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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대본

[붉은 달] 유영석

작성자수다쟁이|작성시간17.07.19|조회수1,094 목록 댓글 0

[붉은 달] 유영석











   # 1. 창덕궁 근정전 (낮)

비가 내리고 있고 십여 개의 만장이 빗물을 휘날리며 펼쳐진다.
별다른 장식 없이 글씨만 써진 대나무에 걸린, 노랗고 붉은 만장.
근정전 지붕 위 용마루에 상투를 풀어헤친 내관 한명이 상복을 입고 걸터앉아 울부짖고 있다.

   자막(N) (자막) 1724년,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인 조선의 왕 경종대왕이
  배다른 동생인 영조가 바친 게장과 곶감을 먹고 사망하자,
  영조가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으로
  조선은 들끓었다.

   # 2. 한양 도성 대로 (낮)

낡고 더러운 도포를 입은 네 명의 선비가 굵은 빗줄기를 헤치며 달려온다.
각기 활과 칼을 들었고 허리춤에는 여분의 활과 환도를 찼다.
금군이 그 앞을 막아서지만 목숨을 건 네 선비는 활을 쏘고 금군을 베어내며 영조 탄 가마까지 달려온다. 가마 옆에서 만장이 휘날린다.

   자막(N) 장희빈과 그 아들 경종을 지지 했던 영호남의 선비와 유생들은
  영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수없는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조선은 노론과 소론, 남인들의 보복과 학살극으로 물들었다. 

빗속에 여기저기 상처를 입고 헐떡이는 네 명의 선비..
도포는 칼에 찢어져 맨살의 상처가 보이고 붉은 피가 흐르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다른 세 명의 선비가 다가오는 금군을 경계하는 사이, 선비1은 등에 찼던 등짐을 끌러 바닥에 펼친다. 그 속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도끼 한 자루가 같이 펼쳐진다.

   선비1  (우렁차다) 임금을 사칭하는 대역죄인은 나와서 목을 내 놓거라!
  선왕을 독살한 네놈의 목을 받으러 왔다!

가마 옆에 나와 서있는 어린 세자가 상복을 입은 채 비를 맞으며 공포에 질려 선비 일행을 본다.
가마에서 상복을 입은 영조가 천천히 나온다.
자막: 영조 (조선21대 왕)

   영조  (나오면서 당당히) 누가 그러던가? 내가 선왕을 죽였다고?
   선비 1 네놈이 게장과 단감을 바쳐 독살하였다는 건 영남과 호남이 다
  아는 일, 시치미를 떼려하느냐?

선비1, 바닥의 도끼를 집어 들고 영조에게 달려든다.
놀라 눈이 커지는 어린 세자
어린 세자의 얼굴에 핏물이 빗물과 섞여 뿌려진다.
영조는 담담히 칼을 뿌려 묻은 피를 털어내고 있다.
  
자막  영조는 피의 정쟁에서 자신의 아들인 세자선을 이용해서 빠져나오
  려고 했다.

   # 3. 창덕궁 길 (오후)

저녁 노을이 땅거미를 만들 즈음..
영조가 어린 세자선을 데리고 저승전으로 향하고 있다.
빠른 어른 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어린 세자선.
열 걸음쯤 앞서 가고 있는 상선이 ‘상감마마 납시요!’라는 벽제소리를 주기적으로 외친다. 산속에서 들리는 들개 소리와 함께 벽제소리는 아련하다.
어린 세자선은 불안한 눈망울로 사방을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다.
겁먹은 세자선이 숲속을 돌아보다가 돌부리에 채어 넘어진다.
따르던 궁녀가 황급히 어린 세자에게 달려온다.

   궁녀1 세자마마, 괜찮으시옵니까?

어린세자선의 이마가 찢어지고 손바닥이 까져 상처에서 피가 난다.

   영조  (매정히) 그냥 두어라!
   궁녀1 (안타까워) 상감마마..
   영조  (어린 세자선에게) 일어나거라!

씩씩하게 일어나는 어린 세자선, 급히 영조의 뒤를 쫓는다.
영조, 저승전 앞에 이르자 직접 커다란 나무 대문을 밀어 연다.
‘끼이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불길한 느낌의 저승전이 모습을 드러난다.
대문 뒤에는 한상궁이 각기 나인 둘을 데리고 마중을 나와 있다.

   한상궁 (예하며) 상감마마 납시었사옵니까?

어린 세자, 저승전을 바라본다.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근엄한 얼굴로 서 있는 한상궁

   # 4.  선희궁 (집복헌) (오후)

섬돌 위에 서서 채비를 하고 있는 선희궁.
지밀상궁이 선희궁의 신을 신겨 주고 있다.
자막 : 선희궁(영빈 이씨. 영조의 빈)

   선희궁 분명코 저승전으로 간다하였습니까?
   지밀상궁 예, 마마님..
   선희궁 세자도 함께요?
   지밀상궁 그러하옵니다.
 
이때, 선희궁 안에서 어린 화완옹주가 옷을 차려입고 뛰어 나온다.

   어린화완 어마마마,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지밀상궁 옹주 아기씨께서 가실 곳이 못 되옵니다.
   선희궁 (화완을 보고) 이리 오십시요. 함께 가십시다.
   지밀상궁 (만류하며) 마마님!
   선희궁 상감께서 옹주를 예뻐하시니 도움이 될 겝니다. 가십시다.

선희궁, 어린 화완의 손을 잡고 앞서 길을 나선다.
 
   # 5. 저승전 대청 (오후)

영조가 대청 가운데에 서있고 그 앞으로 어린 세자선이 부복하여 엎드려 있다.
대청 아래에는 선희궁이 무릎을 꿇고 읍소를 하는 중이다.
상궁들도 대청 아래에 도열해 있다.

   선희궁 이곳은 장희빈께서 사약을 받고 죽은 곳이옵니다. 어찌 이런 곳에
  조선국의 세자를 두려하십니까?
   영조  장희빈은 경종대왕을 이곳에서 키우셨소. 그 분들께서
  거처하시던 곳에서 세자를 키우는 게 무슨 잘못이라는 게요?
   선희궁 장희빈께옵서 그냥 범상하게 돌아가신 게 아니지 않사옵니까?
   영조  세상 사람들이 내가 경종대왕을 독살하고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고
  모함하외다. 내가 독살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길은 우리 세자를 경종대왕이 어린 시절을 보낸 이곳 저승전
  에서 키우는 것이오. (세자선에게) 세자는 이리로 오거라.

어린 세자선, 무릎으로 기어 영조의 곁으로 간다.

   영조  이는 너를 위하는 길일 뿐만 아니라 애비인 나를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 어찌 하겠느냐? 애비를 위해 어미 품을 떠나 이곳에서 살겠느
  냐?
   어린세자선 (우물쭈물.. 선희궁의 눈치를 보다) 부분대로 하겠사옵니다.
   영조  그래.. 장하구나.

영조, 세자선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온다.

   선희궁 (부복한 채 필사적으로) 어이하여 어린 세자를 어미의 품에서 떼어
  놓아 이 불길한 곳에 거처케 하신단 말이시옵니까?
   영조  (전각의 문을 닫으며) 그만 하시오. 이미 결정된 일이오.

이때, 어린 화환이 달려와 대청 아래 선희궁 옆에 함께 부복한다.

   화완  아바마마, 오라비가 불쌍하옵니다.

영조, 매정하게 전각의 문을 닫아 버리고 돌아선다.

   영조  선희궁과 옹주를 궁으로 뫼시도록 해라!
   선희궁 (울먹이며) 상감마마! 부디 하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 6. 저승전 대청 (실내, 밤)

어둠 속에 고요한 대청 마루..
어린 세자선은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흐느껴 울고 있다.
이때 마루바닥이 삐걱이면서 발자국이 다가온다.
놀라 어둠 저편을 보면 엄숙한 표정의 한상궁이 잠옷을 양손에 바쳐들고 걸어오고 있다.

   한상궁 주무실 시간이옵니다.
   어린세자선 (눈물을 훔치며) 알겠습니다.
   한상궁 세자저하께서는 돌아가신 경종대왕과 장희빈께옵서 쓰시던 방에
  머무시게 될 것이옵니다. 

한상궁, 몇 걸음을 걷다가 뒤를 돌아본다.
어린 세자선은 바닥에 앉아 있다가 한상궁이 돌아보자 체념한 듯 자리에서 쓸쓸히 일어선다.
세자선이 따라오자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한상궁.
세자선도 한상궁을 따라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삐걱거리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기분 나쁘다.
겁을 먹은 어린 세자선은 어두운 천장과 주변을 둘러본다.
마치 무엇이라도 금방 튀어나올 것만 같다.
따라가면서 한상궁의 옷자락을 꽉 쥔다.

   # 7. 저승전, 세자의 침소 (실내, 밤)

어둠 속 넓은 방안..가운데에 요를 깔고 누워 있는 어린 세자선.
천정의 격자무늬와 단청들.. 문갑의 나비문양들.. 모든 것이 괴이롭게만 보인다.
구석 어둠 속에 뭔가가 있다. 어린 세자 자세히 보면 웅크리고 앉아있는 소년이다.
세자선 침을 삼킨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더러운 몰골의 더벅머리 소년의 눈빛이 빛난다. 흰이빨만을 드러내며 희죽 웃는다.
겁에 질린 어린 세자는 두 눈을 꼭 감는다. 조심스럽게 슬며시 뜨면 더벅머리 소년이 사라졌다.
이때 어디선가 동굴 속을 울리는 듣한 청명한 물방울 소리가 규칙적으로 난다.
잔뜩 긴장하는 어린세자선.. 감히 물방울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지 못하고 벽 쪽으로 슬며시 돌아눕는다.
마루바닥을 울리는 미세한 삐걱임.. 어린 세자는 침을 삼키고 용기를 내서 곁눈질로 뒤를 돌아본다.
우아한 중년여인이 물을 흠뻑 젖은 채 반대편에 앉아서 고개를 숙인채 수를 놓고 있다. 그 옆에는 더벅머리를 한 더러운 몰골의 소년이 서 있다.
어린 세자는 겁이 나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는다.
이때 이불 속에 뭔가가 있다.
눈을 부릅뜨고 어린 세자를 노려보는 시체 한구. 씬2에서 영조가 죽인 선비1이다.
어린 세자 놀라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켜 비명을 지른다.
마치 방금 피를 흘리는 듯 피는 점점 이불로 퍼지며 어느새 흥건히 흠뻑 젖는다. 넘어져 있는 어린 세자가 있는 방바닥까지 흘러드는 핏물.. 손을 치우지만 어느새 어린세자의 손에도 피가 잔뜩 묻었다. 피 묻은 손을 보며 당황하는 어린 세자..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 유쾌하게 웃는 중년여인의 웃음 소리.
어린 세자 고개를 들어보면, 여인은 더벅머리 소년의 손을 잡고 어린 세자의 앞에 와서 허리를 굽혀 내려보며 서 있다. 갑자기 터지는 고주파의 이명음, 어린 세자선 귀를 막는다. 여인의 눈은 충혈 되어 붉은 눈에 검은 눈동자만이 괴이롭다.
여인의 눈에서 흐르는 피눈물이 흘러 어린 세자에 떨어진다. .. 
이내 어린세자, 비명을 지르며 여인을 피해 정신없이 도망친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문을 필사적으로 두드린다.

어린세자 어마마마! 아바마마! 살려주십시요! 어마마마! 제발!
 
   # 8. 저승전 외경 (밤)

저승전의 불길한 외경
전각 위로 붉은 달이 떠 있다.

   # 9. 창덕궁 안 (새벽)

자막 ‘17년 후’
막 여명이 터오는 새벽길에 노오란 등롱을 든 관리 한명이 황급히 전각들 사이를 달려가고 있는 부감.
관리는 넘어질듯 하며 급하게 달리고 있다.
세자시강원의 주서 이광현이다.

   # 10. 화완 침소 (새벽, 실내)

광현이 침소의 문 앞에 부복하여 엎드려 있다.

   화완E 신새벽에 무슨 일이더냐?
   광현  춘방 주서 이광현이옵니다 세자저하께옵서 옹주마마를 찾으십니다.

   # 11.  화완 침소 (새벽, 실내)

흰 속옷차림의 화완이 면경대 앞에 앉아 있다.
희정, 앞에는 의복을 가지런히 펼쳐 놓고 머리를 올려준다
자막 : 화완옹주 (영조의 딸)

   화완  (문밖에) 무슨 일인데 지금 말을 못하고 가야만 한다는 게냐?
   광현E 입에 담기 어려운 흉폭한 변고이온지라 직접 오시어야 한다고 세자
  저하께서 당부하셨사옵나이다.

화완, 펼쳐진 의복을 직접 입는다.

   희정  (놀라) 옥수를 거동치 마시오서 제가 하겠사옵니다.
   화완  급하다니 어서 가보자.

의복을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화완.

   # 12. 창덕궁 (새벽)

등롱을 든 광현이 앞서서 빠르게 걷고 있고
그 뒤를 화완과 희정이 따라 가고 있다. 
  
   # 13. 저승전 안, 침소 (아침, 실내)

세자선의 침상(침대)에 내관의 시체 한구가 이불 속에 가지런히 눕혀있다. 
칼로 난자당해 이불은 온통 피로 흥건하다.
그 모습을 화완이 놀란 표정으로 내려 보고 있고
조금 떨어져서 광현과 희정이 안절부절하며 서 있다.
세자선은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 쥐고 침상에 걸터앉아 있다.
자막 : 세자 이선 (영조의 아들)

   화완  오라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옵니까?
   세자선 나도 잘 모르겠다.
   화완  (떨리고 당황스럽다) 누가 감히 조선국 세자의 침상에 이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세자선 ............모르겠다.
   화완  죽은 자는 혹여 아시는 자이옵니까?
   광현  (감히 끼어들며) 동궁전의 내관이옵니다.

화완, 조심스럽게 이불보를 들춰 본다. 보기가 끔찍한 듯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린다.
멀리서 묘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광현, 안절부절하며 밖을 내다본다.

   광현  묘시를 알리는 종소리이옵니다. 곧 세자빈 마마께옵서 세손을
  데리고 문안을 올 것이옵니다.
   희정  (광현을 책망하며 낮게) 그걸 지금 말하시면 어떡해요?
   광현  (낮게 희정에게) 그러니 진작에 급한 일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화완  (잠시 생각) 일단 이 흉측한 시체를 치우자. 나는 세자를 돌볼
  터이니 너희들은 이걸 끌어내서 어디로든 숨겨보도록 해라.
   희정  예, 마마님

   # 14. 저승전 앞 (아침)

광현과 희정이 흰 이불보에 싼 시체를 마당으로 힘겹게 끌어내리고 있다.
흰 보는 이미 피로 붉게 적시어져 있다.

   광현  (멈춰서고) 잠시 쉬었다 갑시다. 엄청 무겁네..
   희정  쉬긴 뭘 쉬어요. 빨리 가요. 주서님이 급하다 하시고선..

희정의 재촉에 다시 시체를 옮기는 광현.

   # 15. 저승전 대청 (아침, 실내)

화완이 이불보를 걷어내, 엎드려서 피가 묻은 바닥을 닦아내고 있다.
탁자에는 세자선이 굳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앉아 있고...

   화완  (흔적을 치우며) 정신을 바짝 차리셔야 합니다. 오전에는 시민당에
  서 차대를 하고, 오후에는 국문장에 간다하였사옵니다. 아바마마
  앞에서 절대 정신줄을 놓지 마시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하셔야
  합니다.

세자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다.

   화완  (엎드린 채 돌아보며) 어디를 가시려고 그러합니까?
   세자선 (마음이 어지럽다) 누구 짓인지 알아내야 하지 않겠느냐?
   화완  신새벽에 지금 어딜 가서 알아낸다는 겝니까?
   세자선 금군을 불러야 겠다.
   화완  (일어나며) 큰일 날 소리옵니다. 금군을 부르면 아마바바께서 알게
  되시고 아바마마께서 알게 되시면 필경 더 큰 사단이 날 겝니다.

   # 16. 저승전 밖 (아침)

멀리 세자선의 아내인 혜경궁과 세손이 나인과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광현과 희정은 시체를 놓고 난감하다. 희정, 문득 굴뚝 아궁이를 보고

   희정  저리로 숨어요.
   광현  (시체 한쪽을 들고 엉거주춤 딸려가며) 어어... 천천히 가시오..

두 사람, 시체를 끌고 굴뚝 아궁이로 간다.

   # 17.  굴뚝 안 (아침)

시체를 고래 속으로 밀어놓고 숨는 희정과 광현
굴뚝 철문 밖으로 혜경궁 일행의 발이 보인다.

   광현  세자....

희정이 광현의 입을 손바닥으로 콱 막는다. 조용히 하라는 손가락 신호..
광현, 숨을 못 쉬고 버둥거리자.. 희정은 한심한 듯 등짝을 때리고...
조용히 철문을 닫는다.

   # 18. 선희궁 후원 (낮)

꽃이 만발한 후원을 선희궁과 화완이 나인들을 대동하고 걷고 있다.
옆으로 커다란 연못이 있다.
희정 만이 궤(几, 접의식 의자)를 들고 두 사람을 바짝 쫓고 있고 다른 내관과 궁녀들은 말소리를 들 수 없을 정도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선희궁 (놀라) 세자는, 세자께서는 놀라지 않았습니까?
   화완  괴변이니 놀라셨지만 당당이 참으셨사옵니다.
   선희궁 세자가 어릴 때부터 심약하여 버틸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세자의 침상에 시체를 넣다니.. 누구의 짓인지는 알아냈습니까?
   화완  숙의 문씨네 성국이놈 아니면 정순왕후네 김한구 둘 중의 하나
  짓이지 않겠습니까?
   선희궁 당파들의 짓은 아닐 듯 합니까?
   화완  당쟁을 하더라도 대통의 씨앗이 있어야 할 것이니 궁궐 내부
  에 있는 자들의 소행인듯 하옵니다.
   선희궁 (근심이다) 내 출신이 천하여 옹주나 세자에게 아무런 배경이
  되어주질 못합니다. 변변한 외척 하나 없으니.. 다 내 부덕입니다.
   화완  그야 어마마마께서 자애롭고 선하시어 그런 것이지, 어찌 출신의
  문제이겠습니까?
   선희궁 가엽은 세자.. (화완의 손을 잡고)내 세자를 보고 싶으니 임금께서
  자리를 비우신 틈을 타 옹주가 좀 데려올 수 있겠습니까?
   화완  조만간 그리 하겠습니다. (희정에게) 희정아...

희정, 궤(几)를 펼친다. 화완의 손을 잡고 힘겹게 궤에 앉는 선희궁.

   선희궁 (연못을 보며, 근심) 어찌 세자의 침소에 그런 흉측한 시체를
  넣을 생각을 했을고....(한숨)

   # 19.  창덕궁 저승전 마당 (밤)

   벽제소리 (아련히) 훠-이, 상감마마 납시오. 훠-이, 상감마마 납시오.

상선과 내관 하나가 ‘끼이익’ 거리는 저승전의 문을 연다.
영조가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선다.

   # 20. 저승전 안, 대청 (밤, 실내)

영조가 들어서고 있고 세자선이 황급히 부복하여 있다.
문 쪽으로 내관들이 서 있다.
영조, 저승전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탁자에 앉는다.

   영조  이제 동궁에 있어도 될 터인데.. 아직도 이곳 저승전에 있는 건
  무슨 연유이더냐?
   세자선 (떨며) 아바마마의 뜻을 받자와 어린 시절부터 이곳에 머물
  렀더니 여기가 마음이 편하옵니다.
   영조  그래도 세손과 세자빈이 동궁에 있는데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 예법에 맞지 않겠느냐.
   세자선 곧 그리 하겠사옵니다.

세자선, 엎드려 마루바닥을 보면 손을 짚고 있는 바로 앞에 핏자국이 보인다.
당황한 세자선, 영조가 볼까 슬며시 손으로 핏자국을 가린다.

   영조  (탁자 위의 책을 집어 들고) 그래 요즘은 무슨 책을
  보고 배우는가?

세자선, 핏자국을 손으로 가렸는데 손바닥 아래로 흥건히 핏물이 흘러나온다.
당황하는 세자선, 몰래 영조를 보지만 영조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영조  (표지를 보고) 옥추경이라..... 처음 보는데..
   세자선 그건 그냥 소일거리로...놓아둔 것이옵니다
   영조  (대청 앞의 상선에게) 내관, 경전 중에 옥추경이란 책을 아는가?
   상선  (당황하여 어물..) 도....도교의 경전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조  도교의 경전이라... (선에게) 무슨 내용이더냐?

세자선, 손바닥을 닦아내 핏자국을 다시 가려보지만 여전히 핏물이 흥건히 배어 올라온다. 핏자국에 정신이 팔려 대답하지 못한다.
영조의 심기가 슬슬 불편하다.

   영조  (상선에게) 이 도교의 경전이라는 책의 내용이 무엇이더냐?
   상선  (우물거리다가) 귀.......귀신에 대한 책인 줄 아옵니다.
   영조  (화가 치밀지만 참으며) 귀신이라.. 그래 귀신의 무엇에 대한 적혀
  있느냐?
   상선  귀신을 불러 모아 부리는 주문의 내용이 적혀 있는 줄 아옵니다
   영조  (옥추경을 세자선에게 집어던지고) 이것이 조선국 세자의 소일거리
  더냐!

옥추경의 낱장 쪽이 떨어져 나가며 세자선의 몸에 던져진다.

   영조  못난 놈! 아들이라 보러온 내 잘못이다! (일어서며) 가자!

영조가 떠나자 손바닥 사이로 올라오던 핏물이 사라져버린다.
손바닥을 떼보면 핏자국도 사라졌다. 떨면서 주먹을 움켜쥐는 세자선..
깊은 숨을 내쉰다.

   세자선 (탄식) 어찌해야 하는가..

   # 21. 선희궁의 침소 (밤, 실내)

누워있던 선희궁, 이마를 짚으며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는다.

   선희궁 엄상궁! 밖에 있습니까?

미닫이 문이 열리면서 무릎을 꿇고 있는 지밀상궁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밀상궁 마마님, 부르셨사옵니까?
   선희궁 아무래도 세자에게 가봐야겠소. 채비를 좀 해 주시게.
   지밀상궁 시간이 늦었사오니 내일 가시는 게...
   선희궁 아니네. 심기가 불안하여 잠을 이룰 수 없으니 지금 가봐야 하겠네.

   # 22. 저승전 안, 침소 (밤, 실내)

세자선이 마룻바닥에 종이를 펼쳐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방금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뇌성보화천존’(옥추경에 나오는 뇌우의 신)이다.
아주 고요한 공간. 어디선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세자선, 경계한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하지만 식은땀이 흐른다.
세자의 귀밑으로 식은땀이 흐르고 고요한 공간을 울리는 고주파의 이명음..
세자의 입주위가 자신도 모르게 실룩거린다. 바로 잡으려 노력하지만 멈추지 않는 근육의 떨림.. 마치 물속에 들어간 듯 이명음 속에서도 여전한 물방울소리..
붓에서 떨어진 먹이 종이에 떨어져 붉은 핏빛으로 바뀐다.
천장에서 벽으로 잿빛의 기운이 흑백처럼 퍼져 흘러내린다.
세자선, 영조가 던져 쪽이 떨어져 나간 옥추경을 황급히 주워 수습한다.
옥추경 속의 부적들을 찢어서 황급히 옷 속에 마구 우겨넣으며 주문을 외운다. 

   세자선 (당황하고 긴장하며) 청조는 발령..... 대체 이 일은 언제 끝나려는  가.. 제발........ 천상신장 대장신 지하신장 대장신 오방신장 대장신
  사해신장 대장신 갑진신장 대장신 갑오신장 대장신 갑신신장
  대장신 을유신장 대장신 육병신장 대장신........

세자선의 반대편 떨어진 곳 보료 위에 물에 젖은 중년의 여인이 앉아서 면경대를 보며 얼굴을 매만지고 있다. 여인의 등 뒤에는 더러운 몰골의 더벅머리 소년(두억시니)이 서 있다.
세자선은 옥추경의 부적을 품에 품은 채 감히 숨이 막혀 미동조차 못하고 여인을 지켜본다. 더벅머리 소년의 얼굴을 보면 어린 세자선이다.
소년의 얼굴에 정신을 팔린 사이 눈앞에 뭔가가 있어 고개를 들어보면 중년여인이 허리를 구부려 세자선을 내려다 보고 있다. 7씬의 데자뷰와 같은 상황.
여인의 눈이 검은 동자를 제외하고 핏빛으로 변하며 피눈물이 흘러 세자선에게 떨어진다.
온몸이 굳어 사시나무 떨듯하던 세자선은 정신이 번쩍 든다. 구석으로 도망쳐 황급히 환도를 찾아 뽑아들고 여인에게 겨눈다.

   세자선 (겁에 질려) 너는 누구더냐? 이 요망한 것! 누구냐? 나를 죽이려는
  게냐!

여인, 말없이 돌아서  더벅머리 소년의 손을 잡고 복도로 나선다.
세자선, 칼로 치려하지만 이미 복도로 나가 헛손질이다

   # 23. 저승전 복도 (밤, 실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을 박차 부수고 세자선이 나온다.
세자선을 기다렸다는 듯 여인은 한번 돌아보고는 서서히 복도를 걷는다.
있는 힘껏 환도를 휘두르며 여인에게 덤비지만 여인에게 닿지 못한다.

   세자선 (여인을 쫓아가며) 거기 서라! 요망한 것! 거기 서라!

어느새 복도 끝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여인.
여인의 손을 잡고 가는 더벅머리 소년,
세자선, 환도를 휘두르며 여인의 뒤를 쫓는다.

   # 24. 창덕궁, 저승전 인근 (밤)

지밀상궁과 길을 걷고 있는 선희궁.
지밀상궁이 불을 밝히고 있다.

   선희궁 저승전에 가본지 얼마나 되었소?
   지밀상궁 장희빈께옵서 승하하시고 마마님과 함께 나왔으니 족히 수십년은
  된 듯 하옵니다.
   선희궁 세자를 그곳에 두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 불길한 곳에.... 누명을
  벗겠다는 상감마마와 저의 욕심이 과했습니다.

지밀상궁, 갑자기 발길을 멈추고 우뚝 선다. 놀란 모습.

   선희궁 왜 그러시오?
   지밀상궁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마마님, 저기..
   선희궁 저게 무엇입니까?

어둠속에 왠 사내가 한손에는 환도를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여자시체의 팔을 잡아끌고 저승전으로 가고 있다.
축 늘어져 남자의 한손에 끌려가는 여자의 시체..
지밀상궁, 등롱의 불을 황급히 끈다.

   지밀상궁 (다급하고 낮게) 송구하오나 아무래도 세자 저하인듯 싶습니다.
   선희궁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겝니까? 저게 세자라니요?

마음이 급한 선희궁, 지밀상궁이 말리려는데 황급히 남자가 들어간 저승전을 향해 걸어간다.

   # 25. 저승전 대청 (밤, 실내)

어둠 속이지만 열려진 문으로 대청마루가 보인다.
여자의 시체를 좌탁에 앉혀놓고 머리를 빗겨주고 있는 세자선.

   세자선 이리 더러운 몰골을 하고서 어찌 조선국본의 침상에 누으려느냐?

복도 구석에서 선희궁은 놀라 서있을 뿐이다.
이내 지밀상궁이 선희궁의 허리를 부여잡고 어둠 속으로 피신시킨다.

   지밀상궁 (앞을 가로 막으며) 마마님, 보지 마시옵소서.
   선희궁 지금.......세자가....무엇을 하는게요? 분명코 세자가 맞습니까?

세자선, 여자시체의 한 팔을 잡아끌고 침소로 간다.

   # 26. 저승전 전경 (아침)

   # 27. 저승전 침소 (아침)

화완과 희정, 광현이 세자선의 침상을 내려 보고 있다.
침상에는 여자의 시체가 가지런히 누워있고
세자선은 침상에 걸터앉아 있다.

   화완  (당황) 어찌 주무셨길래 이 사단이 난 걸 또 모르셨단 말씀입니까?
   세자선 모르겠다....시체부터 치워 다오...
   화완  제가 기필코 이 사단의 뒷배를 찾아낼터이니 오라버니는 너무 심려
  치 마십시요.(희정과 광현에게) 세자빈이 문안을 오기 전에 어서
  시체를 숨기거라.
   세자선 ...........
   화완  (곁에 앉아 손을 잡아주고) 앞으로는 제가 옆에서 자면서
  지키겠습니다.

   # 28. 저승전 대청 (아침)

정체모를 여인의 시체를 보에 싸서 끌고 가는 광현과 희정.

광현  (나름 추리) 맞아죽었거나 독살인듯 싶소.
희정  포도대장도 아닌 분이 걸 어찌 아신데요?
광현  피가 없지 않소. 그러니... (시체가 이불보에서 빠지려고 한다)
  어..어..
희정  잘 들기나 해요!
 
화완이 급히 삐져나온 팔을 안으로 넣는다
혜경궁, 두명의 내관과 나인 한명을 대동하고 어느샌가 대청 앞 섬돌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혜경궁 존귀하신 옥수로 뭘 하시는 겝니까?
   화완  (놀라 혜경궁을 바라본다)
   혜경궁 (놀란 빛이 없이 내관에게) 뭘 하느냐? 도와 드리거라.

내관들, 성큼 올라가서 광현과 희정에게 시체를 받아들고 익숙하게 나온다.

   혜경궁 (앞을 지날 때) 잠깐, 얼굴을 보이거라

혜경궁, 시체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쉰다.

   화완  (조심스럽게) 아시는 얼굴이옵니까?
   혜경궁 빙애입니다.
   화완  빙애라면 아바마마의 곁에 있다 동궁으로 온 나인 아닙니까?
   혜경궁 (내관들에게 의미있게) 하던 대로 처리해라
   화완  이런 일이 또 있었습니까?
   혜경궁 따라오시겠습니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혜경궁 시체를 든 내관과 저승전을 나선다.
황망히 대청에 서서 영문을 모르고 쳐다보는 화완과 희정, 광현.
광현, 촐랑거리며 따라가려는 데 희정이 책망하듯 눈치 주며 옷깃을 잡는다.

   # 29. 궁궐 북쪽 요금문(曜金門) (낮)

내관 둘이 시체를 매고 와서 요금문 밖으로 나와 계곡과 같은 가파른 비탈에 굴려 버린다. 화완과 혜경궁도 따라왔다.
화완, 문 밖을 보면 숲풀에 가려져 있지만 유심히 보면 수십 구의 시체가 거적이나 보에 쌓여져 가파른 비탈 언덕 여기저기에 굴려 버려져 있다.

   화완  (놀라) 저 많은 시체가 궁궐 안에서 나온 것입니까?
   혜경궁 (돌아서며) 궁궐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삽니다. (내관들에게) 가자!

   # 30. 동궁전 후원 정자 (낮)

넓은 동궁전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하고 사람이 없다.
화완, 혜경궁을 따라 후원 정자에 앉는다. 탁자에는 다기상이 준비되어 있다.
전각 모퉁이에서 어린 나인한명이 화완을 숨어서 지켜보다가 화완과 눈이 마주치자 다른 나인 한명이 황급히 데리고 숨는다.

   화완  동궁전은 참으로 한적하고 조용하군요. 나인과 내관들은 모두
  세자를 따라 저승전으로 갔습니까?
   혜경궁 (씁쓸히) 궁인들이 많이 그만 두어서 지금 다시 사람을 뽑는 중입
  니다
   화완  세자저하의 침상에 던져진 괴이한 변고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요.
   혜경궁 (화완의 얼굴을 보며 잠시 망설인다. 이윽고) 귀신의 짓이옵니다.
   화완  어찌 귀신이 산사람을 죽여 옮긴다 하시는 것입니까?
   혜경궁 (차를 마시고 놓으며) 세자께서 어릴적 나고 자란 저승전에 가셔야
  마음이 풀리신다 하시어 그곳에 잠시 거처하십니다. 허나 거긴 희빈
  장씨의 저주가 걸려있는 곳입니다.
   화완  세자빈께서도 여인네들이나 하는 한담을 믿으시는 겝니까?
   혜경궁 보셨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사실입니다. 귀신의 짓입니다.
  (눈빛에 슬픔이 어리고) 옹주 밖에 없습니다. 세자를 귀신에게서
  찾아올 길은 옹주 밖에 없습니다. 옹주께서 조선의 국본을 지켜주셔
  야 합니다
   화완  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귀신의 짓이랬다가 제가 지킬 수
  있다니요.
   혜경궁 (한숨 화완의 손을 잡고) 죽은 빙애는 대비전의 나인이었으니 상감
  마마께서도 아시게 될 것이옵니다. 허면 옹주께서 도와주십시요.

   # 31. 창덕궁, 요금문 (낮)

평복에 장옷을 쓴 여인 두 명이 마대자루와 삽을 들고 요금문을 나서고 있다.
스쳐지나갈 때 얼굴을 보면 평민으로 변복을 한 선희궁과 나이든 지밀상궁이다.

   # 32. 창덕궁 요금문 밖 (낮)

수십 구의 시체가 거적이나 보에 쌓여 버려져 있는 골짜기..
지밀상궁과 선희궁이 힘겨워하면서 풀숲을 헤치고 시체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다.
냄새가 지독하여 복면을 했다.
멀리 요금문에서 화완과 희정, 광현이 달려온다.

   화완  어마마마! 지금 뭘 하시는 것이옵니까?
   선희궁 (시체를 확인하며) 빙애의 시체를 무엇에 싸서 버렸습니까?
   화완  흉악한 시체는 뭣 때문에 그러십니까?
   선희궁 빙애는 대전 나인이었기에 임금께서 동궁에 오시면 꼭 찾는 아이입
  니다. 임금이 아시는 날엔 큰 경을 치게 될 겝니다. 반드시 흔적을
  없애야 합니다.
   화완  오라버니가 죽인 것도 아닌데 어찌 그러십니까?
   선희궁 나는 양반출신이 아니라서 자세한 건 모르나 세자의 자리가 작은
  빌미만 있어도 해침을 당할 수 있습니다. 허니 꼭 없애야 합니다.
   지밀상궁 (떨어진 곳에서) 마마님! 찾았습니다!

선희궁, 황급히 늙은 상궁에게도 간다. 뒤를 따르는 화완과 희정.
선희궁, 흰 천을 맨손으로 걷어내 얼굴을 확인한다.

   # 33. 창덕궁 뒷산 (낮)

일행들이 자루에 담은 빙애의 시체를 낑낑거리며 산 속으로 옮기고 있다.
자꾸 발이 미끄러져 아래로 밀려나는 선희궁. 이를 악 다물고 직접 시체를 옮긴다.

   # 34. 창덕궁 뒷산 속 (저녁)

해가 질 무렵의 산속.
삽으로 구덩이를 파고 있는 광현과 희정.
조금 떨어진 곳에 선희궁이 힘겨운 듯 궤(几)에 앉아있고 지밀상궁이 땀을 닦아주며 보좌하고 있다. 그 옆에서 화완이 서서 구덩이 파는 것을 본다.

   희정  (땅파기 힘들다) 허리 끊어지겠네. 꼭 이렇게 까지 해야 한대요?
   광현  우리 같은 일반 사람도 아니고 빙애님은 대비전에서 상감마마 총애
  를 받던 분이신데.. 임금님께옵서 안 찾겠어요? 흔적을 완전히 없애
  야지.
   희정  (다시 땅을 파며 불평) 세자저하께서 죽이신 것도 아닌데.. 이실직고
  하면 되죠.. 
   광현  (땅 파며.. 나름 의미 있게) 글쎄.. 그야 모르는 거죠..
   희정  (빼꼬롬 쳐다보며) 뭘 몰라요?
   광현  (남자답게 삽을 땅을 꽂아 세우고) 희정 나인은 내가 꼭 지켜주리
  다!
   희정  (위 아래로 흘기고) 시덥지 않긴.. 주서님 몸이나 지켜요.

(cut to)
어둑 어둑해 진 산속, 구덩이에 불을 질렀다.
불길을 바라보고 있는 선희궁과 일행들...

   화완  어머님께서는 진정 저승전에 장희대빈의 저주가 얽혔다고
  믿으십니까?
   선희궁 만물천하명월주인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화완  그것은 조선국의 임금을 뜻하는 것이잖습니까.
   선희궁 예로부터 조선국의 임금은 만천하를 비추는 달의 주인이라고 했지
  요. 장희대빈은 그 달을 저주받은 붉은달로 만들겠다 했습니다.
   화완  설마요.

선희궁, 구덩이 속이 불을 보며 회한에 잠긴다.

   # 35. 저승전 침소 (인써트)

씬 #7과 같은 장소다.
어린 세자선이 두려움에 떨며 엎드려 앉아서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
어린 세자선 쪽을 향해 앉은 여인, 손을 떨며 사발에 있는 사약을 마신다.

   선희궁(E) 저승전에 신당을 차려 조선국과 후대의 임금이 될 분들에게 저주를
  걸었습니다. 사약을 마시고 죽는 순간까지도 피를 뿜어내 주술을 건
  겝니다. 

피를 뿜어내는 여인(장희빈).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어린 세자선을 향해 기어온다.
여인이 뿜어낸 각혈의 파편이 어린 세자선의 얼굴에 점점이 튄다.
힘겹게 일어서는 여인, 허리를 구부려 세자선을 본다.
눈빛이 붉게 변하며 피눈물이 흐른다.

   여인  (치를 떨며) 내.... 나와 내 내 아들을 죽인 조선 왕족 사내놈의
  씨를 말리리라.

잿빛의 기운이 천장에서 벽으로 흐른다.
고주파 이명음과 함께 여인과 어린 세자선을 중심으로 시점이 서서히 돌자 어느새 공간은 지하 안가의 토굴 속으로 변했다. 그리고 여인은 그대로이지만 피눈물을 흘리는 여인을 보고 있는 것은 성인이 된 세자선이다.
칠성판이 올려진 여섯 개의 관 사이에 여인이 내려보고 있고 공포의 눈으로 여인을 보고 있는 세자선. 입술 주변을 씰룩거린다.

   화완(E) 장희대빈의 침소는 저승전의 소주방으로 만들었고 신당은 없앴습니
  다. 그런 주술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36. 창덕궁 뒷산 속(저녁)

   선희궁 임금께서 황형인 경종대왕의 기가 서린 곳에서 세자를 키우겠다
  욕심을 내셨습니다. 그게 이 사단의 시작입니다. 
 
   # 37.  저승전 마당 (낮)

영조가 금군 몇과 상선, 대신들을 대동하고 저승전 앞마당에 서 있다.
세자시강원 강관들도 함께 끌려왔다. 그 속에 이광현도 보인다.
세자선은 조금 떨어져 벌벌 떨면서 부복해 있다. 선희궁은 조마조마하다.
영조는 환도를 뽑아들고 있다.

   영조  세자, 네 놈이 빙애를 죽였다는 말이 사실이더냐?
   화완  아바마마 아니옵니다. 오라비가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영조  (칼로 바닥을 두들기며) 네 놈 입으로 말해 보거라. 내놈이 빙애를
  죽였느냐 죽이지 않았느냐!
   세자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죽이지 않았사옵니다.
   영조  그러면 지금 빙애는 어디있느냐? 당장 대령시키거라.
   화완  오라비가 죽이진 않았사오나 죽기는 죽었사옵니다.
   영조  그게 무슨 말이더냐? 죽었는데 죽이지 않았다니!
   화완  시체가 나왔으나 오라비의 짓이 아니옵고 아직 누가 그랬는지 모르
  옵니다.

영조, 칼을 집어던지고 금군이 가지고 있던 활을 뽑아든다.
집어던진 칼소리에 놀라 벌벌 떨고만 있는 세자선.
영조, 활시위를 잡아당긴다.

   영조  궁궐 안에 그런 미친 짓을 할 놈이 저 놈 말고 또 누가 있느냐?
  낮밤이 바뀌어서 도깨비처럼 사는 놈이 이 궁궐 안에 저 놈말고
  또 누가 있느냐? 귀신 따위에 홀려서 제 정신이 아닌 것이 저 놈
  말고 또 누가 있느냐? 하라는 공부는 팽개치고 잡서에 빠진 놈이
  저 놈 하나이지 않으냐!
   화완  아바마마 고정 하시어요. 정녕 오라비를 죽이실 작정이시옵니까?

영조, 분노에 차서 시위를 당긴 눈을 부릅뜬다.
고개를 든 세자선과 눈이 마주친다. 공포에 벌벌 떨고 있는 세자선.
이때 화살이 시위를 떠난다.
일동 다들 놀란다.
화살은 세자선 머리의 관자를 부수고 뒤쪽 사립문 하단에 가서 박힌다.
세자선의 이마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세자선, 귀밑의 피를 손으로 훑어보고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만다.

   영조  (활을 내 던지며) 저놈 정신를 차리게 해라. 내일 국문을 할 것이다.   저놈의 짓이라면 내 반드시 능지처참을 할 것이다!

영조, 밖으로 나가버린다. 일행들 급히 영조의 뒤를 쫓는다.
화완과 광현, 급히 세자선에게 달려간다. 

   # 38. 동궁전 안 (밤, 실내)

촛대로 불을 밝힌 동궁전 안.
앞섬을 풀어헤친 세자선이 책상 앞에 앉아서 멍한 표정으로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다. 광현이 한쪽에 서 있지만 감히 이야기를 걸지 못한다.

   세자선 (이윽고) 아바마마는 내 머리를 겨냥하시었다.
   광현  세자저하 아니옵니다. 상감마마께옵서는 그저 겁만 주려고 하신 것
  이 옵니다.
   세자선 그것이 아니다. 내 머리를 겨냥하셨으나 내가 움직여 빗나간 것이
  다. 언제나 그러했다. 언제나.. 아바마마는 나를 죽이고자 하셨다.
     아바마마는 내 모든 걸 미워하셨다. 공부가 성에 안차면 의지가
  박약하다 하시고.. 밥을 먹으면 미욱스럽다 하시고. 심지어는 내가
  숨을 쉬는 것까지 미워하시어 곁에서 밀어내셨다.
  오늘 분명코 임금께서는 나를 죽이려고 하신 게다!
   광현  세자저하 아니옵니다. 오해이옵니다.
   세자선 (벌떡 일어서며) 세손은 어딨느냐?
   광현  갑자기 세손저하는 왜 찾으시옵니까?
   세자선 (나가며) 세손을.. 세손을 만나야 겠다.

   # 39. 동궁전 안 세손의 거처 (밤, 실내)

세자선, 문갑을 왜 열어젖히며 미친 듯이 뭔가를 찾고 있다.
어린세손은 영문을 몰라 불안한 눈망울로 한 구석에 서 있다.
이때 혜경궁이 안으로 들어온다.

   혜경궁 저하, 무얼 하시는 겝니까?
   세자선 (집히는 대로 집어던지고 뒤지며) 휘항을 찾는다. 세손의 휘항은
  어딨느냐?
   혜경궁 염천 더위에 세손의 휘항은 어찌 찾으십니까?
   세자선 필경 아바마마께서 날 죽이실 게다. 그래도 세손 만은 예뻐하시니
  세손의 휘항을  쓰고 나가 학질에 걸렸다 할 것이다. 세손의 휘항을
  보면 절대 나를 죽이지 않으실게다! 당장..당장 세손의 휘항을
  내 놓거라!
   혜경궁 고정하십시요. 상감마마께서는 저하를 죽이지 않사옵니다!

혜경이 다가와 앉아 세자선의 팔을 잡고 말리자 일어서며 혜경궁을 내동댕이 친다.

   세자선 내 그간 아바마마에게 당한 꼴을 니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세손  (혜경궁 옆에 부복하고) 아바마마, 고정하시옵소서!

세자선, 세손의 보료 옆에 찡겨져 있는 휘항을 발견했다. 황급히 돌아가려는데 세손이 얄밉고 거추장스럽다.

세자선  비켜라 이놈! 지 할아비를 닮은놈! 내가 죽으면 모두 네 놈 때문이
  다!

   # 40. 휘령전 안 (낮)

선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가 향을 피우고 위패 앞에 공손히 읍을 하고 있다.
손바닥으로 박수를 세 번 치고 한 번 더 공수를 한다.
공수를 하는 위패에는 여인이 더벅머리 소년의 손을 잡고 서 있다.
강한 증오심으로 영조를 노려보는 여인. 눈이 붉게 변하며 피눈물이 흐른다.
영조는 여인이 보이지 않고 공수를 한 후 돌아서서 휘령전 밖으로 나간다.

   # 41. 창덕궁, 휘령전 앞 (낮)

여름햇살이 강렬하게 쏟아진다.
세자선은 어린아이의 휘항을 머리에 어거지로 써서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돌바닥에 앉아서 석고대죄를 하고 있다.
비오듯 땀이 쏟아지고 ‘아마바바.. 세손의 휘항입니다. 학질에 걸렸습니다.’를 중얼거리고 있다.
영조가 내관들과 함께 휘령전을 나서다가 세자선의 몰골을 본다.
기가 막히다.

   영조  저 미친놈이 뭘 하는 겐가? 저게...지금 조선의 국본이며 세자의
  꼬라지인가? 정녕 네놈이 미친 것이더냐?
   세자선 아바마마, 세손의 휘항입니다. 저도 세손과 같이 예뻐해 주시옵소서.
   영조  당장 칼을 가져오거라! 내 저 놈의 목을 지금 여기서 치리라!

이때, 선희궁이 달려와 부복하여 세자선의 앞을 막는다.

   선희궁 상감마마. 더위와 학질에 잠시 정신을 놓은 것이옵니다. 불쌍히
  굽어 살펴주십시요. 제발 굽어 살피시옵소서.
  
어린 세손도 달려와 세자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를 한다.

   세손  할바마마, 아바마마를 살려주십시요. 엎드려 비옵니다.

세손, 정말 석고대죄를 하며 이마를 돌바닥에 찧는다.
세손의 이마에 피가 비치자 놀라 당황하는 영조.

   영조  (당황) 당장, 당장 세손을 일으켜 세우지 못하느냐? 빨리 세우거라!
   선희궁 (손으로 세손의 이마를 막으며) 세손, 그만 하십시요.

선희궁, 세손을 감싸 안아 석고대죄를 막는다.

   # 42. 동궁전 편전 (낮, 실내)

넓은 대청마루에 용상보다는 작은 좌탁이 중앙에 있고 세자선은 흐트러진 비단옷의 앞섬을 여미고 나름 예를 갖춰 단정히 좌탁에 앉아 있다.
세자선이 집무를 보거나 강연을 하는 공간이다. 텅 빈 곳에 홀로 앉아서 뭔가 골몰히 생각하는 세자선.
잠시 후 광현이 세자선의 곁으로 온다.

   광현  세자빈 마마와 세손저하께서 오셨사옵니다.

혜경궁이 세손의 손을 잡고 불안한 표정으로 들어와 세자선에게로 온다.

   세자선 (보지 않고) 앉으시게

혜경궁과 세손, 앞에 놓인 방석 위에 북면(정면으로 보지 않고 직각 방향으로 비켜 앉는 것)하고 앉는다.

   혜경궁 (긴장) 어인 일로 부르셨사옵니까?
   세자선 아바마마께서 출신이 미천하다 하여 어마마마의 회갑연을 금지
  시킨 게 사실입니까?
   혜경궁 그런 줄 아옵니다.
   세자선 성상의 빈이시고 내 어머니시고 세손의 할머니이신데 임금께서
  금하셨다 해도 응당 잔치를 해 드리는게 자식된 도리요 효와 예라
  고 생각하는데 세자빈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혜경궁 (당황스러워 슬쩍 세자선의 심기를 살핀다) 하오나 임금께옵서 금하
  셨사오니... 다음에 다시 기회를 보시옵는게....
   세자선 (OL) 그대도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시오?
   혜경궁 (불안해 하며) 그런 것이 아니오라....
   세자선 (일어나 내려오며) 허면 회갑연을 해 드립시다. 내 비록 심신이 상
  했으나 효를 드리지 못할 만큼 금수의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니니....

세자선, 혜경궁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을 잡는다.
혜경궁, 무슨 상황인지 당황스럽다.

   세자선 내 어머님과 그대에게 심려를 끼쳐 미안하외다. 옹주께 어마마마의
  회갑연을 열 것이니 모시고 오라 전하시게..

세자선, 일어나려다 문득 세손에게 눈길이 가고.. 세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일어서서 편전을 나선다. 광현이 황급히 따라나서고..
세자선이 나가는 방향으로 부복하여 엎드리는 혜경궁, 당황스럽다.

   # 43. 동궁전 대청, 마당 (낮)

선희궁의 회갑례상을 차렸다.
좌중 윗석에 선희궁과 화완이 있고 건너편에 세자선과 혜경궁이 있다.

   선희궁 (곁에 앉은 화완에게) 옹주의 말씀과 달리 어릴 적 세자와 같아
  보이는데 무슨 걱정을 그리 했습니까?
   화완  저 역시 오라비가 요즘 들어 저리 환하게 웃는 건 처음 보옵니다.
   세자선 (일어나 차 주전자를 들고 온다) 임금께서 마침 금주령을 내리시어
  술을 쓸 수 없으니 귀한 차를 준비했사옵니다. 제가 어마마마에게
  한잔 따르겠사옵니다

이때 세자선의 귓가에 고주파 이명음이 들린다. 세자선이 보면 물에 젖은 여인(장희빈)이 선희궁의 옆에 앉아 있다. 여인은 세자가 따른 찻잔에 침을 퉤하고 뱉는다.
세자, 입술을 씰룩거리며 광증을 참기 위해 애를 쓴다.
여인이 침 뱉은 차를 선희궁이 마시려고 하자 세자가 뺏어 버린다.
선희궁은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다.

   세자선 (태연히) 중국의 예법엔 첫 찻잔은 마시지 않고 버리는 것이라 하였
  습니다. 다시 받으시옵소서.

세자가 자리에 돌아가자 여인이 이번엔 세자 옆에 앉아 있다.

   여인  (세자의 귓가에) 어머니라, 누가 어머니인가? 저 천한 천민 여자가
  네 어미인가? 내게 늘 매질을 당하고 내 발을 닦고 심부름을 하던
  계집이 이제 네 에미인가? 그럼 나는 누군가?
   선희궁 (화완에게) 세자가 누구와 말을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화완  잘 모르겠습니다. 아바마마의 화살을 맞으신 이후 요즘 가끔 뭔가를
  홀로 중얼거리시곤 합니다.

   # 44. 동궁전 밖 문 앞 (낮)

화려한 노란 옷과 붉은 옷을 입은 취타대가 도열해 있고 임금이나 탈 수 있는 화려한 가마가 놓여 있다.
혜경궁과 세손, 세자선이 마중을 나와 있고.. 희정, 광현도 서 있다.
광현, 세자선이 연신 입술을 씰룩거리는 걸 몰래 보더니 희정의 옷깃을 잡아 사람들 뒷편으로 당긴다.

희정  뭐 하는거예요? 남사스럽게..
광현  일단 여기 있으시오. 희정나인은 내가 지켜 준다 하지 않았소.

화완과 함께 떠나려던 선희궁은 가마를 보고 놀란다.

   선희궁 세자의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이는 임금께서나 타실 수 있는
  물건으로 제가 타면 예법에 어긋납니다. 물리십시요.
   여인  (가마에 앉아 있다 비웃으며) 근본도 없는 고아 계집이 이런 물건을
  감히 탈 수 있다고 생각한 게냐? 그런 에미에게서 태어난 너도 미
  천한 것이니 그런 생각조차 했겠는가?

여인 곁에는 더러운 몰골의 더벅머리 소년이 서 있다.
세자선, 갑자기 곁에 있던 무사의 칼을 뽑아들어 여인을 향한다.

   세자선 그만! (칼을 돌려 어머니인 선희궁의 목에 겨누며) 타라면 탈 것이
  지 무슨 말이 그리 많은가? 천한 것의 표를 그리도 내야 하겠는가?
   혜경궁 저하! 흉측한 칼을 놓으시옵소서!
   세자선 (칼을 혜경궁에게 돌리며) 네 년부터 죽고 싶더냐?
   화완  (놀라 선희궁 앞을 막으며) 오라버니, 무슨 짓이옵니까? 우리를
  낳아주신 어머니 이옵니다!
   세자선 (다시 선희궁을 목을 노려 따라가며) 그래 어머니! 나를 이렇게 낳
  은 어머니! 살아도 살지 못하고 죽어도 죽지 못하게 이리 낳은
  어머니!
   여인  (어느새 세자선의 등 뒤에서) 올커니 잘한다. 죽여라! 죽여!
   세자선 내 임금도 죽이고 뿐만 아니라 불행의 씨앗을 만든 이 년도 같이
  죽일 것이다!
   화완  (선희궁에게) 어머니 어서 가마에 오르시옵소서!

엉거주춤, 선희궁과 화완이 가마에 오른다.

   세자선 (겨눈 칼을 내리지 않고) 취타를 울려라!
   취타대장 (호령하며) 명금일하 대취타!

징이 한번 울리고 요란한 취타소리.
행렬이 움직여도 칼을 내리지 않는 세자

   # 45. 선희궁 앞 (낮)

어느새 비가 내린다. 빗속에서도 취타가 울려 슬프다.
겨우 도착하여 가마에서 내린다.
말없이 안으로 들어가는 선희궁. 그 뒤를 화완과 희정이 뒤따른다.

   화완  어마마마!
   선희궁 (입을 굳게 다물고) 괜찮습니다. 다 괜찮습니다. 괜찮아 질겝니다.
   화완  오라버니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선희궁 오늘은... 그냥 쉬십시다. 옹주도 좀 쉬세요.

빗속에 지친 듯 홀로 걸어가는 선희궁
안에서 지밀상궁이 뛰어 나와 우산을 바치지만 마다하고 홀로 안으로 들어간다.

   # 46. 동궁전, 세자의 침소 (밤, 실내)

세자선이 세손의 휘항을 쓴 괴이한 몰골로 안으로 들어선다.
손에는 환도가 들려있다.
광현이 일어나 두려워하며 세자를 맞는다.

   세자선 (다짜고짜) 세손은 어디에 있느냐?
   광현  송구하오나 세손마마의 휘항을 그만 벗으시옵소서.
   세자선 (광기어린 눈매로 노려본다) 세손이 어딨냐고 묻지 않더냐?
   광현  (겁에 질려) 침소에서 주무시옵니다.
   세자선 (촛대를 하나 집어들고 가며) 이 휘항 때문에 안 죽은 게다. 세손이
  국본을 이을 수 있는 한 반드시 아바마마는 나를 죽일게다.
   광현  오해이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 47. 동궁전, 세손의 처소 (밤, 실내)

한 손엔 촛대와 다른 손엔 환도를 든 세자선이 방문 앞에 서서 잠든 세손을 보고 있다.
세손의 발치에는 물에 젖은 중년 여인이 더벅머리 소년과 함께 서 있다.

   여인  이 아이가 죽어 조선의 국본을 잇지 못하면 누가 감히 너에게
  대항을 하려 하겠느냐? 그것이 조선의 임금이라도 말이다. 

세자선, 대답 없이 세손의 얼굴을 본다.

   여인  고작 세손의 휘항 뒤에 숨어서 목숨을 보존할 테냐.. 아니면 세손을
  죽여 니가 조선의 국본이 되고.. 네 아비의 목을 쳐 지존이 되겠느
  냐?
   세자선 (세손을 바라보는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낮게) 그대는 누구인가?
   여인  훗. 나를 모시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너는 누구의 집에서
  자랐더냐?
   세자선 경종대왕이 자라시고 희빈의 취선당이 있던 저승전이다.
   여인  그런데도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내 집에서 자라난
  내 아이가 내가 누군지를 모른다... 내 아들을 누가 죽였더냐?
   세자선 (낮게) 아바마마이시다.
   여인  나는 또 누가 죽였더냐?
   세자선 할바마마이시다.

여인, 어느새 세자선의 뒤에서 햐얀 손으로 세자의 얼굴을 감싸 안고 뺨을 보듬고 있다. 짧은 이명음과 함께 세자의 입술이 씰룩거리기 시작한다. 천장으로 부터 내려오는 잿빛의 기운.. 여인의 눈이 붉어지면서 피눈물이 흘러내려 괴이한 모습이 된다.

   여인  그럼 내가 누구인가? 내 아이야, 니 할애비와 애비가 너를 내 집에
  버렸다.

세자선, 방안에 있는 더벅머리 소년과 눈이 마주친다.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세자선의 얼굴에 더벅머리 소년의 얼굴이 오버랩 됐다가 다시 세자선의 얼굴이 된다. 세자선의 눈이 붉게 충혈되고 피눈물이 흐른다.
여인, 촛대를 든 세자선의 손을 잡고 있다. 손을 들어 방문에 불을 붙인다.
방 안에 더벅머리 소년은 없고 피눈물을 흘리는 세자선과 오버랩된다.

   여인  너는 살고 네 핏줄은 죽을게다. 내가 누구인가? 불을 질러라. 하여
  지존이 되거라.. 내 아이야.

피눈물을 흘리며 깔깔거리며 웃는 여인.

   # 48. 동궁, 정자 (밤)

연못의 정자.
혜경궁이 다기잔에 황금 빛깔의 차를 따르고 있다.
선희궁, 화완이 앉아있고......

   화완  (돈을 은밀히 건네준다) 필요하실듯 하여 시댁에서 변통하였습니다
   혜경궁 갑자기 요사이 답답하고 맘에 들지 않는다하며 비단옷을 입을 때마
  다 수십 벌씩 찢으시니 동궁의 살림으로는 감당이 되질 않습니다.
   화완  의관에게는 보여 보셨습니까?
   혜경궁 궐내 의관은 소문이 날까하여 친정 아버님께서 시중의 의원이며
  무당, 점쟁이를 대어보셨으나 별 차도가 없습니다.

선희궁, 찻잔을 떨궈 찻물이 흐른다. 굳은 표정의 선희궁, 화완, 급히 닦아 낸다.

   화완  어머님, 괜찮으십니까?
   선희궁 (찹찹하다) 옛적 희빈이 심심하다 하여 비단 찢고 그 소리를 즐겼습
  니다. 하여 중국의 포사란 악녀가 환생한 것이라 말하곤 했습니다.
  노래 소리보다..악기 소리보다 비단 찢는 소리가 즐겁다 하였지요..
  이젠 세자가 비단을 찢는구려..
   화완  또 귀신이니 하는 여인네들의 한담이십니까? 귀신이니 저주니 하는
  것 따위는 없습니다. 뭐든 지 사람의 짓입니다.

급히 희정이 정자로 뛰어 들어온다.

   희정  마마님, 큰일 났사옵니다
   화완  무슨 일이냐?
   희정  동궁전에 불이 났사옵니다! 주서님께서 조소저하를 구하시겠다고
  불 속으로 뛰어 드셨습니다!

   # 49. 동궁전 밖 (밤)

화완과 혜경궁, 선희궁 달려 나왔다
아직 불길이 솟아오르지는 않고 연기만 피어오른다.
건물 전체에서 하얀 연기가 쉼 없이 뿜어져 나온다.

    혜경궁 (정신이 나가서) 세손! 세손이 건물에 있습니다! 세손이 안에
  있습니다.
    선희궁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세손... 세손!

선희궁, 황망히 문 안으로 보이는 불길 속으로 뛰어 든다
화완과 혜경궁이 말릴 새도 없다.

   화완  어마마마!

   # 50. 동궁전 안 (밤, 실내)

연기가 자욱한 실내를 미친 듯이 헤집는 선희궁
마침 유모가 세손과 어린 딸을 안고 입에 젖은 수건을 물리고 있다

   유모  (선희궁을 발견하고) 마마님! 여기 이옵니다!
   혜경궁 (연기를 헤치고 가서) 무사한 겐가?
   유모  예, 무사하시옵니다!

   # 51. 동궁 혜경궁의 침소 (밤, 실내)

불길과 연기에 더러워지고 지친기색이 역력한 선희궁.
내의원 의관이 잠든 세손을 진맥하고 있다.
그 곁에 화완과 혜경궁이 있다.

   선의궁 어떠한가?
   의관  다행히도 별 탈은 없으신 듯 하옵니다.

일동, 다행이다.

   의관  기를 보하는 탕약을 준비하겠사오니 며칠간 드시면 좋을 듯 하
    옵니다.
   화완  지금 당장 뭘 먹이는 게 좋지 않겠는가?
   의관  몹시 지치시어 곤히 잠이 드셨사오니 지금은 그냥 주무시게
  두는 게 좋을 듯 하옵니다.
   혜경궁 알았네, 내일 탕약을 준비하시게.
   의관  예, 마마.

의관, 문 밖으로 나간다.
세손의 얼굴을 잠시 보고 있다가

   혜경궁 (잠시 결심한 듯) 지난번에 사람이 상하는 게
  귀신의 짓이라고 했지요? 이젠 세손이 상할 뻔 하였습니다.
   화완  당파의 짓이 틀림없으니 제가 반드시 잡아서 처벌 하겠습니다
   혜경궁 (일어서며) 오십시오. 제가 그 귀신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 52. 저승전 정원 한쪽 (밤)

저승전의 전경.
전각 옆 넓은 잔디밭으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혜경궁
잔디밭 한쪽에 이르러 풀을 헤집는다. 그러자 둥근 쇠고리 하나가 나온다.
혜경궁이 힘껏 당기자 땅이 열리며 문이 된다.
놀라는 화완과 선희궁

   혜경궁 세자께서 저승전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옵니다.

혜경궁, 땅속 계단으로 내려간다.

   # 53. 땅 속 안가 계단 (밤, 실내)

혜경궁, 계단 벽에 꽂혀 있던 촛대 하나를 집어 들고 내려간다.
토벽으로 된 괴이한 공간을 따라가면 실제 집처럼 나무 대문이 나타 난다
공포스럽게 대문에 그려져 있는 신장의 모습
혜경궁이 빗장을 풀고 문을 열자 ‘끼이익’ 거리며 어둠이 드러난다
혜경궁, 거침없이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 54. 땅 속 안가 (밤, 실내)

혜경궁, 촛대를 내려놓고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사방의 등불에 옮겨 밝힌다.
불이 밝아오자 어둠 속 중앙에 여섯 개의 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혜경궁 이게 귀신의 정체입니다

뒤로는 토굴벽에 괴이한 부적과 그림, 제단과 신당 등이 어지럽게 차려져 있다.
관에는 각기 칠성판이 올려져 있고 그 위에 붉은 천에 흰글씨로 적은 이름이 있다.
제일 앞에 세자 자신인 세자선, 경모궁의 이름이 있고 그 옆에 영조의 이름인 이금, 연잉군이라고 써있다.
선희궁, 놀랍고 두려운 눈으로 관 앞에 다가간다.
‘영빈이씨, 선희궁’이라고 쓴 관 앞에 선다.

   선희궁 이것이...... 저의 관입니까?
   혜경궁 송구 하옵니다.

선희궁, 가장 가운데에 작은 관을 본다.

   선희궁 혹여.. 이 작은 관은 세손의 관은 아니겠지요..
   혜경궁 (침울) 송구하옵니다.

입술을 꽉 깨무는 선희궁.
이때, 세손의 관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선희궁이 갑자기 벽을 의아스런 눈으로 돌아본다. 선희궁의 귀에도 고주파 이명음이 짧게 들린다.
고통에 귀를 막는 선희궁.

   혜경궁 어마마마 왜 그러시옵니까?
   선희궁 이곳에 무엇인가 있습니다. (둘러보며) 뭔가가 있습니다.
   혜경궁 이제 그만 나가십시요. 곧 세자저하가 올 것이옵니다.

선희궁, 돌아서려는데... 여인이 팔걸이가 있는 좌탁에 비스듬히 앉아 있다.

   선희궁 (놀라) 당신은......희빈....
   여인  조선의 국본이란 남자들은 모두 나를 모시게 될게다. 세손이라고
  무사할까..

다시 짧은 고주파음. 귀를 가린 선희궁, 아래를 보면 가운데 관 세 개의 칠성판이 사라지고 그 속에 죽은 푸른 얼굴의 영조와 세자선, 세손의 시체가 눕혀져 있다.
놀라 당황하는 선희궁.

   화완  (비틀거리는 선희궁을 부축하며) 뭘 보신겝니까?
 
이때 세자선이 미치광이 같은 모습으로 안으로 들어선다. 머리에는 여전히 휘항을 쓰고 장도를 바닥에 질질 끌고 있다.
세자선, 선희궁의 일행을 보고 이것들은 또 뭔가 하는 시선.

   세자선 네 놈들은.....네놈들은 누구냐? 여기를 어찌 알고 온 것이냐!
   화완  오라버니. 접니다. 화완입니다. 어찌 그리 알 수 없는 말을 하십니
  까?
   세자선 (다짜고짜 장도를 휘두르며) 죽어라!

혜경궁, 몸을 날려 화완을 안고 쓰러진다. 간신히 피한 화완. 그러나 팔에 상처를 입었다.

   화완  (바닥에 쓰러져) 오라버니, 정신 차리십시요!

세자선, 장도를 바닥에 끌며 화완과 혜경궁이 쓰러진 앞으로 걸어온다.
혜경궁, 화완을 안고 구석으로 피하지만 더 숨을 곳이 없다.

   세자선 (더벅머리 소년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씩 웃으며) 여기 왔으니 모두
  죽이리라!

이때 황망히 바라만 보고 있던 선희궁이 앞으로 나선다.

   선희궁 아드님, 저도 모르시겠습니까?
   세자선 (돌아보고) 네년이 누군데 알아야 하느냐?

세자선, 장도를 선희궁의 목에 대고 코앞까지 다가선다.
선희궁의 목에서 핏물이 배어나오지만 겁 없이 피하지 않고 세자선의 눈을 응시한다.

   선희궁 정녕.. 저를 알아보지 못하시겠습니까?

세자선, 장도를 목에 댄 채 물끄러미 선희궁의 얼굴을 바라본다.
선희궁, 눈물이 흐른다.

   선희궁 아드님, 어찌하여 이리 되셨습니까? 어찌하여 이리 되신 겝니까?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자선, 갑자기 장도를 내리고 돌아선다.

   세자선 (문 앞에서 등을 돌린 채) 어머니, 어머니라! 내게 그런 게 있던
  가? 인간 따위의 어머니가 나한테 있던가? 아... 지들 욕심에.. 나를
  버리고 무시한 아버지라는 작자는 기억난다! 이제 와서 어머니라!

세자선, 장도를 어깨에 들쳐 매고 허망한 웃음을 웃으며 밖으로 나간다.
허물어지듯 쓰리지는 선희궁. 마침 세손의 작은 관 앞이다.
혜경궁과 화완이 황급히 선희궁에게 달려온다.

   화완  어머님, 괜찮으십니까?

바닥에 쓰러져 오열하는 선희궁.

   선희궁 아드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 55. 동궁전, 창고 (촬영 예비씬)

벌컥 문이 열린다.
살인귀가 된 세자선이 칼을 들고 문 앞에 서 있다.
창고 안에 숨어 있던 내관과 나인들 세자선의 모습을 모자 겁에 질려 벌벌 떤다.

   세자선 찼았구나! 쥐새끼들이 여기 숨어 있었구나.

세자선, 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다.
비명을 지르며 창고 밖으로 도망치는 내관과 나인들
세자선, 칼을 휘두르며 내관과 나인의 뒤를 쫓는다.

   # 56. 창덕궁 안 (밤)

옷을 풀어헤친 채 밤길을 걸어가고 있는 세자선의 실루엣.
한손엔 시체의 머리채를 쥐어 끌고 있고. 다른 한손엔 장도를 어깨에 둘러맸다.
저승전 쪽으로 황망히 가고 있다. 붉은 눈에 피눈물이 흐르고..
붉은달의 CG가 세자선의 몸전체를 휘감아 실루엣을 만들고 있다.
F.O (페이드 아웃)

   # 57.  동궁 연못 (낮)

F.I (페이드 인)
선희궁과 화완이 희정을 데리고 간밤의 난리통에 무서진 문을 통해 조용히 들어오고 있다.
혜경궁과 세손이 정자 앞에 나와 있고.. 모두 초췌한 몰골이다.
선희궁을 보자 달려오는 세손..

   세손  (천진스럽게 안기며) 할마마마!
   선희궁 (억지 웃음) 우리 세손. 밤새 잘 잤는가? 건강은 괜찮아 졌고?
   세손  예...
   혜경궁 납시었사옵니까..
   선희궁 세자는 뭘 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어제와 같습니까?
   혜경궁 한번 그리 광증을 치루고 나면 하루 종일 주무시옵니다.
   선희궁 내 그럼 한번 자는 걸 볼 수 있을까요?
   화완  (놀라서 만류하며) 어마마마...
   선희궁 (세손에게) 우리 세손은 여기 옹주와 있으시게.. 할미는 아버지를
  잠깐 보고 올 터이니..

   # 58. 동궁, 침전 (낮, 실내)

죽은 듯 엎드려 잠들어 있는 세자선..
선희궁이 홀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온다.
창문으로 들어온 아침 햇살이 세자의 몸이 비춘다.
천진난만해 보이는 세자선의 얼굴
세자선 옆에 앉는다. 머리를 들어 선희궁의 무릎에 올려놓는다.
세자선, 잠결에 어린아이처럼 선희궁의 허리를 감싸 안는다.
물끄러미 세자선의 얼굴을 내려다 본다.

   선희궁 (눈물이 흐르고) 몰골이 많이 상했구려. 임금과 제가 세자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선희궁, 세자선을 꼼 감싸 안는다.
하염없이 서글피 우는 선희궁.

   # 59. 동궁 정자 (낮)

선희궁과 혜경궁, 화완이 둘러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다.
선희궁, 혜경궁의 손을 꼭 잡는다.

   선희궁 그간 마음 고생이 심하셨습니다.
   혜경궁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선희궁 세자가 사람을 얼마나 상하게 했습니까? 혹여 열 명이 넘습니까?
   혜경궁 (고개를 끄덕)
   선희궁 허면 백 명이 넘습니까?
   혜경궁 (울음이 터지고) 송구하옵니다.
   선희궁 (잠시, 결심한 듯) 세손을 당분간 화완옹주에게 맡기십시오.
   혜경궁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선희궁 그간의 일을 임금께 고변 하겠습니다.
   화완  (놀라고) 어마마마! 그러면 오라버니는 죽습니다.
   선희궁 세자의 일을 그냥 두면 세손도 다칩니다. 세자가 세손을 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세자를 빌미로 당파가 해할 것이고.. 분노한
  임금이 해할 것입니다. 제가 낳은 아들, 제가 거둘 수 있게.. 대처분
  해 달라 고변 하겠습니다.
   혜경궁 (울먹이며) 마마..그러면 아니되옵니다. 세자께서 죽습니다.
   선희궁 그게 우리 모두 살 길이고.. 귀신에 홀린 세자또한 살 길입니다.
  임금의 총애가 남다르니 당분간 화완옹주가 세손을 맡으면 별 탈이
  없을 겝니다. 세자빈.. 정말 미안합니다.
  곧 임금의 처분이 있을 터이니 마음 굳게 잡으십시오.

   # 60. 휘령전 (낮)

영조가 무서운 눈으로 무릎을 꿇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선왕들의 위패를 보고 있다. 용포가 아닌 두정갑을 입고 칼을 찼으며 등에는 전통까지 맸다.
그 곁에는 북면한 채 부복하고 있는 선희궁이 있다.
문이 열려 있고 밖으로 내관과 금군들이 보인다.
영조, 말없이 박수를 세 번 치고 공수한다.

   선희궁 (두렵다) 어찌..... 대처분하려 하십니까?
   영조  그대와 나의 관을 짰다 하였습니까?

다시 박수 세 번을 치고 공수한다.

   영조  (큰소리로) 세자의 관으로 쓰게 뒤주를 가져오라!

   # 61. 창덕궁 길 (낮)

영조, 무장한 금군과 함께 동궁으로 가고 있다.
이 모습을 선희궁과 화완이 보고 있다.
선희궁, 가슴이 미어진다.

   # 62. 동궁 침전 (낮, 실내)

영조, 거칠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다.
이미 세자선은 막 잠에서 깨어나 금군의 창날에 둘러 쌓여있다.
세자선, 영조를 보자 황급히 침상 속을 뒤져 휘항을 찾는다.
휘항을 쓰고 무릎으로 기어 오는 세자선

   세자선 아바마마, 어인 일이옵니까? 저는 아주 죄도 없사옵니다. 살려 주시
  옵소서!

영조, 무서운 눈으로 세자선을 노려본다.

   # 63. 창덕궁 안 마당 (낮)

영조, 두정갑을 입은 채 칼을 뽑아 들고 있다.
내관과 금군이 좌우에 있고.. 혜경궁과 화완, 세손은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다.
그 뒤로 희정과 광현도 안절부절 고개를 숙이고 있고...
세자선은 커다란 뒤주 안에 들어가 있다. 문갑 형태로 앞으로 열리는 뒤주.
세자선은 여전히 휘항을 뒤집어쓰고 횡설수설 중이다.
몸 반은 뒤주 밖으로 내놓고 있다. 

   영조  내 칼에 죽겠느냐, 아니면 네 놈이 니 관 속으로 들어가겠느냐?
   세자선 살려 주십시요.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다 이러하십니까?
   영조  저 놈을 뒤주 속에 밀어놓고 문을 닫아라!
   세자선 또 다시.. 또 저를 어둠 속에 버리시렵니까? 아바마마, 저를 다시
  어둠 속에 내치시렵니까?

금군 사령 두 명이 뒤주의 문이 닫는다. 엉거주춤 뒤주 안으로 밀려가는 세자선.

   세자선E 어린 시절 아바마마를 위해 어둠 속에 들어가지 않았사옵니까?
  또다시 저를 어둠 속에 버리시렵니까? 대체 당신한테 자식이 무엇
  입니까!

선희궁, 차마 보기 힘들다.
슬며시 자리를 피해 마당을 나선다. 

   # 64. 저승전 마당 (낮)

‘끼이익’ 소리를 내며 나무대문이 열리고 선희궁이 안으로 들어선다.
희정과 광현이 뒤따른다. 광현은 나무물통 하나를 들고 있다.

선희궁  (광현에게) 여기 내려놓고 너희는 세손에게 가 보거라.
희정  마마님, 기름통으로 어찌하시려 하십니까?
선희궁  (무서운 표정) 그만 가보라 하지 않더냐?

희정과 광현, 어쩔 수 없이 밖에서 대문을 닫는다. 혼자 남겨진 선희궁.
회한의 표정으로 저승전을 본다. 이내 물통을 힘겹게 들고 뒷마당으로 간다.

   # 65. 지하 안가 (낮, 실내)=> 추가 예비씬

여인이 관 앞에 앉아 있다.
세자선의 칠성판 얼굴 부분이 열려있고, 죽은 세자선이 누워있다.
여인의 눈에서 인간과도 같은 눈물이 흐른다.
세자선의 죽은 얼굴은 어린 세자의 모습으로 변한다.

여인  (안타까움에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물이 흐르고) 아이야.. 내 아들
  아..

밖에서 문소리가 나자 놀아보는 여인, 칠성판을 닫고 일어선다.


   # 66. 저승전 뒷마당 (낮)

선희궁, 지하 안가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을 열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는 선희궁

   # 67. 지하 안가 (낮, 실내)

안가의 안쪽 문까지 꼭 닫고 돌아서면
여인이 거만한 포즈로 탁자 위에(=>세자선의 관 위에) 앉아있다.

   여인  (비웃으며) 이젠 에미가 온 것인가? 그런다고 저주가 풀릴까?
   선희궁 (문을 막아서고 조용히) 희빈.. 이젠 그만 하십시오.
   여인  감히.. 소재나 하던 천한 것이 어디서 망발인게냐!
   선희궁 제 시아버지께서 희빈에게 사약을 내리셨고.. 제 남편인 임금께서
  희빈의 아드님인 경종대왕을 독살하셨습니다.
   여인  알기는 제대로 아는구나.
   선희궁 헌데 말입니다. 저는 희빈 때문에 제 아들을 제 손으로 죽이게 됐습
  니다. 누가 원한이 더 클 것 같습니까? 희빈일까요, 저일까요?
  (단호한 명령조) 세손에게는 손을 대지 마십시요.
   여인  (눈이 붉게 변하며 피눈물이 흐른다) 같잖구나! 니가 내게 하령을
  하겠다? 그래서 살아있는 니가 죽어 귀신이 된 나한데 덤비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선희궁, 여인의 붉은 눈을 노려보며 발로 나무물통을 쓰러뜨린다. 나무물통에서 흘러내리는 기름..
그리고 벽에 있던 촛불하나를 집어 든다.

   선희궁 제가 죽으면 상대가 되지 않겠습니까? (격분) 아들을 죽이는 어미입
  니다. 손자를 위해서 제가 뭔들 못할 것 같습니까? 같이 구천에서
  말동무나 하시지요..

선희궁, 촛불을 기름 위로 던진다.


      - 끝 -






















첨부파일 붉은달_최종수정고(재수정)-유영석.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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