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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용한 자료 모음

의병대장 신돌석(申乭石)의 생애와 업적 - 역사공부

작성자다물|작성시간15.03.31|조회수77 목록 댓글 0



애수의 소야곡 - 남인수

작사 이부풍 작곡 박시춘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 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 주나 휘파람 소리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못생긴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마저 싸늘하구나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던고
모두 다 흘러가면 덧없건마는
외로이 느끼면서 우는 이 밤은
바람도 문풍지에 애달프구나


   申乭石


  생몰년도: 1878년(고종 15)-1908년(융희 2)
  자; 순경(舜卿)
  활동분야: 의병
  다른 이름: 돌석(乭錫)/태홍(泰洪)/태을(泰乙)/대호(大浩)

   생애와 업적
한말 일본의 침략에 맞서 전국에서 많은 의병들이 일어났다.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해

‘개혁’ 이란 미명 아래 조선을 억지로 변화시키려 하자,

  이를 응징하려 안동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무너져가는 조선을 구하고자 일어난 한말의 첫 의병이다.

그리고 이듬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반발하는 항쟁이 전국을 휩쓸었다.

이때 일어난 의병을 전기 의병이라 한다.

의병항쟁은 1896년 봄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경상도 영덕과 영해에서도 처음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열아홉의 신돌석도 영덕 의진의 중군장(中軍將)으로 처음 역사에 기록을 남긴다.

1878년 영해에서 출생한 신돌석은 평민 출신이지만 글을 배웠고

또 “겨우 6,7세 나이에 도망가는 개를 쫓아가 꼬리를 잡아서 때려죽인 적이 있다”는 말이 전할 만큼 기운이 세고 체격이 장대했으며

“축지법을 쓴다”는 말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발이 빨랐다.

혈기 넘치는 나이에 남들보다 센 기운과 빠른 발로 의병에 참여했으니

 당시의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많은 활약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1896년 의병이 해산되면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만다.

아마도 관군의 추적을 피해 떠도는 붐이 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이 무렵 신돌석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뜻 맞는 인물을 만나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그들과 왜적을 물리칠 전략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던 듯하다.

당시 그가 만난 인물들로는 손병희 • 박상진 • 이강년 등이 있다.

한편 이 무렵 그는 전국 각지에서 일본인들을 공격한 일화를 남긴다.

1903년 여름 경북 청도 지방을 지나다가 전신주를 가설하고 있던 일본인 5~6명과 마주치자 전신주를 뽑아 그것으로 쳐죽였으며,

 부산항에서는 배를 수리하는 일본인에게 시비를 걸어 화가 난 일본인이 총을 쏘려 하자 일본 배를 전복시키고 일본인들을 바위 끝으로 끌고 가 떨어뜨리니 바닷물이 붉은색으로 용솟음쳤다는 이야기 등이 전한다.

울산 송정 어느 집에 투숙했을 때는 일본 헌병 10여 명이 그를 잡으려고 잠복해 있음을 알고 달아나면서 담장을 무너뜨려 일병을 몰살시켰다고도 한다.

그렇게 울분을 토해내고 있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조약을 맺어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다시 의병이 일어나는데,이를중기 의병이라 한다.

스물일곱 살의 청년으로 성장한 신돌석은

 1906년 4월 6일 영덕에서 의병을 조직해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 되었다.

전기 의병에 참여해 얻은 풍부한 전투경험과 의병 해산 후에

 전국을 돌며 파악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의병 조직을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당시 그가 이끌던 의병의 규모는 최소한 100명 이상. 200~300명 정도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중농이었던 아버지의 재산으로 신돌석은 이들을 훈련시키고 무장했다.

이들에 대한 자료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평민이었던 신돌석의 부하로 양반 출신 의병들이 상당수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7~9품 정도의 관직이었던 ‘주사 를 지낸 인물부터, 사족 • 유생 • 양반들이 여러 명 속해 있었다는 점에서 이 조직은 상당히 개방적이고 앞서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릉 의병의 체제를 갖춘 신돌석이 첫 공격 목표로 정한 곳은 당시 일본의 전초기지로 육성되고 있던 울진이었다.

첫 번째 울진 공격에서는 일본인을 죽이고 일본인이 살던 집을 집중적으로 부수었으며,

또다시 시도한 두 번째 울진 공격에서는 관아를 습격해 무기를 확보했고,

이어 울진 장호관(長湖館)에 이르러서는 일본군의 배 9척을 기습 파괴하는 등 삼척 • 강릉 • 양양 • 간성 등지에 주둔한 일본군을 무찌르고 그들의 전선 가절을 빙해했다.

연일 의병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고종을 내세워 각지방의 의병 활동을 중지하라는 조칙을 발표했지만,

 황제의 조칙이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의병장들은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저항을 계속했다.

신돌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통감부는 의병 세력을 잠재우려 군대를 파견했다.

영릉 의병에 대한소문이 서울까지 나서 대규모 토벌대가 울진과 영해 및 영덕으로 내려왔다.

의병들은 격렬히 저항했고,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토벌대가 “그 수괴를 놓쳐버렸으므로 일시적 소강을 유지”하는 선에 머물렀다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의병들은 토벌대의 공격을 잘 견디어냈던 듯 하다.

1906년 천혜의 요새인 수동에 머물며 체제를 재정비한 신돌석은 영덕에 있는 일본인들을 쫓아내는 등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이무렵 일본군은 신돌석과 이강년 부대를 완전히 토벌하려고 대규모 부대를 출동시켰다.

당시 신돌석은 평해 • 봉화 • 순흥 등지에서 때로 이강년이 이끄는 의진(義陣)과 연합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첫 번째 작전에서 실패한 일본군이 다시 토벌 작전에 나섰지만,

 이 또한 그리 두드러진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1907년 군대 해산을 계기로 해산 군인들이 의병 진영에 합류하면서 의병들의 전투 양상이나 성격이 크게 바뀌는데, 이때의 의병들을 후기 의병이라 한다.

후기 의병에 이르면 전국 연합부대의 편성이 논의되는 등 의병들의 활동이 항일전쟁의 성격으로 발전한다.

1907년 11월 이인영은 전국 각 지방 의병들에게

“의병부대를 통일해서 연합 의병부대와 통합 사령부를 창설하고 서울을 향해 경기 지역으로 진군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보냈다.

연합 의병부대로 13도 창의대진소를 결성하고 각 도별 의병장을 추천했는데,

 이때 경상도 대표 교남 창의대장에 추천된 인물이 신돌석이다.

그러나 한달 뒤 〈대한매일신보〉에는 교남 창의대장 이름이 박정빈으로 바뀌어 있다.

이에 대해 지금까지는

“신돌석이 평민 출신이기 때문에 양반 출신인 이인영이 신분을 차별하여 바꾼 것”이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근래에는 신돌석이 집합지인 경기도 양주에 도착하지 않아서라는 이유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자료에 의하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신돌석은 양주로 이동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근거지를 지키고 있었다.

1908년에도 신돌석은 평해의 독곡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안동 • 울진 • 삼척 • 강릉 등지의 의병과 합쳐서 춘양 • 황지 • 소봉동 등지의 적을 격파했다.

울진 도곡에서 적의 무기를 다수 빼앗았으며,한독 • 희암에서 싸웠다.

이 무렵 신돌석은 일본군토벌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부대를 소규모로 나누어 산발적인 게릴라 작전을 펼쳤다.

일본군은 신돌석을 잡기 위해 세 번째 토별 작전을 펼쳤지만 이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의병들의 손실도 컸다.

1908년 들어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은 크게 위축되고 있었다.

일본 정규군이 수비대 명목으로 파견되었고 일본 경찰은 골짜기를 누비며 정보를 수집하고 의병과 주민 사이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렸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귀순하면 면죄부를 준다는 귀순법’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신돌석 의진에서도 투항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신돌석을 따르는 의병의 숫자가 20명 정도로 급격히 위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추운 겨울도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신돌석은 몇 명의 인원만 남기고 모두 살 길을 찾아 떠나라는 명령을 내리고 만다.

그 해 겨울 전국의 의병들이 대부분 같은 아픔을 겪었다.

그렇다고 신돌석이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만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무렵 홍범도를 비롯한 여러 의병부대들이 만주로 이동해 독립군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는 만주로 가지 못하고 동족의 손에 잔혹한 죽음을 맞고 만다.

만주로 이동할 자금을 모으고 있었던 듯 고향에서 가까운 산골에 은신하던 그가 1908년 12월 11일 영덕군 북면 눌곡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6촌 형제 (모친 쪽이라는 기록도 있고 조부 쪽이라는 기록도 있고,

 부하라고도 전한다)인 김상렬 형제의 꾐에 빠져 약이 든 술을 먹고 이들에게 도끼 등의 무기로 타살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살해자의 이름을 비롯한 기초 자료부터 한국 측과 일본 측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살해 동기에 대해서도 일본 측의 자료는

“신돌석의 부하로 활동하던 동생 문제로 싸움이 붙었기 때문”이라 한 반면

한국측자료는 “일본군이 신돌석에게 붙여놓은 현상금 때문”이라고 전한다.

거병한 지 2년 8개월 만에 차디찬 시신으로 돌아온 그의 유해는 가족에게 인도되어 태어난 마을 뒷산 봉우리에 묻혔다가 1971년 서울 국립묘지에 이장되었다.


   평 가
“영해에서 봉기한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 의병부대가 일월산과 백암산을 근거지로 의병부대의 규모를 강화하며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한말의 민족사학자인 박은식이《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신돌석을 평가한 글이다.

신돌석은 한말 의병투쟁에 있어서 평민 출신 의병대장으로는 가장 먼저 기병하여 민중적 기반 위에서 막강한 의병 세력으로 성장했으며,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갑작스런 그의 죽음 뒤 그 소식을 들은 한 노인이 지고 가던 짐을 팽개치며

“우리들이 구 차하게 산 것은 신 장군이 일본군을 소탕하리라 기대한 때문인데 이제 끝이로구나”라고 곡을 했다는 이야기는 그에 대한 민중들의 기대를 반영하는 일화이다.

그런 기대는 “바위처럼 큰 돌을 한 손으로 옮겼다든가

“천릿길을 하루에 갔다든가 하는 신화로 표현 돼,

지금도 그가 활동했던 지역에서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의 무용담이 전해진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 장이 추서되었다.


   단발령
1895년(고종 32) 백성들에게 상투를 자르게 한 명령을 말한다.

을미사변 이후 김홍집 내각은 내정개혁 에 주력했는데,

  건양원년 1월 1일을 기하여 양력을 채용하는 동시에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고종이 솔선수범하여 상투를 잘랐으며,

 관리들이 가위를 들고 거리나 성문 등에서 강제로 백성들의 상투를 잘랐다.

우리나라사람들은 머리카락을 소중히 여겼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유교의 가르침 아래 많은 선비들이 ‘손발은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을지를 수는 없다’ 고 분개하며 단발령에 완강하게 반대했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을 적대시하게 된 국민감정을 무시하고 개혁을 단행했으므로,

 백성들은 더욱 분개하여 단발령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의병을 일으켜서 정부시책에 대항했다.


   이강년
1858(철종 9)~1908. 한말의 의병장.

1880년(고종 17) 무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으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듬해인 1896년,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제천으로 유인석을 찾아가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활약했다.

1907년 12월 전국의 의병들이 13도연합 의병부대를 편성할 때 호서창의대장으로 참석했다.

1908년 6월 4일 일본군과의 결전에서 발목에 총알을 맞고 붙잡혀 교수형 당했다.


   이인영
1867(고종 4)~1909. 한말의 의병장.

 을미사변 이후 유인석 • 이강년 등의 의거에 호응해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유인석의 제천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가

 경상북도 문경으로 이주해 은둔 생활을 하면서 농사를 지었다.

1907년 13도 연합 의병부대를 편성할 때 총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런데 이 중대한 시기에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이인영은 문경으로 돌아갔다.

그후 노모와 두 아들을 데리고 숨어 살다가 1909년 6월 7일 일본 헌병 에게 잡혀 감옥에서 죽었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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