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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대본

[알젠타를 찾아서] 이민재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7.02.02|조회수532 목록 댓글 0

[알젠타를 찾아서] 이민재










S#1.  경기장 (오후)

햇살에 쨍! 빛나는 왼쪽 날개 모양 펜던트. 펜던트에 입 맞추는 입술.
‘후...’ 숨소리와 함께 장대를 꽉 잡는 손.
‘후...’ 숨소리와 함께 트랙 위를 전력질주 하는 다리.
‘후...’ 숨소리와 함께 목덜미 뒤로 날리는 머리카락.
흔들리는 시선으로 지주에 걸린 가로대가 보인다.
장대를 폴박스에 찍기 직전의 승희[여/25], 오로지 가로대에만 집중한 모습.
승희가 폴박스를 찍고 가로대를 뛰어넘는 순간, 역광으로 하얗게 표백되는 화면.
위태롭게 흔들리던 가로대가 매트 위로 떨어진다. 실패다.

S#2. 경기장 일각 (오후)

열중 쉬어 차림으로 고개 숙이고 있는 승희. 옆에 나란히 선 선수 두 명.
굳은 얼굴로 선수들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감독, ‘대한체대’ 유니폼 차림이다.

감독  니들도 밖에선 운동선수 행세하고 다니지? 이따위 실력들 가지고.
  어떻게 한 놈도 본선엘 못 나가? (버럭) 니들이 선수야!
선수들  (움찔하며 고개 더 숙인다)  
감독  (억누르며) 8월에 열리는 국가대표 2차 선발전, 무조건 3위 이상 입상해.
  더는 못 봐줘. 후배들로 싹 물갈이 할 거야. (승희 보며) 특히 남승희.
승희  (흔들리는 눈, 가까스로 참는)
감독  너 여름 지나면 졸업이야.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목숨 걸어.
  이번에도 국대 못 달면, 운동 인생 끝나는 거야.
승희  (창백해지는 얼굴... 겨우 버틴다)

S#3. 호프집 (밤)

꽉 찬 맥주잔 앞에 놓고 기가 죽어 앉아 있는 승희.
나머지 두 명의 선수가 제법 취한 모습으로 불만 터뜨린다.

선수1  (혀 풀린) 내가 하겠다는데, 내가 운동하겠다는데!
  지가 뭐라고 하라 마라야? 뻑 하면 물갈이 한다고 협박이나 하고.
선수2  (더 취한) 막말로 우리 중에 신동 소리 못 듣고 운동한 사람 있냐?
  (게슴츠레하게 승희 보며) 어이 장대신동! 뒷담화에 동참 좀 하시죠.
승희  (맥주 마시는 척, 술은 조금도 줄지 않고 그대로다)
선수1  (노래) 세월이 야속하더라~ 나도 장대 들고 펄펄 날던 때가 있었는데.
선수2  너 1학년 걔 얘기 들었냐? 소년체전 3년 동안 싹쓸이 했다는 애.
  입학하고 3개월 동안 기록 15센티 올렸단다. 감독 걔 믿고 그러는 거야.
선수1  15센티? 미친. 완전 사긴데? 혹시 뭐 약물 같은 거 맞은 거 아냐?
선수2  하긴, 스테로이드제 같은거 맞으면 그럴 수도 있지.
승희  (문득, 선수2을 보는데)
선수1  야, 술이나 마셔! 낼부터 또 열나게 뺑이칠텐데...
  (승희의 맥주잔 보고) 얘 또 혼자 고사지내네.
선수2  너 술 못 배우면 시집가서 소박 맞어.
승희  내일 훈련 있잖아.
선수1/2  (동시에) 아 재수 없어! / 야 이 배신자야!
승희  (미안한 표정으로 짠하고 마시는 시늉만 하는)

S#4. 승희의 집 거실-주방 (밤)

조심스럽게 문 여는 소리 들리고, 승희가 조용히 들어온다.
승희, 방으로 들어가다 불 켜진 주방에 차려진 저녁상을 보고 멈춰 선다.
씁쓸한 표정으로 잠시 보다가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냉장고에 정리하는데.
거실 불 탁! 켜지며 민혜[여/45]가 나온다.
밝아진 거실, 벽 한 면이 승희가 수상한 메달과 트로피로 채워진 진열장이다.

민혜  승희니? (다가오며) 밥은?
승희  친구들이랑. (미안한) 나 때문에 깼어?민혜  안 잤어. 우리 딸 들어오는 거 보고 자야지. (말리며) 둬. 엄마가 해.
승희  (계속 정리하는) 다 했어.
민혜  (승희 거실로 밀며) 경기하고 피곤할 텐데 얼른 가 쉬어.

승희, 방으로 들어가려다 진열장 앞에서 멈춘다. 복잡한 눈으로 본다.
민혜, 식탁 정리하다가 승희를 보더니 다가가 말없이 승희의 어깨를 감싼다.

승희  (진열장만 보며) 아빠 또 실망했지. 화 많이 나셨어?
민혜  너는 어떤데?
승희  (보면)
민혜  다른 사람 눈치 볼 거 없어. (보며) 알지? 엄마 항상 니 편 인거.
  내가 사랑하는 건 그냥 내 딸 남승희지 운동 잘하는 남선수 아냐.
승희  (잠시 보다가 민혜의 팔 풀며) 새벽에 훈련 있어. (방으로 들어간다)

S#5. 승희의 집 승희방 (밤)

승희, 들어오자마자 무너지듯 침대에 누워 눈 감는다.
짧은 한숨과 함께 눈 뜨면, 벽에 걸린 커다란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INS> [고등학생 승희가 금메달과 꽃다발 들고 기석, 민혜와 웃으며 찍은 사진]
승희, 사진을 외면하려는 듯 돌아누웠다가, 괴롭게 뒤척이며 반대쪽으로 돌아눕는다.
일어나 불 끄는 승희. 어둠 속에서 잠 못 이루고 계속 뒤척인다.

S#6. 대한체대 체육관 (새벽)

텅 빈 체육관, ‘쿵쿵쿵’ 울리는 소리 들리고 곧이어 장대 들고 뛰는 승희가 보인다.
매트 위로 연달아 떨어지는 가로대.
승희, 출발선에 서서 헉헉대며 가로대에 집중하는데 온몸이 땀으로 푹 젖었다.
숨 고르며 장대를 단단히 쥐고 다시 출발하는데.
‘우당탕!’ 소리와 함께 승희의 장대가 바닥에 나뒹군다.
왼쪽 무릎 감싸 쥐고 바닥에 쓰러진 채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승희.

S#7. 배닥터 진료실 (오전)

스크린에 승희의 무릎 사진 뜬다. 배닥터[남/52세], 사진 심각하게 보다가.

배닥터  첫 수술이 중3 때였지? 수술 끝나고 내가 했던 말 기억나?
승희  (배닥터 보면)
배닥터  (승희 보며) 이 무릎으로 운동하는 거, 시한폭탄 안고 사는 거야.

이때, 문 벌컥 열고 들어오는 준태[남/28], 물리치료사 유니폼 차림.

배닥터  (버럭) 이준태 이새끼! 너 선수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준태  (놀라서 움찔하며 승희 보면)
승희  8월에 2차 선발전 나가야 되요. 그때까지 통증만 좀 어떻게,
배닥터  (자르며) 운동 계속 하면 걷는 것도 보장 못 해.
승희  (간절한) 아저씨 제발,
배닥터  왼쪽 무릎! 완전히 망가져서 평생 못 쓸지도 모른다고!
 
승희, 그 말에 입 다문다. 충격 받은 얼굴로 시선 떨구더니 힘없이 나간다.
배닥터, 괴롭게 고개 돌리고. 준태, 급히 승희를 따라 나간다.

S#8. 병원 야외정원 (오전)

승희, 심각한 얼굴로 벤치에 앉아 있는데. 옆에 앉는 준태.

준태  나 이러라고 일찌감치 운동 관뒀나 봐.
  빨리 취직하고 자리 잡아서 남승희 먹여 살리라고. (보며 싱긋 웃는)
  심각할 거 없어 인마. 하다가 안 되면 나한테 시집 와. 내가 책임질게.
승희  (냉랭한) 벌써 다 끝난 것처럼 얘기하지 마.
준태  나도 운동 해 봤어. 운동은, 해도 살고 안 해도 살아.
  근데 무릎은 아니잖아. 운동했던 10년보다 앞으로 인생이 훨씬 길어.
승희  나 할 줄 아는 거 운동 밖에 없어. 운동 관두고 어떻게 살아?
준태  나한테 시집오라니까? 먹여 살린다니까?
승희  (벌떡 일어나 노려보며) 그게 사는 거야?!
준태  그럼, 운동하다 그만 둔 애들은 다 죽었디?
승희  생각 안 나나보지? 선배 운동 관두고 죽겠다고 난동 부리던 거?
준태  (할 말 없어 시선 피하는데)
승희  쉽게 말하지 마. 장대높이뛰기 선수 남승희, 아직 안 끝났어.
준태  (일어나며) 길게 버텨봤자 너만 더 다쳐. 냉정하게 얘기해 볼까?
  8월 경기 3위 이상 입상? (달래듯) 니 몸 니가 더 잘 알잖아...
승희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노려보다가 홱 가 버린다)
준태  어디 가는데? 야 남승희!

S#9. 스포츠센터 휴게실 (오후)

근육질의 남녀 트레이너들 포스터로 장식된 벽.
승희, 기운 없이 앉아 있는데. 태주가 들어온다.

태주  (함박웃음 지으며 다가오는) 체육관 훈련충이 이 시간에 웬일이래?
승희  (그제야 미소 짓는) 보고 싶어서 왔더니 말하는 꼬라지 좀 봐라.
태주  (승희 머리 헝클며) 반가워서 그러지 지지배야. (앉으며) 경기는?
승희  (씁쓸하게 웃고)
태주  나한테 맨날 절절매는 거 불쌍해서 화끈하게 빠져줬더니.
승희  내 말이. 이태주만 없으면 선수 인생 확 필 줄 알았다 나도.
태주  (보다가) 너 뭔 일 있지? 보고 싶다고 들르고 그런 캐릭터 아니잖아.
승희  운동 관둬야 할까 봐. 왼쪽 무릎 또 말썽이야. 더 뛰면 완전 아작 난데.
  감독님, 은근 관두라고 압력 넣어. 8월 선발전에서 3위 이상 입상하란다.
태주  쫌 더 뛰면, 뭐? 어차피 서른 되기 전에 선수 생명 끝나.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몇 년 지나서 보면 아~무 것도 아냐.
승희  (싸늘해지며) 야.
태주  니가 나한테 해 준 말이야. 작년에 나 쫓겨날 때.
승희  (잠시 보다가 일어나는데)
태주  앉어. 욱해서 뛰쳐나갔다가 하나 있는 친구까지 잃지 말고.
  (보며) 남승희, 운동선수로 괜찮았어. 지금 관두는 거 나쁘지 않아.
승희  (실소 터지는) 다들 왜 이렇게 쉬워?
태주  (일어나며) 나 너랑 10년 가까이 뛰었어. 내가 널 알지. 그 승부욕, 집착.
  너 같은 애들이 까딱하다가 내 꼴 난다.
승희  (불편한 얘기인지 시선 피하는데)
태주  기억나지? 나 약에 손댔다가 난생 처음 따 본 메달 뺏기고 쫓겨난 거.
  딱 너 같은 상황이었어. 있잖아 나, 어디 가서 선수였단 소리도 못 해.

승희, 태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데... 묘하게 불안해지는 표정.
승희, 말없이 돌아서 나간다. 태주, 잡으려다가, 안타까운 표정 지으며 관둔다.

S#10. 승희의 집 거실 (밤)

승희, 멍한 얼굴로 들어오는데.
신문 보던 기석[남/52], 신문에 시선 고정한 채 말 건다.

기석  (신문 넘기며) 지나간 건 잊어. 8월 경기에서 3위 이상 입상만 하면 돼.

승희, 그 말에 멈춰 서 보면, 기석은 여전히 신문만 보고 있다.
앞치마에 손 닦으며 주방에서 나오는 민혜.

민혜  장어탕 했어. 몸 축나지 말라고. 저녁 안 먹었지?
승희  (민혜 얼굴 보는데 마음 복잡해지는) 씻을래... (방으로 들어가면)
민혜  (속상하게 보며) 영 맥을 못 추네.
기석  (신문 접으며) 여름 훈련 다 그렇지. 한 그릇 따로 퍼. 방에 가져다주게.

S#11. 승희의 집 승희방 (밤)

어두운 방, 불안한 표정으로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는 승희.
파란 노트북 불빛에 비치는 승희의 얼굴, 뚫어져라 화면을 노려보는 동공.
승희, 몇 번 마우스 클릭 하더니 사이트 옆 상담메시지 창에 적는다.
<INS> 메시지 :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제 구합니다]
떨리는 가슴 진정시키며 모니터 보는데, 아무런 답변이 없다.
승희, 후... 한숨 쉬며 침대에 눕는 순간 띠링!
벌떡 일어나 메시지 창 확인해 보는 승희.
<INS> 메시지 : [시험용? or 시합용?]
                [핸드폰 번호 남겨주세요]
승희, 조심스럽게 방문을 잠근다. 답변, 핸드폰 번호 작성하고 초조해하며 모니터 보는데.
‘똑똑똑’ 노크 소리 들린다. 화들짝 놀라는 승희.
승희, 다른 창으로 바꾸고 급히 방문 열면, 장어탕 들고 들어오는 기석.
때마침 승희의 휴대폰이 울린다. 당황해서 허둥대며 급히 휴대폰 들고 나가는 승희.

기석  (방 불 켜며) 뭐야 이놈. 불도 안 켜고.

기석, 책상에 장어탕 쟁반 올려놓는데, 띠링! 들리는 소리.
나가려던 기석, 무심결에 노트북 화면을 보고 표정 굳으며 멈춰 선다.
방금까지 승희가 나눴던 메신저 화면 떠 있고.

S#12. 지하철 안 (오전)

등교하는 승희, 초췌한 얼굴로 문에 기대 서 있는데.
띠링! 메시지 알림음 울리고, 휴대폰 꺼내 본다.
<INS> 메시지 : [입력하신 주소로 배송 완료되었습니다]

S#13. 편의점 앞 (오전)

승희, 편의점에서 사인하고 택배를 수령해 나온다.
다급하게 편의점 옆 골목길로 들어간다. 그런 승희를 쫓는 누군가의 시선.
 
S#14. 골목길 (오전)

승희, 긴장한 표정으로 코너를 돌면. 막아서는 누군가. 기석이다.
승희, 놀라서 택배 상자 떨어뜨린다. 기석, 집요하게 상자를 노려보는데.

S#15. 승희의 집 거실 (오전)

기석, 뜯겨진 택배상자를 힘껏 집어 던진다.
눈 질끈 감았다 뜨는 승희. 아슬아슬하게 승희를 빗겨간 상자.
옆에선 민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한다.

기석  기본도 안 돼 있는 자식! 생각이 있어 없어? 니가 그러고도 운동선수야?!
승희  (입 꼭 다물고 서 있는데)
기석  안되겠어. (승희 잡아끌며) 이 자식 썩어빠진 정신 상태부터 개조해야,
승희  (참았던 울분 터지는) 그럼 어쩌라고!!
기석/민혜 (놀라서 동시에 승희 보면)
승희  하고 싶은데 안 되잖아. 몇 달을 해도 안 되고, 몇 년을 해도 안 되잖아!
  기록 못 내면 운동 관두라는데,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되는데!!
 
승희, 문 쾅 닫고 나가 버린다.
기석, 충격 받은 표정이고. 민혜 역시 놀라서 보다가, 급히 따라 나간다.

S#16. 승희의 집 대문 앞 (오전)

대문 열리며 민혜가 뛰어 나오는데.
대문 앞 난간에 쪼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 묻고 있는 승희.
민혜, 조용히 승희 옆에 앉는다. 승희를 가만히 안아주면.
승희, 민혜의 품으로 파고든다. 말없이 서로를 위로하는 승희와 민혜.

S#17. 일식주점 (오후)

기석, 괴로운 표정으로 말없이 술만 마신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배닥터.
기석이 연거푸 술 따라 마시면, 배닥터가 막는다.

배닥터  해도 안 졌어 이 사람아. (술병 뺏어서 자기 잔에 따르면)
기석  (고통스러운) 우리 승희...
배닥터  (알았구나 싶어서) 지가 얘기해? (쓰게 한 잔 마시고)
기석  약물에 손대려고 했어.
배닥터  (술 따르려다 놀라서) 뭐?
기석  (욱하는) 아무리 벼랑 끝에 몰려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짓을!
  친엄마 사랑 못 받고 자라 그런가... 운동에 집착하는 거, 어쩔 땐 겁 나.
배닥터  (충격인 듯 술병 내려놓으면)
기석  (다짐하듯) 이대로 주저앉게 안 해. 내 손으로 직접 훈련 시켜서라도,
  남승희, 무조건 제자리에 돌려놓을 거야.
배닥터  아서라. 내가 볼 때 둘 다 상태 안 좋아. 그러다 부녀사이까지 망가질라.
기석  (술 따라서 괴롭게 마시면)
배닥터  (갈등하는 눈으로 보다가 툭 던지듯) 강진아 귀국했다.
기석  (마시려다 놀라서 보면)
배닥터  시청 신생 실업팀, 거기 감독으로 왔더라고. 얼마 안 됐어.
기석  (굳어버리는데)
배닥터  자격 충분하지 뭐. 한국인 최초로 세계선수권 본선까지 나갔는데.
  웃겨. 강진아 체코 갈 땐 배신자라고 욕들을 하더니.

S#18. 시청 체육관 (오후)

기석, 들어서면. 장대높이뛰기 훈련이 한창인 시청 선수들.
그 가운데, 선수들을 진두지휘하는 진아[여/46].

진아  가로대에 집중! 어깨 열고! (호루라기 불고 선수 따라보는 시선)
  자 마지막! 최나리, 허리 더 세워. 그렇지! 막판 스퍼트 신경 쓰고! (불면) 

출발선에 선 나리[여/20], 전력질주하며 가로대를 뛰어 넘는다.
진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보며 박수치면서 선수들 불러 모은다.
진아 앞에 와서 열중 쉬어 자세로 서는 나리와 선수 3명.    

진아  많이들 좋아졌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 밟아 가는 거야.
  훈련양 늘었으니까 자기 전에 몸들 충분히 풀어주고. (박수 치며) 해산!
선수들  (우렁찬) 수고하셨습니다!

선수들 흩어지면, 짐 챙기는 진아. 문득 이상한 느낌에 보면, 기석이 서 있다.
진아, 놀란 얼굴로 기석에게 시선 고정한 채 바로 선다.
기석, 분노로 이글거리는 표정으로 노려보면. 지지 않고 보는 진아.

기석  너... 왜 돌아왔어.
진아  (무시하며 시선 거두고 다시 짐 챙기면)
기석  (달려들어 진아의 어깨 붙잡으며) 뭐 하자는 거야! 대체 왜 왔는데!
진아  (뿌리치며) 피차 신경 쓰지 말고 삽시다. 남코치. (가방 메고 가려는데)
기석  (분노를 억누르며 한참을 망설이다) 얘기 좀 해.
진아  난 당신이랑 할 얘기 없어.
기석  니 딸 얘기야.
진아  (그 말에 멈칫하며 순식간에 얼어붙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고 나가는)
기석  니 딸 약물까지 손대려고 했어!
진아  (그 말에 멈춰 선다. 돌아본다)
 
S#19. 시청 일각 (오후)

진아와 기석, 나란히 앉아 있다. 둘 다 앞만 본다.
 
기석  대학 입학할 때 4미터 20, 본인 최고 기록 내고 그 뒤론 계속 추락이야.
  왼쪽 무릎이 안 좋아. 재활만 세 번이었어. (혼잣말하듯) 지옥 같았지.
  이번에 국가대표 못 달면 선수생명 끝나. 무조건 3위 이상 입상해야 돼.
진아  국가대표 달면?
기석  세계선수권 본선만 진출해도 실업팀 갈 수 있어.
  한 두 시즌만 더 뛰게 하고 지도자 유학 보낼 거야.
진아  (실소 터지는) 사람 참 안 변해. (보며 툭 던지듯) 걘 뛰는 거 좋데?
기석  누가 시킨다고 억지로 할 수 있는 종목 아니잖아.
진아  (일어나며) 어렵겠어. 여기도 챙겨야 할 내 선수 많아.
  근본적으로, 대학 아마추어 훈련이랑은 달라. 무릎도 안 좋다며.
기석  (따라 일어나며) 가능해! 승희한테 겁쟁이 유전자, 단 1프로도 없으니까.
진아  (빤히 보다가) 왜 나야?
기석  해 냈으니까. 다 끝났다고, (씁쓸한) 나까지도 그렇게 말했었는데.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잖아. 승희도 재기할 수 있게 도와 줘.
진아  (보는데)
기석  엄마 강진아한테 부탁하는 거 아니야. 선수 강진아한테 부탁하는 거야.

기석, 진아 옆에 CD 한 장 두고 간다.
진아, 기석이 사라지고 난 후에야 걱정스러운 표정이 얼굴에 드러난다.

S#20. 진아의 아파트 (밤)

CD 넣는 손. 마우스 클릭하면, 승희의 경기 모습이 노트북에 플레이 된다.
가로대와 함께 처참하게 추락하며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표정 짓는 승희.
진아, 그 모습을 뚫어져라 보며 습관처럼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린다.
진아, 승희의 추락 모습을 돌려 본다. 고통스러워하는 승희를 보며 미간 찌푸린다.
가슴 언저리에 뻐근한 통증 느끼며 가슴을 움켜쥐는 진아.

S#21. 대한체대 체육관 (오전)

힘차게 가로대를 뛰어넘는 승희, 실패다.
승희, 감정의 동요 없이 기계적으로 다시 출발선에 선다. 막 뛰려는 찰나,

진아(E)  허리 더 세우고! 오른 무릎 더 들어!
승희  (놀라서 돌아보면)
진아  왼쪽으로 무게중심이 기우니까 속도도 떨어지고 힘도 분산되지.
  신경 써서 오른쪽 무릎 높이 들고 뛰어 봐. 출발!

승희, 숨을 고른 후 진아의 지시에 따라 뛰어 보는데, 성공이다!
매트에 누운 채 그대로 걸려 있는 가로대를 확인하고 기뻐한다.
승희, 일어나 밝은 얼굴로 뛰어오는데, 기석이 다가오며 진아 옆에 선다.

기석  인사드려. 8월 경기까지 훈련 맡아주실 강진아 감독님.
승희  (예의를 갖춰 꾸벅 인사하고, 진아를 보면)
진아   (역시 날카로운 눈으로 승희를 본다)
기석  이름은 들어 봤지? 한국인 최초로 세계선수권 본선 진출한,
진아  (자르며) 내일 아침 아홉시. 시청 체육관. 늦지 마. (돌아서 가면)

승희, 진아의 뒷모습을 보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출발선으로 간다.
기석, 복잡한 마음이 표정에 드러나는데. 승희, 기계적으로 다시 뛴다.

S#22. 물리치료실 (오후)

물리치료 베드에 누운 승희.
준태가 승희의 왼쪽 무릎을 정성스럽게 물리치료 한다.

준태  강진아? 알지. 나 단거리 할 때도 유명했어. 고삐리 때부터 날렸다고.
승희  (의아한) 장대 선수잖아.
준태  한국에선 단거리 선수였어. 체코 가면서 종목변환 했다 그러데.
승희  그렇구나. 새 코치래. 내일부터 시청 가서 훈련받으래.
준태  너 출전했던 5월 경기, 2위가 아마 거기 선수였을 걸?
  잘 가르치나 봐. 올해 생긴 신생팀인데 거기 애들 다 상승세라더라.
승희  (솔깃한) 그래?
준태  (무릎을 접었다 폈다 운동시켜주며) 잘 됐네. 열심히 한 번 해 봐.
승희  언제는 운동 관두고 시집오라며.
준태  (장난) 솔직히 운동 빼면 너 뭐 볼 거 있냐?
승희  (정색하며 준태에게 잡힌 무릎 빼려고 힘주면)
준태  (잡으며 웃음) 알았어 알았어. 너 운동할 때 젤 이뻐.
승희  (고마운 눈으로 보며 미소)

S#23. 시청 체육관 (오전)

승희, 오래 된 습관처럼 능숙하게 몸 풀고 있다.
몸 풀며 승희를 기웃거리는 나리와 선수들, 진아 들어오면 일사분란하게 도열한다.

진아  (승희 보며) 얼굴들 익혔지? 대한체대 4학년 남승희. 새 훈련파트너야.
선수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승희 보면)
진아     운동경력으론 니들보다 선배야. 대회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있겠네.
  자, 서로 친해질 겸 오늘은 자유 훈련. (박수 치며) 시작!

다함께 박수치며 파이팅 넘치는 분위기. 승희만 이방인처럼 낯설다.
나리와 선수들이 장대 들고 가로대 넘는 훈련을 시작하면, 승희, 맨 뒤에 선다.
맨 앞에 선 나리, 초롱초롱한 눈으로 달려가 깔끔하게 가로대를 뛰어 넘는다.
선수들, 다함께 박수치며 환호 한다. 선수들과 하이파이브하는 나리.

진아  (승희 옆으로 다가와) 4미터 10. 방금 기록이야. 넘을 수 있겠어?
승희  (자신 없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가로대를 보면)
진아  무리하게 뛸 필요 없어. 본인한테 맞게 뛰어.
승희  4미터 10은 넘어야 메달권이죠?
진아  지난 1차 선발전에서 최나리가 2위 할 때 기록이 4미터 10이였으니까.
  긴장해. 2차 선발전, 얘들이랑 붙게 될 거야. 특히 최나리. 우승후보야.

승희의 차례다. 자극 받은 승희, 입술 질끈 물고 전력 질주 한다.
진아와 나리, 그리고 선수들이 승희가 뛰는 모습을 관심 있게 보는데.
몸이 가로대에 걸리며 매트 위로 추락하는 승희. 나리와 선수들, 아쉬워한다.
승희, 괴로운 얼굴로 고개 숙이고 돌아온다. 진아, 그 모습을 유심히 본다.
다시 맨 앞에 선 나리의 차례. 이번에는 가로대를 살짝 건드리며 실패한다.
하지만 실패에도 밝은 얼굴로 뛰어오는 나리. 함께 아쉬워하며 파이팅 불어넣는 선수들.
승희, 질투와 부러움이 섞인 표정으로 그 모습을 말없이 본다.

S#24. 시청각실 (오후)

이신바예바가 세계신기록 세우는 올림픽 영상이 플레이 되다가 멈춘다.

진아  포인트는 힘을 분산시키지 않는 거야. 비결은 어릴 때부터 했던 체조.
  앞으로 삼주동안 장대는 내려 놔. 체조훈련으로 자세부터 잡는다.
선수들  (우렁찬) 네!
진아  훈련에 앞서 간단하게 속도 테스트 볼 거야. 운동장으로 집합.

선수들, 진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밖으로 나가는데.
승희, 잠시 머뭇거리다가 진아에게 다가간다.

승희  저기 감독님. (망설이다가) 경기, 두 달도 안 남았습니다.
진아  (보며) 그런데?
승희  전지훈련도 아니고 시즌 중인데 기록 낼 수 있는 훈련에 집중하는 게,
진아  빠지고 싶으면 언제든 빠져. 니 자유야.
승희  (당황하는) 아빠가, 8월까지 같이 훈련하라고,
진아  니 아빠 울까봐 허락한 거야. 너, 약물까지 손대려고 했다며?
승희  (놀라는) 그건...! (부끄러움에 고개 숙이는데)
진아  니 방식으로 승산 있을 것 같으면 맘대로 해. 강요할 이유 없지. (나가면)
승희  (후... 갑갑한 표정으로 보다가 어쩔 수 없이 따라 나간다)

S#25. 운동장 (오후)

탕! 총소리 울리면, 5명의 선수들이 동시에 트랙을 뛰기 시작한다.
나리가 제일 먼저 들어오고, 뒤 이어 들어오는 선수들. 승희가 꼴찌다.
진아, 순서대로 스톱워치 누른다. 승희, 단거리 전력질주에 숨 몰아쉬며 힘든데.

진아  장대는 속도가 높이야. 이신바예바는 초속 9.8미터 이상으로 뛰어.
  100미터로 환산하면 11초 9. 참고로 100미터 세계신이 9초 69.
승희  (헉헉대며 겨우 몸 추스르고 보는데)
진아  여기 선수들 12초 중반대는 나와. 넌 컨디션 좋아봐야 겨우 13초 초반.
  (선수들 보며) 남승희 도약구간 기록, 12초 중반대 끊을 때까지,
  체력훈련 두 시간씩 연장한다. 내일부터 오전 일곱 시 집합.
승희  (놀라서 보는데)
선수들  (서로 눈치 살피며 유쾌하지 않은) 네...
진아  (나리 보며) 최나리. 니가 책임지고 남승희 기록 맞춰 놔.
나리  네? (벙해서 진아 보는데)
진아  이상. 해산해. (운동장을 가로질러 사라지면)

나리, 무표정하게 돌아서고. 선수들, 승희 흘겨보며 짜증나는 표정으로 따라간다.
승희, 움직이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다. 모멸감 느끼는 얼굴이다.

S#26. 라커룸 (오후)

샤워 마친 승희, 수건으로 머리 털며 나오는데

나리  (라커룸 옆에서 나오며) 언제가 편하세요 언니?
승희  (날카로운) 뭐.
나리  단거리 훈련. 감독님 얘기 들으셨잖아요.
승희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해.
나리  언제가 편하시냐구요.
승희  (어이없게 보며 가려는데)
나리  저두 언니 좋으라고 하는 일 아니에요. 감독님이 시키시니까 마지못해
  하는거지.
승희  (자존심 상해 돌아서서 나리를 보는데)

S#27. 고려시청 체육관 (오후)

승희와 나리, 장대 들고 나란히 서 있다.
3명의 선수들, 주변에 서 있고. 한 명이 호루라기 들고 있다.

나리  (빙글 웃으며) 약속 지켜요. 나한테 지면 같이 단거리 훈련 하는 거예요.
승희  (대꾸 없이 가로대만 노려보는데)
나리  또 하나. 감독님 말씀에 토 달지 마요. 우리 다 그렇게 하고 있어요.
  언니 하나 땜에 분위기 흐리는 꼴 못 보니까. 4미터부터 시작할래요?

4미터에 맞춰진 가로대.
승희, 안정적으로 뛰어 넘는다.
뒤 이어 출발한 나리, 역시 안정적으로 뛰어 넘는다.

4미터 10에 맞춰진 가로대.
승희, 가까스로 뛰어 넘는다.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다가 멈추는 가로대.
뒤 이어 출발한 나리, 다름없이 안정적으로 뛰어 넘는다.

4미터 15에 맞춰진 가로대.
승희,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있는 힘을 다해 뛰는데, 실패다.
나리, 신중하게 숨을 고르고 출발한다. 성공이다. 다른 선수들, 박수치며 기뻐한다.

4미터 20에 맞춰진 가로대.
승희, 전의를 상실한 채 뛸 엄두를 내지 못하는데.

나리  언니 최고 기록이 4미터 20이라면서요? 자신 없음 내가 먼저 뛸까요?

나리, 장대 들고 출발선에 선다.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출발한다.
승희, 누구보다 집중해서 나리가 뛰는 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는데... 성공이다!
다른 선수들, 나리에게 달려가 하이파이브 하며 축하해준다.
홀로 서 있는 승희, 가슴이 서늘해지며 비참한 기분 느낀다.
 
나리  (다가오며) 4미터 30도 한번 뛰어 볼까요? 컨디션 나쁘지 않은데.
승희  (노려보면)
나리  아니다. 감독님 기준 맞추려면 저랑 같이 뛰어야죠.
  훈련 끝나고 두 시간씩 비워두세요.

나리, 선수들과 함께 돌아서 나간다.
승희, 축 쳐진 채 돌아서는데. 어느 새 와 있는 기석.

기석  프로랑 아마추어 차이란 거다. 돈 받고 운동하는 거, 보통 일 아냐.
  뼛속까지 깊이 새겨. 기록이 선수 인격이고, 자존심이야.
승희  (냉랭한 얼굴로 잠시 서 있다가 나간다)  

S#28. 승희의 집 마당 (밤)

대문 열어주는 민혜. 승희가 지친 모습으로 들어온다.

민혜  고생했어. 피곤하지? 새 코치님이랑 훈련 어땠어?
승희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그냥. (들어가려는데)
민혜  (승희의 기분 눈치 채고) 왜. 생각했던 거랑 달라? (걱정스러운 표정)
승희  (잠시 보다가) 그럴 게 뭐 있어. 내가 실력이 형편없어서 그러지.
민혜  (심각한) 그런 소리 마! 너만큼 잘 뛰는 선수가 어딨다고.
승희  (안심시키려 애써 웃는) 그니까. 엄마 닮았음 잘 뛰겠지. (들어가려는데)
민혜  (짠한 얼굴로 보다가) 너 나 닮은 거 아냐. 낳아주신 어머니 닮았어.
승희  (의외의 얘기에 보는데)
민혜  운동 선수셨대. 실력도 훌륭하고, 근성도 대단하고, 뛰는 거 좋아하고.
  깐깐한 니 아빠가 그런 선수 없다고 칭찬할 정도였으니까.
승희  한 번도 못 들었는데. (조심스러운) 엄마 아는 사람이야?
민혜  (고개 젓는) 하도 들어서 아는 사람 같아. 맨날 비교당하면서 혼났었거든.
  그 재능, 열정, 끈기... 다 니가 고스란히 물려받았어. 남승희. 널 믿어.
승희  (괜히 미안해지는 표정)
민혜  얼마나 다행이야. 날 안 닮아서. 엄마, 선수론 별로였거든.

민혜, 미소로 보면. 승희, 고마움과 그리움이 뒤섞인 표정.

S#29. 훈련몽타주

- 양팔 링에서 버티기 훈련하는 승희와 선수들
- 밧줄 타고 올라가기 훈련하는 승희와 선수들
- 엉덩이로만 걷기 훈련하는 승희와 선수들

S#30. 시청 체육관 (오전)

승희, 들어오는데. 체육관 한켠에서 나리가 취재팀과 인터뷰 하고 있다.
주변에서 신기한 얼굴로 보고 있는 다른 선수들. 승희도 옆에 서서 보는데.

리포터  8월에 열리는 국가대표 2차 선발전, 최나리 선수의 목표가 궁금한데요?
나리  일단은 꼭 3위 안에 입상해서 태극마크 달아야죠.
리포터  그 다음엔?
나리  2016년 리우올림픽, 2019년 세계선수권, 2020년 도쿄올림픽?
  장대높이뛰기 선수론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한계에 도전하겠습니다.

선수들, ‘오~’ 놀리듯 감탄하면. 나리, 생글거리며 자기도 오글거린다는 제스처.
승희, 환하게 웃는 나리를 보는데... 갑자기 먹먹해지는 표정.
그때 취재팀중 한명 승희 발견하고 ‘청소년 선수권 우승했던 남승희 선수아냐?’
취재팀, 따라 보며 자연스럽게 승희를 찍으면.
승희, 당황해서 도망치듯 급히 돌아서 나가 버린다.    

S#31. 물리치료실 (오전)

준태, 커튼 열면, 베드에 누워 이어폰 꽂고 있는 승희.

준태  (옆에 앉으며) 신기하다. 남승희가 훈련 땡땡이도 치고. 아주 사람 됐어.
승희  (앉으며) 방송에서 취재하러 나왔어. 내가 거기 소속도 아니고.
준태  왜. 방송타면 누가 알아볼까봐? 야, 너 아무도 신경 안 써.
  니네 팀에 메달 딴 애도 있잖아. 얼굴도 이쁘드만. 널 찍을 이유가 없지.
승희  (째려보면)
준태  그니까 맘 편히 훈련하라고. 왜 여기 처박혀서 이러고 있어 청승맞게.
승희  (보다가) 최나리 알어?
준태  공중여신이잖아.
승희  그러게. 어린 게 잘 뛰고 이쁘기까지 한데 성격마저 좋아. 재수 없어.
준태  인마. 너도 장대신동이었어. 비주얼이 딸려서 여신소린 못 들었지만.
승희  과거형이잖아. 다 옛날 얘기야.
준태  너 그건 아냐? 강진아 선수 스물다섯에 장대 시작한 거?
  체코 귀화해서 첨 장대 잡았을 때 딱 지금 니 나이였다는데.
승희  진짜?
준태  제발 늙은 척 좀 하지 마. 나 지금도 고삐리냐고 민증 보자 그러거든?
  너랑 얘기하다 보면 내가 무슨 이모님이랑 사귀는 거 같애.
승희  (장난스럽게 준태 퍽! 치면)
준태  (헐리우드 액션) 이모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웃으면)
승희  (웃으며 보는데... 진아 얘기가 머릿속에 맴도는 표정)
 
S#32. 라커룸 (오후)

승희, 들어오는데 텅! 승희 앞에 떨어지는 승희의 소지품 박스.
고개 들어 보면 진아가 팔짱 끼고 서 있다.

승희  (꾸벅 인사하며) 죄송합,
진아  죄송할 거 없어. 나가.
승희  잘못했습니다.
진아  (보다가) 1분 준다. 해명해 봐.
승희  (머뭇거리다) 갑자기 카메라로 찍길래... (기어들어가는) 부담스러워서...
진아  아직도 남의 시선 의식하면서 운동 해? 니가 지금 그럴 때야! 똑바로 서.
승희  (열중 쉬어 자세로 서면)
진아  어릴 때 스포트라이트 좀 받았다고 뭐나 되는 줄 알고 착각하나 본데.
  사람들이 지금 보는 남승희는, 아니? 너한테 관심 갖는 사람조차 없어.
승희  (고개 숙이며 입술 깨무는데)
진아  천재병 버려. 언제까지 뒤만 보고 살 거야? 현실 직시하고 노력을 해!
  실력도 없으면서 한 때 잘나갔다고 뻣뻣하게 구는 거, 웃겨. 알겠니?
승희  네...
진아  알겠니!
승희  (울 것 같은 얼굴로 목소리만 높이는) 네!
진아  5분 내로 옷 갈아입고 운동장 집합. (문 쾅 닫고 나가면)
승희  (홀로 남아 한숨 쉬다가... 급히 사물함 정리하기 시작한다)

S#33. 시청 체육관 (밤)

텅 빈 체육관, 나리가 밧줄 타고 올라가며 혼자 훈련하고 있다.
문 열리는 소리 들리며 승희 들어온다. 지친 얼굴로 절뚝거리며 들어오는 승희.
나리, 빙긋 웃으며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나리   나머지 훈련하러 왔어요? 오늘 진도 많이 나갔는데.
승희  (밧줄 잡는데 팔 아파하며 도로 내려온다)
나리  언니 기다렸어요. 코치님이 언니 단거리 기록 얼마나 줄었나 체크한데서.
  필요하면 오늘 배운 것도 알려 줄게요. 뭐부터 할래요?
승희  (가라앉은 얼굴로 보며) 재밌어?
나리  뭐가요? 아직 재밌는 건 없는데.
승희  무슨 기분인 지 알아. 몸 가볍고 기록 좋으니까 세상이 다 우습지?
  누구 하나 튀어 보이면 라이벌 의식 들어서 밟아주고 싶고. 
  좋아. 다 좋은데, 무너지는 거 한 순간이야. 그때 생각해서 적당히 해.
나리  (폴짝 내려오며) 언니가, 내 라이벌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제 좀 재밌네.
승희  (바짝 다가서며) 언니가 한 수 더 가르쳐 줄까?
  장대,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어차피 서른 되기 전에 선수생명 끝나.
나리  (얼굴 굳는데)
승희  우리끼리 싸워봤자 국내용이야. 국제무대선 안 통해. 아무것도 아냐.
  그게 내가 걸어온 길이고, 니가 앞으로 갈 길이야.
나리  나쁘다 정말. 그걸 누가 몰라?
승희  놀면서 운동할 수 있을 때 맘껏 까불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승희, 돌아서 가려는데. 바닥에 뚝, 뚝, 떨어지는 핏물.
놀라서 보면, 나리의 손에서 흐르는 피. 나리, 대수롭지 않게 슥 닦으면.
승희, 그냥 가려다 마음에 걸려 나리의 손을 봐준다. 격한 훈련으로 엉망이 된 손.

S#34. 한강 고수부지 (밤)

승희와 나리, 벤치에 나란히 앉아 치맥 먹는다.
나리, 캔맥주 마시며 너무나도 시원해 하는 얼굴.

승희  상처에 술 안 좋다니까. 염증 생겨.
나리  그럼 언니가 또 치료해주면되지. (건배 권하며) 짠! (시원하게 마시고)
승희  왜 반말 하냐?
나리  (헤 웃으며) 그럼 라이벌끼리 존댓말 하나?
승희  또래 라이벌... 없지? 라이벌 하나 있는 게 안 지치고 오래 가는 건데.
나리  나는 내가 라이벌인데? 5년 후의 최나리, 10년 후의 최나리.
승희  (귀엽게 보며) 이신바예바 아니었어? 니 라이벌.
나리  바보야? 고삐리 때나 그런 소리 하는 거지. 지금 그러면 욕먹어.
승희  (씁쓸한 미소)
나리  나도 알어. 끽해야 선수생명 서른까지고, 날고 기어봤자 국내용 인거.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있나? 그럼 왜 살아? (술 마시면)
승희  (복잡한 얼굴로 나리를 보면
나리  (다 마시고) 언니 나 맥주 한캔 더 사줘요.
승희  야 아 학생이야. 넌 월급 받잖아. (하다가 카드 건네면)
나리  하는 짓처럼 찌질하진 않네. (카드 받아 뛰어가면)
승희  (귀엽다는 미소로 보다가... 조심스레 맥주 마셔본다)

S#35. 승희의 집 마당 (밤)

민혜, 대문 열면. 취한 승희가 비틀거리며 들어온다.

민혜  (놀라서 부축하는) 술 마셨어?
승희  (힘든지 평상에 털썩 앉아 숨 크게 들이마시며) 미안... 엄마 미안.
민혜  (옆에 앉아 속상한 얼굴로) 승희야. 너 정말 괜찮은 거야?
승희  (혀 풀린) 엄마. 나 운동 10년 헛했더라.
  완전 우물 안 개구리였어. 잘난 것도 없으면서 잘난 척만 하는.
민혜  (심각해지는) 시청에서 훈련 받는 거, 많이 힘들어?

승희, 민혜에게 기대며 눈 감으면. 민혜,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는데.

S#36. 승희의 집 승희방 (오전)

쏟아지는 햇살. 숙취로 괴로워하며 잠에서 깨는 승희.
겨우 눈 뜨고 시계를 보면, 현재시각 8시 30분. 승희, 헉! 놀라서 일어난다.    
S#37. 승희의 집 거실-주방 (오전)

민혜, 정성스럽게 도시락 포장하고 있는데.

승희  (급히 뛰어 나가며) 엄마 나 가! (문 닫고 나가는데)
민혜  (도시락 들며) 승희야 이거! (도시락을 물끄러미 본다)

S#38. 시청 체육관 (오전)

승희, 급히 뛰어 들어온다. 나리, 장대들고 훈련 하려다가 승희 보며.

나리  언니 아침 훈련 왜 안 나왔어? 감독님 완전 열 받았어.
승희  (미치겠는) 늦잠 잤어. 감독님 안에 계시지?

승희, 다급한 표정으로 돌아서는데.
양손에 커다란 쇼핑백 든 민혜가 들어선다. 놀라는 승희.

승희  엄마! 여길 어떻게... (하다가 민혜가 든 쇼핑백 보는데)
민혜  들려 보내려고 했는데. 새 선생님이랑 동료들한테 인사나 할 겸 해서.
승희  이러지 말랬잖아. 힘들게 엄마가 왜?

이때,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진아(E)  (화난) 남승희 아직 안 왔어?
승희  (민혜 돌아 세워 밀며) 엄마, 일단 가.
민혜  (무슨 영문인지 몰라 걱정되는) 너 뭐 잘못했니?
승희  (재촉하며) 얼른. 얼른 가 엄마.

민혜, 승희에게 떠밀리듯 밖으로 나가면.
안에서 나오는 진아. 승희와 선수들, 진아 앞에 열중 쉬어 자세로 도열한다.

진아  (승희 보며) 널 어쩌면 좋을까?

S#39. 시청 체육관 앞 (오전)

민혜, 걱정되는 마음에 안쪽을 보면. 진아는 선수들에게 가려 보이지 않는다.
‘네!’ 소리와 함께 선수들 흩어지면, 서서히 드러나는 진아의 모습.
툭, 묵직한 쇼핑백이 바닥에 떨어진다.
진아는 목격한 민혜, 하얗게 질린다.
진정하려 애쓰며 눈 감는데.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몸.

S#40. 주민센터 생활체육실 사무실 (오전)

민혜, 문 박차고 들어오면, 업무 보던 기석, 의아해한다.
민혜, 들고 온 것들을 쓰레기통에 마구 처박는다.

기석  (놀라서 말리며) 왜 이래!
민혜  (뿌리치며) 승희 새 코치, 누구야?
기석  (알아버렸구나... 한숨) 알잖아. 승희 이번이 마지막 기횐 거.
  강진아, 어쨌거나 훌륭한 선수야. 승희 믿고 맡길 수 있겠다 싶어서,
민혜  (들고 있던 반찬 기석에게 던지며) 승희 위해서 진아 언닐 불렀다고?
  진아 언니 불러들이고 싶어서 승희 운동 못 관두게 한 게 아니고?
기석  말 같지 않은 소릴!
민혜  당장 그만두라고 해. 만에 하나 승희가 이상한 낌새라도, (끔찍해하는)
기석  그럴 일 없어. 약속 했고, (보며) 막말로 지 새낀데 나쁘게 하겠어?
민혜  (히스테릭하게) 승희 내 딸이야!
기석  (질린 얼굴로 보면)
민혜  당신이 못하면 내가 해. (문 거칠게 닫고 나간다)

기석, 민혜 잡으려다가, 골치 아픈 듯 자기 머리 쥐어 싸는데.

S#41. 운동장 (오후)

승희, 벌로 운동장 뛴다. 어두컴컴하게 흐린 하늘, 땀으로 푹 젖은 승희.
이때, 승희 옆에 따라 붙으며 함께 뛰는 나리. 승희, 어이없는 표정으로 보는데.
이어서 다른 선수들 3명도 승희와 나리 옆에 붙어 함께 뛴다.

승희  (헉헉대며) 왜들 이래?
나리  혼자 뛰는 거 완전 없어 보여! (보며) 언니랑 술 먹나 봐. 죄책감 쩔잖아!

지쳐가던 승희, 탄력 받아 힘을 낸다. 선수들과 함께 발맞춰 뛰는데.
후두둑, 빗방울 떨어지더니 이내 소나기 쏟아진다.
시원해하는 선수들. 빗속에서 장난치며 신나게 뛰는데.
멀리서 이 모습 보는 진아. 얼굴에 희미한 미소 짓는다.

S#42. 야외 훈련몽타주

- 승희와 선수들, 무릎 높이 들어가면서 녹음이 푸르른 들판 위를 뛰는 모습
- 승희와 선수들, 거칠고 험한 산길을 뛰어 오르는 모습
- 승희와 선수들, 그리고 진아까지 탁 트인 해안가를 달리는 모습 

S#43. 야외 벌판 (오후)

승희, 벌판을 달리다가 뭔가 발견하고 급히 못 본 척 돌아서 가려는데.
가부좌 틀고 명상하던 진아, 눈 뜨며 승희를 본다. 승희, ‘걸렸다’ 싶은 표정.

진아  (그 자세 그대로 눈 감으며 옆자리 가리키면)
승희  (울상이 되며 진아 옆에 가부좌 틀고 앉는다)
진아  결국은 멘탈 싸움이야. 그게 서야 이기든 지든 운동 계속 할 수 있어.
승희  (툭 내뱉듯) 성공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해요.
진아  (보며) 성공? 모르는구나. 장대는 실패해야 끝나는 게임인데.
승희  (어깨 으쓱하며 눈 감으면)
진아  (눈 감은 승희 얼굴 애틋하게 보다가) 좋아졌어. 많이.
승희  (보며 왠지 쑥스러운) 근력도 별로고, 무릎 상태도 안 좋은데요.
진아  집중력 균형감은 훨씬 좋아. 왜 약점만 봐? 잘하는 게 더 많은데.
승희  (의외의 칭찬에 부끄러우면서도 좋은)
진아  4미터 20, 깨보고 싶지 않아?
승희  불가능해요. 한창 때 뛴 거라. 알면서 실패하는 거, 이제 하기 싫어요.
진아  (툭 던지듯) 왜 하니? 장대높이뛰기.
승희  (선뜻 대답 못하고 보다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눈 맞추며) 좋아요.
진아  됐어 그럼. (눈 감으면)
승희  (눈 감는 척 하다가 진아를 보는데... 호기심 생기는 표정)
 
S#44. 승희의 집 승희방 (밤)

검색창에 ‘강진아’ 입력된다. 궁금한 얼굴로 검색결과 살펴보는 승희.
<INS> [육상 단거리 아시아 제패를 노린다! 무서운 고2 소녀 강진아]
<INS> [체육계 미스터리? 트랙에서 사라진 육상 간판스타 강진아]
<INS> [강진아 체코行, 거액의 스카웃 제의에 조국도 가족도 버려]
승희, 찬찬히 살펴보다가 미간 찌푸린다. 유심히 보며 클릭하는 손.
<INS> [충격! 강진아 출산설! 동거하던 담당코치 아이 출산] 

승희  (흥미진진한 표정) 와... 쎄다.

승희, 이번에는 전성기 시절의 진아 경기영상을 클릭해 본다.
<INS> 영상 : [진아, 출발 신호와 함께 장대 들고 전력질주 한다]
승희, 표정 없이 보다가... 순간 안타까운 표정 짓는데.
<INS> 영상 : [진아, 가로대와 함께 추락하며 실패한다]
안타까운 표정의 승희, 서서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INS> 영상 : [진아, 실패했지만 환하게 웃으며 관중들의 환호에 답한다]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진아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승희.
그러다가 ‘어?’ 하고 화면 가까이 다가가는데.
<INS> 영상 : [진아, 손 흔들며 목에 건 펜던트에 입을 맞춘다]
승희, 반사적으로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매만지며 화면을 유심히 본다.
화면을 키워 자세하게 확인하려는 찰나, 노크소리 들린다.

민혜  (빨래 갠 것 가지고 들어오며) 아직 안 잤어? (서랍에 정리하는데)
승희  자려구. (정리하는 것 보며) 엄마 오늘도 땡큐.

민혜, 웃으며 나가다 무심결에 승희의 노트북 본다.
진아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는 승희 모습에 불안해지는 얼굴. 눈을 못 떼고 나가는데.
승희, 활짝 웃는 진아의 사진 하나를 프린트한다. 빙그레 미소 짓는다.

S#45. 시청 체육관 (새벽)

승희, 새벽 일찍 체육관으로 들어서다가, 멈춰 선다.
진아, 장대 들고 뛰는데 왼쪽 무릎에 모래주머니 차고 있다.
폴박스에 장대 찍고 가로대를 뛰어 넘으면, 무게중심이 쏠리며 실패한다.
매트에서 일어난 진아,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오다가 승희를 본다.
승희, 진아의 왼쪽 무릎에 채워진 모래주머니를 보는데.

진아  대책 없이 장대 들고 뛰다간 니 무릎, 못 버텨.
승희  (놀란 표정으로 보면)
진아  뛰어 보니까, 오른 무릎 높이 들어서 균형 맞추는 게 제일 효과적이야.
  (장대 내밀며) 왼쪽 무릎 보호해. 좋아하는 운동, 길게 해야지?

승희, 장대 건네받는데, 뭉클한 표정. 의지 다지며 출발선에 선다.
후... 호흡 정리하며 잡생각을 떨치고 가로대에만 집중한다.
승희, 오른 무릎 높이 들고 달려간다. 폴박스에 장대를 찍고 날아오르는데.
이제까지의 훈련이 효과를 발휘하며 유연하게 가로대를 뛰어 넘는 승희.
매트 위에 누운 채 숨 몰아쉬며 흔들리는 가로대를 본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가로대가 멈춘다. 미소 지으며 천천히 눈 감아보면.
방금 전 가볍게 날아오르던 순간의 느낌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진아  (다가와 손 내밀며) 방금 뛴 거, 4미터 15야. 4미터 20, 충분히 가능해.
승희  (잡고 일어나며 놀라서) 정말요?

승희,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느끼며 활짝 웃으면.
대견한 듯, 처음으로 승희에게 웃어 보이는 진아. 따뜻하게 서로를 보는 승희와 진아.

S#46. 시청 입구 (밤)

승희, 상기된 표정으로 나오는데. 입구에서 기다리는 민혜, 불안한 기색 역력하다.

승희  (발견하고 달려가며) 엄마! (살갑게 민혜의 팔짱 끼면)
민혜  힘들지? 수고 했어 우리 딸.
승희  (함께 걸으며) 간만이다. 엄마랑 같이 걷는 거. (기분 좋은 미소)
민혜  (승희의 밝은 얼굴 보다가) 좋아 보이네.
승희  (혼자 괜히 쿡 웃으며) 재밌어.
민혜  재밌어? 그런 소리 처음 하는 거 같다.
승희  기록 되찾아 가는 것도 짜릿하고, 동료 선수들도 귀엽고, 감독님도...
민혜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보는데)
승희  (멈춰서 보며) 엄마, 나 진짜 잘 할 거야. 할 수 있을 것 같아.
  감독님한테 부끄럽지 않은 선수 되고 싶어.

승희, 다시 걷는데. 따라 걷는 민혜, 승희가 낯설게 느껴진다.
표현할 수 없는 상실감 느끼는 민혜, 눈빛이 불안하게 떨리는데. 

S#47. 진아의 아파트 (오전)

진아, 출근 차림으로 막 가방 메고 현관으로 간다.
문을 여는데, 쇼핑백 들고 앞에 서 있는 민혜. 진아, 놀라서 몇 걸음 뒤로 물러난다.
진아와 민혜, 한 동안 복잡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그러다가 민혜, 작정한 얼굴로 집 안으로 들어온다. 진아, 얼어붙은 채 민혜만 보는데.

민혜  (위악적인 미소) 오랜만이네요. 애 맡겨놓고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려서.
  밑반찬 좀 해 왔어요.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쇼핑백 건네면)
진아  (받지 않고 잠시 보다가) 이럴 거 없어. 할 말 있으면 해.
민혜  (쇼핑백 바닥에 내려놓고 진아 똑바로 보는) 자기 엄마 죽은 줄 알아.
  혹시라도 친엄마가 자기 버리고 갔다는 거 알게 되면,
진아  (지지 않고 보며) 쓸데없는 짓 했네. 그런 상황 절대 안 만들어.
민혜  승희도 승희지만 언니 위해서 하는 소리야.
  적어도 지금은, 자기 낳아준 엄마 그리워하니까.
진아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 쓰는데... 저릿해 오는 가슴)
민혜  (꾸벅 인사하며) 우리 승희 잘 부탁드립니다. (힘주어) 감독님.

민혜, 돌아서 나간다. 현관문이 무겁게 닫힌다.
진아, 순간 극심한 가슴 통증 느끼며 상체가 휘어진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S#48. 진아의 아파트 복도 (오전)

담담한 척 나온 민혜, 온 몸에 힘이 풀리며 괴로운 표정으로 벽에 기대는데.
집 안에서 들려오는 ‘쿵-’ 무거운 소리. 민혜, 그 소리에 문 쪽을 본다.
민혜, 무시하고 가려다가, 갑자기 불안한 생각에 돌아서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면.
현관에 쓰러져 있는 진아!

S#49. 응급실 복도 (오전)

민혜, 충격 받은 표정 짓는다. 옆에 서 있는 배닥터 역시 황당한 얼굴.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의사에게 되묻는 민혜.

민혜  그러면... 심장이 고장 났단 말이에요?
배닥터  상황이 어떤데? 어느 정도 진행된 거야?
의사  심장 판막이 전혀 기능을 못합니다. 수술 시기 지났구요.
  혈액순환 문제로 찾아오는 통증인데, 간격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오늘 내일 또 쓰러져도 이상할 거 없는 상탭니다.

배닥터, 허탈한 표정인데. 민혜, 독한 얼굴로 응급실에 들어간다.

S#50. 응급실 (오전)

민혜, 커튼을 확 젖히면. 진아, 담담한 얼굴로 옷 갈아입고 있다.
민혜, 어이없는 표정으로 진아를 노려보는데. 진아, 개의치 않고 나간다.

민혜  (잡으며) 그 몸으로 어딜 가.
진아  (민혜에게 잡힌 팔 가볍게 뿌리치며) 내가 알아서 해.
민혜  이게 무슨 짓이야? (보며) 대체 우리한테 무슨 짓 하려고 이러는 거야!

진아, 집요하게 앞만 보며 대답 없다. 그냥 나가버린다.
배닥터, 들어오다가 나가는 진아를 보고 놀란다. 배닥터, 민혜를 보면.

민혜  (독하게 마음먹은)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아요. 그이한테도, 승희한테도.
배닥터  (난감한 표정)

S#51. 진아의 아파트 (오전)

현관문이 열린다. 지친 표정의 진아가 들어온다.
진아, 무너지듯 자리에 앉는데. 얼굴에 드리워지는 깊은 수심.
딩동! 벨소리 울린다. 진아, 현관문을 응시하며 움직이지 않는데. 또 다시 딩동! 벨소리.

승희(E)  감독님! 안에 계세요? 저 남승희에요.

진아, 놀라서 일어난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현관문을 본다.
천천히 다가가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열면, 승희가 활짝 웃으며 들어온다.

승희  훈련도 안 나오시고 전화도 안 받으셔서. 시청에 물어보고,
  (하다가 진아 얼굴 보고 놀라는) 어디 안 좋으세요? 얼굴이...
진아  (급히 돌아서며) 잠깐 있어. (방으로 들어간다)

홀로 남은 승희, 뻘쭘한 표정으로 방 한가운데로 들어온다. 가방 내려놓는다.
진아의 메달과 트로피가 정리되어 있는 벽장에 시선이 멎는다. 벽장 가까이 다가선다.
승희, 국제대회 메달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 보는데,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다.
방문 열리며 정돈된 모습의 진아가 나온다. 승희, 그 바람에 놀라서 메달 떨어뜨린다.
승희, 급히 주우려는데, 먼저 줍는 진아.

승희  죄송합니다. 신기해서 구경하다가.
진아  (손에 들린 메달을 잠시 보다가 승희에게 건네며) 너 해.
승희  (놀라서 보다가 손사래 치는) 아니에요, 어떻게.
진아  나한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물건이야. 좋아해주는 사람한테 가면 좋지.

진아, 승희의 목에 메달 걸어준다. 놀라는 승희.
진아, 잠시 보다가, 메달 바로 위, 왼쪽 날개 모양의 펜던트를 만지며 본다.

승희  알젠타. 얘 이름이에요.
진아  (아련하게) 아르젠타비스.
승희  (못 알아듣고) 네?
진아  (놓고 보며) 시청으로 복귀 해. 오후 훈련에 합류할 테니까.
승희  (씩씩하게) 네!

S#52. 버스 안 (오전)

햇살 쏟아지는 창가. 메달을 닦고 또 닦으며 좋아하는 승희. 햇살에 반짝이는 메달.
승희, 뿌듯한 얼굴로 메달을 보다가 생각난 듯, 휴대폰 꺼내 검색한다.
[아르젠]까지 치고 잠시 생각하다가 [아르젠타]까지 치면.
자동검색어로 [아르젠타비스]가 완성된다. 클릭해 본다.
<INS> [절벽에서 뛰어내려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전설속의 새]
승희, 흥미로운 얼굴로 다른 자료들도 클릭해 보는데. 창틈 사이로 바람이 불어온다.
창문을 활짝 열어 바람을 느낀다. 환하게 웃으며 행복한 표정 짓는 승희.

S#53. 배닥터 진료실 (점심시간)

배닥터, 전화를 든다. 한숨 쉬며 괴롭게 갈등하더니, 도로 내려놓는다.
똑똑똑 노크소리 들리고 승희가 들어온다. 배닥터,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난다.

배닥터  승희야! (지레 겁먹은) 왜...!
승희  (갸웃한) 검진하는 날이잖아요. (앉으며) 밑에서 사진 찍고 왔어요.
배닥터  (앉아서 허둥대는) 어, 그렇지... 사진 올라왔나? (모니터보며) 여기 있네.
  (진정하며 살피다가 미소) 좋네. 훈련 많이 한다 그래서 걱정했는데.
승희  감독님께서 왼쪽 무릎 보호하면서 뛰게 하셨거든요.
배닥터  (잠시 보다가 씁쓸한) 그랬구나. 강진아가 남기석 코치한테 은혜 갚네.
  선수 시절에 하도 별나서 니 아빠 아니면 아무도 훈련 못 시켰었거든.
  오죽하면 남코치 아니면 강진아 운동 못한다 그랬겠냐~..

승희, 수긍하는 미소로 웃다가, 순간 멈칫한다.
* 플래시 컷. <INS> [충격! 강진아 출산설! 동거하던 담당코치의 아이 출산]

승희  아빠가... 감독님 담당코치였어요?
배닥터  체코 갈 때까지 쭉 남코치 담당이었어. (차트 적는) 물리치료 좀 받고...
승희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일어난다. 말없이 나가면)
배닥터  (의아한) 승희야?

S#54. 주민센터 체육관 (오후)

승희, 급히 들어서며 보면. 츄리닝 입은 직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는 기석.
승희, 불안한 표정으로 기석에게 다가간다. 기석, 보고 놀란다.

기석  뭔 일이야 이 시간에. 훈련은?
승희  강진아, 누구에요?
기석  (너무나 놀라지만 대수롭지 않은 척) 누구긴 누구야. 니 감독이지.
승희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구냐고!

기석, 당황해서 대답 못 한다.
함께 있던 직원들, 무슨 일인가 싶어 모두 보는데.

승희  강진아, 선수시절에 담당코치 애를 낳은 적이 있데. 여자애래.
  체코로 떠날 때 까지 담당해 주던 코치 딱 한 사람뿐이라는데,

기석, 승희의 팔을 턱! 잡는다. 승희, 말 멈추고 기석을 노려보면.
기석, 승희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S#55. 주민센터 옥상 (오후)

기석, 괴로운 얼굴로 주머니에서 담배 꺼낸다. 입에 물려다 멈추고 보며.

기석  (가라앉은) 어서 들었어?
승희  (긴장하는 표정으로 노려보면)

기석, 한숨 쉬며 담배 입에 물고 불을 찾는다.
그런데 불이 없다. 기석, 담배를 바닥에 힘껏 내팽개쳐버린다.

승희  누군데.
기석  (결심한 듯 보며) 니 엄마야.
승희  (놀라서 눈 커지는) 죽었다며?
기석  (후... 꺼질 듯이 한숨 쉬며 외면하면)
승희  죽었다며. 나 낳아준 엄마 교통사고로 죽었다며!
  온 몸 던져서 나 지키고 자기 혼자 죽었다며!!
기석  (달래려고) 승희야.
승희  어떻게 이래? 엄마도 아빠도,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어!
  (돌이켜 보니 끔찍한) 그런데도 나 그 여자한테 훈련받게 한 거야?
기석  냉정 잃지 마. 달라지는 거 없어. 그래서 그게 뭐?
  낳기만 했지 너 친엄마 기억이나 해? 없잖아. 그냥 지금처럼 살면 돼.
승희  (악쓰며) 어떻게 그래! 감독님이 친엄마라는데!
기석  애미는 무슨! (욱하는) 지 새끼 버리고 간 게 무슨 애미야!
승희  (너무나 큰 충격인) 버렸어... 날? (눈동자 흔들리는) 왜...? 왜!!

기석, 낭패 본 표정으로 입을 다문다.
승희, 충격으로 헉헉대며 고통스러워하다가... 갑자기 뛰쳐나가 버린다.
기석, ‘남승희!’ 부르며 급히 따라 나간다.

S#56. 주민센터 입구 (오후)

승희, 뛰어 나와 정차해 있는 택시에 올라탄다. 출발하는 택시.
간발의 차로 따라 온 기석, 승희를 태운 택시가 떠나는 것을 초조하게 보면서,
손 흔들어 택시 잡아 보지만 차가 없다. 미치겠다는 얼굴로 택시 잡는 기석.

S#57. 택시 안 (오후)

승희, 하얗게 질려서 멍하니 앉아 있다.

기사  (룸미러 보며) 어디로 모실 까요 손님?

멍한 얼굴의 승희 위로 기석이 했던 말이 자꾸만 맴돈다.

기석(E)  니 엄마야. / 애미는 무슨! 지 새끼 버리고 간 게 무슨 애미야!

승희  (얼굴 일그러지는데)
기사  (룸미러로 승희 살피며) 손님, 목적지를 말씀 해 주셔야죠.
승희  (대답 없고)
기사  (짧게 한숨 쉬는데)
승희  (넋 나간) 멀리요... 아무데나, 멀리 가 주세요.

S#58. 시청 체육관 (오전)

진아, 선수들을 보는데. 승희 없이 도열한 나리와 선수들.

진아  남승희 아직도 연락 안 돼?
나리  네... 어제 오후부터 전화도 꺼져 있습니다.
진아  그래? (담담하려 애쓰는 표정으로) 운동장으로 집합.

선수들, 뛰어 나가면. 진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뀐다.
이때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기석. 수염이 꺼뭇하게 자란 까칠한 모습이다.

기석  승희, 승희 여기도 안 왔어?
진아  걔를 왜 나한테 찾아? (문득 불안해지는) 무슨 일이야!
기석  (머리 쥐어뜯으며 미치겠는) 승희가... 다 알아버렸어.
진아  (경악하는) 뭐?

S#59.  진아의 아파트 입구 (밤)

진아, 지친 모습으로 걸어온다. 문득 멈추는데, 가슴을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한다.
숨 몰아쉬며 호흡 정리하는 진아. 허리 펴고 한숨 쉬며 하늘을 본다. 들어간다.
진아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면, 숨어서 보고 있던 승희가 나타난다.
승희, 무언가에 홀린 듯, 진아의 뒤를 따라가려다 멈춘다.
진아의 뒷모습을 보며, 진아를 불러보려고 하지만... 차마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승희,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돌아선다.

S#60. 몽타주

<밤거리>
승희, 멍한 얼굴로 화려한 밤거리를 정처 없이 걷는다.
생기 넘치는 풍경 속에서 승희에게만 이질적인 외로움이 느껴진다.

<승희의 집 거실>
민혜, 핏기 없는 얼굴로 앉아 있고. 기석, 여기 저기 전화 돌려 보고 있다.

기석  어디 또 갈 만한 데 없어? 승희 친구들 있을 거 아냐!
민혜  (초점 나간) 승희... 친구 별로 없어.
기석  (할 말 없어 당황하다가) 그러고 있을 거야? 경기가 코앞이야!
민혜  경기? 그게 뭐. (일어나며 버럭) 내 딸이 죽겠는데 그딴 게 다 뭐야!
  (문 쾅 닫고 승희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승희의 집 승희방>
민혜, 텅 빈 방을 짠한 눈으로 둘러보다가... 벽에 걸린 사진에 시선이 멎는다.
가까이 가 보면, 사진틀에 인쇄한 진아의 사진(=씬44의)이 꽂혀 있다.
기석과 민혜의 자리에 꽂혀있는 사진, 마치 승희와 나란히 선 느낌이다.

<술집>
승희, 소주잔에 술 따른다. 잠시 보다가... 단숨에 마셔버린다.
욱! 토악질 하듯 괴로워하며 켁켁 대는 승희.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인다.

<스포츠센터 앞>
준태, 태주를 만나 승희의 행방을 묻고 있다. 갸웃한 얼굴로 고개 젓는 태주.
준태, 승희가 갈 만한 곳을 적어 놓은 수첩에 줄긋는다. 다음 장소로 뛰어 가는 준태.

<진아의 아파트>
진아,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앉아 있다. 습관처럼 목에 걸린 펜던트 만지작거린다.
이내 결심한 듯, 책상 서랍 열어 하얀 봉투 꺼낸다. [사직서]라고 쓰여 있는 봉투다.

<거리>
승희,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걷다가, 그대로 멈춰 선다.
[제69회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 홍보 현수막이 휘날린다. 승희, 말없이 보는데.
주르륵, 창백한 얼굴에 코피가 흐른다.
승희, 코피인 것 확인하고 고개 뒤로 젖히며 휴지 꺼내려고 가방 뒤지는데.
문득 손을 멈춘다. 손에 딸려 나오는 진아의 메달.
승희, 코피 손등으로 슥 닦고 메달을 말없이 응시한다.

* 플래시 컷. 왼쪽 무릎에 모래주머니 차고 뛰던 진아의 모습
* 플래시 컷. 자신을 보고 처음으로 웃어주던 진아의 모습
* 플래시 컷. 메달 걸어주던 진아의 모습

승희...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못 박은 듯 서 있다.

S#61. 시청 체육관 (밤)

어두운 체육관, 불 켜는 손. 진아다. 커다란 캐리어가 옆에 놓여 있다.
진아, 체육관을 둘러보다가 멈칫한다. 진아의 시선이 멎은 곳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승희.
진아, 캐리어 끌고 천천히 다가간다. 승희, 고개 드는데, 초췌한 얼굴. 자리에서 일어난다.
승희와 진아, 말없이 한 동안 서로를 보다가.

승희  경기 나갈 거예요. 코치 해 주세요.
진아  (담담한) 나 떠나. 급하게 체코로 가게 됐어.
승희  4미터 20, 도전해 볼래요. 실패해도 상관없어요. 해 보고 싶어요.

진아, 잠시 보다가 캐리어에서 상자 하나 꺼내 승희 앞에 내려놓는다.
아련한 눈으로 승희를 보며 돌아서는데.

승희  엄마 딸 하자는 거 아니잖아. 나 뛰고 싶다고!
진아  (등만 보인 채 움직이지 않는다)
승희  이제 좀 뛰는 게 재밌단 말이야. 더 가르쳐달란 말이야.
진아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승희  또 버린다고? 또 도망가겠다고!! (보다가) 나, 왜 버리고 갔어요?
진아  (그 말에도 움직이지 않는데)
승희  나 버리고 가면서까지, 장대높이뛰기, 왜 했는데요?
진아  (돌아선 그대로) 아르젠타비스, 아니, 알젠타 찾으려고.
승희  (보다가) 찾았어요? 대체 그게 뭔데!

진아, 그제야 천천히 돌아선다. 말없이 승희와 눈을 맞추고 뚫어져라 본다.
승희, 영문 모른 채 보는데. 애달픈 심정의 진아, 눈동자가 흔들린다.

진아  평생 널 보러 못 올 줄 알았어.
승희  (순간 가슴에 쿵... 충격이 느껴지고)
진아  그래서 나, 후회 없어.
승희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데)
진아  (애타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승희의 눈물 닦아주려다, 그냥 거두며)
  중심 잃지 마. 신경 써서 오른 무릎 높이 들고 뛰어. (나가면)
승희  (잡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다)

S#62. 시청 체육관 앞 (밤)

진아, 밖으로 나온 후에야 괴로운 표정으로 눈시울 붉어진다.
하늘을 보며 울음 삼킨다. 애써 진정하며 휴대폰 꺼내 전화를 건다.

진아  나야. 니 딸, 시청 체육관에 있어.

S#63. 시청 체육관 (밤)

창가 달빛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는 승희. 앞에 놓인 상자.  
승희 앞에 드리워지는 그림자. 보면, 민혜다. 민혜, 승희 옆에 앉는다.

승희  (멍한 얼굴로) 갔어.
민혜  (안타깝게 보면)
승희  변명도 안 하고, 미안하단 말 한 마디도 없이, 그냥 갔어.
민혜  언닌 항상 그랬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S#64. 경기장 (과거, 오후)

고등학생 진아, 카메라팀 앞에서 금메달 보여주며 포즈 취한다. 금메달 살짝 깨무는 포즈.
진아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 가운데, 대기석에 앉아 부럽게 보는 고등학생 민혜.

민혜(E)  진아 언니, 아빠 밑에서 같이 코치 받던 동료였어. 나랑은 달랐어.
  성적도 좋고, 항상 당당하고, 뛰는 거 참 행복해 보였거든.   
카메라팀의 부탁으로 단체 사진 찍으러 나가는 선수들. 민혜, 안 나가고 앉아 있는데.
진아, 민혜를 발견하고 다가온다. 민혜가 보면, 장난스럽게 웃으며 데리고 나가는 진아.
진아, 민혜의 팔짱을 낀다. 그 사이에 끼어드는 코치 시절 기석. 찰칵! 카메라 찍힌다.

민혜(E)  이유도 없고, 설명도 없었어. 사람 사귀고 헤어질 때도.
  그냥 자기가 좋으면 좋았던 거야. 아빠도 그런 언니 성격을 사랑했고.

S#65. 코치실 안-밖 (과거, 밤)
   
기석, 임신 초음파 사진 본다. 맞은편의 진아, 독하게 앞만 보는데. 

기석  (사진 집어 던지며) 지워.
진아  (독한 얼굴로 대답 안 하고)
기석  2주 후에 경기야. 내일이라도 당장,
진아  (담담한) 수술 받아도 경기는 못 뛰어. 낳을 거야.
기석  고지가 눈앞인데 이깟 일로 주저앉을 거야?
진아  (보며) 우리 어린애들 아냐. 누구 하나는 자기 행동에 책임 져야지.

진아, 황당한 표정의 기석을 뒤로 한 채 일어나 나오는데.
문 앞에 서 있던 민혜, 진아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냥 가 버리는 진아.

S#66. 시청 체육관 (동, 시간의 경과)

민혜  언니는 널 포기하지 않았어. 대신 운동을 포기했지.
  너 낳고 일 년 쯤 지나서 다시 선수로 복귀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어.
승희  (조심스러운) 나... 때문이야?
민혜  (안쓰러운 눈빛) 기록은 여전히 좋은데, 받아주는 팀이 없었어.
  그러다가 니가 두 돌 쯤 됐을 때, 딱 이맘 때였다. 언니가 전화를 했어.

S#67. 공원 (과거, 오후)

민혜, 반가워하며 크게 손 흔드는 모습. 진아와 아기 승희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다.
한달음에 달려 와 승희 안아주며 예뻐하는 민혜. 승희도 민혜를 보며 좋아한다.

진아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나 떠나. 스카웃 제의 받았어. 체코로 갈 거야.
민혜  (놀라서 승희 내려놓고) 잘 됐다. (아쉬운) 코치님이랑 승희, 못 보겠네.
진아  나 혼자 가. (일어나며) 우리 승희, 맡길 사람이 너 밖에 없어. 부탁할게.
민혜  (이해 안 가는 얼굴로 따라 일어나며) 언니.
진아  마지막 기회야. 지금 아니면 평생 선수로 재기할 기회 없어.
  (간절하게 보며) 민혜야 나는, 하루를 살아도 선수로 살다 죽고 싶어.
민혜  그렇다고 자식을 버리고 가? 정신 차려! 승희 두 돌도 안 됐어.
진아  봐서 알잖아. 승희가 옆에 있으면 내 꿈, 절대 이룰 수 없어.
민혜  언니 자식이야! 언니가 낳았어!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딨어?!
진아  민혜야 나! 승희 원망하기 싫어. 미워하기 싫어.
  승희 곁에 남으면 평생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살 것 같아. 그럴 순 없어.
민혜  (보는데)
진아  좋은 엄마로 남을 수 없다면 좋은 선수라도 되고 싶어.
  곁에서 불행해하느니 차라리 멀리서 그리워할래. 죽을 때까지 지켜볼게.

진아, 목에 걸고 있던 두 개의 목걸이 중 하나를 푼다.
활짝 펼친 왼쪽 날개 모양의 펜던트, 잠시 보다가 승희 목에 걸어준다.

민혜  승희가 엄마 찾으면? 그럼 뭐라고 해!
진아  죽었다고 해.
민혜  산 사람을 어떻게 죽었다고 해!
진아  (잠시 보다가) 아르젠타비스... 찾으러 갔다고 전해 줘. (돌아서는데)
승희  (옹알이 하듯이) 엄마?

진아, 그 소리에 멈춰 선다. 돌아보면.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좋아하는 승희.

승희  (펜던트 만지며 어설픈 발음으로) 알, 젠, 타. (까르르 웃는데)

진아, 울컥 하는 표정 감추며 돌아선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간다.
민혜, 잡으러 가다가, 홀로 남은 승희를 본다. 짠하게 보며 승희를 안아주는 민혜.

S#68. 시청 체육관 (동, 시간의 경과)

민혜  아르젠타비스... 뭔지 몰랐거든. 언니 떠나고 나서 찾아봤어.
  새더라. 인디언들이 믿는 전설의 새.
승희  너무 거대해서 혼자 힘으론 못 나는데,
  절벽에서 뛰어 내려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면 세상에서 제일 강해져.
민혜  알고 있었네. 첨엔 언니가 절벽에서 뛰어 내리듯이 도망치는 줄 알았어.
  아니었어. 더 높이 날기 위해서 떠난 거였어. (보며) 알젠타처럼.
승희  (펜던트를 움켜쥐며 서글픈 표정 짓는데)
민혜  먼저 가 있을 게. (짠하게 보며) 승희야... 니 옆에 나 있어.
  아프고 힘든 거, 엄마랑 나눠 가져. 나한테 기대. 엄마한텐 그래도 돼.

민혜, 일어난다. 여전히 펜던트를 움켜쥔 채 앞만 보는 승희.
민혜,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애써 참으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체육관을 나간다.
또 다시 혼자가 된 승희. 진아가 남기고 간 박스에 시선이 멎는다.
승희, 잠시 보다가... 박스를 열어본다.
빛바랜 배냇저고리, 낙서 같은 그림, 난생 처음 보는 사진 몇 장.
사진을 보면, 젊은 시절의 진아와 아기 승희가 함께 한 행복한 한때들.
승희, 낯설게 보다가, 정신없이 박스 안을 뒤져보면, 아래 깔려 있는 스크랩북.
펼쳐보면, 승희에 대한 모든 기사와 자료들이 정성스럽게 스크랩되어 있다.
옛 사진들을 천천히 넘겨보는데, 툭, 눈물이 떨어진다.
맨 마지막 장에 꽂힌 목걸이, 승희의 펜던트와 똑같은 반쪽짜리 날개 모양이다.
승희, 펜던트를 들어서 달빛에 비춰 보는데...

* 플래시 컷. 진아의 경기 영상에서 진아가 펜던트에 입 맞추던 모습

승희, 꾹꾹 눌러 왔던 슬픔이 끓어오른다.
울음을 참으려는데 자꾸만 새어 나온다. 결국 아이처럼 소리 내 우는 모습에서. (F.O)

S#69. 경기장 (오후)

‘제69회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낀다.

캐스터  국가대표 선발전과 함께 진행되는 제69회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
  잠시 후, 여자장대높이뛰기 예선전을 시작합니다.

트랙에서 몸 풀고 있는 출전 선수들 모습 보인다.
누워서 마인트 컨트롤 하고, 운동화 끈 조여 매고, 제자리에서 뛰며 몸 푸는 선수들.
나리, 스트레칭 하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초조하게 입구를 본다.
이때 턱! 가방 내려놓으며 트랙 안으로 들어오는 승희. 옷 벗으면, 안에 입은 출전복.

나리  (반가우면서 괜히) 도망간 줄 알았네. (살피며) 언니, 괜찮은 거야?
승희  (보더니 씩 웃는) 계속 반말한다?
나리  어차피 시청에 내 후배로 들어올 거 아냐? 운동 계속 할 거잖아.
승희  (따뜻하게 보는데)
나리  (시무룩해지며) 감독님 결국 안 오셨다.
승희  보고 계실거야. 그러니까 후회 없이 뛰자. (악수 청하면)
나리  (악수 하며 빙그레 웃는다)

S#70. 관중석 (오후)

관중석에 들어와 앉는 민혜, 기석, 준태.
준태, 응원 플랜카드와 커다란 북을 들고 있다.
그리고, 관중석으로 막 들어오는 진아의 발. 관중석 꼭대기에 선다.

S#71. 경기장 (오후)

나리, 출발선에 장대 들고 서 있다. 신호 떨어지면 숨 고른 후 뛰기 시작한다.
매끄러운 연결 동작으로 보기 좋게 가로대를 뛰어 넘는 나리. 성공이다!
관중들의 박수소리와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캐스터  최나리, 대단합니다! 4미터 15, 1차시기에 성공했습니다.
해설  개인 최고기록이죠? 무서운 상승세를 보이는 여자 장대의 샛별입니다.
  이신바예바 잡으러 갈 날, 머지않았어요!

나리, 기뻐하며 출발선으로 다시 뛰어 오는데.
승희, 제일 먼저 나가 나리와 하이파이브! 승희, 나리를 꼭 안아준다.

S#72. 관중석 (오후)

기석과 민혜, 잔뜩 긴장한 표정 짓는다.
준태, 플랜카드 들고 흔든다. [남승희! 니가 바로 장대여신] 요란하게 박혀 있다.

캐스터  대한체대 4학년 남승의 선수가 출발선에 섰습니다. 도전높이 4미터 20.
해설  4미터 20이면 본인이 보유한 최고기록인데요.
  저 선수가 최근 몇 년 계속 부진했단 말이죠. 아주 의외의 도전이에요.
캐스터  한때는 대한민국 육상계의 희망이었던 남승희 선수.
  오늘 이 경기를 재기의 발판으로 만들 수 있을 지! 기대가 모아집니다.

S#73. 경기장 (오후)

출발선에 선 승희, 진아의 목걸이를 목에 건다.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가 합쳐지며 비로소 하나의 날개가 되는 펜던트.
승희, 펜던트에 입 맞춘다. 가슴 위의 펜던트가 쨍! 햇살에 빛난다.
파우더 통에 손을 넣었다 뺀다. 거치대의 장대를 들어 올려 어깨에 걸친다.
출발 신호 떨어진다. 승희, 곧 달릴 것 같이 장대를 들고 앞을 본다.
가로대를 노려보는데, 유난히 더 높아 보인다. 승희, 흔들리는 표정.
부담이 큰 지 들었던 장대를 다시 어깨에 걸친다. 후... 눈 감고 호흡 정리하는데.

S#74. 관중석 (오후)

기석, 긴장한 승희를 알아보고 주먹 쥔다. 민혜, 차마 못보고 손 모아 기도하는데.
준태,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준태  (우렁차게) 남승희 힘내라!

준태, 힘차게 북을 치기 시작한다. 둥- 둥- 리듬에 맞춰 천천히 울려 퍼지는 북소리.
사람들이 북소리에 맞춰 하나, 둘,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S#75. 경기장 (오후)

승희, 여전히 괴롭게 눈 감고 있는데. 경기장을 가득 채우는 관중들의 박수소리.
승희, 천천히 눈을 뜬다. 이제껏 경기에 대한 압박으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 상기된 선수들의 몸에서 떨어지는 땀 한 방울
- 햇살이 쏟아지는 가로대 너머의 밝은 세상
- 박수로 응원해 주는 사람들
승희, 박수 소리에 맞춰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낀다.
모든 소리가 묵음처리 되며 자신의 심장소리와 숨소리만 들린다.
승희, 얼굴에 희미한 미소 떠오른다. 편안해진 표정으로 기합 한번 넣어본다.
장대를 세우고 가로대에 집중한다. 박수소리에 맞춰 뛰기 시작한다.

S#76.  관중석 (오후)

진아의 발부터 점점 위로 훑어 올라가는 카메라.

S#77. 경기장 (오후)

‘후...’ 숨소리와 함께 뛰는 승희의 모습 위로.

승희(NA) 수없이 많은 가로대를 뛰어 넘으면서도 나는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왜 가로대를 뛰어 넘는지. 당신이 왜 가로대를 뛰어 넘는지.
  하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저 높은 가로대를 뛰어 넘어, 당신과 만났으니까요.

S#78. 관중석 (오후)

진아의 가슴부터 점점 위로 훑어 올라가는 카메라.

S#79. 경기장 (오후)

‘후...’ 숨소리와 함께 뛰는 승희의 모습 위로.

승희(NA) 당신은 내 곁에 없지만 나는 당신을 느낍니다.
  지금 이 순간의 기억을 평생 간직하며
  앞으로 다가 올 어떤 인생도 물러서지 않고 살아내겠습니다.
  나는 지금, 당신에게 가고 있습니다.

승희, 폴박스에 장대를 꽂고 한 마리 새처럼 가로대를 뛰어 넘는다.
왼쪽 다리의 무게중심이 무너지며 가로대를 살짝 건드린다.

S#80. 관중석 (오후)

진아, 그 모습을 보며 활짝 웃는 얼굴. 울컥하며 눈시울이 붉어진다.
하지만 진아, 이번에도 돌아선다. 어린 시절, 승희를 떠나갈 때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관중석 밖으로 사라지는 진아의 뒷모습.

S#81. 경기장 (오후)

승희, 매트에 누운 채 눈 떠 보면 눈부신 햇살에 앞이 보이질 않는다.
여전히 두근두근 뛰는 심장. 처음 느껴보는 떨림에 상기된 얼굴의 승희.
햇살이 걷어지며 드러나는 가로대의 모습.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멈춘다.

S#82. 관중석 (오후)

기석, 민혜, 준태, 동시에 격렬하게 환호한다.
관중들의 엄청난 환호성이 폭발한다.

캐스터  남승희! 남승희! 4미터 20, 성공입니다! 이번 대회 최고 기록입니다!
해설  정말 칭찬하고 싶어요. 오랜 슬럼프를 이겨낸 남승희 선수! 훌륭합니다!

S#83. 경기장 (오후)

매트에서 일어난 승희, 지주에 그대로 걸려있는 가로대를 확인한다.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피어난다. 누구보다 밝게 활짝 웃는 승희.
벅찬 얼굴로 포효하듯 만세 부르는 모습에서. <엔딩>
        

















첨부파일 알젠타를_찾아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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