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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村田英雄

王將

작성자柳 덕인|작성시간08.02.14|조회수286 목록 댓글 0

王將/村田英雄(무라다 히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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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將 (오쇼)********

1)
후케바 도부요우나 쇼기노 고마니 가케다 이노찌오 와라와바 와라에
けば 飛ぶような  將棋の 駒に  賭けた 命を  笑わば 笑え
불면 날아갈 듯한    장기알에   건 목숨을    웃을테면 웃어라

우마레 나니와노 핫뱍구야바시 쯔끼모 싯데이루 오이라노 이키지
うまれ 浪花の  八百八橋  月も 知ってる  俺らの 意氣地
나니와(오사카) 태생의 八百八다리  달님도 알고 있어
나의 오기를

 

2)

아노테 고노테노 시안오 무네니 야부레 나가야데 고도시모 구레타
あの 手この 手の  思案を 胸に やぶれ 長屋で  今年も 暮れた
이 수 저 수 생각하는 가슴에 부서진 공동주택에서 금년도 저물었어

우치모 이와즈니 뇨보노 고하루 쯔꾸루 에가오가 이지라시이
愚痴も 言わずに 女房の 小春 つくる 笑顔が いじらしい
푸념도 않는 마누라 고하루의 웃음짓는 얼굴이   애처롭구나

3)
아스와 도쿄에 데테 유쿠까라와 나니가난데모    가타네바나라누
明日は 東京へ 出て 行くからは なにがなんでも 勝たねばならぬ
내일은 도쿄에  나가는 거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이겨야만 돼   

소라니 히가 쯔쿠 쯔텐가쿠니 오레노 도우시가 마타 모에루
空に 燈がつく  通天閣に おれの 鬪志が  また 燃える
하늘에 등불 켜지는  通天閣에 나의 투지가  또 불타오르네

*****************

  將棋의 鬼才 坂田三吉(사카다 산키치)는 실존했던 인물로 1870년

堺(사카이)시의 彼差別部落에서 태어나 棋界最高의 棋力이란

평가를 받으면서도 생전에 타이틀에는 인연이 없이

무관의 왕으로 1946년 타계하였습니다.

  먼저 일본장기에 대해 간단히 짚고 넘어가 볼까요?

장기의 원조는 인도로 알려지고 있고,

인도에서 서양의 체스, 동양의 장기

이렇게 전래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고 있습니다.

우리것과 일본 것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우리장기의 말은 보통 8각형의 모양에다 彼我합처 32개인데 비해

일본 것은 오각형모양에 彼我 40개(王將 飛車

角將 각1개, 金將 銀將 桂馬 香車 각 2개, 步 9개 彼我)란 점이 다르고,

우리 장기의 규칙은 아주 단순한 반면



일본 장기의 규칙은 좀더 복잡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지요.

이를테면 적진에 당도한 말의 위력이 파워엎(步,香,

桂,銀= 金, 角= 王+角, 飛= 王+飛)된다든지

상대에게서 딴 말을 일정한 기회에 재활용(?)할 수 있다는데

읽어야 할 手와 공략 手가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일본장기를 잘 두려면 머릿속 메모리의 용량이

많아야겠다는 생각은 기본인 것입니다.



  三吉는 서두에서 말씀드렸다시피  彼差別部落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곳이 어떤 곳이냐 하면 江戶새대에 士農工商란

신분보다 더 하위개념의 '非人'등의 자손들이 명치유신 이후

신분이 평등화 복권되었음에도 불구 계속하여

사회적으로 차별, 멸시 당하여 집단으로 모여 살게 된 집락촌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옛 백정마을과 비슷하다 하겠지요.

이렇게 천민 출신인 그가 학문과는 인연이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던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쓸 수 없을정도의 일자무학인 그가

장기에 대한 열정과 철학은 그가 구술하여 남긴 여러 저서가 이야기하듯

말년에는 지식인으로 대접받기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천민 출신이란 이유로 숙적 라이벌인 關根 9段을 이기고도

名人이나 王將의 타이틀을 획득할 수 없었던 것은

뿌리깊은 일본의 신분차별에 기인한 것입니다.

일본의 그런 고정관념이 얼마나 지독하냐하면 'ヨイトマケの唄'란

노래는 너무나 유명한데도 불구하고

土方(どかた,막일꾼)를 테마로 한 노래라는 이유로

방송을 한번도 타보지 못했다 할 정도니까요.

아무튼 죽고나야 그 진가를 알아준다고

사후에 일본장기연맹으로부터 名人位와 王將位가 추서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사후에 드라마틱한 그의 외길 일생은

연극을 위시하여 영화, 가요,

드라마, 紙芝居 등에서 많이 다루어졌습니다.



여기서는 그의 인간 역사보다는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노래 속에 등장하는 약간은 각색되었을 희곡을

중심으로 그의 이야기를 요약하여 펼쳐 보겠습니다.





  1907년(드라마 속의 연대, 실제연대와는 차이가 있는 것 같음)

大阪 天王寺 通天閣을 가까이 볼 수 있는 판자집 동네에 무학문맹이지만

장기만은 만만치않게 센(12살경에 이미 초단의 실력)

ぞうり(일본 짚신)직공[일설에는 다다미 직공]인 坂田三吉가

아내 小春(고하루)  딸인 玉江,  세식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三吉는 거의 매일 자신의 일거리는 내팽개친 채 장기에 열중하여

小春의 고생은 그야말로 말이 아닐 지경이었습니다.

어느날 三吉에게 關西장기동호회 주최의

全大阪(오사카)장기대회의 참가통지가 날아와 이에 뛸 듯이 기뻐한 三吉는

같은 동네의 포장마차 우동장사인 친구로부터

장례식용 하오리를 거의 강제로 빌려입고는

대회에 참가하게 되는데 연전연승한 三吉는

결승전에서 당시 청년棋士로서 제일인자며

關東棋界의 실세 關根金次郞과 대국하게 됩니다.
하지만 三吉는 고전끝에 千日手(같은 수를 세 번 반복하여 두는 일로 금지수 임.

당시 아마추어에는 적용하지 않았음)에 말려 지고 맙니다.

이에 격분한 三吉는 關根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움과 함께

프로기사가되길 결심하게 됩니다.

그런 三吉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내인 小春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딸과 함께 동반자살을 기도하여

미수에 끄쳤다는 사건이었지요.



三吉는 이에 엄청난 충격을 받아 프로기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굳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를 극구 말리는 것은 아내인 小春였습니다.

한번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난 小春는

남편의 장기에 대한 집념과 정열을 이해하게 되어

훌륭한 프로기사가 되어주길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는 이야깁니다.

그리하여 프로에 입문한 三吉는 프로의 길에 매진하게 되지만

나빠진 눈을 小春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수술받아 완쾌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14년 三吉는 프로기사로서의 기량이 늘어

생활도 어느정도 안정되어 갔던 무렵

당시 8단으로 승단되어 있던 숙적 關根와

대국하게 되는데 정식게임이 아닌 비공식 대국이라고나 할까요.

어쨌던 이 대국에서 三吉는 關根를 완파해버립니다.



그리고 1919년 三吉는 명인위에 버금가는 8단에까지 승단하여

문하에 제자도 가지게 되고 벼르고 벼르던 숙적

關根와의 정식대국을 가지게 되는데 제1국은 三吉의 선수로

關根를 걲었지만 그 무렵 三吉를 동행한 딸 玉江에게

小春가 위급하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이를 玉江는 三吉에게는 알리지 않고 홀로 大阪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2국, 三吉는 숨막히는 고전 끝에 대망의 승리를 올리게 되지만

그와 거의 같은 시각에 大阪에서는

그의 승리를 기다렸다는 듯 小春가 숨을 거두고맙니다.

승전보를 알리려던 三吉에게 비보가 날아들고

굵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외칩니다,  

"こはるぅぅ" (고하루우우)

이것이 드라마 속의 유명한 마지막 장면이지요.





  드라마나 노래 속에 담긴 즐거리는 진실 그대로든 각색이 되었던간에

大阪사람들의 감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하고 오랜

동서의 갈등(세끼가하라 合戰 이후)에서 東京을 꺾었다는

긍지와 승리의 상징으로 王將碑는 오랜 세월동안 그 자리에 서 있을 겁니다.

'道頓堀人情'의 노랫말처럼

"負けたらあかん, 負けたらあかんで東京に..." (지면 안돼, 지면 안돼 도쿄에...)

이렇게 大阪人을 격려하면서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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