT(실무교육)를 시켜 줄 사람은 쿡이었던 사람이었는데 나를 무척 반기기는 했지만 가르쳐 주는 내내 툴툴거리고 하루 빨리 Kitchen 안으로 들어갈 생각밖에는 하지 않았다.
결국 일주일 정도를 가르쳐 주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조리실로 도망을 가버렸다.
물론 메스 싸진의 승락이 떨어진 것이긴 하지만 나는 모르는 것이 많아서 수시로 물어보러메스 싸진을 찾아 다녀야 했다.
아직 영어도 타자도 서툰데다가 생소한 일을 하자니 퇴근시간에 퇴근도 못하고 혼자서 사무실에 앉아 수없이 오타난 서류로 휴지통을 채워가면서 고생을 했다.
주로 하는 일은 메스 싸진이 뽑아주는 메뉴를 가지고 그 메뉴에 필요한 식품, 조리법 등을 레시피 카드를 찾아서 간단히 기록해 주고 끝에 카드 번호를 찍어 서류를 완성하면 쿡들이 볼 수 있게 사무실 앞에다 붙여 놓는다. 내용을 잘 아는 쿡들은 메뉴만 보고 알아서 하지만 경험이 적어 잘 모르는 쿡들은 내가 찍어 놓은 것을 보고 만들거나 그래도 모르겠으면 내 책상위에 놓여있는 레시피 카드를 꺼내 보거나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어 본다.
또 식당에서 필요한 식품이나 물품을 내가 내어 주어야 할 것도 있고 부족하면 메스싸진이 써 놓은 것과 내가 창고에서 조사하여 사 와야 할 것을 서류를 꾸며 부책임자인 하사에게 주면 식당 운전병(Mess Driver)과 함께 용산에 가서 조달해 온다. 주로 식품은 냉장 창고에서 GI가 내 주고 식품이 아닌 소모품 은 일반 창고에서 내가 내어 준다. 한 삼개월 정도는 식당으로 내려온 것을 후회할 정도로 아침에 제시간 보다 일찍 출근하고 저녁에 늦게까지 일하는라고 몹씨 힘들었다. 잘 아는 사람이 있어 속시원히 알려 주기만 하면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물어 볼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다.
삼개월 정도가 지나자 타자도 익숙하게 되었고 그날그날 근무시간 안에 일을 마칠 수 있게 되자 재미가 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때까지는 내가 그 뒤로 그렇게 오래 식당에서 있게 될 줄은 전혀 짐작을 하지 못했다. GI가 보충이 되면 나는 다시 Supply Room으로 되돌아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었다.
나중에는 오히려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사무실에서 공부도 하고 이것저것 교양을 넓히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다. 또 일찍 퇴근을 해 봤자 김병장(진급함)에게 잡혀 푸념을 들어줘야 되고 내가 하지 않아도 될 불필요한 일을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느 새 나도 상병으로 진급하였다. 비록 하급자는 원일병, 유이병 둘밖에 없지만 내 위로 상급자도 김병장과 선임하사 둘밖에 없는 명실공히 중고참이 된 것이다.
중대의 앞날을 예상해 보면 몇개월 후면 선임하사 한병장도 제대하고 김병장이 선임하사가 되고 또 6개월쯤 지나면 내가 선임하사가 되어 1년 정도를 근무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김병장이 또 유이병을 때려 문제가 되어 원주에 있는 B중대(B Co 304th)로 전출을 가게 되어 한병장이 제대하면 나는 무려 일년 반 정도 군대생활의 절반 넘게 선임하사가 되어 최고참으로서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비로소 내 군대생활의 앞날에 부정적 요소는 거의 사라졌다.
정말로 행복시작이 되는 것인가?
그러나 어디 나에게만 군대생활의 절반부터 왕고참 생활을 하는 행운이 주어질까?
김병장이 원주로 전출가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 김포 베이스(Kimpo Base)도 체제가 약간 바뀌게 되었다. 내가 처음 전입되었을 때에는 미8군(8th Army) 예하 4통신단(4th Signal Group) 304통신대대(304th Sig Bn)였었는데 미1통신여단(1st Signal Brigade) 예하 304통신대대로 소속이 바뀌어 왼쪽어깨에 미8군 풍차 마크를 달았던 것을 떼고 미1통신여단의 상징인 방패안의 번개칼 마크로 바꾸어 달았다.
그와 동시에 카투사 인원이 5명이던 우리 본부 중대도 TO가 늘어 쿡도 3명이 생겼고 전자통신장비 수리소인 BEMS(Brigade Electronics Maintenance Shop, 여단전자통신장비수리소)에도 다른 부대의 장비수리소와 통합되어 열대여섯 명의 카투사가 우리 중대로 전입 되었다.이제 모두 20명이 넘는 대 인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상급자도 육칠 명이 넘게 들어왔다. 숫적으로 원래의 본부중대 인원 4명은 절대적 열세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본부중대의 짬밥을 따져서 전입고참 대접 받기가 불가능해졌다. 그런데 전입병력의 절대 다수는 빔스(BEMS)에서 전자통신장비를 수리하는 병력이었다. 쉽게 말해서 전통적으로 선임하사는 인문계가 하는 것이 보통인데(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공계가 대부분인 것이다. 한병장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누가 선임하사로 지명될지 알 수 없다. 빨리 결정되어서 제대 전 조수로서 OJT를 받아야 무난히 임무를 수행할 수가 있는데.....!
쿡이 부족하여 인사과에 얘기하여 신병 박이병을 하나 받아 쿡 보직을 주었는데 이 후임병이 나의 고향 아산의 이웃 고장인 예산 오가면 사람이었다. 얘기 좀 시켜보니 나의 큰 기반이 되겠다.
그런데 이 박이병이 사회에서 명동에 있는 무역회사를 다니다 왔는데 자기 삼촌네 회사라 한다. 일이 바빠서 주말에도 나가서 도와 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나보고 일요일 낮에 만나서 점심이나 같이 하자고 얘기했다.
토요일 외박을 나가서 노량진 사시는 당숙댁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찾아가려고 하는데 걱정꺼리가 하나 있다. 찾아오라고 한 회사가 10층이 넘는 곳에 있는 사무실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라는데 엘리베이터를 타본 적이 없다.
아니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국민학교 6학년 때(1962년도) 서울로 수학여행을 와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라는 6층짜리 화신백화점을 구경갔었다. 선생님을 따라 딱 한번 타 봤는데 그때는 ‘엘리베이터 걸’이 있어서 일일이 안내를 해 주었다.
그런데 10년 넘어 지금은 서울에 높은 빌딩도 많이 생겼는데 서울 구경을 국민학교 졸업한 뒤로도 몇번 하긴 했지만 빌딩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다.
만약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가 엘리베이터 걸이 없으면 작동법을 몰라 안에 갇혀서 계속 아래 위로 오르락내리락만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는 것이다.
당숙아저씨는 서울 모 고교 화학교사이셨다.
아저씨에게 물어 상세히 작동법을 전수받고 명동을 갔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타고 내리는 사람이 계속 많아서 내가 작동 할 필요 전혀 없이 함께 탔다가 해당 층에서 내리기만 하면 되었다.^^
(내가 그런 촌 사람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서울 생활에 모르는 것 무지 많다! 그러나 서울 근교산 만큼은 서울 사람 못지 않게 잘 안다! ㅋㅋ)
얼마 후 한병장이 나를 불러 밥이나 먹자고 한다. 삼척 원덕면 호산리가 고향이고 농협에 근무하다가 입대를 했다는 한창운 병장은 아주 모범적인 사람이다. 하급자들을 괴롭힌 적이 없고 부담주기 싫다고 거의 막사에서 같이 자리하지 않는다. 동기나 동향인들 등 외부에서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하고 놀다가 거의 잠을 잘 때만 중대로 온다.
한가한 시간을 골라 카투사 스낵바에서 같이 밥을 먹으며 하는 얘기를 들으니 한병장은 인사계 및 인사과 사람들과 접촉하여 나를 차기 선임하사에 앉히려고 노력을 했다한다. 그런데 너무 짬밥수가 적고 다른 중대에 똑똑한 사람이 며칠 차이로 선임자에게 밀려 앞날이 불투명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우리 중대로 오게 되었는데 우리 중대에 기반이 없으니 나보고 잘 협조해 주고 그사람이 나가면 내가 선임하사를 하게 될 것이라 한다. 사실 나는 지금은 선임하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먼저 번처럼 대여섯 명 밖에 없으면 관리하기도 쉽고 할일도 많지 않은데 지금은 20명이 넘어 주말에 외출, 외박증 끊어다 주기, 진급 시키기, 휴가 보내기 등 일이 많다. 거기다가 숫자가 많으면 사고 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인데 하급자가 큰 사고를 치면 책임자도 연대책임을 피할 수 없어 엉뚱한 피해를 보는 것을 더러 봐 왔기 때문이다.
나는 선임하사 별 생각없고, 지금 맡는다고 해도 위로 고참들 모시고 하기가 애로사항 많다. 물론 군대는 계급이고 보직은 계급보다 더 높으니 보직으로 밀어 붙이면 되긴 하지만 어디 내가 그럴만한 인물인가? 내가 나를 더 잘 알지!
며칠 뒤에 이권식 병장이 본부중대 선임하사로 왔다. 경남 진주가 고향인 사람이었는데 매우 인상이 좋고 유순한 사람으로 보인다. 선임하사로 오긴 했지만 기반이 취약하여 기가 죽었나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이사람도 한병장 이상으로 남을 피곤하게 하지 않게 하는 합리적이고 훌륭한 사람이었다.
나는 이제 다른데 신경 쓸 것 없이 Mess Office에서 일만 열심히 하면 될 일이다.
약 삼개월 정도를 남보다 아침 일찍 나가고 저녁에 늦게까지 불켜놓고 일하는 것을 반복하다보니 서서히 그날의 일이 근무시간 중에 충분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런저런 식당의 분위기 파악도 되고 일의 돌아가는 형편을 알게 되니 하루 열심히 하면 3일치를 미리 할 수 있는 수준까지 되었다. 완전 물이 올라서 식당이 원활하게 잘 돌아가게 되니 메스 싸진 켄튼도 나를 무척 좋아하고 처음에 일을 모를 때는 답답하여 식당에서 잡일을 하는 한국인 종업원 KP나 웨이트레스 아줌마들에게도 물어 보러 쫓아 다녔었었다. 그 사람들도 잘은 모르나 식당에 십년 이상 다닌 사람들이 많아 서당개 풍월 읊듯이 조금은 참고가 되었었다. 이제는 그 사람들이 나에게 쫓아와 물어보고 부탁을 하게 되는 상황까지 발전을 했다.
웨이트레스 아줌마들은 내가 정문 근무할 때부터 대부분 얼굴을 익혔었는데 나에게 가끔씩 김치나 고추장 등을 갖다 주기도 했다.
처음 카투사가 되면 양식을 먹는 것이 그렇게 좋은데 4개월 정도 지나면 칼칼한 맛이 전혀 없는 양식이 싫어져서 식당 근처에만 와도 음식 냄새에 속이 뒤틀려 식당 안에 들어와서는 싸인은 하되 밥은 못 먹고 주스와 과일 같은 것만 먹는 경험을 대개 누구나 다 한번 이상 한다. 그래서 고참들이 건듯하면 맛있는 음식 투성이인 부대 식당을 마다하고 라면을 쫄병들을 시키거나 자기가 직접 끓여 먹는 것이다.
나는 그나마 군대 오기 전에도 감자와 빵을 매우 좋아하여 그럴 때 도움이 많이 되었다. 감자와 빵은 식당에 항상 있으니까!
아, 식사 내용을 아직 말하지 않았네! 아침은 무조건 Breakfast로 식빵 4조각에 잼과 버터를 바르고 계란 2개, 소세지나 베이컨 2쪽을 준다. 감자, 우유, 커피, 시리얼 등은 상시로 놓여 있고(요즘의 샐러드바), 점심은 무조건 Lunch? 아니다! 보통은 Dinner이고 메인 메뉴는 햄버거 2개가 60% 이상이고, 더러는 스테이크, 치킨, pork steak, 스파게티, 미트로프,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가끔 왕새우나 굴 튀김도 나오는데 4개 정도를 준다. 처음에는 양이 적은 것 같아 잘 안 먹는데 좀 지나면 빵이나 감자를 더 먹더라도 색다른 음식이므로 먹게 된다.
메인 메뉴로 나온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므로 메인 메뉴가 한가지 뿐인 경우는 거의 없고 무난한 햄버거는 거의 매번 나온다고 봐도 된다. 군대에서는 낮에 할일이 많으니 잘 먹고 잘 싸우던지 일 잘하라고 점심을 제일 잘 준다. 아침은 건너 뛰는 사람도 많다. 저녁은 대부분 Supper인데 특별히 저녁을 Dinner로 잡는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하루 2번 Dinner가 될 수 없으므로 점심이 Lunch가 되는 것이다.
휴일은 무조건 저녁이 Dinner 가 된다.
처음 미군부대 들어와 식당을 들어가면 매우 당황하게 마련이다.
카투사 교육대에서 식사시간을 앞두고 식사예절 및 식사 상식에 대한 교육을 잠간 받지만 막상 식당에 들어와 보면 음식의 종류도 많고 쿡들이 좀 무서워 보이기도 하는데다 아직 아는 단어도 발음이 귀에 들어오지 않아 기가 죽는다. 쿡이 흑인 병사인 경우는 더 무섭다.
물어보는 말은 ‘How do you want your eggs(steak)?’이거나 초이스일 경우 ‘What do you want?’정도인데 친절하지도 않고 우리가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자기 할말만 빠르게 말하고는 기다린다. ‘하우 두 유 원트 유어 에그스?’라고 또박또박 말하지 않는다. 무척 빠른 말투로 ‘하유원유어 에그스?’라고 들린다. 무슨 소린지? ‘웟 두 유 원트?’로 들리지 않고 ‘워류원?’으로 들린다.
주는대로 받아먹던 훈련소에서의 습관으로 처음엔 셀프서비스인 것과 서비스를 받아야 할 것 초이스인 것 등도 구분이 안 된다.
그러나 조금만 익숙해지면 계란과 스테이크를 빼면 대개 손가락질 만으로도 해결이 된다.
계란은 2개를 주는데 Scrambled(흰자 노른자 섞어 익힌 것), Hard(노른자 막만 터뜨리고 앞뒤로 익힌 것), Omlet(지단을 만들어 햄, 고추, 양파 등을 잘게 썰어 넣고 싼 것), Boiled(삶은 것) 등인데 80% 이상이 스크램블이다. Sunny Side Up이라는 것도 있는데 노른자를 그대로 두고 바닥만 살짝 익힌 것을 말한다. Fresh는 날계란.
스테이크는 보통 Rare, Medium, Well-done 세단계로 살짝, 중간쯤, 많이 익힌것을 말하는데 GI는 대부분 Medium을 카투사는 Well-done를 주문한다. Medium은 말만 중간이지 우리가 보기에는 피가 줄줄 흐르는 생고기이다. Rare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이야 일반 사회에서도 양식을 많이 상대하니 시리얼, 계란, 스테이크 등을 주문하는 법이 일상화 되다시피 했지만 외식이라곤 짜장면 먹는 것이 거의 전부이던 1970년 무렵에는 외국여행이나 호텔을 제집 드나들 듯 하는 사람이 아니면 전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내가 좋아했던 것은 아이스크림과 올리브, Grape Fruit(자몽 같은 것)인데 그당시 우리나라 식품점에선 올리브나 자몽이 없었다. 전날 술을 많이 마시고 다음날 속이 쓰리면(난 소주 두병 정도만 마셔도 다음날 아침 식사를 못했다.) 그날은 캔에 든 Grape Fruit를 사무실 책상위에 올려놓고 그것과 아이스크림만 먹는 때도 있었다.
특별한 때란 추수감사절 같은 명절(칠면조 고기와 많은 종류의 과일이 나온다)이나 큰 훈련이 끝났거나 가끔씩 하루를 잡아서 Minority(소수약자)를 위하여 Dinner 이벤트를 잡는 날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인을 위하여 ‘Korean Night’를 설정하여 김치와 불고기, 갈비를 한 코너에 놓고 원하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게하고, ‘Soul Night’는 흑인들을 위한 만찬인데 그날은 내장과 돼지 발목 요리가 나오는 것이 재미있다.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내장, 족발은 서민들의 음식이 아닌가?
흑인들이 노예시절 가축을 잡아서 정육은 백인들에게 요리하여 주고 남은 내장이나 족발을 버리기 아까워 먹다보니 그런대로 맛이 있다.(사실은 더 맛이 좋다.) 오래 먹어오다 보니 그들의 기호 음식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날은 흑인들과 카투사들이 접시에 족발 내장을 수북히 담아 싫도록 먹는다. 백인들은 잘 안 먹는다. 족발도 발톱부분은 절단하고 주니 먹기에 더 좋다.
대부분의 고기들이 머리, 내장, 발목, 꼬리, 껍데기 등 양반들이 먹지 않는 부위가 더 맛있는 것 같다. 다행이지, 덕분에 바닥 인생들이 더 맛있는 고기를 먹을 수 있었으니!
또 닭고기를 먹을 때 다리부분과 날개 가슴 두 부분 중 선택을 하게 되어 있는데 GI들은 거의 다 날개 가슴살을 선택하고 카투사는 거의 100% 닭다리를 선택을 한다. 뒤 늦게 오는 사람은 선택의 여지가 없을 수도 있다.
부대 식당에서 제공되는 음식 중 가장 고급에 속하는 것은 스테이크인데 그 중에서도 T-bone steak가 가장 비싸다고 한다. 어느 부위인지 몰라도 손바닥만한 스테이크에 T자 모양의 뼈가 하나씩 박혀 있다. 일년에 몇번 안 나온다.
식당 운영비도 쿠폰형식으로 배부가 되어 메스 싸진이 거기에 맞추어 메뉴를 염두에 두고 식품을 구입을 한다. 매월 Master Menu 가 책으로 배부되어 메스 싸진은 그 책을 보고 칼로리를 계산하고 가격을 참고하여 메뉴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다.
Supper 는 점심과 비슷하지만 조금 간단하다. 가짓수가 훨씬 적다.
전 근무 기간 중 제일 많이 먹은 음식은 단연 햄버거로 대략 60% 이상이다. 거의 점심과 저녁은 햄버거 2개가 주식이다시피 하다.
(제대하고 몇년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에도 햄버거 가게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나는 군대에서의 습관대로 햄버거는 한번에 2개씩 먹어야 되는 것인 줄로 알았다.)
햄버거는 송아지고기로 만든 Veal Berger 에 치즈를 얹은 것을 최고로 친다. 요즘은 햄버거가 건강에 해롭다는 추세이니 지금은 무슨 메뉴가 많이 나오는지 궁금하다.
나는 식당에서 15개월 정도를 근무했다. 내가 김포에서 32개월 정도 근무하는 동안에 가장 인정도 받고 대접도 받던 시절이었다.
집에 가고 싶으면 이삼일 정도 열심히 일하여 메스 싸진의 싸인 만 받으면 4박5일짜리 외박증도 끊어 준다. 하도 자주 가니 반겨주던 고향집의 어머니도 나중에는 오기만 하면 돈이 들어가니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식당에서도 쿡들이 NCO Club 으로 오라는 사람도 많았고, 돈 없이 클럽에 들어서기만 해도 여기저기서 맥주 캔을 한두 개씩 가져다 줘서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같이 먹은 적도 있다. 그때 여자들도 가끔 에스코트하여 들어갔는데 여자들에겐 순하고 달콤한 슬로우진(체리하나 띄운 빨간 술)이나 크렘디멘트(박하향이 나는 녹색 술)를 시켜 주면 좋아했다.
서양의 술 문화가 좋은 것이 우리는 분위기 있는 술집에 친구와 가려면 최소한 십만원 이상은 가져가야 되는데 클럽에는 맥주나 Coke(코카콜라) 한캔만 시켜놓고 앉아서 분위기만 즐겨도 아무도 시비하지 않는다. 밴드가 있는 시간이면 무대에서 춤도 출 수 있다.
우리처럼 코가 삐뚤어지게 먹는 사람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런 사람 만나 보기 어렵다.
-떳떳지 못한 얘기 하나-
쿡으로 전입 온 카투사 하나가 나에게 물삐빠(Water Sand Paper, 식당에서 고기 굽는 넓은 그릴 판을 닦을 때 씀)를 한권 달라고 한다. 보통은 몇장씩 가져가는데 가끔은 갔다 놓고 쓰려고 한권씩도 가져가는 사람이 있으므로 내 줬다. 그런데 2일 쯤 후에 또 가지러 왔다.
몇번을 주었는데 그 많은 삐빠를 어디다 쓰는지 이상해서 나중에는 무엇에 썼는지 말하지 않으면 안 주겠다고 했더니 ‘그냥 썼어요’라고 하다가 빙글빙글 웃으며 내게 말했다.
밖에 내다 주면 돈을 주는데가 있다는 것이다. 뭐야? Cook이나 KP들이 포장을 뜯지 않은 햄이나 소세지를 잔반통에 넣어 숨겨 내가서는 부대찌개 식당에 팔아먹는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목격하기 어렵고 이건 내게 빅 뉴스이다. 그날 부터 나도 퇴근길에 한두개씩 가져다가 배럭스 Wall Locker(옷장) 안에 넣어 두었다.
**물삐빠란 종이로 된 사포인데 그릴을 닦을 때 거칠면 마모가 되어 고운것을 쓴다. 물을 뿌려가며 문지르므로 ‘물삐빠’라 하는 것이다. 자개농 광택을 낼 때도 고운 물삐빠로 물을 뿌려가면 문질러 광택을 낸다고 한다.**
토요일 아침 외출나갈 사람 중 식당에 일하는 사람과 나와 친한 사람들을 오라고 하여 옷 속 등이나 배에 한권이나 두권정도 넣고 나가면 표 나지 않는다. 또 옛날에 나도 헌병대에 근무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근무하면 외출증 보여줄 필요도 없이 그냥 나간다.
시내에 나가서 농방을 가면 한권에 2천원씩(직장인 월급이 4~5만원일 때) 주었다. 옛날에는 장농을 지금처럼 기업에서 가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농방에서 톱질하고 아교로 붙여 만들고 전면에는 호마이카 칠을 하고 자개를 박아 광을 내는데 이 물삐빠가 쓰인다고 한다. 헝겊으로 된 국산은 질이 좋지 않아 미제를 가져오면 돈을 많이 주는 것이다. 이리 저리 다녀 보아 돈을 제일 많이 주는데를 단골로 삼아 다닌다.
다섯권만 가지고 나오면 그날 4~5명의 식사비, 술값, 다방비가 충분했다.
(내가 저지른 비리 중 가장 큰 건임)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동안 나에게 뭐든지 자주 물건을 타러 온 사람들은 빼돌리는 구멍이 있어서 그리 한 것 같았다.
-더러는 미군부대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이면 돈이든 뭐든 많이 가져가는 사람이 애국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난한 나라에 도움이 될테니까. 자기 합리화이지 그건 아니다.-
아마 먹고 살기가 좋아진 요즘은 옛날의 우리처럼 물건을 빼돌리는 일 같은 것은 거의 없어졌을 것이다.
대부분의 GI들은 정직하고 나쁜짓을 잘 하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대개 그런 것이고 그들도 사람이니 당연히 물건을 빼내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리고 식당에 쿠폰으로 배부되는 예산은 출입문에서 작성하는 식사인원 리스트의 숫자에 좌우된다. 숫자가 많아야 쿠폰이 많이 나와 식당 예산이 풍부해 진다. 가끔 메스 싸진은 나보고 리스트에 아무나 카투사 이름을 몇명 써 넣으라 한다. 같은 식사를 2번 해도 관계없으며 한국사람 글씨는 비슷해서 내가 써 넣어도 표시가 잘 안나니 괜찮다는 것이다. 심심하면 몇 명씩 써 넣어 주고 마감을 하였다. 어차피 서류는 모두 내 손에서 정리가 되는 것이므로!
한미 연합 훈련 등 큰 훈련이 있게 되면 식당도 바쁘다. Supply Room이나 S-4에 가서 훈련장에서 쓸 물품이나 전투식량인 C-Ration 을 수령하기도 하고, 훈련장에서 식당으로 쓸 큰 텐트를 꺼내어 손질도 하고 훈련장에 나갈 쿡과 부대에 남을 쿡을 선정해야 하며 메뉴도 두 종류로 작성해야 된다.
그런데 대부분 높은 산에 있는 훈련장(훈련은 낮은 곳에서 이루어지지만 우리부대는 통신부대이므로 훈련만 있다하면 전파가 잘 터지는 높은 산으로 올라간다. 그때 우리부대 훈련장은 천안 성거산에도 있었다. 가끔 집에 올때 시간이 맞으면 훈련장 가는 차를 얻어타고 오는 때도 있었다)에서는 물, 식재료, 물품, 쿡 등 모두 부대에서 만큼 충분하지 못하므로 제대로 갖춰 요리하여 먹을 수는 없다. 그래서 간이 식사가 요리되는 셈인데 여기에도 매뉴얼이 있다.
# 참고 : C-Ration(보통 ‘씨 레이션’이라고 말하지만 본 발음은 ‘씨 뢔션’이다.)
6-25 전쟁 때 헐벗고 굶주리는 우리 국민들에게도 더러 지급되었었고 그 일인당 작은 박스가 12개 들어 있는 큰 ‘C-Ration 박스’는 매우 튼튼하여 이걸 구하면 집에 두고 물건을 담아두는데 요긴하게 쓰였다. ‘레이션박스’로 통칭된다.
아마 그때 배급으로 나누어 준 씨레이션은 유효기간이 지났거나 다 되어가는 것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버릴 것을 나누어 준것이니 기분이 나쁠 수도 있지만 그것이라도 먹고 살아났으니 감사할 일이다. 유효기간이 바로 지난 것 중에 변질된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Supply Room에서 일할 때 씨레이션도 관리를 했었는데 날짜를 확인하여 유효기간이 지난 것은 폐기 처분을 하는데 창고에서 꺼내어 앞에 쌓아 놓으면 트럭이 와서 싣고 간다. 우리는 심심하면 살짝 뜯어서 이것 저것 빼 먹고 도로 넣어두기도 하였다.
그런데 왜 C레이션이냐? A나 B는 어디 두고?
그것은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이렇다.
식당에서 제대로 조리하여 주는 음식은 A-Ration,
훈련장 같은데에서 반 조리 정도로 간단히 조리하여 주는 음식은 B-Ration이며,
전쟁이 벌어거나 훈련으로 취사부대가 따라다닐 수 없을 때 조리없이 먹을 수 있는 전투 비상식량으로 C-Ration이 지급되는 것이다.
훈련장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보면 훈련장에선 채소가 귀했는지 야채를 수북히 쌓아놓고 먹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6. Sergeant Sigarette
나와 같이 SP에서 근무하다 A중대로 내려온 카투사 중에 나보다 4개월 정도 고참인 김태석(가명) 병장이 있었다. 그는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GI들 사이에서 ‘싸진 씨그뤳’으로 통했다.
아는 사람(GI)을 만나기만 하면 ‘가주와, 탐배!’라고 말하여 담배를 얻어 피우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담배를 보면 자기 담배인 양 꺼내 피우는 약간은 낯이 두꺼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카투사나 GI에게 재미있는 사람 정도로 그렇게 미움을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카투사가 외출을 했을 때 헌병을 만나면 헌병이 무척 반가워한다. 물주를 잡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지품 검사를 하여 제일 많이 적발 되는 것이 ‘양담배’와 ‘달러’소지이지만 그 외에도 많다. 무사통과는 불가능하고 얼마나 적게 뺏기느냐가 관건이다. 거기다가 결정적으로 카투사의 보직은 자기들에게 영향을 끼칠만한 힘이 있는 보직이 거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말 난 김에 미군부대 생활의 부정적인 면을 들추어 본다.
나와 식당에 같이 근무하는 GI Cook 중에 부인이 한국 여자이면서 일년 만기인 한국 근무를계속 연장 연장하여 한국 생활이 4~5년인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한국사람 모두를 ‘슬렛키 한초’라고 항상 말하고 다닌다.
‘슬렛키’란 어원은 모르겠다. 국어, 영어사전을 두루 찾아봐도 안 나온다. 뜻은 ‘비전문적 절도(좀도둑)’정도를 말하며, ‘한초’는 일본어에서 온 ‘조장, 대장’정도의 뜻을 가지고 있다.
너는 부인이 한국사람인데 왜 한국인을 그렇게 나쁘게 말하냐 했더니 자기 눈으로 수없이 봐왔고 사실이라고 한다. 그럼 내가 슬렛키하는 것을 보았느냐 했더니 보진 못했지만 남 모르게 분명히 했을 거라 한다(찔끔! ^^). 그 대신 그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또 아주 나쁜 것만도 아니다.
혹시 한국사람의 나쁜 짓을 그사람이 발견을 해도 그러려니 할 뿐 그런 사실을 처음 접한 GI처럼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라도 된 듯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떠들어대고 보고를 하거나 그 사람을 내보내라거나 하지는 않는다.
월급 1천원 정도를 받는 군인(카투사)이 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당장 교통비로도 턱없이 모자란다. 그럼 생활하는 데 필요한 그 돈은 어디서 생기나? 확실한 근거는 없고 내 추측에 카투사의 1/3 정도는 집에서 가져다 쓴다고 본다. 나도 32개월 동안 몇달치 월급 정도를 갖다 썼다.
나머지 2/3 정도는 자체해결을 한다. 그 GI 말대로 슬렛키를 하거나 남에게 뜯어서 쓴다.
일반적으로 군대의 업무를 4가지로 나눈다. 1과 인사(행정), 2과 정보, 3과 작전(교육, 훈련), 4과 보급(큰 부대에선 G-1, G-2... 이렇게 나가고 작은 부대에선 S-1, S-2...이렇게 나간다. ‘G’는 General을 뜻하고 장성급 이상의 지휘관이 있는 부대, ‘S’는 Staff를 뜻하고 장성급이 아닌 지휘관이 있는 부대에 붙인다한다. )
그중 어디가 제일 좋을까? 물품이 풍부한 건 당연히 S-4 보급이다. 그러나 다른 부대도 운영상 물품이 필요 없는 곳은 한 군데도 없으므로 어디에나 물건은 있게 마련이다.
그래도 S-1 인사와 S-2 정보는 쓸 물건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럼 제일 배고플까?
그것도 아니다. 2과는 비리수사도 겸하고 있는 곳이니 생기는 것 있을때 수시로 인사를 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가차없이 당할 수 있고, 엉뚱하게도 제일 별 볼일 없을 것같은 1과는 이런 모든 군대 내의 보직을 이리저리 옮기는 일을 하는 곳이니 1과 인사가 힘은 제일 세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여러 곳에서 통한다.
그럼 또 인사과 근무자들은 겁나는 것이 없을까? 그것도 또한 아니다. 결정적 비리가 적발되면 2과(CID, 보안사 포함)에게 당할 수도 있다.
-김포에는 GI CID에 한국군 중사가 하나 파견나와 있었는데 이 사람은 계급은 비록 중사이지만 파견대장, 인사계와 맞 먹는다. 상급자이니 말씨는 존댓말을 쓰지만 농담을 함부로 하며 말투는 전혀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리고 사실인지는 몰라도 자신은 상사 진급을 하지 않으려고 돈을 쓴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해가 잘 안되는 일이지만 계급이 달라지면 보직이 바뀌기 때문이라 한다.-
그보다 더 무시하지 못하는 곳은 병원이다.(사회에서도 의원과 병원이 있듯이 군대에도 작은 병원은 Dispensary이고 큰부대 종합병원은 Hospital이다.)
병 고치는 것 외에 아무런 힘도 없을 것 같은 의무병이나 병원 관계자들에겐 누구나 순종적이다. 누가 언제 어떻게 아플지 모르고 아프지 않아도 미군부대 병원에서 약이라도 타 가고 싶은 사람 많은데 함부로 대했다가는 큰 고생하는 수도 있다. 헌병대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힘좀 쓰는 부서에 있는 사람일 수록 VD(Venereal Disease, 성병) 때문에 병원에 가는 일이 많다.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가 계급사회인 군대에서도 존재한다.
내가 직접 보고 말하는 사실은 별로 없고 부대내에 널리 퍼져서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듣고 하는 말이므로 모든 사건은 루머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내가 쫄병일 때 식당 운전병을 하다가 보직없이 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들은 얘기로는 GI를 끼고 식당 물품을 한 트럭 해 먹다가 적발되어 영창을 갔다와서 아직 보직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는 이미 서울에 집 한채를 사 놓았다는 것이다.
또 짚차가 미국에서 올때는 분해상태 포장으로 들어와서 현지 도착하여 조립을 하는데 포장도 뜯기전 사라졌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런 경우는 SP나 SG(Security Guard, 외곽 경비)와 CID의 상호 묵시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대형사고에도 근무자와 책임자가 교체되는 정도로 끝나고 마는 경우가 많다.
우리 김포부대는 통신부대로 비교적 물자가 풍부한 편이 못되는 곳이라한다.
우리 부대에서 제일 생기는 것 많은 곳으로는 Gas Station(주유소)을 친다.
전에 한번 카투사가 몸은 편한데 빳따가 센 편이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생기는 것이 많은 곳 일수록 그렇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가만히 있는데 누가 먹으라고 갖다 주는 사람 없다. 물건을 취급하는 실무자들은 대부분 중고참들이고, 왕고참급은 보통 책임자로 펜대를 잡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만 있으며 생기는 것이 있을리가 없다. 그러므로 이유없이 집합을 시키거나 작은 잘못에도 트집을 잡고 ‘맞을래, 보고를 하래?’하고 두들겨 패면 맞고서 갖다 바치던지 맞기전에 수시로 알아서 인사를 닦아야 하는 것이다.
우는 아기에게 젖 주는 것처럼 아기를 안 울리려면 울기 전에 젖을 주어야지!
이점은 한국군 특과에 근무하는 부서에서도 통하는 원리가 아닐까? 혼자만 먹으면 체한다는 것은 금과옥조(金科玉條)나 마찬가지인 원리!
심지어 인사과에서도 당일 외출증 정도는 조건없이 내어 주지만 2박 3일 이상 외박증이나 당연히 주게 되어있는 휴가나 진급도 그냥은 이핑계 저핑계를 대고 잘 내어주지 않는다.
(보통 2박3일 외박에는 양담배 한보루, 5박6일은 양주 한병 등이 불문율)
항상 휴가도 정해진 인원이 있는데 같은 기간이 겹치면 인사를 잘하는 사람은 원하는 때 보내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때 보내주며, 그당시 사병 진급은 왜 그런지 모두 병장을 달고 제대하지 못하고 상병제대가 절반이 넘었다. 그러므로 일병까지는 정해진 기간대로 진급을 하지만 상병, 병장은 TO가 내려오는 대로 진급을 시켜주기 때문에 머리가 터진다. 그러므로 인사과의 확실한 돈줄이 된다.
고참이 되어 병장을 달지 못하면 쫄병들에게 권위가 안서고 보직에도 영향이 있다. 나는 마침 전입동기로 대전 유성이 집이고 중학교 체육교사를 하다 입대한 박상훈이라는 친구가 인사과에 있었고 내가 우리 중대의 차기 선임하사로 내정되어 있어서 돈은 들이지 않고 병장을 달고 인사과 사병들과 인사계를 모시고 밥 한번 먹는 것으로 끝냈다.
그외로 또 모든 사고는 돈이 들어야 수습이 된다.(나까미만 각오하면 돈 들일 필요 전혀없다.) 나는 선임하사를 10개월 정도를 하면서 이런 중간 심부름을 무수히 하고서 잘못된 인식이 머리에 박혔었다. 이런 교섭력이 있는 선임하사의 중대는 대체로 원활하게 돌아가는데 그렇지 못하면 하급자들에게 불만이 쌓인다. 똑똑치 못한 나는 이런 것이 사회생활의 요령인 줄로만 알았다. 제대하고 사회에 나가면 이런 요령을 통하여 남보다 사회생활을 더 잘하게 될 것으로 믿었다.
7. 검열(Inspection)
우리 부대는 보병부대가 아니기 때문에 육군다운 군생활에 대하여는 잘 모른다.
검열은 일년에 한번 사격연습이 있을 때 사격 전 총기 검열, 막사 검열, 그리고 한밤중에 불시검열 등이 있다.
한 줄로 죽 늘어 서 있다가 검열관이 앞에 오면 ‘I’m Ready For Inspection, Sir!’하고 경례를 붙인다.
총기 검열은 무기고에서 총을 받아서 먼지를 잘 떨고 고장난 것인가 아닌가 확인만 하면 되는데 거의 먼지만 떨면 된다. 검열관은 지나가면서 가끔 하나씩 총을 달래서 격발시켜보고 지나간다.
막사에서의 검열은 훈련소의 내무검열 비슷한 성격인데 일년에 한번만 했다.
막사를 깨끗이 청소를 하고 관물을 침대위에 줄 맞춰 늘어놓고(Display) 검열을 받는다. 개인 락커도 열어보고 청결상태나 불법 물품 소지 여부를 검사한다.
청소는 막사마다 언제나 House Boy가 있어서 미군들에게 매월 몇 달러씩 받고 청소 및 세탁물을 책임져 주는 사람이 있으니 우리는 개인 물건만 잘 정리하고 불법적인 물건만 안 보이는 곳에 치웠다가 검열이 끝나고 갖다 놓으면 된다.
골치 아픈 것이 불시 검문이다. 한밤 중 갑자기 들이 닥쳐 막사 불을 켜고 락커를 열으라고 한다. 주로 해피 스모크(대마초) 적발을 위한 것으로 더러는 탐지견을 끌고 와서 검열을 한다. GI들은 칠팔십 %는 대마초를 피는 것 같다. 그러나 적발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누가 ‘나 잡아 가시오!’하고 막사 락커 안에 보관을 하겠는가?
주중에는 피는 사람도 거의 없다. 주말에는 많이 피우는 데 막사 한방에 모여 책상 위에 잔뜩 펼쳐놓고 피우다 늘어져서 침대에 누워있는데 만약 그때 불시 검열이 나왔다면 모두 그 자리에서 수갑 채워 끌고 가서는 영창으로 보낸다.
나는 검열에서 두번을 적발 된 적이 있었는데 두번 다 양주였다. 한번은 ‘Johny Walker Black Label’이 락커 안에 있었는데 상납용이었는지 밖으로 내 가려고 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검열관은 장부에 기록하고 카투사에게 양주 소지는 불법이라고 말하고 가져갔다.
나는 속으로 어디서 났는가? 누구를 통하여 구했는가? 돈을 어디서 났는가? 어디에 쓰려고 샀는가? 등을 물어 볼 것 같아 대답할 말을 준비하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 그뿐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또 한번은 ‘Jim Beam’이라는 값싼 양주를 한병 넣어두었는데 또 걸렸다.
양주병을 들어서 라벨을 한번 들여다보더니 나를 보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탁상 머리 아파!”
라고 한국말로 말하곤 많이 마시면 머리 많이 아프니 조금만 마시라고 하면서 양주를 도로 넣어 놓고 갔다.
(일본어에서 온 말이지만 GI들이 한국말로 알고 잘못 쓰는 말이 몇개 있다.
탁상-많이, 슬렛키-좀도둑, 스꼬시-조금, 모스꼬시-조금 있다가, 한초-대장, 마마상-아줌마, 파파상-아저씨)
적발된 경우는 어떻게 될까? 양주나 양담배 같은 것은 GI에게는 해당 안되고 카투사에게만 불법적인 것이므로 중범죄는 아니다. 더러 무시하고 봐 주는 경우도 많고 적발되었다 하더라도 물품만 압수하는 선에서 끝나고 아무것도 물어보거나 처벌하는 경우는 없다.
8. 제식 구령
이 말은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통신부대에서 별로 쓰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 부대에선 대대 지휘관(Bn Commander)의 의지에 따라 가끔씩 Morning Formation(조회)을 갖고 PT 체조나 구보, Road March(가두행진)를 할 시에 들어볼 수 있다.
신기한 것은 한국군이나 미군이나 제식 구령은 실제의 낱말과 발음이 많이 변형된다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어 보자. 한국군의 ‘하낫 둘 셋 넷’을 어떻게 구령으로 붙일까?
나도 처음엔 분명 한국말이지만 못 알아 들었었다.
‘하나-으앗, 둘-울, 셋-엇, 넷-엇’이다.
다시 연속으로 붙여 말하면 ‘하낫 둘 셋 넷’이 ‘으앗 울 엇 엇’이 된다.
걸어가면서 ‘하낫 둘, 하낫 둘’을 반복하여 구령 붙일 때는 아예 ‘으아 우어 으아 우어’라고 한다. 내가 훈련소에서만 들어본 구령이고 오래 전이니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미군! ‘원 투 쓰리 포’인데 ‘쓰리’는 ‘드리’로 들리나 ‘원 투 드리 포’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 처럼 변형된다. ‘원-핫, 투-툽, 드리-드립, 포-폽’이 되어서
‘핫 툽 드립 폽’으로 들린다. 딱딱 끊어지고 절도 있다.
마찬가지로 ‘차렷’은 ‘어텐-션’인데 우리 귀에는 ‘텐—셧’으로 들린다.(처음엔 ‘틴치--핫’으로 듣고 무슨 단어인지 몰랐다.)
‘어텐--션’을 ‘어’는 들릴 듯 말 듯, ‘텐’ 조금 길게 띄었다가 ‘션’은 ‘셧’으로 강하게 변형되어 들리는 것이다. 우리의 ‘차려’를 ‘차렷’으로 구령 붙이는 것과 같은 원리다.
‘전체 쉬어(Stand at Ease)’는 ‘스탠앳--티스’, ‘편히 쉬어(At Ease)’는 부드럽게‘애리즈’, ‘앞으로 갓(Foward March)’은‘포워드--허치’로 , ‘뛰어 갓(Double Time March)’은 ‘더블타임--허치’(굵은 글씨는 강하게)
동두천의 미보병 2사단에서 근무한 분 있으면 더 재미있는 제식구령을 많이 아실 텐데!
제일 많이 쓰고 색다른 내가 아는 것은 두가지 ‘핫 툽 드립 폽’과 ‘텐--셧’뿐이다.
우리 통신대대에서는 보병부대와 같은 전투와 관련하여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일년에 한번 M-16 실탄 3~40발 정도 사격을 하는데 우리 부대엔 아예 사격장이 없고, 인근의 김포 공수부대 사격장에 가서 사격을 한다. 훈련소와 같은 엄격함이 없이 그저 가서 실탄을 소비하고 오는 수준이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인지는 모르나 체력강화에 대한 지침이 내려오는지 가끔씩 가다 Morning Formation을 갖고 각 작업장 Section별로 정렬하고 있다가 중대장의 훈시를 들은 후 간단한 PT체조나 구보를 하는 수가 있다.
하사관들 중에서는 뚱뚱한 사람들이 많아서 조금 뛰는체 하다가 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일반 사병들은 열심히 뛰는데 4열로 줄을 맞춰 뛰면서 옆에서 깃발을 들고 구령을 붙이거나 군가를 선창하는 사람이 있다. 특별한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사병 중 잘하는 사람이 하는 것인지 가끔 바뀌기도 한다. 군가를 부를 때 우리 한국군(훈련소에서)은 평소 내무반에서 익혔던 군가를 부르는데 조교가 옆에서 같이 뛰면서 “행군(구보)간에 군가한다. 군가는 ‘진짜 사나이’군가 시--작!”하면 발걸음에 맞춰 전원이 동시에 시작하여 동시에 끝난다.
미군은 좀 다르다. 옆에 깃발을 든 사람이 모르는 노래를 배울 때 처럼 한 소절씩 선창을 하면 전원은 따라 부르는데 일정한 군가를 부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우리 민요의 매기기와 받기를 하는 것처럼 문장을 지어내서 하기도 한다. 이때 매기는 사람의 역량에 따라 매우 재미있어 힘든 줄을 모르고 뛰면서 따라 부른다.(‘Cadance’라고 하며 큰 부대에서는 Cadance Test도 있어서 잘하는 사람을 뽑기도 하는 모양이다.)
대부분 영어를 잘 모르는 나같은 사람은 반도 못알아듣지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소리만 비슷하게 따라 불러도 흥이 난다.
지금까지 기억나는 몇 마디 ‘I Wanna Be an Airborne Rager!’, ‘Here We Go’와 무슨 뜻인지는 모르나 ‘Stuck It Up the Lady’뿐이다. 보나마나 일것이지만.....!
하루는 아침에 구보를 하고 나니 재미가 있어서 미군군가를 배워볼까하고 Supply Room의 그림슬리 일병에게 선창을 시키고 나는 따라 불렀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싸진 앤더슨이 빙그레 웃더니 나보고 그 노래의 뜻을 아느냐고 물어봤다. 모르고 그냥 따라 하는 거라 했더니 배우지 말란다. 왜냐하면 매우 음담패설하여 다른데 가서는 부를 수 없는 노래라 한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주로 남자들만 있는 군대에서는 그런가 보다.
우리도 해병대의 ‘흘러가는 물결 그늘 아래......’라던가 ‘인천의 성냥 공장......’등등의 노래가 그렇지 않은가?
행군 시에는 위에 쓴 구령으로 ‘앞으로 갓→포워드--허치’한 다음 ‘핫 툽 드립 홉 핫 툽 핫 툽’이라든가 ‘Your Left Right Left Right Left’같은 것을 많이 사용한다. ‘제자리에 섯(모두 섯)→그룹--홀트(Group Halt)’이라 한다.
보병 부대에서 근무했더라면 재미있는 행군 중에 있었던 이야기나 군가 하나 쯤은 소개할 수 있었을 텐데 어쩔 수 없음을 죄송하게 생각한다.
다음 세상에 태어나서 또 카투사로 가게 된다면 확실하게 보병으로....! ^^
9. 대대 인사계 레니오 가(家)에서
미군부대에 배속된 지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파견대장 정소령(이분은 태권도 무덕관 공인 5단이다.)은 당시 미군장교 클럽에서 태권도 시범을 보이는 등 미군 사이에 태권도 실력이 널리 알려졌었는데 무시할 수 없는 미군요인-304대대 GI Bn CSM(대대 인사계)인 Renio-으로부터 자녀 태권도 지도를 부탁받고 대한민국 육군 중령 체면상 자신이 직접 꼬맹이 몇명을 가르칠 순 없고, 그렇다고 부대내에 영향력이 큰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기도 곤란하여 사병 중에서 선발을 하여 지도를 맡기려고 하였는데 나는 영문도 모르고 선발이 되었다.
최종 선발이 되었던 사람은 나 말고도 둘이 더 있었는데 둘 다 실지 유단자이며 실력으로는 나보다 훨씬 낫다.
그런데 하나는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고참병으로서 사양을 했고, 다른 하나는 실력은 가장 뛰어난데 배속된 지 한두 달 정도 밖에 안 되는 신병으로서 언어소통에 문제가 있었다.
(내가 Supply Room에서 Mess Clerk으로 갈 때와 상황이 똑같다!)
외박이 힘들던 일등병 시절, 파견대장과 독대하여 주중 2번 영외로 나가 미군자녀 몇 명을 지도하는 조건으로 매주 외박증을 끊어주겠다는 유혹에 넘어갔다.
그분 말대로, 미군부대에 있으면 욕설 중심의 거친 영어만 배우지 점잖은 영어 제대로 배우기 힘들다. 거기다가 미국인 가정문화를 체험하기란 더더욱 하늘의 별따기다.
이런 기회에 공부 좀 하고 그 사람들에게 잘만 보이면 미국 구경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였다.
이건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다. 마다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사실 손해 볼 것 전혀 없는 유혹인 것이다.
고참들도 힘든 매주 외박증을 보장해주고 주중에도 저녁에 징그러운 고참들로부터 해방되어 김포에서 용산 South Post까지 일주일에 두 번(주중 1일+토요일) 영내버스나 시내버스를 타고 나가고, 들어오는 시간은 내 마음대로다.
GI들의 외출 제도는 Day Pass, Over Night Pass, 3 Days Pass, Ordinary Leave 4가지가 있다. 우리도 이들에게 준한다.
# Day Pass(외출증) : 근무가 아니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 단, 밤 12시 이전에 귀대해야 한다. 우리도 비슷하지만 주중에 나가는 것은 힘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쉽지 않다.
# Over Night Pass(외박증) : 하룻밤 자고 들어올 수 있는 패스다.
# 3 Days Pass(2박3일 외박증) : 보통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까지이나 헌병대 처럼 조별 교대근무 하는 부서나 휴무 중인 병사는 주중에도 가능하다. 2박 뿐 아니라 휴무만 얻을 수 있으면 5박, 6박도 가능하다.
# Ordinary Leave(정기 휴가증) : 대개 일년에 한번 30일간 순번 대로 간다.
모든 외출증은 귀대날짜의 밤 12시가 제한 시간이다.
가끔 가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외출을 제한하여 부대원 전원이 외출 금지를 당하는 수가 있는데 나 하나만은 완전 열외다. 인사계를 비롯하여 인사과 전원이 있는데서 지시받은 파견대장의 특별명령인데 인사계 상사조차 그 부분에 대하여는 터치 못한다!
그래서 파견대장으로부터 배려를 받아 도복도 한 벌 얻어 입고 검은 띠도 하사 받았다.
이분 역시 나를 간단히 심사한 후 자격이 충분히 된다고 단증을 만들어 준다는 것을 사양하였다.
그리하여 검은띠 두른 도복을 들고 밖에 나가는 것을 여러 차례 본 많은 미군병사들이 나를 무슨 태권도 고수인 것으로 아는 것이다.
아이들 태권도를 가르치러 갈 때 처음에는 도복을 들고 파견대장과 함께 찝차를 타고 용산 South Post에 있는 영외거주자 구역 CSM Renio의 집으로 갔다.
전에 Supply Room에 근무할 때 South Post에는 대형 Laundry Shop이 있어서 중대 세탁물을 가지고 일주일에 한번 다녀가고 가끔씩 PX가는 GI를 따라 차타고 지나다녀 보긴 했으나 군인가족이 거주하는 집을 들어가 본 것은 처음이다.
South Post에는 식품점 비슷한 Commissary(사전에는 식당, 매점 등으로 나온다) 등 여러 가지 편의시설, 학교, 체육관, 야구장 등 넓은 공간에 잔디밭도 많고 숲도 우거져 있다.
지금은 상당부분 회수되어 용산공원이 되었으나 아직도 남아있고 결국은 모두 평택으로 이전이 끝나면 회수되어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파견대장 정소령으로부터 쌍방이 소개를 받았다.
이 사람 싸진 메이저 레니오는 비록 계급은 주임상사이지만 우리 김포 부대 내의 사병 중에서는 가장 높은 사람으로 영향력은 크다.
나는 김포 부대 카투사 중에서 가장 태권도 고수라고 소개 되었다. ^^
싸진 레니오 부부는 하와이언으로 하와이에 본집이 있다고 한다.
나중에 나보고 하와이에 여행을 오면 찾아오라고 하여 하와이도 넓을 텐데 어떻게 찾느냐 했더니 하와이에 와서 전화번호부에서 Renio를 찾으면 자기가 아니어도 친척일 테니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 있다가 정소령은 가고 내가 태권도를 가르쳐야할 꼬맹이 들이 왔다.
이집 자녀들은 4명인데 어찌 된 일인지 큰 아들은 나이가 많다. GI인데 김포에 근무하지는 않는다.
둘째는 초등학교 5학년 여자 Angie(Angela)인데 몸집은 고등학생 정도이다. 셋째, 넷째는 초등학교 2, 3학년 남자 아이로 셋째가 Tony(Anthony), 넷째가 Eddy(Edward)로 두 살밖에 차이나지 않는 누나에 비하여 현저히 작다. 서양 사람치고 아이도 많고 첫아이 하나만 나이가 크게 차이 나는 이유가 궁금하다.
내가 가르칠 대상은 밑에 두 꼬마이다.
첫날은 거실에서 옷 입고 띠 매는 법, 인사하는 법, 준비 자세 등 간단히 마쳤다.
내가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되는지 기약이 없다. 제대하는 날까지 해야 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하다가 고참이 되고 더 중요한 일을 하게 된다면 이일을 할 사람을 후임자 중에서 찾으면 아마 희망자가 줄을 설 것이다. 내가 외박 자주 나가는 것을 봐 왔으므로....!
또 그때까지 가르칠 내용이 없다. 내가 그럴 실력이 안 된다.
다음 주에는 혼자 찾아갔더니 거실에 비슷한 크기의 여자 아이들 둘이 더 와 있었다.
흑인아이와 백인아이가 하나씩이다. 이제 여기 세계 3대 인종이 모두 모인 것이다.
싸진 레니오와 친하게 지내는 이웃의 아이들로 아버지가 흑인은 상사, 백인은 대위라고 한다.
레니오 부인이 나보고 괜찮겠느냐고 해서 거실이 다소 좁은데 난 관계없다고 했다.
초등학교 2, 3학년 짜리 들인데 장난이 반이다. 엄격하게 할 수도 없고 내가 이 아이들을 가르쳐 검은띠를 만들 것도 아니기 때문에 국민학교 교사의 경험을 살려서 놀이삼아 게임 삼아 재미있게 가르치며 놀아줬다.
언젠가는 좀 늦게 끝났는데 레니오 부인이 저녁을 먹고 가란다.
밥을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미국 가정에서는 어떤 식사를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부대 식당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도 궁금했다. 한편 영화에서 보듯 근사한 저녁식사가 나오는 건 아닌가 기대가 되기도 하고.....!
그래서 기다린 결과 내용은 실망스럽게도 우리가 집에서 마누라 없을 때 이것저것 챙겨먹는 그런 수준이었다. 접시 한쪽에 볶음밥 약간, 계란 후라이, 빵과 감자 약간 그리고 탄산 음료!
내가 기대가 너무 컸나? 그리고 이 사람들 매일 이렇게 식사를 하는 건가?
매주 2번을 가는데 주중 한번과 토요일 한번이다. 요일을 정하긴 했지만 그집의 사정이나 나의 사정으로 요일을 바꾸거나 빼 먹는 경우도 많았다. 갑자기 못 가게 되면 전화를 해 주면 되고!
한번은 아이들 때문에 내가 자유롭게 행동을 못하니 세집에서 돈을 모아서 Pay를 주겠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군인이고 태권도 도장에서처럼 매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니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럼 선물을 사주겠다고 한다. 그것도 사양했다.
돈이든 선물이든 받으면 그 순간부터 나는 자유를 읽고 얽매이는 관계가 된다.
파견대장은 무슨 일을 하는지 인사과에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육군본부를 가 있다시피 자주 간다고 한다. 어쩌다 만나면 항상 ‘수고한다. 네가 그 일을 맡아주므로 여러 가지 일이 잘 풀린다. 태권도는 잘 가르치던 못 가르치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집 사람들의 기분만 상하지 않게 행동 잘하라.’이런 내용의 말을 했다.
레니오 집에서 아주 민망한 경우가 두 번 있었다. 내가 민망할 건 없고 내가 보기에 민망한 것이다. 한번은 GI인 그 집 큰 아들이 집에 있었다. 예쁘장한 한국여성을 여자 친구로 데려와 같이 있었는데 그집 가족과 내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둘 사이에 빈틈이 하나도 없도록 바싹 끌어안고 애정행각을 서슴없이 벌인다. 부비고 뭉개고 쪽쪽 소리가 나게 빨고 다른 사람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만 자꾸 얼굴이 붉어지려고 한다. 미국은 성에 개방적이라더니 결국 나도 가까이에서 목격을 하게 되는구나! 침실이 바로 옆인데 좀 들어가서 그러지!
내가 아이들을 태권도 연습 시킬 시간이 되니 방으로 들어가서 더 이상은 목격을 못했다. 나중에 아이들 태권도가 끝나고 그 여자 친구가 혼자 나와서 음료수를 따라 나에게 가져와서 권한다. 그리고 한마디!
“김일병님, 미안해요! 제가 어쩔 수 없었어요!”
내가 본다고 애정 표현을 거부하다가 깨지지는 말아야지. 모쪼록 그 한국 여성도 결혼에 성공했기를 바란다.
또 한번은 갔더니 레니오 부인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싸진 레니오는 주방에서 무슨 요리를 하고 있는데 그 옆에 몸집이 꽤 되고 상당한 볼륨있는 몸매를 가진 흑인 여성이 레니오의 허리를 감고 몸을 바짝 밀착시키고 있었다.
이웃이 아무리 사이가 가까워도 배우자까지 공유할 수는 있는 것은 아닐 텐데 혼자 앉아 태연한 부인이 도대체 이해가 안간다.
잠시 소파에 앉아 있는데 이번엔 그 흑인 여성이 활짝 웃으며 음료수를 나에게 가져다 주며 내 옆에 앉는다. 내 손을 잡으며 아이들을 재미있게 가르쳐 줘서 아이가 좋아한다면서 고맙다고 하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혹시 이 여자가 나를 깔아 뭉개면 어쩌나 겁이 났다.
다행히 거기까지 나가지는 않았다.
인물로는 레니오 부인이 훨씬 낫다. 이 사람들의 나이는 삼십대 초중반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레니오 부인은 하와이언이고 하와이언은 폴리네시아계로서 여성들이 젊어서는 날씬하고 예쁜데 결혼만 하면 머지않아 몸집이 집채만 하게 커지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레니오 부인은 아이를 넷이나 낳고도 몸 관리를 잘 하는지 날씬하다. 본인 말로 Exercise를 많이 한다고 한다.
이 일이 내가 민망하여 눈 둘곳을 몰랐었지만 나는 이사람들의 이웃끼리 어디까지 얼마나 깊은 행동까지 용납이 되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물어보기도 민망하여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한번은 태권도를 마치고 신발을 신으려하니 잠시 기다리라 한다. 태권도 배우는 백인아이 아버지가 방문을 했는데 그 사람도 돌아가려하니 차를 태워다 주겠단다.
어디까지 가느냐 물었더니 관계없이 내가 가고자 하는 곳까지 태워다 준단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명동에서 나보다 일년 정도 늦은 후임병을 만나기로 했었는데 명동에 가는데 어떠냐 했더니 두말없이 ‘OK!’
나가서 보니 보통 승용차가 아니다. 장교라서 대형 세단을 끌고 다니나? 캐딜락만한 크기에 납작하고 우수한 완충기(=쇼바, Shock Absorber)를 장착했는지 겉에서 보기에는 차가 많이 흔들리지만 타고 보니 충격이 거의 없이 승차감이 좋다.
이 차를 얻어타고 명동 사람들이 많은 복잡한 곳에서 내렸다.
여러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 가운데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
“저눔 시키, 군대 생활 할 만큼 하네!”
딱 한번 얻어 타본 걸 아는 사람 있나? 매일 그런 줄 알았겠지!
이런 생활도 두달이 넘어 세달이 다 되어가니 귀찮아 진다.
나도 쫄병 벗어난지 꽤 되어 그 사이 상병도 달았고 외출, 외박증 받는데 별 지장 없기도 하고 그렇게 매주 외박을 나갈 일도 없다.
그동안 아는 친구, 친척 다들 한두 번씩 찾아다니며 술도 밥도 얻어먹고 용돈까지 타서 썼는데 더 이상 찾아가야 반가워할 사람 거의 없다.
이걸 다른 사람에게 넘길까? 조금 아깝기도 하고.....!
어느 날 싸진 레니오 집에 들어섰는데 기다리고 있어야할 아이들 4명이 보이지 않는다.
레니오 부인이 오늘은 애들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미리 말 못해 미안하지만 아이들 모두 체육관(Gym) 태권도장에 등록을 하였다한다.
괜찮다고 인사하고 되돌아 나오려고 하니 잠간 들어와서 기다려 달라고한다.
조금 있으면 싸진 레니오가 들어오는데 다과나 들면서 기다리란다.
왜냐고 물으니 같이 PX가서 청바지라도 하나 사 주겠다는 얘기다.
그럴 필요 없다고 탄산수나 한잔 마시고 가겠다고 하고 음료수 마시며 얘기 조금하다가 나왔다. 의례적인 말이겠지만 언제든지 내집같이 놀러 오란다.
또 망설이던 내용이 저절로 고민 필요 없는 쪽으로 해결이 났다.
10. 황소와 송아지의 겨루기 한판
내가 국민학교 저학년 무렵, 그러니까 주변의 어른들이 하는 말귀를 내가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을 무렵부터는 6-25 전쟁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휴전 후 5년 정도 지나서이니까 물론 그 이전부터도 그 엄청난 전쟁이야기가 언제나 어른들의 술안주 감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일 터였겠지만 그때는 너무 어려서 그 이야기를 수용을 못했기 때문에 기억을 못하는 것이다.
우리 옆집에는 우리 아버지와 몇 살 차이나지 않는 ‘건배’라는 이름의 팔촌형님이 사셨는데, 전쟁 3년 동안 무수히 많은 실전 경험이 있는 분이었다.
그 형님은 우리 아버지께는 항렬 상 ‘아저씨’라고 호칭을 하지만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으므로 두 분이 자주 술자리를 같이 하셨는데, 시작은 이런저런 농사일, 집안일, 사회 돌아가는 일등 다양하지만 꼭 빼먹지 않는 이야기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히 전쟁이야기이거나 그 당시 일어났던 일들이다.
한번은 그 형님이 술을 마시다가 미군과 시비가 붙어 싸운 이야기를 들었는데, 미국사람들은 완력과 주먹 힘은 세지만 책상다리도 하지 못하고 쪼그려 앉지도 못할뿐더러 다리가 무척 약하다고 한다.
그래서 다리를 세게 걷어차서 쓰러뜨리고 덩치가 큰 미군으로부터 위기를 모면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팔촌형님은 빈약하다 할 만큼 덩치가 작은 편이다. -
내가 1972년 12월 12일에 군에 입대하여 군번 1232 3604를 받고 논산 제2훈련소 23연대에 입소하였다.
그 추운 겨울의 한복판 6주간의 전반기 훈련을 마치고 배출대에서 5일정도 대기를 하다가 미군부대로 차출을 받았다.
미군부대로 배치가 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생각해낸 것이 만약 미군부대에서 근무를 하다가 미군과 싸울 일이 있으면 다리를 걷어차야겠다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다.
통신주특기(36-)를 받은 탓인지 김포공항 울타리와 접해있던 미제4통신단((4th Signal Group --> 나중에 소속이 미제1통신여단(1st Signal Brigade)으로 바뀜)) 소속의 제304대대 본부중대(HHC, 304th Sig Bn)에 배치가 되었다.
총병력 500여명 중 한국군(KATUSA)은 50여명이 각 중대에 흩어져 섞여있었다.
막사 한 방에 침대가 6개 정도 있다보니 같은 한국군끼리 한방에 쓰게 되는 일이 드물었다.
이것은 신병으로서는 다행이고 고참병으로서는 불행한 일이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충분히 짐작을 하시겠지만.......!
어찌된 셈인지 지휘관(Commanding Officer=CO)인 대대장(Battalion Commander) 탐슨 중령(LTC Thomson)도 흑인이고, 부관(Executive Officer=XO)도 흑인이며, 사병들의 아버지라 할 대대 인사계(Command Sergeant Major=CSM)마져도 흑인이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미 본토에서는 흑인병사의 수가 백인병사의 10%정도밖에 안 된다는데 우리 대대에서는 절반 정도가 흑인병사인 것 같았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으나 그 당시는 Minority인 흑인들이 힘을 합쳐 주먹을 치켜들고 'Black Power'를 공공연히 외치며 약간의 문제를 일으켰다.
자기들끼리는 나이가 많던 적던 ‘Soul Brother’라 부르고, 여자에게는 ‘Soul Sister'라고 부르며 만나는 사람마다 오른손을 자기 왼쪽 가슴(심장이 있는 쪽)에 대었다가 상대편의 주먹과 부딪치고 이어서 두손을 아래위로 치고받는 복잡한 인사법을 주고 받으며, 때로는 주위의 흑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총질을 하는 시늉과 소리를 내면서 단결된 힘을 과시한다.(나중에 총질하는 시늉은 Human Relation Office에 진정이 되어 없어졌다.)
당연히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만 결속을 다지면서 소란을 피우는 이런 행동들을 곱게 볼 수 없다.
그래서 가끔씩 흑백충돌이 일어나서 헌병이 출동하고 병원에 입원하는 일도 있었다.
한번은 나도 곤란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는데 사병도 출입이 가능한 하사관클럽(NCO Club)에 술을 마시러 갔다가 화장실을 가게 되었다.
그 클럽의 화장실은 통로가 좁은데 술 취한 흑인병사 몇이 서서 얘기를 주고받다가 그중 하나가 다리를 앞으로 뻗어 지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뒤돌아 나오려고 했더니 이번에는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면서 또 하나가 다리를 뻗어 앞뒤의 길을 모두 가로 막았다.
그러면서 비웃고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도저히 숫자로나 힘으로나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한명을 상대해도 승산이 없는데 죽을 맛이다.
한동안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 체격 좋은 백인병사가 하나 들어왔다.
‘오, 하느님!’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는 혹시 이 백인 병사에게 까지 시비가 붙으면 큰 싸움이 되겠다 싶어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길을 터주는 바람에 나는 무사히 화장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런데 나갈 때가 또 걱정이다.
보나마나 들어올 때와 상황이 똑같이 전개될 터인데 말이다.
예의 그 백인병사와 쌍 나란히 서서 남성만의 고유한 자세로 볼일을 보게 되었는데, 나한테 말을 건넨다.
대충 알아들은 내용은 이렇다.
‘불안해하지 말라, 나와 함께 나가자. 3K를 아느냐? Black Power만 있는게 아니라 우리도 단체가 있다.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우리에게 연락해라. 우리가 더 세다.’
그러면서 자신의 소속과 이름, 전화번호 등을 적어주었다.
둘이서 볼일을 다 보고 나오다 보니 그들은 그때 까지 그대로 거기 있었는데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다 빠져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고 눈치를 살폈더니 다 잡은 먹이를 놓친 맹수의 표정인 것처럼 보였다.
이들의 얼굴이 모두 낯선 것으로 봐서 우리 김포부대의 GI는 아닌 것 같았다.
흑인 백인을 막론하고 어느 쪽이 더 좋은지 나쁜지로 흑백을 가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내가 군대생활 34개월 중 약 32개월을 미군부대에서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객관적인 결론을 내리자면,
흑인은 백인에 비하여 정이 많고 인간미가 있다. 좀 더 한국적인 사고와 맞는다.
백인은 ‘나’중심인데 반하여 흑인은 ‘우리’라는 생각이 강한 것 같다.
예를 들면 백인은 여러 사람이 있는 가운데에서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혼자도 잘만 먹는다. 어지간히 친하지 않으면 달라고 해도 잘 안준다.
우리는 같이 먹든가 차라리 굶으면 굶었지 혼자는 못 먹는데 흑인들은 우리와 백인들의 중간쯤이다.
친한 친구가 다른 사람과 싸움이 붙었을 때, 우리는 무조건 친구 편을 들어주는데, 백인들은 거의 개입을 안 하고, 흑인은 어느 정도 개입을 한다.
백인이 보다 더 이성적이라면 흑인은 보다 더 감정적이다.
먹는 것에도 차이가 있다.
백인은 닭고기도 날개, 가슴살 등을 좋아하고 스테이크 같은 살코기를 좋아하는데, 흑인이나 우리는 닭다리를 좋아하고, 족발이나 내장 같은 것을 좋아한다.
-옛날 노예시절 소, 돼지 등을 잡아서 살코기는 주인인 백인들이 다 먹고, 노예들은 버리는 발목, 내장, 껍데기들을 잘 손질하여 먹다보니 그 부분이 살코기 못지않은 맛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 지금까지 계속 먹게 되었을 것이고, 백인들은 그 맛을 아예 모르기 때문에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또 흑인은 쉽게 친구가 되고 친구가 되면 서로 흉허물 없는 사이가 되지만, 백인은 친구 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친구가 되어도 정이 잘 안가고 공식적인 사이가 되어 개인적인 부탁을 하기가 어렵다.
미군들의 계급체계를 살펴보면 우리와 다른 점이 조금 있다.
우선 제일 큰 차이가 지금은 전군이 모병제 이므로 모두 지원하여 입대한 직업군인이다.
우리는 하사이상을 하사관(NCO = Non Commissioned Officer)이라고 하는데 미군은 병장(SGT, Sergeant)이상을 하사관이라 하고 한 분야에 대하여 일정한 권한이 주어짐과 동시에 책임을 져야한다.
미군은 은색이 금색보다 높다. 맞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땅속 깊은 곳에서 부터 하늘까지 금, 다음 은이며 초급장교는 기둥(나무) 소, 중령은 나뭇잎, 대령은 독수리(하늘), 그 위로 별이라는 비공식설이 있다.
기술병이라고 할 수 있는 특기병(Specialist)은 계급체계가 따로 있어서 계급이 높아져도 보수에만 반영을 할 뿐 어떤 행정권이 주어지지 않는 단순 기능직일 뿐이다.
아주 특수한 분야에서는 전문성이 있으므로 특별대우를 받는 곳도 있는 모양이다.
준사관이상의 장교들은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