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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대본

[달의 제단] 유현미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6.12.12|조회수1,048 목록 댓글 0

[달의 제단] 유현미








#1. 사당 (낮)
    한줄기 빛이 들어오면서
    열쇠 열리는 소리 들리고 이내 문이 활짝 열리면
    신주 앞에 나란히 서는 조부와 상룡
    심의를 입고 흑립을 쓴 조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단정한 자세로
    이마가 땅에 닿도록 큰절을 하고 일어나

조부 : (쩌렁쩌렁하게) 정유 금일 효손 상룡 귀 자군역 감현
자막 : 丁酉 今日 孝孫 尙龍 歸 自軍役 敢見
       오늘 정유일, 효손 상룡이 군역을 마치고 돌아왔기에 감히 뵈옵나이다

    군복차림의 상룡,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조부의 말이 끝나자마자
    향합을 열어 몇 자루의 향을 피우고 큰절을 올린다

#2. 조부방 (낮)
    병풍이나 족자 하나 없이 서안과 쌍문갑, 사방탁자뿐인 간결한 방
    한복차림의 조부, 눈빛만으로 범접할 수 없는 풍모가 느껴진다
    조부 앞에는 정갈한 나무 상자가 네다섯 개가 놓여있고 그 속에는 비단보에 쌓인
    언간들과 옷가지, 서필, 벼루, 여자의 장신구 등등이 들어있다.
    언간 든 상자를 열어보는 조부, 그 형형한 눈빛을 따라가는 상룡

조부 : (보면) ...
상룡 : (좀 더 허리를 곧추 세우고 자세를 바로 한다) ...
조부 : 보아라!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상자 속 비단보를 푸는 상룡
    가장자리가 닳고닳은 언간 십여 통 나오면  
    조부를 올려다보는 상룡

조부 : 황명산 자락 일부가 군부대에 수용되었다.
       그곳에 모셨던 봉분들을 이장하다가 발견한 것들이다.
       내 짐작이 맞다면 네 먼 조모 되시는 안동 김씨의 유품인 듯하다.
상룡 : ?
조부 : 그 중에 이 언간들은 집안의 사손이 국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니 남에게 해독을         맡길 필요는 없을 터!
상룡 : (내심 당황) 제가 국문학을 전공하긴 하지만 이제 겨우 3학년입니다.
       이런 옛글을 해석하기에는 실력이 부족합니다.
조부 : (보는) ...
상룡 : 더구나 이런 유품들은 희귀한 문화재일텐데... 관청에 먼저 알리셔서
       전문가가 다루도록 하심이...(말해놓고 아차 싶다)
조부 : (상룡을 마땅찮게 보다가) 땅에서 나온 출토물이니 나라의 법으로
       다뤄져야겠으나 혹, 이 일이 가문의 운명을 좌우할 일일지 누가 알겠느냐?
       일단 애벌해석부터 해 보거라. 그 후에 합당한 수순을 밟아도 늦지는 않을 터!

#2-1 효계당 대청
    상룡, 언간을 들고 조부방 나온다.
    언간을 다시 한 번 보다 2년 만에 돌아온 효계당 마당 굽어보고

#3. 상룡방 창문 앞 (낮)
    상룡의 방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와 기웃거리고
    상룡, 방문을 모두 열고 옷을 벗어 걸다가 여자를 본다
    짧게 얽히는 두 사람의 눈빛, 이내 문을 닫아버리는 상룡
    부엌에서 들리는 달실댁 목소리

달실댁 : 정실아 뭐하고 있니? 얼른 장에 좀 갔다오라니깐...상룡이 배고프겠다

    정실, 알았다며 간다. 그리고 이내 습관인 듯 흥얼대는 작은 노래
    뒤로 보이는 달실댁

정실 : 상룡이 어매는 바람둥이, 사내 없이는 잠을 못 잔대
       상룡이 어매는 바람둥이, 밥은 굶어도 그 짓은 해얀대

#4. 안채 전경 (낮) (20년 전)

어린 정실 : 날마둥 날마둥 사내를 바꿔, 날마둥 날마둥 사내를 바꿔

    바람에 펄럭이는 머리칼 사이로 얼굴의 반을 덮은 홍반이.. 정실이다.
    이크.. 안채에 들킬까 노래 멈추고

해월당 : (소리) 본성이 천비하여 오역십악을 범하면

해월당 : 지옥계에 떨어지나니, 오역십악의 죄를 지은 자들은 지옥계에 갇혀
         이 땅에서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극악한 고통을 당하느니라.

#5. 안채 대청 (낮)
    마루에 마주 앉아있는 해월당과 무릎을 꿇고 앉은 어린 상룡(5세)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서안 위에는 지옥도를 그린 탱화집이 놓여있다
    단아한 한복 차림에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해월당
    품위와 격조가 느껴지는 분위기와는 사뭇 달리,

해월당 : 적법한 배필에게 성실을 지키지 아니하고, 짐승처럼 쾌락을 쫓아 음행을
         일삼은 자들은 중합지옥의 옥졸들이 쇠로 만든 절구 속에서
         참기름을 짜듯이 눌러 짜고,
상룡   : (겁먹은)...
해월당 : (차디찬 눈빛으로) 규환지옥에서 철퇴로 아가리를 찢은 뒤 피 흘리는 입으로
         펄펄 끓는 구리물을 마시게 하고, 초열지옥에서 시뻘겋게 달군 쇠다락에
         가두어 온 몸이 구워져 가죽과 살이 익어 터지느니
상룡   : (무서워서 고개를 숙이면) .....

    순간, 서안을 탁!! 소리나게 치는 해월당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드는 상룡의 모습에서 느닷없이,


#6. 블랙화면
    타이틀 ‘달의 제단’ + 크레딧 + 손각시 환타지 몽타주

#7. 효계당 누각 대청 (낮)
    형형한 눈빛으로 상룡부를 쏘아보는 조부
    괴로운 심정으로 조부의 앞에 앉아있는 상룡부

조부   : .......
상룡부 : .......
조부   : 너는 서안 조씨 가문의 16대 종손이다!
         종통을 이어야하는 것이 네 숙명이거늘!
상룡부 : (애원이다) ....아버님이 원하시는 대로 효계당으로 내려왔습니다
         아버님이 원하시는 여자와 혼인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부   : (쏘아보는)
상룡부 : 어떻게 아들까지 낳은 여자를 잊으라 하십니까? 어떻게 제 핏줄을,
         제 자식을 버리라 하십니까?
조부   : 문중의 허락도 없이 삿된 계집과 니 마음대로 한 혼인이다!!
         그런 불측한 혼인으로 얻은 자식을 조상께 고할 수가 있다더냐?
상룡부 : 아무리 가문이 중하기로... 천륜보다 더 중합니까?
조부   : 어디서 감히 천륜 소리를 입에 담느냐? 모자람이 많으나 네 놈이 서안 조씨
         가문의 종손이라는 것! 마땅히 종부의 몸에서 다음 종손을 얻는 것,
         그것이 천륜이다!!
상룡부 : 아버님! (절망하는).....


#8. 안채 대청
    반짝 반짝 윤이 나는 유기 제기들이 대청 마루에 도열해 있다.
    열심히 제기를 닦고있는 해월당.
    더는 닦을 필요가 없이 반짝이는 제기를 닦아대며..
    사랑채 쪽에서 벌어지는 일과는 상관없는 듯.
    그런 해월당 분위기와 반대로 사랑채 쪽 신경 쓰는 달실댁..

#9. 조부방 (낮)
    상룡부, 다시 한번 애원이라도 하려는 듯 입을 열려는 순간,

조부   : 못난 놈! 그 요망한 계집이 너를 버렸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느냐!

    쌍문갑 속에서 영수증 한 장을 꺼내 상룡부의 발치에 던져버리고
    방을 나가는 조부
    방바닥에 떨어진 용지를 천천히 집어드는 상룡부
    수취인 서영희, 발신인 조창선, 거액의 돈을 보냈다는 입금서 클로즈업

#10. 늪 (새벽)
    체념한 듯, 분노한 듯, 두 눈을 부릅뜨고 미친 듯이 삿대를 미는 남자
    안경 떨어지고 몹시도 흔들린다. 상룡부다.
    물안개 속으로 뒤뚱이며 사라지는 배, 멀리서 풍덩, 어푸어푸...!
    소리 들리는 듯 마는 듯...
    이윽고 조용해지고.. 물안개 속으로 천천히 흘러나오는 배, 안경, 구두 한 짝,
    찢어버린 입금서만이.... 페이드 아웃

#11. 안채 마당 (낮)
    밀려오는 먹구름을 바라보며 대청에 서있는 해월당, 소복차림이다
    안채로 들어서는 두루마기 차림의 조부
    그 뒤로 눈물 자욱이 흔연한 채 잠든 상룡을 업고 들어오는 정씨
    이제 막 안방에서 나와 차분하게 대청마루 아래 댓돌로 내려서는 해월당
    동시에 정지간에서 나오는 달실댁과 그녀의 치맛자락을 움켜쥔 어린 정실(5세,
    홍반이 있는)...

조부   : (정씨를 보면)
마름정씨 : (상룡을 땅에 내려놓는다)
상룡   : (잠이 덜 깬 눈으로 낯선 곳을 두리번거리는)
해월당 : (상룡을 보는)
조부   : (상룡에게) 인사하거라, 네 어머니시다!
상룡   : (그제야 사태 파악이 된 듯 울먹이며 해월당을 보면)
해월당 : (종부답게 상룡을 바라보며 두어 걸음 다가온다)
상룡   : (주위를 둘러보며) 엄마, 엄마아아---!!!(울음을 터뜨리는)...

    일순, 내심 당황하는 해월당
    안쓰러운 얼굴로 상룡을 달래려고 다가오는 달실댁

조부   : (버럭) 어허! 아무리 어리다고는 하나 서안 조씨 가문의 차종손이다!
         어디서 함부로 울음을 터뜨리느냐?

    조부의 불호령에 놀라 대번에 울음을 깨무는 상룡
    꺽, 꺽, 터지는 울음을 참아내는 상룡의 시야에
    달실댁의 치맛자락 뒤에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상룡을 빠끔히 쳐다보는
    정실이 보인다

#12. 사당
    열쇠 돌아가는 소리 들린다
    이윽고 활짝 열리는 사당 문
    종친들이 일렬로 도열해 있는 가운데
    조부와 해월당, 겁먹은 어린 상룡(5세) 보인다
    향탁에 분향을 하는 조부를 올려다보는 상룡, 사당 안 분위기가 사뭇 두렵다
    자기도 모르게 해월당의 치마폭 뒤로 숨으려하면
    다소 엄한 눈으로 상룡을 내려다보는 해월당
    일순 굳어버리는 상룡...

조부 : 창선지자부 유씨 이신유유월칠일 생자 명상룡 감현!
자막 : 昌善之子婦 柳氏 以辛酉六月七日 生子 名尙龍 敢見
       창선의 며느리 유씨가 신유년 유월 칠일 아들을 낳아 이름을 상룡이라
       하였사오니 감히 뵈옵습니다

    해월당, 상룡에게 엄숙한 얼굴로 손을 내밀면
    망설이다 그 손을 잡는 상룡
    상룡을 데리고 위패 앞으로 나가는 해월당
    주춤주춤 따라가는 상룡
    위패 앞에서 상룡의 손을 놓고 어서 절을 하라고 눈짓하는 해월당
    겁먹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는 상룡
    낮은 키의 상룡을 압도하는 근엄한 종친들의 매서운 눈빛들...
    울음을 간신히 참고 큰절을 올리는 상룡.....
#13. 효계당 전경 (밤)
    쏟아지는 장대비...
    거센 빗줄기를 망연히 쳐다보고 있는 조부

#14. 안채 마당 (밤)
    종택의 시름을 아는지 모르는지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저 혼자 물장난에 신난
    정실(5세), 그 뒤로 정지간에서 대야를 들고나와 황급히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달실댁 보인다

#15. 안방 (밤)
    심란하게 쏟아지는 빗소리 들리는 가운데...
    아랫목에 누워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놓은 채 열이 들끓는 상룡 (5세),
    한쪽 무릎을 세우고, 세운 무릎에 팔꿈치를 댄 자세로 앉아
    상룡을 내려다보고 있는 해월당
    황황히 방으로 들어온 달실댁, 대야를 상룡의 옆에 내려놓고
    상룡의 이마에 놓인 물수건을 갈아주려다 이마를 손으로 짚어보며
    
달실댁 : (깜짝 놀라) 아이고, 이래 열이 높아가, 병원에 가야 안되겠니껴?
해월당 : 아버님 침수 드셨네, 목소리를 낮추게.
달실댁 : (대번에 입 다물고 물수건을 갈아주면)...
상룡   : (가늘게 울며) ....엄마아 ....엄마아아.....
달실댁 : 아이고 (안쓰럽다. 그러나 해월당 눈치 보느라 안아주지도 못하고)...
해월당 : 해인초 달인 물을 먹여보게
달실댁 : 배앓이 때문에 열 나는기 아인 것 (같은데요)
해월당 : (달실댁을 보면) ....

    해월당의 위엄에 눌려 후다닥 방을 나가는 달실댁

#16. 효계당 (밤)
    그토록 의연했으나... 홀로 남으니 가슴이 미어지는 조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고 어린 상룡을 차종손 삼아 종통을 이으려니
    걱정이 앞서고 슬픔이 밀려온다... 그렇게 복잡한 심정으로...

#17. 안방 (밤)
    간신히 열이 내려 잠이든 상룡 (물수건 없이)...
    자면서도 어미를 찾는다. 해월당, 그런 상룡을 내려보다가
    비오는 밖으로 망연한 눈길을 돌린다. 페이드 아웃

#18. 마을 일각 (낮)
    동네 아이들이 놀리는 노래 소리가 멀어져 가고
    아래 쭈그리고 앉아 나뭇가지로 깨작깨작 흙바닥을 파헤치고 있는 상룡(8세)
    옥수수를 먹으며 상룡이 쪽으로 다가오는 정실(8세)
    정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의기소침 흙바닥에 화풀이를 하고있는 상룡
    그런 상룡의 옆에 앉아 불쑥 자신이 먹던 옥수수를 내미는 정실
    인상을 쓰며 싫다고 고개를 가로젓는 상룡
    다시 옥수수를 먹어대며 말을 꺼내는 정실

정실 : 상룡아, 느그 어매 이야기 들었나? 느그 어매, 아주 독한 년이라카데
상룡 : (욱해서 쳐다보면)
정실 : (옥수수를 먹어대며) 할배한테 돈 받고 느그 아배를 버려가, 느그 아배가
       늪에 빠져 죽었다 카드라, 니도 할배가 돈주고 데려왔다 하데,
상룡 : (충격이다)!!
정실 : (연신 먹어대며) 동네 사람들도 다 안다 아이가
상룡 : (정실을 확 밀치며) 더럽은 주디 닥치라, 이 배냇병신, 암퇘지야!

    홱 돌아서 가버리는 상룡
    엉덩방아를 찧은 채 울먹울먹 울음을 터뜨리는 정실

#19. 대청 (낮)
    서안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상룡(8세)과 해월당
    해월당, 스스로의 욕망을 다잡기라도 할 듯 오달진 목소리로

해월당 : 투도와 음행을 거듭하여 착한 사람을 더럽힌 자는 이 모든 지옥보다
         더 무서운 소적지옥에 떨어지느니라
상룡   : (수없이 들은 얘기다)......
해월당 : (자신을 책망하고 있다, 슬프고 준엄하게) 소적지옥에서는 죄인을
         쇠꼬챙이에 꿰어 시뻘건 용암에 처넣기를 반복하느니 그 고통이 너무도
         가혹하여 살려달라고 울부짖지 않는 자가 없느니라
상룡   :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20. 사찰 대웅전 안
    해월당 삼천배를 올리고 있다. 보는 어린 상룡. 점차 탈진해가는 해월당

해월당 : (E)뿐이더냐? 인간이라 할 수 없는 말종들은 살가죽을 벗겨 펄펄 끓는 쇳물
         에 집어넣어 온 몸을 불태우고, 쇠로 만든 매가 날아와서 눈알을 파먹으니,
         사내를 꼬드기는 음탕한 입술 또한 들끓는 무쇠 창으로 짓이겨지고
         음란한 혓바닥은 제 키만큼 뽑혀 잘근잘근 썰어지느니라
         음행한 여인의 아랫도리 역시 불에 달군 삼지창으로 쑤셔지고 갈갈이
         찢기느니, 무릇 짐승처럼 쾌락을 쫓지 말지며 오로지 몸을 정결히 가지고
         남에게 죄를 짓지 말지니라

#20-1 대청
    지옥 이야기 끝내고 멍한 해월당. 그런 해월당을 보는 어린 상룡 시선

#21. 효계당 누각 대청 외
    신비로운 아름다움과 고아한 자태로 누각마루 위에 꼿꼿하게 서있는 해월당의
    모습에서 카메라 천천히 뒤로 빠지며...
    소복차림으로 기둥에 기대있는 해월당..
    동자승 병풍 앞에서 금강경을 읽고있는... 그림들에...

상룡 : (N) 해월당은 종가의 도원경을 꿈꾸는 할아버지가 가장 공들여 선택한 방짜
       며느리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살아생전 그녀의 옷고름조차 만진 적이 없었다          한다. 아버지의 시신이 늪에서 발견된 그 해 가을 효계당의 종손으로 유일한          혈육이지만 서자인 내가 낙점된 것은 한평생을 삶의 버팀목으로 삼아야할
       그녀의 자존심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일이었다. 그러나 팔렬 지옥의
       불길 같았을 속내를 감춘 채 곳곳한 종부의 삶을 살던 해월당은 마흔을 못넘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22. 달실댁 방
    고성 이씨 가문의 유명한 언간 ‘원이 엄마의 사부곡’의 다큐멘터리를 보고있는
    정실, 달실댁 들어오면..

달실댁 : 옛날에도 저런 사랑 이바구가 있었어, 내 저걸 보고 얼마나 애닯든지
         고마 눈물이 팍 나드라
정실   : 옴만 저런 사랑 한번 못해봤어?
달실댁 : 니나 많이 해라!

#23. 상룡방
    상룡, 언간을 해석하고 있는 듯 언간과 각종 사전류 고서적 등이 펼쳐져 있다
    상룡은 족보를 열심히 보고 있다
    언간의 주인공 안동 김씨의 기록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쉽게 안 보이고..
    그러다 한쪽 귀퉁이에 보이는 아주 작은 글씨... 안동 김씨 소산...
    그녀의 남편은 준몽, 아들은 민영이라 기록되어있다
    기쁜 얼굴의 상룡

달실댁 : (E) 상룡아 어르신 출타하신다

#24. 종택 앞 (아침)
    검은색의 고급스런 승용차 대기 중이다
    승용차를 연신 닦아내는 운전기사도 세련된 양복차림이다
    이내 종택을 나서는 두루마기 차림의 조부와 상룡, 달실댁, 마름 정씨
    운전기사, 깍듯이 절을 하고 차 문을 열어주면
    올라타는 조부
    허리 굽혀 인사하는 상룡과 달실댁, 마름 정씨
    이내 차창문 내려지면서

조부 : 언간은 어찌 되어 가느냐?
상룡 : 초벌 해석이 거지반 끝나 갑니다. 며칠 내로 해석 전문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부 : 우리 언간이 이씨 문중 것보다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한치의 오역도 없이 만전을 기하거라

    멀어지는 조부의 승용차, 쳐다보는 상룡  

상룡 : (N)할아버지가 주신 언간은 조선시대에 아녀자들이 주고받던 순 한글 편지였다
       이 언간은 삼백 년 전의 것으로 안동 김씨가 친정할머니에게 올린 안부편지였         는데, 그 시기라면 서안 조씨 최대 전성기였던 원찬조의 영화가 서서히 막을
       내리며 긴 쇄락의 길로 접어들 시기였다

#25. 효계당 일각
    생각하며 중문으로 들어서는 상룡
    펼쳐지는 삼백 년 전 효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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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간1

#1-1 중문 안마당 (낮)
    사랑채 마루 위.
    커다란 교자상에 풍성하기 이를 데 없는 돌상이 차려져있다
    쌀, 떡, 국수, 과일 등의 음식이 차려진 돌상 앞에
    책, 종이, 붓, 먹, 활, 화살, 무명실이 놓인 백완반(床)이 놓여있다
    복건을 쓰고 쾌자를 입은 민재 ‘돌 잡히기’를 하고 있다
    아장아장 상을 붙잡고 걸으며 뭔가를 집으려고 하는 민재
    민재가 무얼 집을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는 존구고와 종친들
    그리고 이 모습을 보고있는 소산과 준몽 얼굴에

상룡 : (N) 편지의 주인공 안동 김씨는 묘석과 족보의 기록으로 미루어 나로부터 11대
       를 거슬러 올라간 준몽할배의 부인이었다. 준몽할배라면 한미한 시절 유일하게
       진사까지 올랐던 분으로 문중 어른들에게도 몇 안 되는 벼슬했던 분으로
       들어온 분이셨다. 반면 안동 김씨는 홍문관 대제학을 배출한 안동 소산의
       명문가 출신으로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엄격한 할머니 밑에서 자란 새색시였다

존구 : 옳지, 옳지, 우리 당금아기 우리 얼뚱 아기, 과연 뭘 집을꼬?
민재 : (손을 뻗치면)
일동 : (민재의 손을 따라 몸이 쑤욱 앞으로 내밀어지는데)
민재 : (실타래를 잡으면)
일동 : (기뻐서 우리 종손, 명 길겠네, 명 길겠어! 등등의 애드립이 터지고)
존구 : (민재를 안아 올리며) 내 누님 댁 환갑연에서 준수한 형제들이 여덟이나
       절 올리는 걸 보고, 속으로 피눈물을 흘린 게 엊그제 같으오이다
존고 : 오대에 독신만 이어졌으니 왜 아니 그러셨겠습니까?
       허나 이제 우리 민재 실타래 잡았으니 문운이 펴질 것이옵니다
존구 : 당연 그래야지요, 암, 그래야하구 말구요. 이 모든 게 다 민재 에미덕이외다.
       내 소산 사둔댁에 절을 다 하고픈 심정이요

    금이야 옥이야 민재를 어르면서 기쁨의 눈물마저 보이는 존구고

소산 : (기쁨에 겨워 사랑을 보면)
준몽 : (콜록콜록 기침을 하는)
일동 : (기쁜 와중에도 사랑을 염려스런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돌쇠 : (E) 나으리, 나으리!

    마당으로 달려 들어오는 돌쇠

집사 : 종산을 지켜야할 놈이 여긴 어인 일이더냐?
돌쇠 : 황명산 자락 성막골에 두창이 번져가, 아고 으른이고 다 죽어나가니더
       쇤네도...
존구 : (O.L/ 민재를 안고 얼른 돌아앉으며) 썩 물럿거라, 이 기쁜 날 그 무슨
       해괴한 소리더냐?
소산 : (걱정스런 낯빛으로 민재를 보는)....

#1-2 마당 (밤)
    헛간에서 나오는 돌쇠의 머리통을 따악- 갈겨 버리는 하인
    (눈만 빼고 얼굴 전반을 무명천으로 가린)
    쓰러진 돌쇠를 멍석에 두루루 말아서 수레에 싣는 하인 서너 명
    (역시 무명천으로 가린) 주위를 경계하며 어디론가 황급히 달려가는 하인들
#1-3 늪
    풍덩!! --- 늪에 던져지는 멍석,---
    이내 잔잔한 파문이 일면서 무심한 달빛이 쏟아지는 평온한 늪의 모습에서

#1-4 소산의 방 (밤)
    서안을 앞에 놓고 언간을 쓰고 있는 소산
    그 옆에 앉아서 소산이 쓴 언간을 더듬더듬 읽고 있는 거둘

거둘 : 어... 얼뚱... 아기... 민재의... 초도일을... 맞이하여....
소산 : 우리 거둘이 그새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할머님이 아시면 기뻐하시겠다.
       편지 전해드릴 때 읽어 드리거라
거둘 : (신이 나서) 조조 아니 족족유여한... 하물... 이바지 마련해 주셨사오니...

    미소를 지으며 언간을 써 내려가는 소산의 얼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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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대학 도서관 안
    햇빛이 드는 창가의 노트북 앞에서 언간 작업을 하고 있는 상룡
    옆에는 각종 사전과 고서작류가 잔뜩 쌓여있다
    모니터 화면에는 언간의 내용과 뜻풀이 해놓은 단어들이 많이 보인다
   
    “얼뚱아기 민재의 초도일을 맞이하여 족족유여한 하물, 이바지 마련해 주셨사오니
    물물이 하갈동구요, 목목이 정긴 숙요라 존구고 내외분 기쁨 크셨사옵내다“

    이바지 - 음식같은 것을 정성들여 보내줌
    물물이 - 모양모양이
    하갈동구 - 격이나 철에 맞음
    목목이 - 중요한 길목마다
    정긴 - 정밀하고 긴요함

    말로 문장을 해석해 보는 상룡, 막히는 곳 ‘숙요’ 컴사전으로 검색 결과가 없다
    이번엔 옆 고어사전 열심히 뒤적이는 상룡
    몇몇 후배가 인사한다

#27. 도서관 앞 (저녁)
    가방을 메고 도서관 쪽에서 걸어 나오는 상룡,
    여자 후배 3명의 무리와 마주친다

일동 : (반갑게) 형!! 안녕하세요, 제대했다는 말 들었어요 (애드립)
후배1: 어쩐 일이세요? 학기말인데
상룡 : 어어, 도서관에서 뭘 좀 찾느라구..
후배1: 야, 너 왜 인사 안해? 니가 걸핏하면 들먹이던 상룡이 형이잖아
소진 : (내숭인 듯 수줍은 듯) 안녕하세요
상룡 : (보면)?

#28. 도서관 앞 길 (저녁)
    성큼성큼 캠퍼스를 걸어나오는 상룡
    그의 뒤로 저만치 서있는 후배들 보이고
    상룡을 향해 열심히 뛰어오는 소진
   
상룡 : (뜨악)?
소진 : (생글 웃으며) 선배님, 제 전화번호 모르시죠?

    상룡, 관심이 간다

#29. 안채 마당 (낮)
    두리번두리번... 안채로 들어서는 장년의 남자
    정짓간에서 앞치마를 탈탈 털며 나오던 달실댁, 남자를 보는 순간 숨이 탁 막힌다
   
남자   : (해부죽 웃으며) 당신 오랜마이구마
달실댁 : 누굴 보고 당신 소리를 하는교?
남자   : 봐라, 천없이 밉어도 한때는 한솥밥 농가묵고 동방거처 하던 너거 서방
         아이가! 참말로 오랜마이구마! 
달실댁 : (혹여 누가 볼까 전전긍긍) 그짜아서 내를 몰로 보고 이카는교
남자   : 봐라, 여서 이래 하지말고, 우리 어데라도 나가가 커핏물이라도 한사바리
         마시믄서, 이저끔 살아온 이바구나 해보자 마
달실댁 : 엄뚱소리 하지마소, 내는 그짝이랑 할 말이 한나또 없으이까네
남자   : 허허이, 이바구를 하다보면 머신 수가 날수도 있는 일을 고직커로 여서
         이칸다
달실댁 : 놓으소, 노라카이!

#30. 안채 대청 (낮)
    청소하는 정실, 어디서 목소리를 들은 듯도 하다
    무슨 느낌을 받은 듯 뒷채 쪽 보다 황급히 안채 쪽으로 달려들어간다
   
#31. 안채 (낮)
    가자커니, 놓으라커니, 실랑이인 달실댁과 남자
    안채 마당으로 뛰어 들어와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정실
정실   : 아배요! 아배 맞지예?
두사람 : (정실을 쳐다보는)...
남자   : (정실의 모습에 놀라) 니가 정실이가?
정실   : (성큼성큼 다가오며) 예, 지가 정실이니더, 아배 고맹딸 정실이니더!
남자   : (이상하게 쳐다보면서) 아이구마... 니, 우예 그리 컸노?
달실댁 : (꼭지 도는) 와, 우리 정실이가 어때서 그카는교?
         아배 엄씨 이래 커준기 내사마 눈물나게 고마분데 뭣이 잘못됐는교?

    내심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남자
    “아배요!”를 부르며 남자에게 달려드는 정실
    정실의 손을 탁-- 낚아채는 달실댁

달실댁 : 흙때이를 씹고 죽는 한이 있어도 저 인간이랑 상종 안 한다 안카드나!!   
정실   : (잡힌 손을 빼내려고 애쓰며) 내는 아배 볼끼다!
달실댁 : 아배? 아들 본다꼬 새끼고 마누라고 다 팽기치고 첩실 치맛폭에 처박힌
         화상이다! 딸은 지 새끼 아이라꼬 엄동설한에 내쫓아삔 인간이란 말이다!
         그런 위인이 아배가? 아배가??

    정실의 등짝을 찰싹 찰싹 때리는 달실댁
    무안해져서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는 남자
    문득, 안채 일각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상룡과 눈이 마주치면
    당황한 남자, 그대로 안채를 나가버린다
    “아배요, 아배요!” 불러대다 철썩 주저앉는 정실

#32. 효계당 대청
    상룡, 소리나는 쪽 보다 앞마당 쪽으로 가는데 누군가 황급히 나간다
    정실부이다. 뒤로 들리는 모녀의 울음소리

달실댁 : (소) 내 자빠지가 죽고 나거든 쫓아가라 이 문디 가스나야...

    서럽게 우는 정실 소리...
    상룡, 그쪽으로 가려다말고... 착잡한 표정

#33. 조부방
    조부, 소산 언간의 해석본을 읽고 있다. 다 읽고 쳐다보는 조부
    상룡, 혹 잘못됐나 싶어 불안하다. 조부, 해석본을 내려놓고 소산의 두 번째
    언간을 내준다

#34. 상룡방
    자기방에 돌아와 안도하는 상룡, 소산의 두 번 째 언간을 본다

#35. 누각마루
    둘째 언간 보고 있는 상룡

상룡 : (N)소산의 두 번째 언간은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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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간2 (원찬조 때의 사건)
#2-1. 정지간 밖 (낮) (과거)
    급하게 뛰어들어오는 거둘이.
    화로위에 약탕기를 올려놓고 정성껏 부채질을 하고있는 소산
    이내 “아씨, 아씨”를 부르며 호들갑스럽게 뛰어 들어오는 거둘이

소산 : (부채질을 멈추지 않은 채) 서방님 탕제니라, 정성이 하늘에 닿아야하거늘
       어인 소란이냐?
거둘 : 아씨! 제가 지금 가슴 철렁한 이야길 들었사와요. 서방님 저리 편찮으신 게
       다 이 집안에 내력이 있기 때문이랍니다요! 제가 늙은 침모로부터 그리들었사         와요
소산 : (종부다운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어허! 어디서 쓸데없는 말을 옮기고 다니는         게냐?
거둘 : 아씨 그게 아니구요.. 제가 들었는데.. 아씨만 모르시는 일이라구..모두들..

#2-2. 안방 (밤)
    언간을 쓰고 있는 소산

소산 : (E)거둘이 비록 천한 하비(下婢)라 하오나 제법 도리를 셀 줄 아는 아이인지라
       말을 허투루 옮기지 아니 하옵는데 일전 듣기 무서운 말을 전하기에 혼자만
       가슴에 담아두기 어려워 망설임 끝에 할머니께 아룁나이다

#2-3. 안방 (낮)
    거둘이 들은 이야기를 소산에게 한다. 민재 옆에서 자고있고..

거둘 : 이 댁에는 판서 벼슬까지 지내고 낙향하신 선조 어르신이 있다고 들었사와요,
       그런데 어르신이 나라엔 공을 세우시고 향리엔 덕을 쌓으셨지만 집안을
       다스림은 그만 같지 못하셨던 모양입지요

#2-4. 사랑채
    기둥 한켠에서 마당을 바라보고 있는 어두운 시선.
    윤곽이 센 노인 프로필이다.
    멀리 반듯한 자태의 계집아이가 하녀들과 어울려 일하고 있다

거둘 : (E)그만 집안에 거느리던 아랫것의 딸년에게 욕심을 내셨다고 하와요
       한데 그때 열여섯 살 먹었던 그 계집아이는 몸가짐이 단정하였고 자태도 얌전         한 것이, 천것이지만 격이 있었다 하와요. 곱고 바르기가 그와 같으니 양인
       (良人)총각 하나가 정인이 되어 돌아올 가을이면 혼사를 치르기로 정해놓은
       터였다 합지요      
   
#2-5. 효계당 사랑방 (대과거)
    호피 보료에 안석(案席)과 장침, 그 옆의 연상과 문갑, 병풍 등이 지극히
    호사스러운 방이다. 그 화려함만으로도 이 방 주인의 재력과 지위를 가늠할
    만하다. 그 방 한가운데 앉아 종친과 바둑을 두고있는 원찬(70대),
    노인임에도 풍채가 장대하다. 문득 소반에 찻잔을 받쳐들고 들어오는 하녀(16세)
    소반을 원찬과 종친사이에 놓고, 달달 떠는 손으로 차를 따른다

#2-6. 행랑채 일각
    집사가 계집아이에게 뭔가 강요하고 있다. 걱정하는 부모들 눈빛
    뭔가 집요하게 보는 노인 프로필

거둘이 : (E)하온데 지체 높으신 어르신께옵서 처녀에게 눈독을 들이시고 자꾸만
         동침을 강제하시니 처녀가 읍소도 해보고 앙탈도 해보고 여러 길로 피해보려
         했던가 보옵지요. 하오나 어디 어르신 욕심이 아랫것 눈물 따위에 눅어졌겠
         사오니까. 자꾸만 강제하시니,

#2-7. 하녀 아비의 방 밖 (밤)
    희미한 호롱불이 새어나오는 방, 무슨 이야기라도 나누는 듯 하녀와 하녀의 아비,
    어미의 모습이 비추는가 싶은 순간 “싫어요!”소리와 함께 방문을 박차고 나오는
    하녀. 행랑채를 막 달려나가려는 하녀의 앞을 우뚝 가로막고 서는 집사

하녀 : (겁먹은 눈으로 올려다보면)
집사 : 나으리 뜻만 받들거라, 네 아비는 물론이고, 너 또한 평생 호강하리니
하녀 : 소, 소녀에게는 혼인을 약조한.....
집사 : (말 자르며) 내일 밤이니라 (아웃되면)

#2-8. 산속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사력을 다해 도망치는 총각과 하녀
    두려움에 질린 거친 숨소리, 맹렬히 뛰는 발자국 소리,
    그 뒤를 바짝 쫓는 무수한 횃불의 무리들
    마침내 불타는 횃불에 둘러싸이는 총각과 하녀
 
거둘이 : (E)견디다 못한 처녀는 어느 날 정인과 모의하여 멀리로 달아나려 하다가
         그만 잡혔다 하지요. 어르신께옵서는 크게 노하시어 옹이도 깎지 않은
         울퉁막대기로 총각을 매우 치게 하시니 그 날로 숨이 넘어갔다하와요

#2-9. 사랑채 마당 (밤)
    횃불 아래, 살구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커다란 자루 하나
    그 주위에 울퉁 막대기를 들고 서있는 하인배들
    마루에 거대한 산처럼 우뚝 서서 노기등등 내려다보고 있는 원찬
    전전긍긍 툇마루 아래 내려서있는 집사

원찬 : 매우 쳐라!

    사정없이 달려들어 자루를 때리는 하인배들
    지축을 흔들릴 듯한 비명소리 터지고
    이내 피가 폭죽처럼 번지는 자루

#2-10. 헛간 (밤)
    작은 키로, 안간힘으로 창살에 달라붙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녀
    땅바닥으로 떨어져버리는 피범벅이 된 자루,
    동시에 폭삭 재가 무너지듯 주저앉아 버리는 하녀,
    서리서리 한 맺힌 그 얼굴 위로

거둘 : (E)총각의 숨이 넘어가자 헛간에 갇혀 있던 처녀도 그대로 혀를 깨물어 이생을
       저버렸다 합지요

#2-11. 안방
    심각히 듣고있는 소산

거둘이 : 한데 그 일이 있고 나서 판서 어르신의 세 아들들이, 하나는 과거를 보러
         올라가다가 알지 못할 병을 얻어 돌아갔고, 하나는 천렵 갔다가 물 곬에
         휩쓸려 잃었고, 마지막 하나는 말발굽에 낭심을 차여 고자가 되어 버렸다고           하와요. 처녀가 죽은 지 꼭 삼 년 안에 세 아들들이 다 그리되어 버린
         것입지요.

#2-12. 효계당 일각
거둘이 : (E)하오니 사람들이 입이 모두 그 계집하녀가 처녀귀신이 되어 그리
         해코지를 한다고 수군거리지 않겠사와요
#2-13. 솟을대문 앞
    붉은 천으로 얽힌 용마루와 손각시를 올려다보면서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중인
    스님

스님 : 어허! 혀 없는 손각시가 용마루에 앉아있구나

거둘 : (E)게다가 연전에 탁발승 하나가 이 댁 용마루에 손각시 귀신이 엎디어 울고
       있으니 원혼을 달래 주라 한 것을 어르신이 대노하시어 매타작까지 안기시었다
       하오니 그 일도 자손에게 복될 일은 아닙지요
 
     매 맞고 쫓겨나는 노승

#2-14. 서안 조씨 종택 사당
    사당에 종손을 고하는 제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종친들 표정, 하나같이 어둡다
    역시 암담한 표정의 원찬, 그의 옆에 젊은 남자, 이제 막 사당에 큰절을 하고있고

거둘 : (E)그 뒤로 이 댁에는 여러 대에 독자만 거듭되다가 양자를 들이는 일이
       허다했답니다. 그래서 재산이 뭉텅이 뭉텅이 잘라져 나가게 되고
       어르신네들께옵서는 재산 모으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셨던가 보아요.
       흉년에 보리 한섬으로 토지 문서를 맞바꾸는 일도 흔했다 하옵니다요

#2-15. 소작농의 집
    하인배들과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방문 왈칵 열어제치는 집사
    비실비실한 몸으로 달려나와 마당에 무릎을 꿇고 싹싹 비는 소작농

소작농 : 나으리, 자식들 굶긴지 사흘째니더....
집사   : 아, 그러게 보리 한섬을 꿔줄 테니 집문서를 맡기라니까
소작농 : 나으리, 참말로 천벌 받심니데이, 어떻게 보리 한섬하고 집문서를
집사   : (말 자르며) 자네한텐 소작을 거둬들이라는 분부시네 (돌아서면)
소작농 : 알겠시니더, (죽고 싶다) 팔겠시니더 (호주머니에서 집문서 내주면)
하인   : (헐렁한 자루 툭 내던져주는)
소작농 : (놀라서)나으리, 이게 무슨 한섬이니껴?
집사   : 아, 판서 나으리 송덕비 건립중이라네. 몇 대에 걸쳐서 소작을 부쳐먹는데 
         송덕비 건립에 성의 표신 해야지
소작농 :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야이 이 날강도 같은 놈들아-!!!

#2-16. 안방 (낮)
거둘이 : 허니, 입 달린 아랫것들은 모두, 어지신 서방님도 조상의 악업 때문에
         하늘의 벌을 당해 몸병을 얻었다고 하굽쇼, 결국 조씨 가문은 절손 되어
         문을 닫고 말거라 합니다요!
소산 : (말 자르며) 어헛! 절손이라니!! 서방님도 계시고 민재도 있거늘 어찌 천한
       입을 그리 망령되이 놀리느냐? 다시 한번 극요한 입을 놀렸다간 태장질을 면치         못할 것이니라!

#2-17. 안방 (밤)
    언간을 쓰다말고 강보에 싼 민재를 품에 안고 저 멀리 용마루를 올려다보는 소산,
    그 근심스런 얼굴위로

소산 : (E)날로 도릿하게 여무는 민재를 두고 절손이라니, 이런 흉한 측문이 어디
       있으리잇가, 거둘이를 야단치고 입단속을 시키었으나, 소손녀 자주 헛것을
       보고 놀라니 다만 두렵사옵니다. 부디 한마님께옵서 이 몸을 따끔히 초책하여
       주시옵소서. 임신(壬申) 삼월 그믐날 손녀 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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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사랑방 (낮) (현재)
    서안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상룡과 조부
    서안 위에 두 번째 언간과 그것을 해석한 용지 놓여있다

조부 : (노기 등등) 이것이 도대체 무슨 삿된 수작이냐?
       네 놈은 이 허튼 소리를 보고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더냐?
상룡 : (할 말을 잃어).....
조부 : 그 어른이 누구시더냐? 우리 문중에서 가장 추앙 받는 원찬할배시다!      
       마을 풍속을 청명하게 하시고 향리에 덕을 쌓으셔 향민들이 송덕비까지 세운
       청백리의 전형이시다
상룡 : (용기를 내어) ....저도 ...언간의 내용을 그대로 믿지는 않습니다
조부 : 그대로 믿지를 않다니, 아랫것들이 떠드는 망발에 일면 수긍이라도 간단
       말이더냐?
상룡 : (할 말을 잃어)......
조부 : 일찍이 우리 조상께서는 잘못에 대해서는 엄격한 형벌로 아랫것들을 다루셨다.
       개중에 간교한 아래 것들이 앙심을 품고 삿된 소문을 퍼뜨렸음을 어찌 모른단         말이더냐? 이러고도 니가 이 집안의 종손이라 할 수 있더냐?
상룡 : (그 서슬에 눌려) 저는 단지 언간을 충실하게 옮기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언간의 내용이 우리 집안의 명예와 배치될지라도 나름대로 가치가
       (아차 싶다, 황급히) 그래야 전체적인 평가가

    순간, 가까이에 있던 묵직한 명함첩을 상룡에게 던져버리는 조부
    상룡의 이마에 명중하는 명함첩
    동시에 낡은 명함첩이 툭 뜯어지면서 상룡의 셔츠 앞섶에 명함이 우수수
    쏟아져 버린다

조부 : 못난 놈....
상룡 : (입술 무는).....
조부 : (새 언간을 상룡에게 툭 던져주며) 니가 이러니 근본 없는 천격 출신이란 소릴
       듣는 것이다! 네가 하는 일의 의미를 깊이 새겨보거라!

    그대로 방을 나가버리는 조부
    한동안 입술을 물고 끓어오르는 수치심을 꾸욱 참았다가 천천히 흩어진 명함을
    하나하나 명함 첩에 집어넣는 상룡. 무심코 또 다른 명함 한 장을 집으려다가
    일순 굳어진다. 『JAZZ SINGER 서영』명함 C.U

    이내 다시 사랑방으로 들어오는 조부의 기척이 들리면
    얼른 명함을 손에 쥐고 감추는 상룡
    향로를 하나 들고 상룡의 맞은편에 앉는 조부
    언간을 향로에 집어넣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는 조부
    활활 타들어가는 언간
    명함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상룡

#37. 효계당 일각 (낮)
    축 처진 어깨로 걸어가는 상룡의 뒷모습   
    궁금한 얼굴로 상룡을 쳐다보는 정실의 모습에서

#38. 늪 언덕
    상룡, 늪 언덕에 온다. 답답하면 오는 곳인 듯한 분위기..

#39. 정짓간 (저녁)
    부뚜막에 앉아 콩나물을 다듬고 있는 정실
    이내 손도 안댄 소반 하나를 들고 들어오는 달실댁,
    얼른 일어나 달실댁의 손에서 소반 받아 한쪽에 내려놓는 정실

달실댁 : 상룡이가 와 저러노? 와 밥도 안 묵고...먼 일 있나?
정실   : 아까 낮에 할배한테 혼났다 아이가
달실댁 : 으르신한테? 와 또?
정실   : (밥상을 치우며) 그걸 내가 우예 아노?
달실댁 : 상룡이는 한다꼬 하는데 우예 그리 으르신 눈엔 안차나 모리것다
         참말로 걱정이데이 (한숨을 내쉬는데)

#40. 재즈바
    고급스런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바,
    긴장한 얼굴로 들어오는 상룡, 자리에 앉아 스테이지보고..
    ..물어보는 상룡

상룡   : (명함 보여주며) 이분 언제 나오세요?
웨이터 : 아, 서영씨요. 이분은 11시 넘어야 나오세요

    손목 시계 보면

#41. 늪 언덕
    오후 1시 20분 가리키는 시계. 상룡, 명함을 움켜쥔다. 결심이 선 듯 일어나
    자전거로 달려간다

#42. 고속 터미널
    버스에서 내리는 상룡

#43. 도시 거리
    점점 번화해지는 도심 스케치 (1,2)     

#44. 도시 거리
    상룡, 길가는 사람 붙잡고 무얼 묻는다 (1,2)

#45. 재즈바 입구
    어리벙하며 온 카페 앞.. 들어가고..

#46. 재즈바 안
    상룡, 벽시계 보면 시간이 좀 흐른 듯 하다
    스테이지엔 다른 재즈가 연주된다
    뭔가를 조용히 꺼내면 어릴 때부터 가지고있던 생모 사진

#47. 늪
    배에 누워 사진 보는 상룡

#48. 누각 대청
    어린 상룡 사진 본다. 뒤쪽 지나가는 조부, 사진 얼른 감춘다
   
#49. 재즈 카페
    그 사진 보는데 어디서 들리는 Autumn leaves
    직감적으로 서서히 고개 돌려 쳐다보는 상룡의 눈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노래하는 생모, 고혹적인 차림새다
    그녀를 그리움과 회한과 원망이 뒤섞인 눈으로 쳐다보는 상룡...

#50. 카페 입구
    상룡의 시계 밤 12시를 넘겼다...
    몹시도 초조하다. 이내, 바바리 코트 차림에 화장품 케이스 들고 홀로 걸어
    나오는 생모, 가발을 벗고 머리를 뒤로 묶어 아까와는 반대되는 수수한 차림새,
    쓸쓸하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상룡을 발견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생모
    따라가는 상룡. 누군가 자기를 따라온다는 느낌을 받고 돌아서는 생모.
    바짝 얼어서 긴장하는 상룡

생모 : 나한테 볼 일 있으세요?
상룡 : (차마 입도 안 떨어져서 핑 도는 눈물로 보는).......
생모 : (일순, 본능적인 느낌에 사로잡혀) !!
상룡 : (보는) ....
생모 : (보는) ....

    멀리 주차된 차, 차 창문 내려지고 보이는 남자

남자 : 여보, 왜 그래?
생모 : (얼른 표정 수습하고 크게) 아니에요, (상룡을 향해) 싸인해 드려요?
상룡 : !!!

    잘가라는 듯 미소를 띄며 상룡을 보고, 남자의 차로 가는 생모
    장승처럼 서있는 상룡을 뒤로하고 멀어지는 생모

#51. 달리는 시외버스 안 (밤)
    맨 뒷자리에 앉아 창문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는 상룡

상룡 : (N)다섯 살 때 냉정하게 나를 보냈던 엄마였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내가 그랬듯 엄마 역시 가슴속에서 나를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이십 년의 빈곳을 순간의 눈빛으로 다 메꿔
       줬으니까...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엄마!...

#52. 송덕비 앞 (새벽)
    패잔병처럼 송덕비 앞을 스쳐 터벅터벅 걸어가는 상룡

#53. 효계당 일각 (새벽)
    뒷밭에서 파뿌리 정도를 뜯어 정짓간 쪽으로 가던 달실댁
    이제야 효계당으로 들어오는 상룡과 마주친다

달실댁 : (황급히 달려와) 어데갔다 이제 오노? 으르신이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아나?
상룡   : (조부의 방 쪽을 보면 / 불이 꺼져있다)
달실댁 : 사당에 신알 가싰다. 퍼떡 옷 갈아입고 인사드리라 마

# 54. 조부의 방 (아침)
    형형한 눈빛으로 상룡을 쏘아보는 조부
    그 눈빛에 오금이 저리는 상룡, 무릎을 꿇은 채 전전긍긍이다

조부 : 어디서 배운 망령된 짓이냐?
상룡 : (뜨악)?
조부 : 언간의 내용은 삿된 소문에 불과하다 했거늘!
       네 놈은 그저 해독만 했을 뿐인데 혼이 난 게 억울했느냐?
       그래서 반항이라도 하고자 말없이 외박한 거더냐?
상룡 : (그제야 알아들었다) 그, 그게 아니고
조부 : (혀를 차며) 못난 놈. 용렬한 심보로 어찌 문중을 이끌어간단 말이더냐?
상룡 :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조부 : 네 아비와 생긴 것은 다르되 하는 짓은 한가지구나
상룡 : (억울해서 죽고싶고)......
조부 : (쩟, 혀를 차며)나가 보거라! ...천출의 피를 어쩌겠느냐?

#55. 별당 마당
    정실, 손에 비 걸레 등 들고 온다. 댓돌 앞에 떨어져있는 신발 하나

정실 : 어, 이거 상룡이껀데!

    댓돌 위에 올려놓고 마루에 올라 청소 시작한다
    이어 흥얼거리는 노래 소리

#56. 별당 방안  
    조부에게 야단 맞고 잠든 상룡,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눈떠지고...
    정실, 방안으로 들어와 방 청소 시작하고.. 여전히 흥얼거리며

정실 : (E)상룡이 어매는 바람둥이, 사내 없이는 잠을 못잔대
       상룡이 어매는 바람둥이, 밥은 굶어도 그짓은 해얀대
       날마둥 날마둥 사내를 바꿔~

    불에 덴 듯 벌떡 일어나 정실 앞에 서는 상룡
    놀라는 정실, 달아나려 하지만..
    그대로 달려나와 정실의 엉덩이를 걷어 차버리는 상룡
    훌러덩 허연 허벅지를 드러낸 채 쓰러져버리는 정실
    이글이글 분노에 불타는 눈으로 정실을 내려다보는 상룡
    상룡의 심상찮은 분위기에 놀라 일어나려는 정실
    와락 정실에게 달려드는 상룡
    놀라는 기색도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그저 순한 정실
    정실의 치맛자락을 걷어올리고 황소라도 때려잡을 기세로 덮치는 상룡
    아앗, 신음을 토해내는 정실
    정실의 주둥이를 틀어막고 거칠게 방아질을 해대는 상룡
    상룡의 얼굴을 두 눈에 가득 담으며 아득해지는 정실

    댓돌 아래에 숨겨있는 듯 놓인 상룡 다른 신발 한짝
    울렁이는 대숲

#57. 안채 장독대 앞
    허겁 안채 쪽에서 걸어나오는 정실. 그러나 별당 쪽 한번보고는 미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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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간3 (민재의 죽음)

#3-1. 소산의 방 (밤)
    소산, 눈물로 그렁이고... 눈물 언간 위에 떨어져 번지고..   

소산 : (E)할머님, 죽고싶습니다. 정말 죽고싶습니다. 거꾸러져 천만 번 죽고싶은
       목숨을, 거추장스러이 몸을 움직이고 숨을 쉬려니 앉은자리 그대로 지옥이며
       시시로 말할 수 없이 비참할 따름입니다

#3-2. 효계당 안채 (낮)
    마루에 서있는 존구, 민재를 품에 안고 왜 이리 더디냐는 얼굴로 존고를 쳐다보면
    존고, 역시 마루에 서서 안방을 향해 “아가, 아직 멀었느냐?” 재촉해댄다.
    안채 마루 밑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유모와 거둘이, 하인들 보이고
    순간, 존구의 품에 안긴 민재 울기 시작하면
    이내 보따리를 싸서 안방에서 나오는 소산
    어미를 보자 더욱 자지러지는 민재를 향해 선뜻 다가가 안으려면
    민재를 얼른 유모에게 넘기는 존구
    민재의 짐을 든 소산에게서 얼른 짐을 채틀어 거둘이에게 넘기는 존고
    엄마~!!를 부르며 소산을 향해 손을 뻗치고 우는 민재
    그런 민재를 품에 안고 대기중인 가마에 올라타는 유모
    찢어지는 가슴으로 민재를 바라보며 가마 쪽으로 다가가려는 소산
    그런 소산의 팔을 붙잡는 존고
    미어지는 가슴으로 가마만을 쳐다보는 소산
    안채의 중문을 나서는 가마
    가마의 창문 사이로 어미를 찾아 헤매는 민재의 고사리 손 클로즈업

소산 : (E)마을에 천연두가 창궐하며 여러 집 아이들이 죽었기에 시아버님께서 민재를
       고모님 댁으로 피해보내라 하시기에 어미 품을 떠나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붙잡고 매달리는 것을 억지로 떼어내어 허겁지겁 영기말로 보냈거늘..

#3-3. 마을 일각
    달려오는 흰가마 한 대

소산 : (E)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금옥 같은 민재를 앗아간 것입니까. 고모님 어깨
       너머로 손 내밀던 그 모습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이 되어버렸습니다

#3-4. 안채 마당
    나으리, 나으리!!! 울부짖으며 마당을 뛰어 들어오는 머슴
    큰 사랑방 문 열리고 내다보는 존구
    왠지 불안한 얼굴로 작은 사랑방에서 뛰쳐나오는 소산

머슴 : (철퍼덕 무릎을 꿇고 앉아 우는)나으리, 나으리......
존구 : 무슨 일이더냐?
머슴 : 애기씨께서... 애기씨께서...

    소산, 애기씨란 말에 가슴이 섬뜩해 댓돌 아래로 내려선다
    순간, 사랑채 마당으로 들어서는 새하얀 가마 보인다
    철렁,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소산
    이내 가마 속에서 머리끝까지 흰 천으로 쌓인 아이를 품에 안고 울면서 내리는
    유모. 잘겁하게 놀라 맨발로 마당까지 뛰어내려오는 존구, 부들부들 떨면서
    차마 다가서지를 못한다
 
유모 : 몇 일 전까지만 해도 아무 일 없이 잘 지내시었는데, 갑자기 고열이 오르고
       그대로.....(우는)

소산 : (E)영기말에 가서 첫이레까지는 아무 일 없이 잘 지내었으나 돌림감기에
       걸리려는지 볼이 발갛고 말간 콧물이 흐르기에, 배즙에 꿀을 섞여 먹이고
       재웠으나 이튿날 갑자기 고열이 오르고 발진하더니 축 늘어졌다가 그대로
       숨결을 접었다하니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습니까
#3-5. 안채 마당
    넋이 나간 소산, 천천히 유모에게로 다가간다
    그녀의 품에서 잠든 아이를 받아 안 듯, 조심조심 민재를 받아 안는다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민재를 품에 안고 용마루를 올려다보는 소산
    마치 민재의 혼불인 양, 애처롭게 번득이는 푸른 인광 보이면서...

소산 : (E)내장이 갈기갈기 끊어지는 듯하며 두골이 낱낱이 빻아지는 듯 붓을 쥔
       손가락이 무슨 요사한 망언을 떠드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오니 목숨이
       붙었으되 살았다 할 수 없습니다. 사람 꼴도 갖추지 못하고 흉사(凶事)
       전하는 망물(妄物)의 버릇없음을 부디 널리 이해해주시어요
       임신(壬申) 십일월 초여드렛날 손녀 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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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상룡의 방 (밤) (현재)
     착잡한 마음으로 언간을 내려놓는 상룡
     잠시, 골몰히 생각하다가 벌떡 일어난다
     ..................
     이내, 책상 위에 족보를 내려놓고 앉는 상룡
     긴장된 마음으로 족보를 펼쳐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카메라 주욱 훑어 내려가면
     준몽(사랑)과 소산의 이름 아래, 子, 민영(珉永)이라고 쓰여있다

상룡 : (N)언간에 쓰여진 소산과 준몽의 아들은 민재였는데 족보상은 민영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어있었다. 그렇다면 민재가 죽고 나서 두 사람은 아들을 하나
       더 얻은 것인가?.....

    상룡, 족보를 넘겨 14대 원찬조를 찾는다
    00 아래 이름 아래, 아들 대종, 대규, 대환이 새겨져있고
    대종과 대규는 대가 끊겼으나, 대환 밑에 子, 00라는 이름이 써있다

상룡 : (N)그리고 준몽으로부터 4대를 거슬러 올라간 원찬 할배에겐 언간에 쓰여진
       대로 아들이 있었다. 두 아들은 죽고 막내아들은 고자가 되어 대를 잇지
       못했다고 했으나 족보에는 대가 이어져 있었다.

    상룡, 원찬조부터 족보를 쭉 훑어 내려 가본다   

상룡 : (N)그리고 그 후대에도 계속해서 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씨 가문이 절손될 것이라는 언간의 이야기는
       할아버지 말대로 아랫것들이 지어낸 거짓말이었을까?
    상룡, 다시 한번 족보를 살핀다. 점점 빨라지는 손가락
    모두 독자로만 이어진다

상룡 : (N) 그러나 원찬조를 시작으로 누대에 독자만으로 이어지고 있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자그마치 13번을 독자만으로 이어진다는 건...

    상룡, 용마루 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어디선가 땡, 땡, 적막을 깨는 괘종시계 소리 들린다...
    일순, 시계보고 벌떡 일어나는 상룡

#59. 뒷채 (밤)
    자신의 방에서 살금살금 나와 안채를 지나 어둠 속을 쏜살같이 달려가는 정실,
    삐거덕 중문 여는 소리를 내며 사라진다

#60. 별당 (밤)
    달빛이 희미하게 비쳐지고 있는 별당 마당
    정실의 손을 잡고 다급하게 별당으로 향하는 상룡

상룡 : 아지매는 모리게 잘 나왔제?
정실 : 옴마는 허리약만 무면 세상 모린다. 걱정마라

    풍경소리에 달빝이 그윽하다
    마침내 거칠고 원초적인 정사가 끝나고 나면

상룡 : 근데 니... 그건 괘안나?
정실 : 머 말인데?
상룡 : 와 그거 있잖나... 이래하다가... 멋 좀 조심해야하는 거 아이가?
정실 : 임신 말이가? 내는 멘스를 한분도 안해가 고마 아아를 못놓을기다
       의사도 마 그래 이야기하더라
상룡 : (임신을 못한다니 정실이 더없이 사랑스럽다, 정실을 꼭 끌어안고)
       낼도 일로 나와래이
정실 : (상룡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상룡 : (선뜻 대답없다, 감히 뚱뚱이 주제에, 존심 상해서) 싫음말고
정실 : (사랑에 푹 빠진 얼굴로) 니는 머시마가 우예 그리 이삐게 생깃노?

    마음이 탁 풀린 얼굴로 정실을 돌아다보는 상룡

#61. 정짓간 (아침)
    조반상을 직접 들고 정짓간으로 나오는 상룡, 표정이 매우 밝다
    부뚜막을 마른 행주로 닦고있는 정실, 상룡과 눈이 마주치면 부끄럽다
    얼른 몸을 상룡이 반대쪽으로 튼다.
    찬장을 정리하던 달실댁, 화들짝 놀라 상룡이 들고 온 상을 받으며

달실댁 : 으르신 봤다간 우얄라꼬 이라노?
상룡   : (정실을 힐끔 쳐다보며, 해보는 소리다) 아지메요, 두부 맛있데예!
정실   : (자랑하고 싶어서 얼른 일어나) 그기 내가 조린기다(쌩 나가버리는)
상룡   : (그런 정실이 귀엽다, 살짝 웃는다)   
달실댁 : (상룡의 미소와 뛰쳐나가는 정실을 뜨악하게 본다) !?
상룡   : (재빨리 눈치 채고) 힘드시지예? 지가 뭐 도울 거 없겠니껴?
달실댁 : (웃으며) 니가 빨리 장개 가는 거이 내 도와주는 기제
         이 집에 안주인 없은지가 벌씨로 한참 되지 않았나
상룡   : (내심 뜨끔해서 달실댁을 보면)
달실댁 : (대견한 듯 보며) 쪼맨한게 어메 떨어져가 밤마동 우는거 보면 내 속이 다
         씨렸는데... 이래 장성해가 장개갈 때가 다 됐으이 참말로 세월 빠르다!
상룡   : (어머니같은 달실댁이다, 새삼 죄책감이 밀려온다).....
달실댁 : 하이고 내 정신 좀 보그래이, 내 퍼떡 가게 갔다 올낀데, 니 뭐 필요한 거
         없나?

    상룡, 애써 웃으며 작게 도리질하면, 그대로 나가려는 달실댁.
    상룡, 문득 뭔가 떠오른 듯

상룡   : 아지매요, 재봉틀 기름 있시니껴?
달실댁 : (돌아보며) 재봉침 기름? 뭐하구러?

#62. 효계당 일각
    오랫동안 안 쓰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상룡, 얼굴이 숯검정이다
    문득 땔감을 한아름 안고 들어오는 마름정씨

정씨 : 아이고 상룡아, 빈방에 뭐할라꼬 군불은 지핀다고 이래쌓노
       으르신 보셨다간 경을 칠끼구마
상룡 : 너무 오래 안쓰이까네 곰팡이가 설 것 같아서예

    자신의 방, 정실의 방, 안채 중문, 등등의 경첩에 정성껏 재봉틀 기름을 바르고       다니는 상룡. 끼이익-- 소리가 나던 방문을 여러 번 여닫아 보는 상룡.
    그때마다 얌전히 여닫히면 빙그레 웃는다

#63. 안채 마당 (밤)
    정실의 손을 잡고 마루로 뛰어올라오려는 상룡
    일순, 겁을 먹고 여기만은 안 된다고 도리질을 하는 정실
    호기롭게, 일종의 악의에 가까운 심정으로 괜찮다며
    정실의 손을 틀어쥐고 방으로 들어가는 상룡

#64. 안방 (밤)
    생전의 해월당이 쓰던 세간이 고스란히 그대로 놓여있는 방이다
    방문을 여는 순간, 차디찬 냉기가 확, 두 사람을 감싼다
    더욱 더 오싹해진 정실

정실 : 해월당 마님 방이다, 상룡아...
상룡 : 안다. (혼잣말)불을 넣는데도 춥네...

    안 들어오려는 정실의 손을 홱 잡아끌어 들이고 방문을 닫는 상룡
    그녀에게 보란 듯이 벽장문 열어 해월당의 눈부시게 흰 요를 바닥에 까는 상룡,
    방안을 둘러보며 달달달 떨던 정실, 기겁한다
    상룡이 그 이부자리 위에 정실을 눕히려들면

정실 : 베, 베락 맞으면 우얄끼고...

    와락 정실을 쓰러뜨려 버리는 상룡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상룡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정실
    해월당의 동자승 병풍 앞에서 뜨거운 정사를 벌이는 상룡
    뚫어지게 응시하는 동자승들..

    해월당의 이불 위에 나란히 누워있는 상룡과 정실
    정실은 아직도 무서워 상룡의 품에 태아처럼 안겨있다
    여전히 그 두 사람을 외면하고 깎은 조각처럼 앉아있는 해월당
    상룡,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내심 희열에 차서

상룡 : 니는 참말로 운이 좋은 줄 알아래이, 아무나 여자를 이렇게 무지개 태워주는           거 아이다. 남자가 나쁜 놈이면 즈그들만 재미를 보고 끝이라 아이가
정실 : (다소 분개한) 맞다, 진짜로 나뿐 놈들이다. 사람이 아파가 우는데도 생각도
       안해주데
상룡 : !!?

    상룡, 얼음을 뒤집어 쓴 듯

상룡 : 마이 아프드나?
정실 : 하모! 첨엔 맨날 울었다 아이가
상룡 : 근데?
정실 : 김씨가 내더러, 자꼬하면 괘안타 그커더니 그 말이 맞데
상룡 : 나중엔 실실 좋아지드나?
정실 : 나중엔.. 머.. 좋은 건 아이고... 고마 참을 만은 하데
상룡 : 참을 만 해?
정실 : 엉
상룡 : (이불에서 튕기듯 일어나 정실의 멱살을 움켜쥐고) 김씨가 어뜬 새끼고?
       내 말고 어뜬 놈이랑 그 짓을 한기고?
정실 : (놀라서)아이다, 아이라카이네에, 내는 참말로...
상룡 : (냅다 정실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면서)언놈한테 또 그 더럽은 가랭이를 벌맀나?
       어떤 놈이고, 어떤 놈이냐 이 말이다!
정실 : (겁에 질려) ....저어기 평지 상회 김씨 아재....
상룡 : (어이없다) 평지상회?
정실 : 내, 내가 몇 년 전에 시장 갔다오다가 쭈, 쭈쭈바 하나 사물라고 들갔는데...
       김씨 아재 그 사램이 내를 골방에다 딜이밀더니...
  
    쿵 소리가 나도록 정실의 머리통을 바닥에 박아버리는 상룡
    그대로 머리를 바닥에 댄 채 소리 죽여 우는 정실

상룡 : 그 다음엔? 담엔 또 누고?
정실 : (울면서)제, 제사 때 오는 사램이다
상룡 : (충격이다, 고함을 지르는) 제사 때 한 둘이 오나?
정실 : 내는 참말로 누군지 모린다.... 하나는 나가 좀 많고 하나는 좀 적은데
       고성 산다 카더라....
상룡 : 고성!..
정실 : 내더러 이쁘다 그카고... 저거 마누래 몰래 내 델꼬 살기라고..
       큰 도시 데꼬가서 얼굴 고치주고... 그칸다까네.. 내는 참말로 그라나하고..

    놀라움에 벌러덩 이불 위에 누워버리는 상룡
    여전히 그 자세로 앉은 채, 확연한 조소를 품고 상룡을 쳐다보는 해월당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벌떡 일어나는 상룡, 그대로 방을 박차고 나가면,
    얼굴을 이불에 묻은 채 소리 죽여 흐느끼는 정실
    어디에도 해월당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방에서....

#65. 효계당 일각 (낮)
    옷가지가 비죽 나와있는 가방을 메고 빠르게 대문을 향해 나서는 상룡
    이제 막 대문을 들어서던 달실댁, 상룡을 보고 반갑게

달실댁 : 상룡아, 니 오데 가노?
상룡   : (마지못해) ...쪼매 좀 다녀오겠시니더

    그대로 나가버리는 상룡을 뜨악한 얼굴로 쳐다보는 달실댁

#66. 정짓간
    안채로 들어오는 달실댁, 하도 울어서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정실
    얼른 고개를 숙이고 정짓간 쪽으로 들어가려면

달실댁 : 상룡이가 와 저라노?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
정실   : 내가 그걸 우예 아노?
달실댁 : (그제야 정실의 얼굴을 보고)니는 또 와 그라노?
정실   : 와, 내가 어때서?

    대답은 그렇게 해 놓고도 얼른 정짓간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정실

#67. 평지상회 앞 (낮)
    시너 통을 들고 평지상회 쪽으로 성큼성큼 가는 상룡
    평지상회 안으로 서슴없이 들어가 물건 위에 시너를 뿌리기 시작한다
    놀라서 만류하는 김씨를 뿌리치고 마침내 불을 당겨버리는..

#68. 버스 (낮)
    때마침 도착한 낡은 시내버스에 성큼 올라타 버리는 상룡   

#69. 터미널 (낮)
    버스에서 내려 주변을 휘이 둘러보는 상룡
    지갑 보면 쓸 만큼의 지폐 몇 장 보이고...
    분주한 사람들 속에 우두커니 서있는 상룡, 갈 곳이 없다
    결국 터미널 한 귀퉁이에 있는 허름한 식당으로 향한다

#70. 보신탕 집 (낮)
    질뚝배기에 신선한 부추와 방아 잎에 수북히 얹혀진 보신탕에서 카메라 빠지면,
    그 앞에 앉아있는 상룡, 잠시 보신탕을 쳐다보더니 들깻잎과 고춧가루를
    한 숟갈씩 푹푹 퍼 넣고 휘이 젓는다. 문득 탁구공 만한 눈알이 둥둥 떠있는 게
    보인다. 숟가락으로 푹 떠서 한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어 먹는 상룡.

    들깻잎과 고춧가루가 수북한 채 손도 안댄 보신탕에서 화면 빠지면
    숟가락을 든 채, 보신탕을 내려다보는 상룡. 껍데기 보인다.
    속이 메스껍다. 끝내 입에 넣지를 못하고 터지려는 토악질을 바듯이 참고,
    “여기 얼마예요” 묻는 상룡의 모습에서
#71. 호프 집
    이미 거나하게 취한 일동 (여후배 1, 2 상룡과 소진)
    왁자한 분위기 속에서 소진, 자꾸만 상룡을 관심 있게 쳐다본다
    상룡도 소진의 눈빛을 의식하고 있다

소진 : (시계를 보더니, 다소곳이) 저 먼저 일어날게요
후1  : 아우 야아, 벌써?
후2  : 어딜 가? 분위기 좋은데 혼자만 빠지기야?
소진 : 우리 집 통금시간 00시야. 1분이라도 늦었다간 대문 밖에서 날 새야 돼.
       (상룡에게) 선배님, 버스 정류장까지만 바래다 주실래요?

#72. 버스 정류장
    소진, 적당히 오다 상룡의 팔짱을 낀다

소진 : 선배님 우리 한잔 더해요?

#73. 모텔 카운터
상룡   : 얼마예요 
카운터 : 쉬었다 가실 거예요? 주무시고 가실 거예요?
상룡   : (뭐라 말할지.. 소진 보며.. 결정 못하고 우물쭈물하다) 쉬었다..
카운터 : 삼만 원입니다 (칫솔치약 내놓고 키 준다)
상룡   : (지갑 보며 아차 싶다, 난처한.. 말도 못하고..)
소진   : (모자라는 돈 때문에 쩔쩔매는 상룡을 힐끔 쳐다보더니) 삼만 원이요?
         돈주세요 (상룡에게 돈 받아 모자란 만큼 정확히 채워서 카운터에게 내미는)

#74. 모텔방 입구 + 방 안
    현대식 모텔이라 키가 카드 형태다. 생소한 상룡, 어찌 쓰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안 된다. 소진, 보다못해 카드 뺏어 쉽게 열어버린다.
    상룡과 눈이 마주치자 일순 들켰다는 생각에 얼른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숭을 떤다. 방안으로 들어오자 불빛이 환하다

소진 : 너무 불이 밝다, 저 먼저 씻을게요, 불 좀 꺼줘요 (욕실로 아웃)
상룡 : (스위치가 안 보인다. 어찌 꺼야할지 당혹스럽다)
소진 : (소) 선배님 불 좀 꺼달라니까요!
상룡 : (당황) 어, 알았어!.. 스위치가
소진 : (소) 리모콘 없어요?

    허둥대던 상룡의 눈에 리모콘이 보인다. 리모콘을 눌러버리면 모든 불이 다
    꺼져버린다
소진 : (소)형!~
상룡 : 어, 미, 미안...

    몹시 당황한 상룡, 리모콘을 다시 누르면 확 불이 켜진다
    몇 차례 더 불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는 사이, 완전히 주눅이 드는 상룡
    몇 차례 끝에 무드조명으로 만드는 상룡
    타월로 몸을 가린 소진이 룸으로 나오면 머쓱해진다
    거울 앞에 앉으며

소진 : 선배 이런데 처음이에요?
상룡 : 응? 아니!.... 아니!
소진 : 그렇다고 한 거예요 아니라구 한 거예요? 난 첨 아닌데 솔직히..
상룡 : 으...응
소진 : 선배 더워요? 웬 땀을 그렇게 흘려요?
상룡 : (긴장)..어어 그게...

    주눅든 상룡, 머뭇거리다 만회하려는 듯
    갑자기 소진을 침대 위에 눕히고.. 시간 경과
    별 감흥 없이 누워있던 소진, 위 상룡에게

소진 : 선배 안가요?
상룡 : 응, 저기 조금만 더 있다가...
소진 : ..뭐 그럴 수도 있죠

#75. 버스 정류장 근처 + 정류장
    머쓱해져 걸어오는 상룡과 소진
    이내 소진의 버스가 와서 멎는다. 상룡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버스로 달려가는 순간

소진 : 형, 먼저 갈게요
상룡 : 저...(이대로 보낼 수 없다. 자존심 상해서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은데)
소진 : (돌아보며 다가와) 차비 없죠?
상룡 : (완벽한 자괴감)

    천 원짜리 두 장 꺼내 내밀고 가는 소진

#76. 평지상회 앞 (밤)
    몹시도 괴로운 얼굴로 걸어오던 상룡, 문득 불빛 환한 평지상회 간판 보이면,
    일그러진 얼굴로 작은 돌멩이 하나 집어든다. 그걸 던지려다가 성이 안 차는 듯
    커다란 돌덩이 하나 집어들고 유리창을 향해 던지려는 순간,
    가게 안에서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나오는 김씨 보인다.
    뚝-- 돌덩이를 떨어뜨리고 도망치듯 뛰어가 버리는 상룡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스럽다. 스스로에게 화난다. 깡통 하나를 냅다 걷어차
    버리는 상룡

#77. 상룡 방 안 (밤)
    한심한 하루였다. 아무데도 갈 곳 없고 맘에 들었던 여자도...
    단 하나 뜻 한 대로 할 수 없었던 상룡, 천장을 멍하니 쳐다본다..
    그러다 불현듯 일어나 뛰쳐나간다

#78. 효계당 일각
    안채로 달려가는 상룡

#79. 정실의 방 (밤)
    세상 모르게 자고있는 정실
    왈칵 방문을 열고 뛰어 들어오는 상룡
    그대로 정실의 몸을 덮쳐, 치맛자락을 사정없이 걷어올린다
    기겁하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달빛에 비친 상룡을 본 정실,
    반가움에 핑 눈물이 돈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거칠게 정실을 찍어대는 상룡

상룡 : 니가 드럽은 년인 거 알았으이까네, 오늘부터는 고마 가지고 노는 기라...
       니는 아무 사내나 타고 노는 년이니까네, 끌어내가 조리를 돌려도 시원찮고
       아무 때나... 하고 싶을 때.... 하고..... 갖고.... 놀다가.... 걸레 같은...

    마침내 절정에 치달았다가 이내 떨어져 방바닥에 눕는 상룡
    정실, 사무치게 고맙고 감사해서 상룡을 쳐다보면
    한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 죽여 우는 상룡...
    정실, 가슴이 아파온다. 물끄러미 상룡을 쳐다보다가

정실 : 잘못했다... 상룡아... 다 내 잘못이니까네.... 울지마라.......
 
    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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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간4
#4-1 효계당 전경 (과거/ 낮)
    오랜 고목과 대숲에 둘러싸인 효계당...
#4-2 정짓간 (낮)
    약탕기에서 달인 한약을 삼베 헝겊에 부어 놋숟가락 두 개로 짜는 소산,
    두 손에 힘이 없어 제대로 짜지지도 않는다
    꺼질 듯이 지치고 힘든 얼굴에 마른 눈물이 어리면서

소산 : (E)한마님, 못난 손녀 일신이 부덕한지라 참경을 보온 것도 모자라
       헌헌장부마저 저리 시들어 가오니 차마 하늘을 바라보기 부끄러운 몸이라,
       붓을 들어 일자 소식을 전하는 것마저 한마님께 폐롭지 아니할까 두려워
       글월 드물었사옵내다

#4-3 사랑방 (낮)
    완연히 병색이 깊은 사랑... 누워있다

소산 : (E)사랑의 몸병은 위와 목에 돌처럼 굳은 혹이 생겨 거죽 위로도 만져질
       지경이 되었사오니 이제 구제하기 어려울 듯 하옵내다

    목반에 약사발을 들고 들어와 사랑의 옆에 앉는 소산
    그녀를 깊고 깊은 눈길로 쳐다보는 사랑
    눈물 그렁한 눈으로 애써 미소를 짓는 소산
    삭정이 같은 손을 내밀어 소산의 손을 잡는 사랑...

소산 : (E)여짜옵기 낯없사오나 사랑의 몸병이 있은 후에도 존구고께옵서는
       잉태하여야 한다, 하루라도 몸 성할 적에 자손 보아야 한다 하시며
       이 몸을 사랑에 들게 하시었사오니 기나긴 투병에도 부부간의 정은 도리어
       도타웠나이다

#4-4 큰 사랑방 (낮)
    이제 막 외출복 차림으로 들어오는 존구와 내구(외숙부), 굳어있다
    맞이하는 존고 역시 시름이 깊다. 자리에 정좌하고 앉는 존구에게

소산 : (E)존구께옵서는 훗날의 일을 대비하여 시외증조부와 함께 다니시며
       양자 들일 길도 알아보시는 듯 하오나 하냥 여의치 않사오니 집안에 드리운
       먹구름이 가실 줄을 모르옵나이다

존고 : (존구의 눈치를 보다가)...정히 우리 가문에서 양자를 들일 수 없다면
       남의 자식이면 어떻습니까? 수양이라도 하시는 게....
존구 : (말 자르며) 근본도 모르는 남의 씨를 주워다 어찌 종가를 맡긴단 말이오?
존고 : 문중에 워낙 손이 귀하기도 하옵니다만 양자들일 재물도 없지 않사옵니까?
존구 : (큰 한숨 후)흉년이지 않습니까? 두고 보세요, 보리 한섬에 땅문서 바꾸자는
       것들이 속출할 것입니다. 부인은 곳간 문이나 잘 지키세요!

    화를 내며 방을 박차고 나가버리는 존구

#4-5 소산의 방 (낮)
    자리에 누워 의원에게 진맥을 잡히고 있는 소산
    불안, 초조한 심정으로 의원의 말을 기다리는 존고
    그녀 넘어 문지방께 서서 지켜보는 거둘이

의원 : 경하드리옵니다, 태맥이오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 기뻐하는 존고와는 달리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소산,
    그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다...

소산 : (E)지아비가 중환 중에 아녀자가 잉태함은 후안무치, 못하여야 할 일이겠으나
       집안의 사정이 절박하다보오니 만불행중 일행인가 하옵내다. 비옵나니 아들을
       낳아 사랑의 마지막 발걸음이나마 가벼이 해주고픈 마음 간절할 따름이옵내다

       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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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사당 (현재/밤)
    사랑채 너머 사당의 대숲까지 일렬로 알전구가 켜져 있다    
    너울너울 춤을 추는 불빛 아래, 그 길을 맨 앞에 앞서오는 조부
    그 뒤를 신주를 모신 죽사를 안고 따라오는 상룡
    상룡의 뒤를 등롱을 들고 따르는 젊은 제관
    그 뒤를 따라오는 제관 예닐곱 명

#81. 큰 사랑방 (밤)
    제상 앞에 놓인 교의 위에 정중히 모셔지는 신주
    조부와 문장 어른이 맨 앞에 서고
    상룡은 다른 제관들 틈에 섞여 선다
    조부, 집사로부터 술잔을 받아 모사기에 조금씩 세 번 나누어 부으면
    제관들, 모두 재배하여 신주에 참배한다
    조부, 미려하고 단정한 동작으로 다시 잔을 올리고 부복 (초헌)
    미리 쌓아두었던 육적을 두 명의 제관이 마주 들어 제상에 올리면
    모든 이들이 꿇어 엎드린 가운데, 쩌렁쩌렁하게

조부 : 유/ 세차 갑신 칠월 계유삭 초삼일 무진 / 효손 일우 감소고우/
       현 십오대조고 절위대장 부군/ 세서천역 휘일부림 추원감시
       불승영모 / 근이청작서수 / 공신전헌 상/ 향

    조부의 목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상룡, 강민 아재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문득 누군가 상룡의 허리를 꾹 찌른다
    화들짝 놀래 상념에서 벗어나는 상룡
    눈초리가 올라간 채 자신을 쳐다보는 조부와 눈이 마주치면
    서둘러 아헌을 올리기 위해 제상 앞으로 나아가는 상룡

#82. 안채 수돋가 (밤)
    알전구 아래, 수돗가에 달라붙어 혼자서 설거지를 하고있는 정실
    은근슬쩍 정실에게 다가오는 강민 아재

아재 : 니 요새 좋은 일 있는갑네, 우예 이리 이삐졌노?
정실 : (몸을 틀어 외면하며 그릇만 닦는)
아재 : 저 말이다... 내, 니 줄라꼬 별당에다 뭣을 좀 갔다놨거든,
       이따 글로 좀 나온나
   
    막 안채로 들어서다가 강민 아재의 수작에 핏발이 서는 상룡

상룡 : 정실아 머하고 있나? 내가 갖다 달란 것 우에됐노? (화낸다)
정실 : 으..응, 저어...

    큼 기침소리를 내며 힐끔 상룡을 쳐다보고 나가는 강민 아재
    상룡, 열 받는 심정으로 강민 아재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정실을 보면
    정실, 죄라도 지은 양 고개를 푹 꺾는다
    이 모습 정짓간에서 본 달실댁

#83. 사랑 누각 (밤)
    높직한 사랑마루 위에 몇몇 종친들과 접빈객과 함께 음복상을 받은 조부,
    형형한 눈빛으로 마당을 내려다보는 품이 일국의 제왕 같다

접빈객 : 이 근동, 불천위제는 다 취재해보았습니다만, 어르신 댁처럼 성대하고
         화려한 곳은 처음입니다
종친1  : 불천위제 뿐 아니라 황명산 자락의 가족묘원은 이 고장 사람들이 경외하는
         명소가 되었지요
종친2  : 그게 다 우리 종손 어르신 덕입니다. 전국의 종가를 순례하시어 가장
         훌륭한 종가문화를 이렇듯 복원하신 분이올시다
조부   : 어허 쓸데없는 소릴.....(겸손하지만 자랑스럽고)
기만할배 : (조부의 눈치를 살피며) ....어머이가 백수를 못 채우실 듯 싶은데.....
일동   : (대번에 어색해지면서 조부의 눈치를 살핀다)
조부   : (멸시하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기만 할배는 쳐다보지도 않는)...
기만할배 : (조부보다 훨씬 늙은 그가 쩔쩔매며)생전에 그래 고생도 마이하셨으이까네
           우리 황명산 자락에 좋은 자리 하나 턱 잡아 놓으마... 그래만 하면
           가시는 마음이 참말로 편안할 긴데....

    조부, 접빈객에게 인사하고 침소로 들어가 버리면
    조부가 들어가자마자 접빈객과 함께 일어서는 종친들
    어깨가 축 쳐진 기만 할배만이 홀로 남아 술을 들이킨다

#84. 사랑 마당 (밤)
    이글거리는 참숯더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종친들
    그 한 귀퉁이에 앉아 숯불만 뒤적이고 있는 상룡
    그들 모습 뒤로 대청마루의 기만 할배, 술주정을 하고 있다
  
기만할배 : 솔직커로 남평문씨 집안 아이믄 내사 마 굶어 죽었다 
           그 으르신들 덕분에 내는 에런 시절 굶어 죽잖고 산기라!

    종친들, 대청마루 위의 기만할배를 힐끔 쳐다보더니

종친3  : 암만 호구하기가 급급해도 그렇지 우리 선산을 채간 문씨 가문의
         산지기가 뭐꼬?
강태 아재 : 저래 체신없이 구는 기 한 두 번이고?
            그보다 종부가 없는 기 더 큰 문제다, 안채 빈 게 벌써 몇 년째고?
종친3  : 우리 상룡이가 퍼떡 장가가야 할낀데
상룡   :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게 거북할 뿐이다)......
종친4  : 인물 같은 거는 보지마라, 종부는 그저 아아를 잘 놓으면 되는기라
강태 아재 : 얼라 놓는 그기는 하늘이 정하는기제 사람 뜻대로 되나?
            (취기가 올라서) 종부가 아아를 몬놓으마 일가중에서 양재를 들여도 된다
            이 말이다
종친3  : 양자가 좋아도 종손 놓는 그 경사에 비할기가?
강태아재 : 종손의 씨라꼬 재목도 아닌 아를 앉히는 것보다야 일가중에서 나은 아를
           종손으로 세우는기 백번 낫다 아이가, 안글나?
종친3,4 : (대답을 못하고 상룡을 힐끔 쳐다보며 강태 아재를 나무라듯 보면)
상룡   : (자괴감으로 애꿎은 숯불만 뒤적이다 일어나고)!!

#85. 별당 밖
    별당 문에서 떨어져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는 달실댁
    저만치서 강민 아재의 인기척이 들리면 황망히 자리를 피한다

#86. 별당 안
    한참 절정을 향해 치닫다가.....
    마침내 정실의 품에서 떨어지는 상룡, 땀이 흥건한 얼굴로 천장을 향해 눕는다

정실 : (그런 상룡의 땀을 옷자락으로 정성껏 훔쳐주면).....
상룡 : (정실을 물끄러미 보다가) 누가 뭐래도 니는 내가 참말로 좋제?
정실 : 그거이 말이라고 하나
상룡 : 날마둥 사내가 바뀌는 여자가 놓은 자식이라도 니는 괘않제?
정실 : (깜짝 놀라며) 니 그 말을 믿었나?
상룡 : (역시 놀라며) 아이가? 동네 사람들이 떠들어댔다믄서
정실 : 아이다, 내가 지어낸 말이다. 하도 니가 내를 상대 안해주이까네
       니하고 한분만이라도 말하고저워서... 해본 소리다
상룡 : (이상하게 화도 안난다, 정실의 가슴을 파고들며) 정실아, 내 좀 꼭 안아줘라,
       구렁이같이 꼭 좀 안아 줘봐라
정실 : (상룡을 끌어안는데)
과수댁 : (E)이라지 마이소, 안되니더
강민아재 : (E)아, 얼른 들어가라니까

    화들짝 놀라 떨어지는 상룡과 정실
    동시에 서로 몸이 얽힌 채 뛰어들어오는 과수댁과 강민 아재
    덴겁하게 놀라는 네 사람
    후다닥 별당을 빠져나가는 과수댁과 강민 아재
    황급히 옷을 여미느라 부산한 상룡과 정실
    문득 문밖에서 들리는 강민 아재의 낮은 목소리

강민아재 : (E)상룡아, 우리 서로 모르는 체하기다

    황당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는 상룡과 정실
    문득 욱욱-- 헛구역질하는 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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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간5

#5-1. 효계당 마당 (과거/ 낮)
    비가 퍼붓는 가운데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여인의 쪽진 머리를 누군가 풀고 있다
    카메라 앞으로 돌면, 소복차림으로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
    지극히 비통하고 슬픈 얼굴로, 몸 안의 눈물은 이미 다 쏟아낸 듯,
    정신마저 혼미한 듯하다가......풀썩 맷방석에 쓰러져버린다
    바람에 사정없이 펄럭이는 하얀 치맛자락 너머,

소산 : (E)남편의 상을 당하였으니 그의 목숨이 끊어질 때 따라 죽기가 무에 그리
       어렵겠사옵니까마는 죄 많은 태중에 천금같은 생명이 자라고 있어 남편이
       죽은 지 석 달이 지나도록 남편을 따라 자결치 못하고 구구한 붓을 들어   
       할머니께 문안 여쭙내다

#5-2. 효계당 밖
    야트막한 흙담 너머
    초라하기 짝이 없는 상여 하나, 비 맞으며 효계당을 빠져나가고 있다

#5-3. 소산 방
    소산, 언간 쓰고있다

#5-4. 사랑채 방
    멀리 소산이 보이고 망연한 존구 존고 비 오는 밖만 본다

소산 : (E)천하에 다시 없을 불효를 보신 시부모께서는 내당과 큰사랑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않으셨다 하며, 조상께 씻지 못한 죄를 한번 나서 두 번이나 지은
       이 몸은 큰 마당에 자리 깔고 엎드려 있었을 따름이니 민재 아비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킨 것은 의관과 일가 어른들뿐이었다 합내다 

#5-5. 작은 사랑채 방
    사랑 죽어가고, 보는 일가친척, 의관, 하인 몇몇

소산 : (E)거둘이 전하는 말로는 큰 병을 얻어 두어 해에 병이 더했다 덜했다를
       거듭하여 뼈만 남은 환자가 물기 없는 누런 눈알로 힘겹게 방문만 바라보다
       초저녁에 숨을 거두었다 하오니, 가쁜 숨결 속에서 그 방문이 열리어
       들어와 주기를 기다렸던 이 누구였을지 짐작할 길 없습내다

#5-6. 큰 사랑방 (낮)
    보료 위에 험악하게 굳은 얼굴로 앉아있는 존구
    그의 앞에 쓰러질 듯 꺼질 듯 바듯이 절을 하고 앉는 소산,
    제법 배가 봉긋하게 부르다

존구 : 일문에 천앙이 내렸으니 이는 물론, 종부 부덕한 탓이니라!
소산 : (그저 죄스러워).....
존구 : 태중에 민재 아비의 씨가 들지 않았다면 네 지금까지 살아있을 염치도
       없을 터! 딸을 낳거든 그 길로 자진하여 열부로써의 마지막 행실을 삼도록
       하거라
소산 : (고개를 조아린 채)......
존구 : 오늘 이 말은 그저 해보는 소리가 아님을 명심하거라
소산 :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로).....

#5-7. 소산 방
    언간 쓰는 소산

소산 : (E)몸 풀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아비 죽은 줄도 모르고 옆구리로 발뻗는
       어린것이 아들일지 딸일지 모르겠습내다. 천지신명께서 무심치 아니하시오면
       가엾은 어린것에게 여자의 몸을 입히지는 아니하실 것입내다

거둘 : (다가와 앉으며) 아씨, 친정 한마님께서 인편에 이걸 보내오셨사와요
소산 : (애써 일어나려고 하면)
거둘 : (얼른 부축해서 일으키는)
소산 : (떨리는 마음으로 보자기를 풀면/ 누비로 만든 소산의 치마저고리와
       아기 배냇저고리 나온다/ 그 옷들을 품에 안고 오열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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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상룡의 방 (밤)
    요강을 타고 앉아있는 불안한 얼굴의 정실
    정실, 마침내 소변을 묻힌 테스터를 상룡에게 내밀면
    후다닥 테스터를 달빛이 스미는 창가에 비춰보는 상룡
    초조하게 상룡을 쳐다보고 있는 정실
    어느 순간, 털썩 주저앉아 버리는 상룡

정실 : (겁을 먹고) 어카제, 상룡아.... 내 도망가까?
상룡 : (두려움에 넋이 나간)....
정실 : (엎어져 흐느끼기 시작하는)
상룡 : (짜증이 솟구쳐) 시끄럽다, 할배 깨면 우얄끼고?
정실 : (흐느낌을 억누르며 엎어져있는)....
상룡 : ....일단 ....니 방으로 가라... 낼 생각하자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상룡을 올려다보는 정실
    짜증스런 얼굴로 앞만 뚫어져다 쳐다보고 있는 상룡
    체념한 듯 천천히 일어나 방문으로 향하던 정실, 문득 돌아서서
정실 : (오금박듯) 머라 해도, 얼라는 내끼다!

    냅다 달려들어 정실의 머리통을 오달지게 후려치는 상룡
    쿵.... 쓰러지는 정실의 모습에서...

#88. 조부의 방 (아침)
    조부와 기역자로 앉아 조반을 먹고있는 상룡,
    조부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고 있다
    이내 방문 열리고 숭늉그릇을 들고 들어오는 달실댁
    아연, 긴장한 채 달실댁의 표정을 살피는 상룡
    애정이 가득한 얼굴로 상룡에게 숭늉을 건네주는 달실댁
    내심 안도가 되는 상룡...

#89. 효계당 안채 (낮)
    관심 없는 척 하면서도 은근히 안채 뒷채 쪽을 휘이 둘러보는 상룡
    어디에도 정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한구석에 앉아 무엇을 맛있게 먹는 정실

#90. 별당 (밤)
    정실의 손을 잡아끌고 별당으로 들어오는 상룡
    죄라도 지은 양 상룡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는 정실
    그녀를 달래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만 하는 상룡,
    정실의 얼굴을 들어 입을 맞추고, 흉측한 홍반에도 키스를 퍼붓고
    아직도 사랑한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정실의 치맛자락으로 손을 넣으며

상룡 : 걱정 마이 했제? 내도 니 걱정 마이 했다. 할배가 아신다 해봐라,
       일이 우예 돌아가겠노, 하지만 염려마라, 내가 알아보고 있으이까네
       니는 맘속으로 준비를 딱 하고 있다가 내가 나오라 하거든 얼른 나와가...
       다 해준다 카더라...내만 믿어라..
정실 : (그렁한 눈물로) 고맙다, 상룡아
상룡 : (비로소 치맛자락에서 손을 빼내며) 고맙기는, 당연한기제
정실 : 내는 어떻게 되든동 상관없다. 아아만 있시모 나는 고마 되는기라
상룡 : (벌떡 일어나 앉으며) 니 그 아아를 낳겠다 그말이가?
정실 : (뜨악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니가 여태 니만 믿어라 그카지 않았나?
상룡 : (열받은) 지금, 니 와 이라는데? 니 지금 내한테 공갈하는 기가?
정실 : 공갈이 다 뭐고... 아아를 우예 키울지는... 걱정하지 마라...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노, 어데 시설에라도 들가 살든지...
       어데가서 몸땡이 꿈지럭거리모 밥은 못벌어 먹겠나
상룡 : (정실이 떠날까 내심 걱정인) .....니 그라모 여기를 떠나서 살기가?
정실 : .......그래야 하모....
상룡 : 그 아아가 그키나 중한기가? 달실 아지매하고 내하고 다 합친 것 보다
       더 중한기가?
정실 :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는)....
상룡 : 말해보라카이!!
정실 : 옴마도 중하고... 니도 중하고... 우예 그거를 말로 다 할기고...
       하지만 이 추한 몸띠이가 이래 쓸모있어 본 일이 또 일을끼가?
       이 아아는 내 뱃속에서 나서, 내 젖 묵고 자랄기라... 내 몸띠이가 그보다
       더 장한 일을 언제 또 해볼끼고
상룡 : !!
정실 : (감격의 눈물로)게다가 이 아아가 어데 보통 아아가, 니가 준 씨로 받은 아다,
       하늘겉은 아아다. 내 뱃속에 우예 이런 보물이 들왔을꼬....내는 이 아아를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다. 죽는 일이라캐도 겁이 안 난다.
       아무도 못 뺏어갈끼다.....
상룡 : !!!

#91. 상룡의 방 (밤)
    불 꺼진 방안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상룡
    무너질 듯 바닥에 주저앉아.... 어둠을 응시한다....
    이내 체신없는 울음이 쏟아질 것 같다
    울먹울먹... 터지려는 울음을 참다가 끝내 주먹으로 틀어막는 상룡
    마침내 머리를 방바닥에 대고 우는 상룡의 모습에서....

#92. 효계당 전경 (낮)
    겨울의 한기가 느껴지는 고택, 여기저기 헐벗은 나무들도 보이고...

#93. 사랑방 (낮)
    마주앉아 있는 상룡과 조부
    보자기를 조심스럽게 풀어 언간을 상룡에게 내미는 조부
 
조부 : 마지막 언간이다. 소중한 것이 삿된 수작에 농락되어선 안된다
상룡 : (받아드는).....
조부 : 무엇이 진실인지는 마지막 언간을 해석해보면 알 수 있을터!
       모든 것이 네 손에 달렸다
상룡 : (말씀을 드려야하는데 용기가 안 난다)......
조부 : (방을 나가지 않고 있는 상룡을 뜨악한 눈빛으로 보면)
상룡 :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조부 : 무엇이냐
상룡 : 저..... 결혼하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조부 : (놀란 눈으로 쏘아보는).....
상룡 :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조부 : 돌이킬 수 없는 형편이라...
       네 아비와 하는 짓이 똑같구나, 그래 상대가 누구냐?
상룡 : .....정실입니다
조부 : (기겁) 달실댁의... 딸... 말이냐?
상룡 : (애원)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정실이는 이미 제 아이를 가졌습니다,
       제발 받아들여 주십시오
조부 : (서슬 푸른 눈으로 보는).....
상룡 : (눈물로 읍소하는) 정실이만 받아들여주신다면
조부 : (말 자르며) 나가거라
상룡 : 할아버지!!
조부 : 아이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상룡 : 제 자식입니다! 할아버지의 손자입니다!! 이 집안의 종손이란
조부 : (서안을 부숴 버릴 듯 내려치며) 썩 나가지 못하겠느냐!!!

    일순, 그 눈빛과 목소리에 오금이 저리는 상룡
    부들부들 입술을 뒤틀며 두 손을 덜덜 떠는 조부
    당황한 상룡, 목반 위에 놓인 언간을 챙겨들고... 할 수 없이 방을 나간다

#94. 사랑채 마루 (낮)
    어찌해야 좋을지.. 막막한 상룡

#95. 정실의 방 (밤)
    행복에 겨운 듯 미소를 품고 자고있는 정실
    그런 정실을 보고 망연하게 보는 달실댁....어찌되었건, 그녀에게는 한없이
    애달픈 딸이다. 정실의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으며 행복해하는 딸을 쳐다본다
    이내 달실댁의 주름진 두 눈에 눈물이 그렁하지만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96. 효계당 (새벽)
    조부, 대청에 버티고 서있다
    정실아아아...!! 달실댁의 목소리

#97. 상룡의 방 (새벽)
    일순, 잠에서 깨어난 상룡, 화들짝 놀래 벌떡 일어나 뛰어나간다

#98. 효계당 (새벽)
    입에 재갈이 물린 채, 검은 양복의 사내들에 의해 끌려나오는 정실
    정실아... 정실아...를 부르며 따라나오는 넋이 나간 달실댁
    달실댁을 부르는지 상룡을 부르는지 재갈이 물린 입으로 울부짖으며
    안 끌려가려고 버둥대는 정실
    그녀에게 쏟아지는 인정사정 없는 발길질
    그 발길질로부터 배를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인 정실
    방을 뛰쳐나와 댓돌까지 맨발로 내려서는 상룡
    문득, 마루에 우뚝 서있는 조부의 모습에 그만 멈칫하면,
    개처럼 두들겨 맞으며 질질 끌려 솟을대문 쪽으로 가는 정실

달실댁 : (조부의 발아래 엎디어) 어르신, 잘못했니더, 모두가 지 잘못이니더,
         살려주이소, 어르신, 우리 정실이 쫌 살려주이소!
 
    대꾸없이 사랑방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조부
    어르신, 어르신을 부르다가 대문 쪽으로 내달리는 정실댁
    바로 달려나가는 상룡

#99. 효계당 솟을 대문
    정실을 짐짝처럼 봉고차에 싣는 사내들
    이내 부르릉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면
    정실아--!! 대문 밖까지 쫓아 나왔다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털썩 주저앉는
    달실댁, 상룡

#100. 조부방 (새벽)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조간을 들춰보고 있는 조부..

#101. 효계당 누각 (새벽)
    상룡, 달려와.. 정실이 떠난 쪽을 망연히 쳐다본다

#102. 조부의 방 (낮)
    조부와 달실댁

달실댁 : (연신 눈물을 훔치며) 지하고 정실이 효계당에 뿌리내린지도 벌써
         이십 년이 다 되가니더, 불쌍한 우리 모녀 거둬주신 은덕을 생각하모
         뼛가리가 펄펄 날리도록 일해도 모자라지예, 참말로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씸이 없심더, 다 지 잘못이라예, 말리지 몬한 지 잘못이라예
조부   : .....

    문틈으로 보이는 두 사람, 보는 상룡

달실댁 : 눈치 챘을 때, 고마 그때 말렸어야 했는데, 그 못난 것이 을매나
         행복해하는지,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니더!
상룡   : (놀라워)!!!

    애간장이 끊어지는 듯 소리 죽여 우는 달실댁의 울음소리 들리면서

#103. 뒷채 (저녁)
    기백이 다 사라진 얼굴로 카다란 가방을 들고가는 달실댁
    죄책감과 자괴감에 휩싸여 달실댁의 뒤를 따라오는 상룡
    문득 마른 지푸라기처럼 털썩 주저앉는 달실댁

상룡   : (가슴이 미어지는)이래 가시면 정실이를 몬 수로 찾니껴?
         할배 서안을 뒤져서라도 정실이 찾아낼깁니더
달실댁 : 내사 에미니까는 찾다가 흙을 물고 죽어도 할 수 없제, 하지만 상룡아
         니는 그래하지 마라, 어르신한테는 니하고 이 집안이 세상 전분기라
         그걸 지킨다꼬 당신 일생도 고마 내던져뿌렀는데 니가 자꾸 엇나가모
         어른 일생이 너무 불쌍타 아이가...
상룡   : (달실댁의 품에 고개 묻고 운다)
달실댁 : (그 눈물 자기 손바닥으로 닦아주며)아이고 내 새끼... 내라도 니 옆에
         있어줘야 할낀데... 내도 이래 가뿔면 우리 상룡이 우예 살꼬!
상룡   : 아지매요!!

#104. 효계당 누각
    멀리 달실댁과 배웅하는 상룡의 모습, 조부 보고 있다
 
#105. 효계당 (어스름)
    안채 수돗가의 함지박 위에는 낙엽이 수북하고...
    바람마저 을씨년스럽게 불어댄다

#106. 조부의 방 (저녁)
    마주 앉아있는 상룡(울어서 부은 얼굴)과 조부

조부 : (상룡이 일면 안쓰럽기도 하여).....
상룡 : 꼭 이렇게까지 하셨어야 했습니까?
조부 : 두고두고 집안에 풍파를 일으킬 갈등의 씨앗은 미리 없애는 것이 좋다
상룡 : (치받쳐서) 갈등의 씨앗이라뇨? 제 자식이고 할아버지의 종손입니다!!
조부 : 종손이라니? 정실이 뱃속의 아이를 두고 하는 말이더냐?
       정실이가 종부로서 갖춰야할 품격의 그림자나 따를 수 있다더냐?
상룡 : (열 받은)종부로써 갖춰야할 품격이 무엇입니까? 정실이의 몸이 온전치
       못하고 아비에게 버림받은 것이 정실이 잘못입니까?
조부 : 몸뚱이가 온전치 못하고 천출이어서가 아니다! 일생 부엌데기로 보고 배운 게
       그뿐인 아이가 수백 년 이어져 온 종가문화의 현현한 정신을 온전히 이을 수
       있겠느냐?
상룡 : (말문이 막힌)
조부 : 종부는 일개 아낙이 아니라 종가의 정신적 지주니라!
       근친들이 종부의 품위에 고개를 숙여야 종가의 위의가 영영한 법!
       그 몫을 그 아이가 할 수 있다고 보는 게냐?
상룡 : !!
조부 : (조용히) 물러가거라
상룡 : (무너지며 눈물로 애원하는) 정실이와 결혼은 하지 안겠습니다. 아니,
       다시는 만나지도 않겠습니다, 제 아이를 돌아보지도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불쌍한 달실댁 모녀가 아이를 키우며 살게 해주십시오
       뱃속의 아이가 어찌되면 정실인 죽습니다! 
조부 : (깊은 눈길로) 그 아이가 세상의 빛을 보게되면 이 집안에는 또다시 씻을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된다
상룡 : (눈물로 호소하는)할아버지!!
조부 : 뱃속의 아이를 없애는 일은 내가 한 일이다.
       천벌을 받더라도 내가 받을 테니 죄책감은 버리거라!
상룡 : (우는 얼굴로 올려다보는)!!
조부 : 넌 이 집안의 미래다, 너만 지킬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일도 나는 기꺼이
       감당할 것이다!
상룡 : !!!

#107. 효계당 일각 (밤)
    푸른 달빛이 효계당으로 비추고 있다
    초겨울의 칼끝같이 시린 바람이 몰아치고...
    의사 결정권을 거세당한 자의 평안함과 극심하게 밀려오는 피로감에 싸여
    사랑채를 걸어 나오는 상룡

상룡 : (N)추위 속에 푸르게 빛나는 효계당은 얼음궁전 같았다. 낯익은 푸르스름한
       기운은 아름다웠던 해월당 어머니의 푸른 이마를 연상케 했다.
       나는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그녀처럼 모든 의지를 포기하고 운명이 흔드는
       대로 한 몸을 내맡기고 살아내면 되는 것이냐고......      

    상룡, 별당 쪽으로 가며...

#108. 별당 방 (밤)
    온통 푸른 달빛이 비치고 있는 빈방이다
    그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상룡, 차가운 기운이 도는 빈방이다
    무엇을 찾듯이 조심스레 병풍 쪽으로 가 병풍의 한쪽을 밀면 해월당의 얼굴
    드러난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눈물의 해월당 얼굴,
    좀 더 병풍을 밀면 울고있는 해월당의 모습 나타난다.

해월당 : (보는)......
상룡   : (보는)......
해월당 : 정실한테 내 배를 주었어....(눈물이 그렁한) 그 뱃속에 아이가 들었는데...
상룡   : ...왜 그러셨어요?...
해월당 : 너 같은 아들을 가지고 싶었어...
상룡   : !....
해월당 : 아니, 지아비를 가지고 싶었다 (손떼고.. 가득한 눈물로)....
상룡   : !!....
해월당 : (주루루 흐르는 눈물로) 무릎뼈가 부스러지도록 삼천배를 올리는 순간
         순간에도 난 남자를 생각했다. 입으로 팔열지옥 이야기를 하면서 불아가리로
         뛰어 들어가 나를 지옥불로 태워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효계당을 떠나지
         못했어.. 운명 때문에.. 난 떠날 수가 없었다
상룡   : (일순 해월당의 모든 것을 알게된 듯 하다..)

    상룡, 천천히 일어나 해월당의 넋을 위로하듯, 아니 운명의 사슬에 묶인
    자신을 제단에 올리듯 한 겹 한 겹, 옷을 벗기 시작한다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앞만 쳐다보고 있는 해월당
    마침내 그녀의 눈앞에 상룡의 알 다리가 보이고...
    깎은 조각처럼 앉아있는 그녀의 뒷모습 너머 알몸으로 반듯하게 눕는 상룡이
    보인다... 뜨거운 연민의, 아니 어쩌면 체념의 눈물이 흐르는 상룡의 모습에서
    효계당 용마루에 손각시의 살풀이춤이 너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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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간6

#6-1. 초막 밖 (과거/ 밤)
    깊은 산중에 흐릿한 호롱불만 새나오는 적막한 초막으로 카메라 점점 다가가면서

소산 : (E)비가 오려는지 날 밝은지 오래건만 창호가 어둡사옵내다

#6-2. 초막 안
    강보에 싼 아기를 품에 안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고있는 소산(한마님이 준
    누비저고리 입고) 그 옆에 앉아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밖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
    거둘이
소산 : (E)만 하루를 비릇고 계명축시에 몸을 풀었사오나 정성이 하늘에 닿지 아니
       하였던지 딸을 낳고 말았사오니다

소산 : (아이를 내려다보며 눈물이 하염없는)
거둘 : (불안, 초조해서) 아씨, 날 밝기 전에 어서 떠나셔야하옵니다
       이리 지체할 일이 아니옵니다아--
소산 : (아이를 들여다보며)서방님을 어찌 이리 빼 닮았을꼬, 아밧님 모습도 보이는
       구나, 처음엔 서운타 하실지라도 종래엔 혈육이오니 괴오실 것이니라
거둘 : 아씨, 큰 나으리께옵서 아씨께 자진하라 하시는 뜻이 어디에 있는지 정녕
       모르시겠사옵니까?
소산 : (눈물이 가득한 눈을 들어보면) ?

#6-3. 여염집 방 (밤)
    기진맥진 땀이 흥건한 얼굴로 까무러져 누워있는 여자(30대),
    그녀는 안중에도 없이 아이를 품에 안고있는 존고, 모처럼 웃는다
    어느 순간, 아이를 품에 안고 일어나 방을 나가는 존고 

거둘 : (E)아랫것들 속삭이는 말로는 이미 나으리께서는 탐탁한 사내아이 하나를
       마련해두셨다 하더이다. 아씨께서 딸을 낳으시면 아씨를 자진케 하신 후
       아기씨와 사내아이를 바꿔치실 것이라 하더이다

#6-4. 초막 (밤)
    숯이 닿은 듯 입술이 타들어 가는 소산, 거둘이를 쳐다보면

거둘 : 산파가 태를 묻는다고 그 길로 사라졌으니 효계당엔 이미 계집아이 낳은 일이
       전해졌을 것입니다요
소산 : (두렵다/ 강보에 싼 아기를 더욱 끌어안으면)
거둘 : 쇤네 득수아비를 이리로 데려올 것이니 어서 채비를 하시어요(달려나가고)

    소산, 아기를 내려놓고 힘겹게 일어나 보자기에 아기 짐을 싸다가
    다시 밀어놓고 아기를 얼른 품에 안고 종종대며 방을 빙빙 도는

소산 : (E)들은 말이 하 흉완하니 어린것의 목숨을 구하려면 피신하자 싶다가도
       아밧님께서 핏줄에게 그리 모진 마음을 먹으시랴 두 생각이 갈마들었나이다

    마침내, 다시 아기를 한쪽에 내려놓고 서둘러 짐을 싸는데
    벌컥 방문이 열리면서, 우람하기 이를 데 없는 존구의 실루엣 보인다
    내심, 몹시도 놀라는 소산, 얼른 짐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일어서면
    이내 신발을 신은 채 성큼 안으로 들어오는 존구
    소산, 시아버지께 큰절을 올리려고 하면
    손을 내저으며 도포자락을 홱 털고 틀어 앉는 존구

소산 : (강보에 싼 아기를 내밀며) 아버님, 돌아간 민재 아비의 일점 혈육이옵니다.
       부디 굽어 살피시오소서
존구 : (눈길조차 주지 않고)
소산 : 아버님. 이 아이의 얼굴이 누굴 닮았는지 한번만 봐주시옵소서
       바로 아버님의 얼굴이옵니다, 아버님!! (흐느끼면)
존구 : ...어허! 내 너에게 헐후하게 듣지말라 일렀거늘 어찌 당연히 갈 길을 가지
       않는게냐?
소산 : (하얗게 질리는)!!!

    두려움에 휩싸여 강보에 싼 아기를 더욱더 끌어안는 모습위로...

소산 : (E)그 순간, 오로지 딸아이를 살려야겠다는 한마음뿐이었사옵내다.
       거둘이와 득수아비가 올때까지만 목숨을 부지하면 아이는 살릴 수 있을 것
       같았사옵내다

소산 : 마땅히 갈 길을 가지 않고 이리 더딘 죄 용서하시오소서,
       아버님 말씀을 따르겠나이다
존구 : (비로소 소산을 쳐다보며) 반가의 여식으로써 한점 부끄러움 없이 처신해야
       할 것이라, 내 너로 하여 악을 썼더니 목이 피곤하구나,
       얼른 나가서 물이나 한잔 떠오너라

    잠시 망설이다가 품에 안은 아기를 방바닥에 내려놓고 서둘러 방을 나가는 소산

#6-5. 초막 밖 (여명)
    희뿌여니 동천이 밝아오는 어두운 숲
    이른 잠을 깬 지빠귀가 나직이 울 뿐, 인기척 하나 없는 숲을
    목을 길게 빼고 보는 소산

#6-6. 마을 길 일각 (새벽)
    거둘이와 득수아비, 가마 한 대를 데리고 급히 달려온다

#6-7 초막 부엌
    이내 초조하게 부엌으로 들어갔다가 그릇에 물을 담아 나오는 순간
    캥캥... 어린 짐승이 숨넘어가는 듯한 소리 들린다
    일순... 소름이 돋는 소산, 쟁반을 내던지고 방으로 뛰어들어간다

#6-8. 초막 안
    왈칵 문을 열어제치고 뛰어드는 소산
    존구, 무슨 일을 했는지 섬뜩한 눈빛이다
    하... 입이 벌어지는 소산
    소산을 한번 쳐다보고 나가버리는 존구
    손이 사시나무 떨 듯 떨려오는 소산, 아이를 천천히 안아 올리면
    바르작거리다가 이내 축 늘어지는 아이
    미친 듯이 강보를 풀어헤치면 배냇저고리를 붉게 물들인 피...

소산 : (E)어미의 내장을 촌촌히 끊으며 바르작거리던 어린것이 이내 잠잠하더이다,
       겨우 하룻밤, 어미와 자식으로 만났던 정리를 생각하면 살이 에이고
       뼈가 시려 형언할 길 없삽내다

#6-9. 동 방
    흔들린 필체의 언간, 바닥에 놓여있고
    그 언간 아래 강보에 싸인 죽은 아이 누워있다
    그 아이를 쳐다보며 품에서 은장도를 꺼내는 소산
    툭, 피묻은 은장도 바닥에 떨어지면서 이내 아이 옆으로 고꾸라지는 소산
    마치 잠이든 듯 누워있는 모녀의 가슴팍에서 우러나는 피,
    언간을 적시면서...

소산 : (E)세상의 일은 시시로 사람의 도를 잃고 짐승의 흉포를 따르나니...
       그 모진 장단에 맞추어 숨쉬고 살아가기가 다못 대근할 따름이옵내다
       엎드려 비옵건데 불효 망물한 손녀는 씻은 듯이 지우시옵고 부디
       세세년년 천복을 누리시옵소서

#6-10 초막 앞
    도착하는 거둘이 가마.. 방문 왈칵 열고 뛰어들어오는 거둘이와 득수아비,
    아씨!!! 부르며 달려들어 통곡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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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상룡의 방 (밤/현재)
    핏자국이 있는 언간에서 충격을 받은 듯 눈을 떼지 못하는 상룡
    충혈된 눈으로... 언간을 쳐다보다가, 허공을 망연히 쳐다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달려나간다

#110. 사랑채 건너 방 (밤)
    수장고 금고를 열면 지난번 발견된 안동 김씨의 유품함이 있다
    열어 꺼내면 나오는 소산이 마지막에 입었던 피 묻은 상의와 역시 핏자국이
    보이는 배냇저고리...
    모든 것이 진실임을 확신하게 되는 상룡

상룡 : (N)아들을 낳고 죽은 것으로 알려졌을 소산에겐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을
       것이다. 그리고 소산의 유품들은 몸종이던 거둘이가 수습해 부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삼백 년 간을 숨죽이고 묻혀있던 소산의 언간들과 유품들은 모든
       것을 지켜본 거둘이의 생생한 증언인 셈이다. 애달팠던 소산의 삶을 후대에
       전해주기 위해서..

#111. 효계당 일각 (밤)
    위풍당당하던 고택이 폐가처럼 을씨년스럽다
    종택을 휩쓸고 지나가는 삭풍에 앙상한 나뭇가지가 휘어진다
    자신의 방에서 사랑채 마당으로 걸어나오는 상룡
    효계당을 아주 낯선 시선으로 둘러본다
    누대 수백 년 동안 그토록 집요하고 참악한 불운이 거듭된 곳이다

#112. 조부의 방 (밤)
    강풍에 격자무늬 창살이 몹시도 흔들린다
    마지막 언간의 해독 본을 이제 막 읽고 노트를 덮는 조부
    조부를 참담한 심정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는 상룡

조부 : .........
상룡 : .........
조부 :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떠하냐?
상룡 : 언간은 진실입니다
조부 : 진실이라...(이를 악물고 지그시 눈을 감는)
상룡 : (조부의 일생이 안타깝다, 처음으로 조부에 대한 애정이 격동한다)
       언간만 공개하지 않으면 변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그대로 그렇게 살아가면 됩니다
조부 : 네 놈은 정녕 이 언간을 믿는단 말이냐? 
상룡 : 진실이 추악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언간의 존재를 맹세코 발설치 않겠습니다
       정실이만 꺼내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시면.....
조부 : (자르며) 언간을 미끼로 그 아이를 내놓으란 수작이렸다!
       천금같이 중한 것을 희생하여 비천한 것을 얻으려하다니... 못난 놈!
상룡 : 가문을 잇겠다고 갓난아이를 밟아 죽이고 양자를 들이기 위해 재물을
       후무려 빼앗고...그렇게 해서 이어온 것이 이 가문입니다. 보십시오,
       할아버지도 똑같이 하고 계시잖습니까? 왜? 왜죠? 왜 그런 악업을 반복
       하시는 겁니까?
조부 : 으음!.. 내 너 같은 천격을 종손으로 앉힌 게 천추의 한이다!!! 
       (언간을 화로에 넣으려 집는다)
상룡 : 안됩니다...(조부 손 잡는..)
조부 : 놓아라!
상룡 : 정실이를 내놓으십시오, 그 전에는 죽어도 안됩니다!!
조부 : 놓아라아!!! (조부 고함에 놓는 상룡) 서안 조씨 가문은 이따위 허황된 무고로
       힘없이 넘어갈 집안이 아니다. 네 놈은 더 이상 우리 집안의 종손이 아니다!

    우악스럽게 언간 다발을 화로에 넣어버리는 조부
    어쩔 수 없이 보다.. 불이 붙자 반사적으로 언간을 꺼내 던져버리는 상룡,
    조부, 이번엔 소산과 민재의 저고리를 집어 화로에 넣으려 하면..
    결사적으로 달려들어 막는 상룡,
    그러는 사이에 언간 불씨로 창호문이 타들어 간다

상룡 : 안됩니다, 안된다구요!

    조부의 계속되는 행동에 눈이 뒤집히는 상룡, 급기야 멱살을 잡는다

상룡 : 미쳤어! 당신은..! 미쳤어..

    언간의 불씨가 창호문에 크게 번지기 시작한다

상룡 : 미쳤어! 미쳤다구! (엉엉 운다)

#113. 효계당 외경
    불이 창호문을 넘어 기둥 지붕께로 번져간다

#114. 조부방
    울다가 정신차리고 보면 형형한 화귀가 문살과 기둥을 타고 오르면서
    기겁하는 상룡
    조부, 흔들림 없다

상룡 : 할아버지 나가셔야 돼요, 할아버지..(그러나 돌처럼 움직이지 않고..)

    조부, 흔들림 없이 앉아있다

상룡 : 할아버지 나가셔야 돼요, 나가셔야 된다구요!
조부 : 삼백 년을 넘어 사백 년, 오백 년, 이 가문이 이어져 온 것은 천근같이    
       흔들리지 않는 할배들 때문이었다. 네놈은 악업이라고 하나 그분들의
       무거움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이 이 자리에 있기나 할 것이더냐?
       근본이란 쉽게 생기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게 없다면 문중도 나라도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이 어리석은 놈아!...

    상룡, 망연한 눈빛...

조부 : 가거라!

    돌아앉는 조부.. 마침내 조부를 덮쳐버리는 화마

상룡 : 할아버지..! 할아버지이..!!

    불길, 점차 상룡 쪽으로 감싼다... 상룡, 마침내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알게
    되고 마지막으로 울부짖는다

상룡 : 정실아! 정실아!!

    상룡이 위로 떨어지는 불기둥... 상룡의 외침만이 길게 울려 퍼진다

#115. 효계당
    거대한 화마의 효계당 급기야 무너진다

#116. 효계당 일각 (낮)
    - 다음날, 아직 연기가 피어나는 효계당 잔해
    - 그 해 여름, 비가 내리는 잔해 터.. 씻겨 내려가는 것들..
    - 2년 후 여름, 남은 기둥마저 무너지고 이젠 잡초로 덮인 효계당의 방대한 터,
      카메라 빠지면 누군가 서있다, 정실이다.
      젖 물린 아기를 품에 안고 처연한 얼굴로 망부석처럼 움직임 없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끝>





















첨부파일 달의_제단_유현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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