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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대본

[로맨스 파파] 김모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6.10.28|조회수457 목록 댓글 0

[로맨스 파파] 김모










#1. 시골집 (낮)

 잔뜩 화가 난 파마머리 아줌마 얼굴.

아줌마 사람이 이렇게 축 늘어져만 있어! 내가 답답해 죽겠어 그냥.
 남들은 퇴직하면 낚시고 댕기고 등산도 다니고 하더만...
 하다못해 친구들 만나서 맛난 거나 좀 찾아 먹구 댕기던지.

 속사포 같은 잔소리에, 안방 아랫목에 이불 덮고 누워 고개만 내놓은 아저씨 실눈을 뜬다.
 아저씨 손을 잡아 일으키는 아줌마.

아줌마 인나, 좀!

 미적미적 아줌마가 잡아끄는 대로 마루를 지나 창고방으로 끌려가는 아저씨.
 아줌마, 벌컥 창고방 문을 열어젖혀 아저씨를 밀어 넣는다.
 창고방 한가득 쌓인 낡은 물건들.

아줌마 그렇게 할 게 없으면 이놈의 쓰레기라도 치워!

 보란 듯 문을 쾅 닫고 나가는 아줌마.
 거대한 잡동사니 더미 앞에 우두커니 선 아저씨.

아저씨 (웅얼웅얼) 여편네, 갈수록 드세 지내.

 옆에 쌓인 낡은 책 더미를 발로 툭 차는 아저씨.
 바닥에 떨어지는 만화책 더미. 만화책 한 권 들어보는
 <로맨스 파파> 글/그림 이리나

#2. 이리나 집 거실 (낮)

 빈 술병들이 뒹구는 지저분한 거실 모습 위로..
 전화벨 울리고, 자동응답기 삐~! 소리 난다.
 응답기 멘트로 흘러나오는 한결이 목소리.

한결 (응답기) 저는 우리 아빠 비서입니다. 아빠는 지금 전화 못받으니깐요, 삐~ 소리 난 다음에 말하세요!
한결엄마 (소리) 저기... 애들 며칠만 맡아줘.

 이리나, 쇼파 위에 이불 덮고 댓자로 누워 자고 있다.

한결엄마 (소리)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거든. 내일 갈게. 부탁해.

 잠결에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려 덮으며 돌아눕는 이리나.

#3. 출판사 (낮)

 편집장과 마주 앉은 이리나.

편집장 이리나 선생 이번 연재가 몇 회분이나 남았나... 거의 끝나가죠?
여직원 5회 남았죠.
이리나 그래서 다음 연재는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편집장 (말을 자르며) 그러지 말고 연령대를 좀 낮춥시다. 학원 순정물 어때요?
이리나 (떨떠름) 예?
편집장 이 기회에 컨셉을 한번 바꿔 보자구요. 너무 비슷하게 갔자나. 지금까지 쭉...
이리나 (못마땅해 웅얼웅얼) 글쎄... 별로...

 편집장 책상에 전화벨 울리면, 전화 받으러 일어서는 편집장.

편집장 (전화 받으러 가며) 생각 좀 해 보세요.

 출판사 입구.
 이리나, 출판사 직원과 얘기하고 있다.

이리나 (떨떠름) 애들 데리고 지지고 볶고 하는 게 그렇게 재밌나?
여직원 (편집장 눈짓하며) 신경 쓰지 마세요. 선생님 작품이야 고정 독자가 있는데요.
이리나 (문 열며 웅얼웅얼) 내가 이런 소리 들을 정도면 요즘 신인들은 골이 빠개지겠네.
여직원 요즘 상황이 안좋잖아요. 아참! 선생님 배경 그리는 분은 작품 준비하는 거 없대요? 실력 괜찮은 거 같던데.
이리나 실력은 있지..
여직원 한번 가지고 나오라고 하세요. 괜찮은 거 있으면 저희도 좋고.

 문을 잡고 서서 곰곰이 생각에 빠진 이리나의 옆얼굴.

#4. 이리나 집 작업실 (밤)

 거실 쪽은 웅성거리는 이리나와 사람들 목소리로 떠들썩하다.
 영주 책상 위에 놓인 그림.
 남자의 옆얼굴 세부를 다듬고 있는 영주.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그림을 덮고 배경 작업 들어간다.
 앞쪽에 붙여놓은 버스 내부 사진들을 참고삼아 연필로 스케치하는 영주.

민규 (밖에서) 영주야! 나와서 족발 먹어라!
영주 이거 마저 하고요! 먼저들 드세요! (혼잣말) 버스는 힘든데. 그냥 지하철로 할 것이지, 에이...
이리나 (문 벌컥 열며) 먹고 하지?
영주 (깜짝 놀라) 예??? 예...

#5. 이리나 집 거실 (밤)

 TV화면에는 드라마 장면이 이어지고.
 자기 집 인양 편한 자세로 자리 잡은 민규, 이리나와 뻣뻣이 앉은 기철.

민규 (영화보며) 저 봐, 또 스물 아홉 살이에요. 미치겠다니까? (기철에게) 야, 공무원! 영화 드라마에 여자 스물아홉 넘기면 법에 걸리냐?
기철 (짜증) 저는 9급이라 그런 거 모른다니까요.
이리나 (민규에게) 넌 얘 왜 데리고 다니냐. 너 만화에 아직도 미련 있냐?

 기철, 뭔가 대답하려다가 민규가 옆구리 찌르는 통에 ‘윽!’ 소리만 내고.

민규 출판사는 왜, 다음 거 때문에?

 작업실에서 나오는 영주.

이리나 어... (자리잡고 앉은 영주에게) 참! 너 작품 준비하는 거 있지?
영주 예?
이리나 왜 나 안 보여줘.
기철 (부러워서) 출판사에서 보재요?
민규 데뷔할 때가 지났지, 하긴. 영주 너 얘랑 일한지 얼마나 됐니?
이리나 3년.
영주 엥? 4년 넘었어요.
이리나 그래???

 오징어를 이리나에게 던지는 민규.

민규 이 한심한 놈아, 3년은 너 이혼한지 3년 된 거고.

 머쓱해져서 머리 긁적이는 이리나를 바라보는 영주.

민규 하여간 알아줘야 돼.
기철 그럴 수도 있죠.

 다시 응징당하는 기철.
 전화벨 소리 울린다.

#6. 아파트 마당 (밤)

 차 앞에 아이들 짐 들고 선 한결엄마와 뚱한 표정의 한경, 하늘.

이리나 마감이라 바쁜데 갑자기 이러면 곤란하자나...
한결엄마 갑자기라니? 메시지 남겼는데 못 들었어?
이리나 ...
한결엄마 여전하네...

 이리나, 답답해서 쳐다보면.
 오도마니 서서 이리나를 보고 있는 한결과 하늘.

이리나 어디, 출장?
한결엄마 음.. 갔다와서 얘기하자.

 아이들 짐을 이리나 손에 넘기는 한결엄마.
 차에 오르는 엄마를 쳐다보는 한결의 시무룩한 표정.

한결엄마 (차에 앉아 내다보며) 엄마 갔다올께! 애들 학원 빼먹으면 안 돼!

 아이들 향해 손 흔들며 차 문 닫는 한결엄마.

이리나 (웅얼웅얼) 학원? 바빠 죽겠는데 학원은 또 언제 왔다갔다하냐. 미치겠네.

 빤히 쳐다보는 아이들 시선에 괜히 머쓱해져 헛기침하는 이리나.
 한결엄마의 차 멀어지는 모습 지켜보는 이리나와 두 아이.
 하늘, 한결의 귀에 뭔가 속삭인다.

한결 (이리나에게) 아빠랑 있는 동안 컴퓨터 게임 맘대로 해도 되냐는데?
이리나 (의아해서 보면) 방학숙제 알아서 잘 하면.

 하늘, 다시 한결 귀에 대고 속삭인다.

이리나 뭐래?
한결 (새침하게) 아싸.
이리나 근데 하늘이 얘 왜 이러는데? 어디 아파?
한결 아니.
이리나 그럼 너네 동네는 이러고 노는 게 유행이야?
한결 아니, 그냥 자기 혼자 그래. 재밌대.
이리나 엄마는 뭐래?
한결 엄마하고 있을 땐 안그래. 학교에서도 공부시간엔 말 잘해.

 힘차게 고개 끄덕이는 하늘.

이리나 엄마 몰래 이러는 거야? 그건 더 나쁜데?
한결 엄만... (망설이며) 회사일도 있고.. 아빤, 엄마랑 좀 다르잖아.

 이리나,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으며 감동받은 눈치.

한결 아무래도 아빠가 더 어린애 같으니까 우리 잘 이해할거라고 생각했지.

 김빠진 얼굴로 손을 거둬들이는 이리나.
 고개 끄덕이며 씩 웃는 하늘.

#7. 이리나 집 거실 (밤)

 현관에서 영주, 이리나에게 짐을 받으며

영주 어머, 오랜만이다. 그치?
민규 한결이, 하늘이 많이 컸네. 아저씨 기억하지?
한결 (뾰족한 목소리로) 아빠 마감이 코앞이라며. 안 바빠?
이리나 어? 그게... 바쁘지. 내일부턴 엄청...
민규 (애들에게) 앉아라? 왜들 그러고 서있어?
한결 (하늘에게) 일루 와.

 안방으로 향하는 한결과 하늘.
 어리둥절해서 지켜보는 이리나, 따라 들어가는 영주.

#8. 이리나 집 안반 (밤)

 바로 들어오면 한결과 하늘 옷 갈아입는다.
 영주, 하늘이 옷 벗는 것을 도와주며

한결 (뿌루퉁해서) 저 아저씨들 지금도 맨날 와서 놀아요?
영주 매일은 아니지. 마감 때는 바쁘잖아.

 새침하게 한숨을 푹 내쉬는 한결.
 한결 귀에 다급히 속삭이는 하늘.
 의아해서 쳐다보는 영주.

영주 왜, 비밀 얘기야?
한결 (하늘이에게) 아줌마 여기 사는 거 아냐, 바보.
영주 응?

 하늘, 다시 한결 귀에 귓속말하면.
 어리둥절해서 아이들 지켜보는 영주.

#9. 이리나 집 안방 (밤)

 한결과 하늘 사이에 누운 이리나.
 한결, 하늘 불편한지 고개를 갸우뚱거리지만 이리나, 편안한 표정.

한결 바쁘다면서.
이리나 그래도 야, 이게 얼마만이냐. 좋다.
한결 아빠.
이리나 응?... 왜, 한결이 뭐 아빠한테 말할 거 있어?

 고민하는 듯이 입을 삐죽이던 한결, 고개를 젓는다.

한결 아니야.
이리나 (분위기 잡으며) 하긴, 너희들도 다 컸으니, 나름대로 고민이 있을 거야. 생각도 복잡하겠지. 엄마, 아빠 헤어지면서 생긴 문제들이라든지..

 눈살을 찌푸리며 지겨운 표정 짓는 한결.

이리나 뭐든 말해봐. 아무리 곤란한 거 물어봐도 아빠가 잘 설명을...
한결 (말 자르며) 나 그냥 잘래.
이리나 어? 어.. 그럴래?

 새침하게 눈 감으며 돌아눕는 한결.

이리나 (하늘 쪽으로 돌아누우며 혼잣말) 짜식, 쌀쌀맞기는.. 그래, 우리 하늘이.

 어느새 쌔근쌔근 잠든 하늘이.

#10. 시골집 창고방 (밤)

 대충 훑어보고 책장 넘기는 아저씨.

#11. 이리나 집 작업실 (낮)

 컴퓨터 책상 앞에 앉은 하늘.
 시끄러운 게임 효과음 속에 이를 꽉 깨물고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다.
 엄청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 키보드 방향키를 자유자재로 조작하고.
 영주, 배경작업하며 슬쩍 돌아보고 웃는다.
 콘티를 앞에 놓고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앉는 이리나.

이리나 (눈을 부비며) 미치겠네.
영주 병원 좀 가보시라니까. 그때 결막염 걸린 거 후유증인지도 몰라요.

 구석에 틀어박혀 만화책 읽던 한결.

한결 그러게 자주 좀 씻지, 쯧.
이리나 (하늘에게 퉁명스레) 너도 누나처럼 만화책이나 보지 응?
한결 (고개를 들어 보며) 냅둬. 아빠 집에 왔으니 쟤도 좀 즐겨야지.
하늘 (고개를 끄덕끄덕)

 일그러지는 이리나 얼굴.
 이리나 밖으로 나가며,

이리나 (웅얼웅얼) 환상의 복식조다, 니넨.
한결 환상의 복식, 그게 뭐야?
영주 다정한 오누이라고.

#12. 달리는 차 내부 (낮)

 운전석의 이리나와 뒷좌석의 한결, 하늘.
 이리나, 약도와 주위를 번갈아 살피며 정신이 없다.
 약도가 잘 안 보여 눈을 잔뜩 찌푸리는 이리나.

한결 (초조해서) 학원 늦겠다.
이리나 가만 좀 있어 봐. (약도 보느라 눈 찌푸리며) 이 근처 같은데..

 느긋하게 둘러보며 앉은 하늘, 눈이 커지고..

한결 (꽥) 아빠! 차!!!
이리나 (놀라서) 어어!!!

 앞 차를 들이 받을 뻔 하며 끼익~! 멈춰서면.
 휘청, 앞으로 숙여졌던 이리나와 아이들 몸이 반동으로 되돌아온다.
 반동에 흔들리며 멍한 세 사람 표정.

#13. 안과 (낮)

 눈을 꿈벅이는 이리나.

이리나 (걱정스러워서) 제가 눈에 이상이 있으면.. 정말 안 되는데요.
의사 (깐깐) 그렇게 걱정되시는 분이 몇 달이나 고생하다 이제 오셨어요?
이리나 .... 제가... 병원에 좀 공포증이..... 심각합니까?

 침을 꿀꺽 삼키는 이리나.

의사 (차트 덮으며) 노안입니다. 돋보기 맞추세요.

#14. 이리나 집 작업실 (낮)

 컴퓨터 게임에 빠진 하늘과 만화책 읽는 한결.
 백지를 앞에 놓고 책상 밑에서 안경집 만지작거리고 앉은 이리나.

이리나 (긴 한숨과 함께 혼잣말) 이 나이에...

 그림에 몰두하던 영주, 고개 돌려 쳐다본다.

영주 예?
이리나 아니. (구석을 보며) 하늘아, 좀 떨어져서 해. 눈 나빠진다.

 꿈쩍도 않고 컴퓨터 게임하는 하늘.

이리나 (웅얼웅얼) 자식도 다 소용없고.

 다시 쳐다보는 영주.
 혼자 시름에 잠겨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는 이리나.

#15. 시골집 창고방 (낮)

 아저씨, 돋보기 안경알에 입김을 후~ 불어 옷자락으로 닦는다.
 안경을 끼고 책장을 다시 들여다보는 아저씨.
 굼뜬 동작으로 손가락에 침을 발라 한 페이지 넘긴다.

#16. 이리나 집 작업실 (밤)

 혼자 앉은 이리나,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낸다.
 조심스레 안경 끼고 콘티 들여다보는 이리나.
 찌푸렸던 눈살 펴지며 ‘오호!’ 만족스런 표정.

영주 (밖에서, 다가오며) 선생님!
이리나 (후다닥 안경 벗어 책상 밑에 숨기며) 어?

 문 열리고 고개 빠끔이 내밀은 영주.

영주 애들은 계란 넣자는데.
이리나 (버럭) 라면에 계란을 넣던 오리알을 넣던 그런 거까지 일일이 물어보고 그러냐, 너는. 일 하는 거 안보여?

 멀뚱히 쳐다보는 영주.

#17. 주방 (밤)

 식탁에 숟가락 놓고 심부름하는 아이들.
 하늘, 한결 귀에 속삭인다.

한결 화난 거 아니거든. 남자들이란... 에휴!

 현관 ‘띵동’ 소리

#18. 이리나 집 거실 (밤)

 불편하게 앉은 기철과 퍼져 앉은 민규, 그리고 멍한 얼굴의 이리나.

이리나 그 힘든 시험쳐서 취직했는데, 조수로 들어오겠다니.. 미쳤냐?
민규 그림을 못 잊겠다잖아.
이리나 (답답해서) 그럼 집에서 그려! 아니 배경하던 놈이 칸 작업을 한다고 난리야.
민규 손 놓은지 1년이 넘었는데 날로는 안 먹겠다는 거지.
이리나 그럼 니가 데리고 하면 되겠네.
기철 선생님, 전 19세는 싫습니다.
민규 (헤드락 하며) 이 자식이 성인물이 왜 어때서?
이리나 미치겠네, 정말. 그래서 직장도 때려친다고?
민규 (어이없어 이리나 보며) 미쳤냐? 그 좋은 직장 왜 때려쳐.
기철 저녁에 와서 안 되면 밤 세겠습니다. 저 맘만 먹으면 칼퇴근 됩니다.
민규 장하다! 우리 공무원.

#19. 이리나 집 작업실 (밤)

 역시나 구석에 짱박혀 만화책 보는 한결과 요란스레 키보드 두드리며 장신팔린 하늘.
 그리고 나란히 앉아 수다 떨며 일하는 기철과 영주.
 기철은 콘티를 보며 칸을 정성스레 치고, 영주는 배경장면을 펜으로 그려 넣고...
 등을 돌리고 앉은 이리나.
 오만상을 쓰고 콘티를 들여다보는 중.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들.. 오락 효과음, 기철과 영주의 수다.

영주 민원업무라는 게 되게 피곤한 거구나.
기철 답답한게요, 사람들이 잘 몰라서 고생하는 게 너무 많거든요. 시스템 자체가 복잡한 것도 있지만 어떤 건 정말 단순한 건데 홍보 부족! 딱 그거에요. 용어도 낯설고 그러니깐...

 이리나, 의자를 와락 밀치고 일어선다.

이리나 (컴퓨터 게임 끄며) 몇 시간째야, 가서 씻어! 너네 둘다 씻고 자!

 두 아이 팔을 잡아 문 밖으로 내보내는 이리나.

이리나 (기철에게) 너! 나가!
기철 (벌떡 일어나며)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내쫓지만 말아주세요!
이리나 (단호히 문을 가리키며) 너! 마루에서 해.

#20. 화장실 (밤)

 뚱한 표정으로 나란히 서서 이를 닦는 한결과 하늘.

#21. 이리나 집 작업실 (밤)

 사각사각 펜 소리만 가득한 가운데, 영주, 흘끔 이리나를 살핀다.

이리나 이제야 좀 살 거 같네.
영주 (그리며) 기철씨 무안했겠어요. 심하시더라, 항상.

 묵묵히 그리는데만 열중한 이리나 등판.

영주 애들도.. 안되겠어요.. 오랜만에 왔는데 하필 마감이랑 겹쳐서..
이리나 .. 어차피 걔넨 나 좋아하지도 않잖아.
영주 (화들짝 놀라 쳐다보며) 예? 아니에요!
이리나 한결이 그 녀석은 지 엄마 판박이고.. 하늘이 그놈은 아예 말도 안하고.

 영주, 그림의 행인들 사이에 턱수염이 거뭇한 남자를 그려 넣는다.
 머리가 헝클어진, 우울한 표정의 남자.

#22. 거리 (낮)

 햄버거 봉지 손에 들고 아이스크림 먹으며 걷고 있는 영주와 기철 모습. 연신 수다를 떨며 웃고 있다.

#23. 이리나 집 거실 (낮)

 탁자 앞에 앉아 숙제하는 한결과 바닥에 엎드려 만화책 읽는 하늘.
 하늘, 점점 눈을 책상에 들이대고 탐색하는 폼이다.

한결 눈 나빠진다!

 며칠을 안 감아 뭉친 머리에 지저분한 턱수염의 이리나, 작업실에서 나온다.
 고개 들어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책상에 머리를 박는 하늘.
 양쪽 페이지 공원 그림, 지금의 이리나를 꼭 닮은 지저분한 남자가 산책로를 걷고 있다.

이리나 (현관 앞에서 서성이며) 어디서 노닥거리느라 안 오는 거야, 바빠 죽겠는데.

 이리나, 웅얼거리다 작업실로 들어가면.
 하늘, 한결에게 펼쳐진 만화책을 불쑥 들이댄다.

한결 (손으로 치우며) 뭐야.

 하늘, 귀에다 소곤소곤.
 한결, 하늘이가 가리키는 그림 보고.

한결 응? 아하~! 너도 아빠 찾아냈구나? 아줌마가 장난치는 거야. 중요한 거, 주인공 같은 거 말고는 아줌마 담당이거든.

 하늘, 짜증내며 도리질 치고는 다시 그림을 한결 얼굴에 들이댄다.

한결 얘, 왜 이래!

 하늘, 그림의 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한결과 하늘, 그림 위에 머리를 모으고 들여다본다.

#24. 시골집 창고방 (낮)

 퍼질러 앉아 만화책 보고 있는 아저씨.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다음 권을 든다.

#25. 이리나 집 작업실 (낮)

 햄버거 우적우적 씹으며 영주의 뒤통수를 째려보는 이리나.

영주 진짜 햄버거만 사온거라니까요.
이리나 누가 뭐래? 너는 저런 답답한 놈이랑 말이 통하냐?
영주 (그림 그리며) 얘기해보면 사람 괜찮은 거 같아요. 기철씨가 보기보단 머리가 좋은가봐. 하긴, 그러니까 공무원 시험도 됐겠지.
이리나 (코웃음) 공무원 그거, 난 십억을 주고 하래도 싫다.
영주 뭐 그런 제의는 들어오기 힘들지 않겠어요?

 이리나, 자리에 앉으며 슬쩍 영주 쪽을 돌아본다.
 영주, 책상 위 지우개 가루를 한쪽으로 모으다가...

영주 왜요?
이리나 아니다.

#26. 아파트 전경 (밤)

 이리나네 아파트, 불 켜진 창.

#27. 이리나 집 작업실 (밤)

 영주, 책상에 엎여져 자고 있다.
 이리나, 조심스레 영주 어깨를 두드린다.

영주 (소스라쳐 놀라 깨며) 예?? 다음 페이지 나왔어요?
이리나 애들 옆에서 한 시간만 자고 와라.
영주 (머리를 흔들며) 그럼 다음 장 나오면 깨워주세요.

 어깨를 풀며 나가는 영주.

#28. 이리나 집 거실 (밤)

 영주 나오면 한결, 하늘 쪼르르 따라간다.

한결 (다짜고짜) 아줌마 몇 살이에요?

 진지한 표정으로 보고 선 두 아이.

영주 (웃으며) 스물 여섯, 왜?

 급히 한결에게 귓속말하는 하늘.
 하늘이 팔을 찰싹 때리는 한결.

한결 많이 먹긴. 많은 거 아니거든.

 이번에는 한결이가 하늘이 귀에 뭔가 속삭인다.
 멀뚱히 지켜보는 영주.

하늘 (놀라서) 아빠가 그렇게 늙었어?

 놀라서 쳐다보는 영주와 한결.
 움찔하는 하늘.

영주 어머!! 하늘이 목소리 얼마 만에 듣는 거니?

 귀여워서 하늘이 머리를 쓰다듬는데...
 하늘, 다시 한결에게 귓속말.

영주 에이, 뭐야. 그 좋은 목소리를 두고.
한결 (하늘에게) 그러게 사람은 좋다니까!
영주 응?

 입을 꾹 다물고 고개 젓는 아이들.
 하늘, 한결이 팔을 찰싹 때린다.

#29. 작업실 (밤)

 영주, 불쑥 들어오며

영주 선생님, 하늘이가요...

 후다닥 안경을 벗어 감추는 이리나.

이리나 (안경을 손에 쥐고 일하는 척) 어.. 뭐..?
영주 그게 뭐예요? 선생님, 안경 쓰세요?
이리나 아, 잠 좀 자고 오라니까.
영주 줘 봐요.
이리나 (막으며) 얘가 왜 이래!

 이리나, 안경을 뒤춤에 감추고 슬슬 피하며.
 잽싸게 이리나 팔을 붙잡아 안경을 찾아내는 영주.

영주 (신기해서 써보며) 안경 맞네!
이리나 (낚아채려고) 내 놔!
영주 (이리나 팔을 붙잡아 막고) 어!! 이거.. 돋보기네??

 털썩 주저앉는 이리나.
 영주, 놀람 반 웃음 반의 표정으로 안경을 쓰고 방 안을 거닐어 본다.

영주 돋보기는 언제부터 쓰셨어요? 어머, 세상에...

 돋보기 너머 보이는 거지꼴의 이리나와 책상들, 의자들.
 거리감이 묘하다.

이리나 (일어나며) 신났다, 아주.
영주 내가 쓰니까 이상하다. 막 몽롱하네?

 그 순간 의자에 부딪혀 삐끗하는 영주.
 이리나, 잽싸게 넘어지는 영주를 받아 안는다.
 시간이 멈춘 듯 돋보기 렌즈 넘어 서로 눈을 보며 굳어진 이리나와 영주.

이리나 (자세 풀며) 애들은 자나...
영주 (얼른 안경 벗고 펜 챙기며) 집에 가서 그려올게요.
 
#30. 이리나 집 거실 (밤)

 후다닥 안방으로 달음질쳐 들어가는 두 아이.
 작업실 문 열리고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이리나와 영주.

이리나 (안방으로 바삐 가며) 자냐?
영주 (현관으로 후다닥) 갈게요.

 이리나와 영주, 각각 안방과 현관문 열고 가버리면.
 거실 탁자 뒤에서 고개 쑥 내미는 기철.

기철 (잠꼬대)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시 사라지는 기철 머리통.

#31. 영주 방 (밤)

 스탠드 불빛이 흐리게 비추는 방구석.
 영주, 남자의 옆얼굴 그림 쳐다보고는 책상에 머리를 쿨쿨 박아댄다.

#32. 시골집 부엌/창고방 (밤)

 부엌, 설거지하며 목청 높여 투덜대는 아줌마.

아줌마 아주 자리를 잡았네, 자리를 잡았어. 동네 창피해서 누구한테 하소연도 못 하겠어. 그냥. 하나로도 모자라서 둘씩이나.. 에휴.

 창고방. 쌓인 물건들 사이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채 만화에 푹 빠진 아저씨, 한 페이지 넘긴다.

#33. 달리는 자동차 내부 (낮)

 뒷자리의 한결과 하늘, 할 말이 있는 듯 운전석 뒤에 바짝 붙어있다.

이리나 (통화중) 글쎄, 이번 마감은 절대 안 넘긴다니까. .. 지금? (전방을 둘러보며) 작업실이지. 일 하느라 정신없으니까 끊자고.

 통화가 끊나고...

이리나 아빠 일만 끝나면 우리 신나게 놀자, 응?
한결 일단 마감 끝나면 아빠 수염부터 깨끗이 깎고 미용실 가서 머리도 이쁘게 잘라.
이리나 (슬쩍 거울로 얼굴을 살피며) 보기 좀 그러냐?

 한결, 눈을 굴리며 망설이고 있는데...
 인상을 잔뜩 쓴 채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하늘.

이리나 (머뭇머뭇) 왜.. 학원 애들이 뭐라 그러든? 창피했어?

 이리나의 씁쓸한 얼굴 뒤로 너무 심했다는 듯 동생을 꼬집는 한결과 억울한 표정의 하늘.

#34. 이리나 집 작업실 (밤)

 마감 직전의 정신없는 작업실.
 붙어 앉은 한결과 하늘.
 하늘이 조심스럽게 원고를 잡아 고정시켜주면 지우개질 하는 하늘.

기철 (톤 작업 마친 원고를 훑어보며) 선생님 인물은 역시 선이 섬세하네요. (톤 조각 털어내며) 영주씨도 이런 꽃미남 스타일 좋아요?

 이리나, 등 돌린 채 귀 기울이고.
 동시에 한결과 하늘, 손 멈추고 기다린다.

영주 (우물우물) 글쎄... 생각을 안 해봤는데...

 동시에 멈췄던 손을 움직이며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는 이리나와 두 아이.

기철 (다음 원고 작업하며) 그럼 남자답고 무뚝뚝하고 그런 스타일은요?

 다시 이리나와 두 아이, 긴장.

영주 (고개를 못 들고 우물우물) 글쎄, 뭐.. 그냥...

 이리나와 두 아이, 긴장을 푼다.
 얼굴이 달아올라 손으로 부채질하는 영주.

기철 (작업하며) 참! 근데...

 멈칫하며 기다리는 영주와 이리나, 아이들.

기철 영주씨 작품 언제 보여줄 거예요?
영주 나중에요.

 동시에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이는 이리나와 아이들.

이리나 (웅얼) 흥, 지가 뭔데.
한결 (조그만 목소리로) 어우~! 저 눈치 없는 아저씨 빨리 갔음 좋겠어.

 아무 말 없었던 듯 머리 박고 일하는 이리나와 아이들.

#35. 이리나 집 작업실 (낮)

 책상에 앞드려 잠든 이리나.
 나란히 앉아 원고를 정리하는 영주와 기철.
 영주, 솔로 깔끔히 털어내고.
 기철, 원고를 받아 추리면.

영주 (기철과 하이파이브 하며) 끝!

 소리에 놀라 이리나, 잠에 취한 멍청한 얼굴 번쩍 올라왔다가.. 다시 쿵 떨어진다.

#36. 이리나 집 베란다 (낮)

 창 밖으로 원고 뭉치 안은 채 사이를 빠져나가는 영주와 기철 모습.
 한결, 뿌루퉁해서 지켜보고 섰다.

한결 우리 아빠 건데 자기들끼리 신나서. 아빠도 같이 나가지. 바람도 쐬고.

 이리나, 뭘 보나 내려다 본다.

한결 일이 끝나면 아빠랑 아줌마랑 축하해야지, 왜 아줌마랑 저 이상한 아저씨랑 저러고 있대?
이리나 (솔깃) 응? 뭐 했는데?
한결 저 아저씨, 아줌마 관심 끌려고 저러는 거 아냐?
이리나 (붙잡으며, 나지막이) 한결아.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해 듣는 한결.

이리나 저 아저씨... 아줌마한테 관심있는 거 같던?
한결 (곰곰이 생각) 글쎄... 에이, 상관없어. 아줌마도 보는 눈이 있지.

 이리나, 지저분한 얼굴이 한 가득 눈에 잡히면.

한결 (잡아끌며) 빨리 머리도 자르고, 면도 좀 하고...!

#37. 출판사 앞 (낮)

 문을 밀치고 나오는 기철과 영주.

기철 우와! 영주씨 금년에 데뷔하겠네. 축하해요.
영주 그냥 작품 한번 보자는 건데요 뭐. 될지 안 될지 몰라요.
기철 어쨌든 영주씨 실력을 출판사도 알아 본 거니까 우리 축하주나 해요.

 망설이다 고개 끄덕 하는 영주.

기철 잔뜩 사가지고 들어가서 선생님이랑..
영주 저기..!

 기철, 의아해서 쳐다보면.

영주 그냥 우리끼리 가요. 한결이... 사람들 와서 술 마시고 그러는 거 싫어 하던데..

#38. 이리나 집 작업실 (밤)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하늘.
 한결, 방안을 왔다갔다 하고.

한결 온다 그랬는데.. 야, 아무래도 아줌마, 그 사람이랑 놀고 있는 거 같지 않냐?

 하늘, 게임 하느라 정신이 없다.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에 밝아지는 한결이 표정.

#39. 거실 (밤)

 이리나, TV 드라마 보며 멍하니 앉아 있다가 쳐다보면.
 벽에 기대 털퍼덕 앉는 민규.
 현관에서 뚱한 얼굴로 들어오는 한결.

민규 얘는 아무리 봐도 지 엄마 풀빵이네. 너 그런 말 많이 듣지?

 이리나 손의 리모컨 빼앗아 채널 돌리는 민규.
 한결, 못 마땅해 민규를 째려본다.

민규 영주랑 기철이랑은, 갔어?
이리나 밖에서 한 잔 하고 집에 갈 거래.
한결 어떻게 알아, 아빠? 전화 왔었어?
이리나 응? (우물쭈물) 어.. 기철이 아저씨한테 전화해봤지. 원고 잘 갔다 줬나 걱정 되서.
민규 (히죽히죽 웃으며) 그러다 걔네 둘이 어떻게, 잘 되는 거 아니냐?

 부녀 둘 다 흠칫.

민규 분위기 어떻든? 뭐 좀 냄새가 모록모락 나지 않던?
이리나 (씁쓸) 뭐.. 그럴지도 모르지.
한결 (버럭) 아빠는 왜 그렇게 씻는 것 싫어해?

 이번에는 민규와 이리나 흠칫.

이리나 뭔 소리냐.
민규 (장난끼 돌며) 그렇지, 불만 있는 거 다 말해. 할 말은 하고 사는 거야.
한결 맨날 집에만 틀어박혀 있고!
민규 좋은 지적이다.
이리나 한결아, 왜 그러는데?
민규 좀 새겨들어, 임마. 다 맞는 말이구만.
한결 한심한 사람들 하고만 어울리고!

 민규, 입이 딱 벌어진다.

이리나 (인상 쓰며) 너! 그만 해, 응? 아빠 화났다.
한결 뭘, 맞잖아? 맨날 술 마시지, 어른이 되서는 테레비에 붙어살지.
이리나 (버럭) 이노무 자식, 조용히 못 해!
한결 아빠는 바보야! 아빠는...
이리나 (한결 팔을 움켜쥐며) 아빠가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한결 (꽥 소리 질러 버린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엄마 결혼한단 말야!

 이리나, 맥이 풀려 굳어 버린다.

한결 (울먹) 아빠만 혼자 남잖아. 아빠 이렇게 그냥 늙어버리면 어떡할 건데? 아프고 그래도 옆에 아무도 없으면 어떡할 건데..?
이리나 결혼.. 한대?
한결 영주 아줌마까지 가버리면 아빤... (흐느낌에 말끝을 흐리며) 혼자 어해..?

 망연히 선 이리나.
 작업실에서 빼꼼이 내다보던 하늘, 으앙! 울음을 터뜨린다.

#40. 거리 포장마차 (밤)

 소주 잔을 앞에 놓고 앉은 영주와 기철.

영주 (살짝 취해서) 어떤 신이 세상을 다, 인간까지 만들고 나서 그랬대요. 거참 보기 좋구나!
기철 (역시 기분 좋게 취해서) 자기가 만든 걸 자기가 보고?
영주 만화를 그린다는 것도 세상 하나를 만드는 거잖아요.
기철 ... 그렇죠.
영주 그런 거 느껴보고 싶어요.

 손을 펴 원고 들여다보는 시늉하는 영주.

영주 참... 좋구나.

 영주, 쑥스러운 웃음.

영주 그런 날이 올라나?
기철 그럼요... 언젠가는 오겠죠... 하하

 거리. 포장마차 천막에 비친 영주와 기철의 그림자.
 그 두 그림자 앞에 선 이리나의 쓸쓸한 모습.
 이리나, 걸음을 옮긴다.
 영주,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얘기하고 있다.

영주 만화 배우겠다고 선생님 처음 찾아갔을 때 해주신 얘긴데.. (싱긋) 멋있죠.

#41. 이리나 집 안방 (밤)

 어두운 방.
 쌕쌕거리며 잠든 하늘과 뒤척이는 한결.
 가만히 문 열리면.
 한결, 얼른 눈을 감는다.

이리나 (한결 옆에 구부려 앉으며) 아빠 한심하지?
한결 ....
이리나 아빤 괜찮아. 내가 왜 혼자야. 한결이도 있고 하늘이도 있는데. 엄마.. 잘 됐네. 좋은 사람 만나서 더 행복해져야지. 아빠가 고생 많이 시켰는데.

 한결의 머리를 쓰다듬는 이리나의 손.

이리나 아빠도 잘 살 거야. 한결이 걱정 안 하게..

 이리나, 한결의 머리를 한번 짚어보고 나가려는데...

한결 나.. 엄마 닮아서 싫어?
이리나 (다시 앉으며) 무슨 소리야? 엄마가 얼마나 멋지고 좋은 사람인데. 아빠는 니가 누굴 닮던, 앞으로 어떻게 자라던, 계속 좋아할 거야.

 옆에 누워 한결이와 하늘이를 두 팔로 한껏 당겨 안는 이리나.

#42. 영주 방 (밤)

 영주, 원고를 앞에 놓고 앉아 있다.

영주 내가 잘 할 수 있을까요?

 정면 벽에, 대답하듯 내려다보고 있는 옆얼굴 남자 그림.

#43. 시골집 칭고방 (밤)

 아저씨, 나지막히 한숨 내쉬며 마지막 장을 덮는다.

#44. 놀이공원 (낮)

 사람들 틈으로 보이는 이리나와 두 아이.

#45. 이리나 집 이곳 저곳 (낮)

 이리나와 한결, 하늘 찍은 사진 보이며
 전화벨 울리다 삐~ 소리와 함께 자동응답기 소리.

한결 (응답기) 저는 우리 아빠 비서입니다.
하늘 (응답기) 아빠는 지금 전화를 못 받으니깐요,
한결,하늘 (응답기) 삐~ 소리 난 다음에 말하세요!
한결엄마 (소리) 애들 잘 있지? 엄마 보고 싶다고 안 해? 좀 데려다줄래? ... 일 잘 끝내고 돌아왔어. 고마워. 애들 돌봐줘서.

#46. 아파트 마당 (낮)

 차에 아이들 짐을 싣고 있는 이리나.
 영주, 나란히 선 아이들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영주 금방 헤어지네. 다음 방학 때 또 올거지?
한결 (새침) 모르겠어요, 어떻게 될지. 공부할 것도 많고.

 비밀얘기 하듯 이리나를 힐끔 보고는 영주에게 다가서는 두 아이.

한결 (은근) 근데요.. 우리 엄마 결혼할 사람 생겼어요.
영주 그래?
한결 (조그맣게) 아빠 땜에 걱정이에요, 어휴~! 너무 어린애 같아서...

 하늘, 눈이 동그래져 한결이를 쳐다본다.

영주 .. 엄마 좋으시겠다. 축하한다고...

 어느새 나타난 두 아이 뒷덜미를 잡아끄는 이리나.

이리나 요녀석들! 아주 질겨요, 그냥.

 어리둥절해서 보고 선 영주.
 뿌리치고 차로 달려가는 한결과 하늘.
 차 문을 열며 찌푸린 얼굴로 한결에게 귓속말하는 하늘.

한결 (조그맣게) 아빠 흉본 게 아니지, 바보. 아줌마 모성본능을 자극한 거거든. 말해도 넌 모를 거다.

#47. 한결엄마네 아파트 주차장 (낮)

 저 멀리 아파트 베란다 창에 몸을 내밀고 손 흔드는 한결엄마 모습.
 한결엄마 모습 사라지고 나면.
 이리나, 아이들을 자기쪼긍로 돌려세워 놓고 그 앞에 몸을 굽혀 앉는다.

이리나 한결아. 아빠 되게 지저분하고 사는 것도 엉망이고 그렇다며. 그러면서 아줌마에 대해 그런 생각하면 안 되지.
한결 그치만.
이리나 너 아빠를 봐라. 아빠가 젊으냐? 아님, 부자야? 잘 생겼냐? 야, 아줌마한테는 그 나이에 맞는 젊은 사람이 어울리는 거야.
한결 아빠. 아빤 사랑을 모르나봐.

 할 말을 잃은 이리나.

한결 아빠가 어떻게 순정만화를 그리는지 정말 모르겠어.
한결엄마 (뒤에서) 얘들아!

 한결과 하늘, 엄마를 부르며 달려간다.
 엄마 품에 뛰어 들어가 안기는 두 아이.
 이리나, 아이들과 엄마가 끌어안고 반가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미소 짓는다.
 하늘, 엄마 팔 사이로 그 모습을 보더니..
 엄마 품을 빠져나온 하늘, 이리나를 향해 쪼르르 뛰어온다.
 이리나의 의아한 얼굴.
 앞에 선 하늘, 눈을 깜박이며 이리나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한다.

이리나 (무릎 굽히며) 하늘이 왜?
하늘 (귀에 대고 속삭임) 아빠도 멋있어.

 하늘이를 안아주는 이리나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놀이터 벤치.
 이리나와 한결엄마 앉아 있다.

한결엄마 사실은.. 출장 갔던 거 아니야. 나... 결혼해. (개구장이처럼 씩 웃으며) 시부모 될 분들한테 인사하고 왔어. 미국에 계시거든.
이리나 (담담) 이번엔... (씩 웃으며) 좋은 사람이지? 당신 고생 안 시킬 사람...
한결엄마 응??? (웃음) 애들한테도 잘 해.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짓는 이리나.

한결엄마 안 놀라네? 당신한테 먼저 말하고 싶어서 아이들한텐 아직 얘기 안 했어. 한결이, 하늘이... 놀라겠지?

 어이없는 듯, 허탈한 듯, 피식피식 웃는 이리나.

한결엄마 왜?
이리나 (웃으며) 어이구 이 한심한 친구야.

 고개를 내저으며 쿡쿡 웃어버리는 이리나.

#48. 이리나의 집 여기 저기/작업실 (낮)

 거실과 안방, 화장실을 차례로 훑어보며 지나가는 이리나.
 울적한 모습으로 작업실로 들어와 문을 닫는다.
 빈 책상과 의자들.
 의자에 풀썩 앉아 멍청히 허공을 보다가 의자를 이리 빙글, 저리 빙글 돌려본다.
 의자가 한바퀴 돌아가면. 창문과 벽, 방문, 다시 반대편 벽으로 무심한 시선이 따라가는데...
 문득 시선을 잡아채는 방문에 붙은 허연 종이.
 얼른 의자를 멈추고 살핀다.
 방문에 이리나의 만화원고가 붙어있다.

이리나 (방문으로 돌진) 내 원고!!!

 원고 가운데를 가로질러 빨간 색연필 줄이 하나 그어져 있다.

이리나 (원고를 붙잡고 서서) 이 녀석들!!! 원고에 손댔어!!!

 하늘이가 만화책에서 찾아낸, 공원전경이 그려진 장면이다.
 이리나, 화를 참지 못하고 신음소리 내며 들여다보는데...
 자신의 캐릭터로부터 수풀 사이 어딘가로 빨간 줄이 이어져 있다.
 수풀 사이 뭔가 어렴풋한 형체가 가물가물하다.
 이리나, 눈을 한껏 가늘게 뜨고 보다가 얼른 책상으로 날아가 돋보기를 챙겨온다.
 안경을 끼고 빨간 선을 따라 들여다 보면..
 나뭇잎들 사이, 작은 큐피트가 이리나 캐릭터를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다.

#49. 영주 방 / 이리나 집 작업실 (밤)

 콘티 작업에 몰두한 영주.
 전화벨 울리면 반사적으로 받는다.
 영주가 ‘여보세요’라고 하기도 전, 이리나의 목청 가다듬는 소리가 들린다.

영주 선생님?
이리나 어.. (헛기침) 흠!! 그래. 영주야.
영주 예?
이리나 아이들도 와 있고 해서 니가 고생이 많았다. 니 작품도 준비해야 하는데... 내가 신경도 못 쓰고.
영주 (조심스레) 선생님, 한 잔 하셨죠?
이리나 ? ... !! (버럭) 너는 어떻게 날 그런 쪽으로 몰고 그러냐?
영주 (무안해서) 저는 그냥... 갑자기 전화하셨길래.
이리나 야, 너랑 나 사이에.. (우물쭈물) 뭐 꼭 일이 있어야 전화하고 그러냐.
영주 선생님! 잘 안 들려요.
이리나 (안절부절 못하고 왔다갔다하며)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입으로 ‘에이!’하고는) 작품은 어떠냐, 괜찮게 나오는 거 같아?
영주 괜찮긴요. 죽겠어요. 괜히 불안하기만 하고.. 좀더 준비한 다음에 가져간다 그럴 걸.
이리나 (깜박 잊은 듯) 아차! 내가 그 얘길 했어야 했는데!
영주 (긴장) 무슨 얘기요?
이리나 영주야, 교복을 입혀야 한다, 응? 학원물이 대세야.
영주 선생님! 선생님 유행 같은 거 신경 안 쓰셨잖아요. 실망이에요.
이리나 (버럭) 야! 불안해 죽겠다며? 나야 걱정되니까 이러지. 배가 불렀어, 아주.
영주 (퉁명) 선생님, 저 밤 세워야 되거든요.
이리나 (심통) 밤을 세든 뭘 하든 출판사 가기 전에 나한테 검사 받고 가! 엉성하기만 해봐. 죽었어, 너.

 전화 뚝! 끊어지고 나면.
 영주, 수화기 내려놓으며 의아한 얼굴로 갸우뚱하고.

이리나 (뒷목을 부여 쥐고는) 이게 아니었는데.

#50. 시골집 마당 (밤)

 아저씨, 마당을 서성이며 걷다가 고개 들어 밤하늘을 쳐다본다.

#51. 시골집 안방 (낮)

 넥타이를 정성들여 묶는 아저씨의 손.
 어깨에 혹시 비듬이 있을까 툭툭 털어낸다.
 거울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깔끔하게 차려입은 자기 모습을 살펴보는 아저씨.
 슬쩍 바지 지퍼까지 확인한다.

#52. 버스 터미널 (낮)

 아저씨, 터미널로 들어가다가 꽃가게에 눈이 가면 걸음을 멈춘다.

#53. 이리나 집 작업실 (낮)

 피곤한 모습으로 앉는 영주.
 영주의 원고를 꼼꼼히 훑어보는 이리나.
 옆얼굴의 남자 주인공 얼굴 그림.

이리나 어째 분위기가 허전하다?
영주 (기운 없이) 걔가 원래 그래요. 마음이 좀... 쓸쓸한 사람이거든요.

 갸웃하며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이리나.

이리나 (원고 보며) 너무 심심하지 않냐? (웅얼웅얼) 요즘 애들 보면 개그도 잘 써먹고 반전도 근사하게 넣고 그러던데. 너무 우울해서 이거...

 이리나, 영주를 보면.
 어느새 잠든 영주.
 영주의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리나.
 이리나, 싱긋 웃음 짓더니 살짝 손을 뻗어 종이와 연필을 집는다.
 뭔가 쓱쓱 그려대는 이리나의 모습.

#54. 아파트 입구 (낮)

 아파트 건물을 긴장해서 보고 선 아저씨.
 심호흡하고는 주소쪽지 들고 아파트 마당에 들어선다.

#55. 이리나 집 현관 앞 / 현관 안쪽 (낮)

 헛기침하며 목소리 가다듬고 선 아저씨.
 현관문 ‘띵동’ 소리.
 꽃다발을 가슴께에 그러쥔 채 긴장한 아저씨.
 문 열리고 내다보는 이리나 얼굴.

이리나 누구..?
아저씨 이리나 화백님 계십니까?
이리나 제가 이리난데요.

 멍청히 져다보는 아저씨.
 이리나 역시 꽃다발을 손에 쥔, 어색하게 깔끔한 아저씨를 이상한 듯 쳐다본다.

아저씨 리나... 이리나 선생은 여자.. 분인 줄...
이리나 아 예, 이리나는 제 필명이구요...

 꽃다발을 쥔 손 힘없이 떨구는 아저씨.
 뒤에서 들리는 영주 목소리.
 원고 봉투 들고 튀어나오는 영주.

영주 (나오며) 선생님! 왜 안 깨우셨어요!

 우뚝 멈춰서는 영주.
 아저씨의 입이 벌어진다.

영주 ... 아빠!
이리나 (뒤돌아 영주를 보고, 다시 고개 돌려 아저씨 보며) 아빠? .. 아빠!!!

 충격으로 입을 벌리고 선 세 사람.

#56. 이리나 집 거실 (낮)

 탁자 위 찻잔을 앞에 놓고 앉은 이리나, 영주, 아저씨.
 허탈감에 멍한 상태로, 또는 무슨 영문인지 머리를 굴리며...
 세 사람, 서로 시선 한번 맞추지 못한 채 꼼짝 않고 앉아있다.

#57. 아파트 입구 (낮)

 세 사람 걸어 나오다가 영주부 그제야 생각난 듯 아직도 들고 있던 꽃다발을 이리나에게 쓱 내민다.

아저씨 (꾸벅 굽히며) 우리 딸아이 잘 부탁합니다.
이리나 (허둥지둥 받아들며 꾸벅) 무슨 말씀을... 제가 너무 오래 붙들고 있으면서 고생을 시켜서... 죄송합니다.

 고개 숙인 채 돌아서는 아저씨.
 영주, 이리나 눈치를 보며 아저씨를 따라간다.
 꽃다발 받쳐 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선 이리나의 얼빠진 모습.

#58. 시외버스 터미널 (낮)

 아저씨, 영주에게 가라고 손짓하며 돌아선다.
 어깨 축 처진 그 뒷모습.
 영주, 원고봉투를 가슴에 안고 지켜본다.

영주 (마음) 오래 붙들고 있다... 오래 붙들고 있으면서 고생을 시켰다...

 깜짝 놀라 시계를 찾아 본다. 달리는 영주.

#59. 이리나 집 작업실 (낮)

 책상에 꽃다발을 올려놓고 골똘히 보며 생각에 잠긴 이리나.

이리나 (마음) 부탁한다.. 우리 딸아이를 잘 부탁 한다...

#60. 출판사 (낮)

 영주 콘티를 자세히 훑어보는 직원.

직원 그림은 좋아요. 좋은데...

 영주, 들릴 듯 말 듯 한숨.
 원고를 꺼내 한 장, 한 장 넘기는 직원.

직원 좀 쳐지는데... 스토리가...

 눈이 동그래지더니 풉! 웃어버린다.

영주 (놀라서) 뭐 잘못됐어요?

 영주, 받아서 보면.
 백지에 그려진 두 개의 캐릭터.
 빈 활을 든 큐피트 개구지게 웃음 짓고..
 수염이 시커먼 지저분한 이리나 캐릭터, 가슴에 꽂힌 화살을 부여 잡고 무릎을 꿇었다.

이리나 (소리) 깜박했다!

#61. 이리나 집 거실 (낮)

 이리나의 원고봉투로 후려치는 영주.

이리나 있지, 영주야! (피하며) 영주야, 그게 아니고 말이지...
영주 (때리며) 선생님 땜에 완전 망신만 당했잖아요!
이리나 미안하다, 야! (막으며) 영주야, 진정 좀 하고 나랑 얘기를...

 이리나, 얼결에 영주 두 손을 꽉 움켜잡고...
 마주 선 채 눈을 맞춘 두 사람.
 뭔가에 홀린 듯 굳어지고....
 두 사람의 모습, 만화가 된다.

#62. 시골집 마루 (낮)

 행복한 한 쌍의 그림을 엎드려 보고 있는 아저씨.
 덧문을 열어젖히며 툴툴대는 아줌마.

아줌마 (여전히 심통맞지만 꽤 누그러진 듯) 그 놈의 만화책 또 잡고 앉았네.
아저씨 (여전히 어눌하지만 한결 편안한 목소리로) 그 놈의 만화책이라니, 이 사람이. 우리 딸내미 작품이라고!

 아저씨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퍼진다.


























첨부파일 로맨스파파(김모).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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