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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홈 스위트 홈

작성자피터팬|작성시간23.04.21|조회수203 목록 댓글 0

[홈 스위트 홈]  /   작가  최진영

 

기억 속 최초의 집에는 우물이 있었다. 우물의 돌덩이에는 초록색 이끼가 피어 있었다.

그리고 비가 그친 어느 날에는 툇마루에 청개구리가 나타났다. 당시 두어 살이던 내 손바닥보다 작고 깨끗해 보이던 연두색 생명체.

나는 손을 뻗었고 청개구리는 폴짝폴짝 뛰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울었다. 왜 울었을까? 그때 내가 운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나조차 잊어서 영영 모를 것이 되었다. 그런 일들에 대해 요즘 자주 생각한다. 분명 일어났으나 아무도 모르는 일들.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와 함께 사라져 버리는 무수한 순간들. 그런 것들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가도 한 사람의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들의 총합이라고 생각하면 의미가 없을 수만은 없고. 폭우의 빗방울 하나. 폭설의 눈송이 하나. 해변의 모래알 하나. 그 하나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렇지만 나는 청개구리를 기억한다. 이유를 망각한 나의 울음을 기억한다. 아주 많은 것을 잊으며 살아가는 중에도 고집스럽게 남아 있는 기억이 있다. 왜 남아 있는지 나조차 알 수 없는 기억들. 나의 선택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나를 선택하여 남아 있는 것만 같다. 청개구리가 나를 선택했다.

 

미래를 기억할 수 있을까? 육체의 눈과는 차원이 다른 정신의 눈이 있어 미래를 보고 기억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인생이 한 방향으로만 , 그러니까 책장을 넘기듯 오론 쪽에서 왼쪽으로, 현재에서 미래로만 흐른다는 생각을 버렸다. 시간은 인간의 언어. 측정도구. 약속. 인간이 발명하고 이름 붙인 것 그러므로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은 발산한다. 과거는 사라지고 현재는 여기 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하나의 무언가가 폭발하여 사방으로 무한히 퍼져나가는 것처럼 멀리 떨어진 채로 공존한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할 뿐 미래는 어딘가에 있다 쉽사리 볼수없는 머나먼 곳에.

인류가 동시에 과거 현재 미래란 개념을 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혼란에 빠질까? 누군가는 아주 찰라일지라도 평생 경험한 적 없는 엄청난 자유를 실감할지도 모른다. 출생과 죽음 성장과 노화 발생과 소멸을 시간이란 개념 바깥에서 이해하고싶다. 시간을 배제하고 변화를 말 할 수있을까? 죽음 다음이 있다면 어쩌면, 시간에서 해방된 무엇 아닐까?

 

삼십대 중반에 어진을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동거 생활한 지 삼 년째에 ‘나’와 어진은 위기를 맞는다. 바쁜 일상에 치여 힘겨워하는 어진과 그런 어진의 짜증에 ‘나’도 지쳤기 때문이다. ‘나’와 어진은 이별을 선택하는 대신 주변 환경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충남 보령의 작은 빌라로 이사를 했다. 앞뒤 창으로 계절마다 색이 변하는 뒷동산과 구름처럼 희뿌연 해수면이 보이는 새로운 집에서 잃어버리는 여유를 되찾아 갔다. 어진은 직장을 옮기고, 프리랜서인 ‘나’는 작업 시간을 조정하며 고되었던 일상을 환기했다.

그러나 어진과의 결혼을 앞둔 무렵, ‘나’는 암 진단을 받았다.

‘나’는 항암 치료를 끝냈지만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암이 재발했다. 의사는 3차 재발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암 진단을 받은 것이 오로지 ‘나’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심할 땐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던 ‘나’는, 병원 로비에서 누군가의 말을 듣고 멈춰 섰다. 아직 젊은 사람이 어떻게 살았기에 그런 병에 걸렸느냐는,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며 아픈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중년 남녀.

 

아프다는 이유로 잘 못 산 사람이 될 순 없었다. 어디선가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즐거운 곳에서는 날오라 하여도 내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집은 아직 없었다.

 

폐가를 고쳐서 살 겠다는 내 계획을 들었을 때도 엄마는 말도 안된다고 했다.

아픈 사람일수록 생활이 편리하고 큰 병원이 있는 도시에 살아야한다고, 병을 고칠 생각은 안하고 어째서 시골의 다 쓰러져가는 집에 기어들어갈 생각을 하는 거냐고, 불길하다고 ,

제발 정신차려라고 말했다.

나는 병원 침대에서 죽고싶지 않아. 집에서 죽고싶어.

왜 죽을 생각부터 해. 병원에 가면 살 수 있는데.

살 수 있는 생각만 하다가 죽고 싶진 않단 말이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거야.

네가 할 일은 건강을 되찾는 거야.

건강을 어디 맡겨 둔 것처럼 말하지 마.

아픈 사람이 어떻게든 나을 생각을 해야지.

아픈 사람이란 말 좀 그만해, 엄마. 나는 나을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더 행복해질 수는 있어.

우리는 차 안에서 자주 다퉜다.

 

엄마, 잘 기억해. 나는 꼭 작별 인사를 남길 거야. 마지막으로 내가 한숨을 쉬면 그건 사랑한다는 뜻이야. 비명을 지르면 그건 사랑한다는 뜻이야. 간신히 내뱉는 그 어떤 단어든 사랑한다는 뜻일 거야. 듣지 못해도 괜찮아. 나는 사랑을 여기 두고 떠날 거야. 같은 말을 어진에게도 했다. 사랑을 두고 갈 수 있어서 나는 정말 자유로울 거야. 사랑은 때로 무거웠어. 그건 나를 지치게 했지. 사랑은 나를 치사하게 만들고, 하찮게 만들고, 세상 가장 초라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어. 하지만 대부분 날들에 나를 살아 있게 했어. 살고 싶게 했지. 어진아, 잘 기억해. 나는 이곳에 그 마음을 두고 가볍게 떠날 거야. 그리고 하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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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 지붕을 철거하기 전, 키 재기 흔적이 남아 있는 문틀과 야광별 스티커가 붙어 있는 유리창은 절대 버리지 말아 달라고 업체에게 당부했다. 내게 남은 기억. 나와 함께 사라질 기억. 나는 육체고 이름이며 누군가의 무엇이다. 그러나 그보다 깊은 영역에서, 나란 존재는 나만이 알고 있는 기억의 합에 더욱 가까웠다. 사람들이 말하는 영혼이란 기억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떠났고 집은 버려졌어도 거기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런 것을 페기물로 처리하고싶지 않았다.

 

공사를 도우며 집 안 곳곳에서 여러 물건을 주웠다. 노란 슬리퍼 한 짝, 스누피가 그려진 볼펜, 빨간색 레고 블록, 유리구슬, 티스푼, 손뜨개 인형, 열쇠고리, 베이지색 단추……. 그런 것을 발견하면 흙을 털어 내고 물로 깨끗이 씻어 작은 바구니에 모아 두었다. 누군가 그것을 찾으러 올지도 모르니까. 실례지만 혹시 이곳에서 손잡이에 꽃 모양 장식이 있는 티스푼을 보지 못했습니까? 오래전 이곳에 살 때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네잎클로버 모양의 열쇠고리인데요, 제가 지금에야 그것을 찾는 이유는……. 과거에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 멀리까지 찾아와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상상하면 행복했다. 또한 나의 천국은 다음과 같은 것. 여름날 땀 흘린 뒤 시원한 찬물 샤워. 겨울날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바라보는 밤하늘. 잠에서 깨었을 때 당신과 맞잡은 손. 마주 보는 눈동자. 같은 곳을 향하는 미소. 다정한 침묵. 책 속의 고독. 비 오는 날 빗소리. 눈 오는 날의 적막. 안개 짙은 날의 음악. 햇살. 노을. 바람. 산책. 앞서 걷는 당신의 뒷모습. 물이 참 달다고 말하는 당신. 실없이 웃는 당신. 나의 천국은 이곳에 있고 그 또한 내가 두고 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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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는 무난히 끝났다. 이삿짐을 옮길 일만 남은 집을 바라보며 엄마가 말했다.

자잘한 건 매일매일 고치면서 살아야해. 이런 집에 살면 손볼 구석이 매일 생기니까 텃밭도 그래. 매일 풀을 뽑고 흙을 다지고 물을 주고 벌레를 잡고. 그런 사소한 일을 게을리 하면 안돼. 엄마는 여전히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죽음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니까.

미래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나는 이제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 눈앞에 내가 기억하는 미래가 나타났으므로. 어느 여름날에는 튓마루에 청개구리가 나타날 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향해 손을 뻗고 청개구리는 사라지고, 나는 이유를 모른 채 울어버릴지도.

나는 다시 아플 수 있다. 어쩌면 나아질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탄생과 죽음은 누구나 겪는 일 . 누구나 겪는다는 결과만으로 그 과정까지 공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이제 나는 다른 것을 바라보며 살 것이다. 폭우의 빗방울 하나. 폭설의 눈 한송이. 해변의 모래알 하나. 그 하나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물론 신은 그런 것에 관심 없겠지만.

 

[출처]  2023년도 이상 문학상 대상 수상작 ,

            최진영 “ 홈 스위트 홈” (  [책]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본문을 요약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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