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鶴田浩二

流轉/鶴田浩二......日本 侍(さむらい)傳統

작성자유덕인|작성시간07.11.20|조회수288 목록 댓글 2


1867년 보신전 때_ 사쓰마 구미(組)들의 모습을 펠리코 비토가 찍은 사진입니다 _Samurai of the

流轉-鶴田浩二

作詞 藤田まさと 作曲 阿部武雄
曲 제공 : 황 규원님

男命を 三筋の糸に
賭けて 三七 賽の目 くずれ
浮世 カルタの 浮世 カルタの
浮沈み


どうせ一度は あの世とやらえ
落ちて流れて 行く身じゃないか
鳴くな.夜明けの 鳴くな.夜明けの
渡り鳥


意地は男よ 情けは女(おなご)
ままになるなら 男を捨てて
俺も生きたや 俺も生きたや
恋のため

Satsuma clan, during the Boshin War period, circa 1867. Photograph by Felice Beato

 

일본 사회를 받치고 있는 네이션 에너지 중_ 칼의 사무라이와 꽃의 사쿠라_ 벚꽃을 드는 이들이 많습니다. 특히 칼의 문화_ 그 정신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펼쳐있습니다_ 사무라이들은 일반 평민 위에 군림하면서 엄청난 특권을 누렸지만, 반면에 배를 주릴망정 명예에 죽고사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혹독한 자기수양과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하층민들에게 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점이 의무로서 강조됐습니다. 12세기 이후부터 1868년 메이지유신 이전까지 일본사회 상층 계급의 삶의 자세로 자리잡아 온 이런 정신은_ 일본 전통사회 지배집단의 윤리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_  무사도는 일본을 상징하는 벚꽃과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고유의 정신이다”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사도는 일본을 이해하는 데 핵심 키워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_

 

반면에 우리나라는 선비 문화였지요_

이 사무라이의 정신에도 조선 선비 정신은 큰 영향을 미쳤지요_

 



완전 군장을 마친 사무라이_ Samurai with assorted weapons. 

 

bushi (武士)

일본 사무라이는 조선 선비와 같은 이념을 가지고 무조건적으로 주군을 섬기는 것을 신하의 도리로 받아들였다. 조선 성리학의 힘이 없었다면 일본은 새로운 영지를 찾아 다시 조선이나 중국을 침략하는 데 나섰을 것이다. 이처럼 일본의 침략성을 주군에 대한 충과 부모님에 대한 효의 이념으로 흡수하게 만든 것은 조선 성리학의 도덕성과 윤리성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19세기 중반 이후, 다시 침략주의로 돌아간 일본의 사상적 계기도 성리학에 있었다. 선비와 사무라이는 형제처럼 비슷하지만 사무라이는 칼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 호사카 유지

 

조선 선비와 일본의 사무라이_에 관한 한국에 귀화한 일본인 학자가 쓴글입니다

 

사무라이의 정신인 '무사도'의 성립에 조선 성리학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저자의 관점입니다. 전혀 생각치 못했던 관점이라 더 흥미롭더군요. 특히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하다 일본의 포로가 된 강항이라는 분은 일본에 가서 일본의 유학자에게 학문적인 영향을 주셨다고 합니다. 

 




누군가 조선시대를 "선비들이 플라톤의 철인정치(哲人政治)를 실험한 시대"라고 묘사한 적이 있는데 (도올씨였나요?) 다른 건 몰라도 그 묘사만큼은 저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수많은 문제가 있었겠지만, 그 정신만은 현대인도 쉽게 따르기 어려운 그 무엇인 거 같습니다. 끊임없는 자기수양과 절제, 학문(철학)과 예술을 동시에 연마하는 능력, 권력에 굴종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말하는 자세 등은 흉내내기 어렵죠.

조선이 망해가던 때 많이 생겼던 폐단들 때문에 유교란 고지식한 악습, 유학자는 시대를 못따라가는 고집불통 정도의 이미지가 주로 남아있긴 하지만, 그 이미지는 부당한 측면이 많습니다. 조선 초기만해도 성리학은 시대를 앞서가는 새로운 학문이었을테고, 왕조차도 백성의 목소리를 들어야한다는 상당히 선진적인 철학이었을테니까요. 어쨌든, 당시 선비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 약간이나마 엿볼 수 있던 거 같아 좋았습니다.

 

Samurai on Horse
Samurai on Horse
by Keishu Takeuchi 1861-1942

 

사무라이는 근대 일본까지 존재했던 막장 집단이지요_ 공통적으로 큰 칼을 두 자루 차고 다니며 상투를 틀고, 이상한 어깨뽕이 달렸으며 동그라미와 井자 무늬가 있는 옷을 입었다는 점이 있으며, 사무라이들의 막장 행각은 일본 역사서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일본의 정사속에서도 활약했습니다_  

 

원래 사무라이는 귀인(貴人)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이를 경호하는 사람을 말하며 한자로 侍(시)라고 씁니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 이후 무사계급이 성장하면서 셋칸케[攝關家:섭정과 관백벼슬을 하는 가문]와 잉[院] 등에서 경호를 위해 무사를 채용하자 점차 특수한 집단으로 세력과 신분이 상승하게 되었지오.
 
 
다음은 사무라이에 대한 자료입니다_
 
1192년 가마쿠라[鎌倉]막부가 들어선 뒤 사무라이는 실질적인 지배집단으로 부상한다. 에도[江戶]시대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사농공상(士農工商) 가운데 사(士)를 사무라이로 지정하여 사회 특권을 법으로 보장했다. 일본의 무사계급은 영주인 다이묘[大名]에게서 녹봉을 받으며 다이묘의 지역 안에서 행정과 사법의 직무를 맡았다. 일본에서 사무라이는 단순히 칼을 휘두르는 무사가 아니라 해당 지역의 질서유지를 담당하는 사회의 엘리트 계층이었다. 그러므로 사회 특권층으로 많은 권리를 누리기도 했지만 평민의 모범이 되도록 생활 규범 또한 엄격했다.
 
 
Samurai Warrior in Full Armor
Samurai Warrior in Full Armor
by Yoshitoshi Taiso 1839-1892
 
사무라이는 성(姓)을 가질 수 있는 특권을 가졌으며 칼을 허리에 차고 다닐 수 있다. 그리고 평민이 잘못을 범했을 경우 그 자리에서 목을 벨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특권층이 되기 위해 그들은 무술 뿐만 아니라 학문에 대한 지식이 요구되었다. 또한 자신의 주군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검소하게 생활해야 했으며 올바른 행동을 하였는지 항상 자신을 뒤돌아보고 명예가 훼손되었을 경우 사무라이의 명예를 위하며 할복해야 했다.
 
Dancing Samurai
Dancing Samurai
by Sadahide Utagawa 1807-1873
 
사무라이의 이러한 모습은 일본문화에 영향을 끼쳐 현재에도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일본인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할 수 있는 근검절약의 모습은 사무라이의 영향이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이 할복 자살하는 것은 사무라이들이 자신의 명예를 위해 할복하던 것이 전해진 것이다. 평민들은 사무라이에게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할 수 없었는데, 이는 일본인들의 겸손한 태도와 경어체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사무라이_ Samurai 

 

侍(さむらい)하면 떠오르는 것- 武士道

충(忠)과 무(武)를 중시하는 武士道는 충성. 희생. 신의. 예의. 결백. 상무. 명예 등을 중시하는 무사계급층의 도덕체계로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이 강했으며 일본의 통치이념을 이루기도 했다. 일본의 무사(武士)는 주군의 은혜와 보호에 대한 대가로 영주를 위해서 목숨 바쳐 싸우는 것이 주군에 대해 충성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식밖의 행위도 무사도(武士道)라는 명분아래 서슴없이 자행했고 싸움에서 졌을 때는 주인에 대한 충성으로 할복(切腹)을 했던 것이다.

 




그럼 왜 하필 배(腹)를 갈랐을까?

무사의 할복은 평안시대 이후 시작됐다고 전해지는데 봉건시대의 무사는 정신이 머무르는 곳을 배(腹)라고 여겨 무사로서의 책임을 지기 위해서 죽을 때 할복했던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무사가 죽을 때 할복하고 죽는것으로만 알고 있는데 칼로 자기 배를 그어 죽는 것이 아니고 할복의 실패를 막고 참혹한 고통을 빨리 없애기위해 스스로 배를 찌르려할때 뒤에서 동시에 목을 쳐주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4명이 있으면 2명이 남은 2명의 목을 치고 살아남은 2명중 또 한명이 한명의 목을 치고 최후에 남은자는 혼자서 할복해 죽어야 했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남은 사람이 더 무사적인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여겼다는 말도 있다.




할복 장소도 따로 있었다!

할복장소가 따로 있었다는 자료가 있다. 히메지성(姬路城)은 1346년 짓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성의 한쪽 구석에 외부랑 다 차단된 작은 공간이 있었으며 그곳이 바로 할복장소이었다. 아예 할복장소라고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일본 사무라이들은 일단 패해서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고 차라리 할복을 하면 높이 칭송을 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런 일본 무사의 충의와 신의를 상징하는 것이 할복이 됐으며 현재 일본의 조직폭력배 야쿠자들도 무사도 충의와 신의의 덕을 강조하며 충을 표시하는 단지(指つめ : 손가락을 자르는 관습)를 행하고 있다.



ヤクザ(야쿠자)와 侍(さむらい-사무라이)

ヤクザ라는 말은 원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라는 뜻을 가진 말로 폭력배를 지칭하는 은어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보통명사로 굳어진 것이다. 이들 ヤクザ 조직은 侍(さむらい)와 그 성격이 매우 비슷한데 충성과 의리를 중시하며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반성의 뜻으로 새끼손가락을 단도(短刀)로 자르는 것이 자신의 실패를 할복자살로 대신하는 侍(さむらい)의ㅣ 경우와 흡사하다. 또한 ヤクザ의 親分(おやぶん)은 武士계급시대의 영주에 子分(こぶん)들은 侍(さむらい)에 견주어 볼 수 있겠다.






侍(さむらい-사무라이)에 관한 뒷 이야기

1. 浪人(ろうにん)은 바로 여기서 온말!
현대 일본어에서 "실직자" 혹은 "재수생"을 뜻하는 浪人(ろうにん)이라는 말은 과거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武士를  浪人이라 칭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2. 지금의 운전 규칙이 侍의 칼과 관련 있다?

예전에는 칼이 비스듬히 부딪히는 걸 도발로 간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좁은 골목을 우측 통행 하다가는 왼쪽의 허리춤에 차고 있는 상대방의 칼과 부딪히기 십상이였는데 이 같은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기 위해 버릇처럼 왼쪽으로 걷기 시작한 것이 江戶(えど)시대에 보행예절이 되었고 이 후 자동차가 도입되면서 운전 규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 일본은 우리와 반대로 차는 좌측통행 사람은 우측통행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진짜로 여기서 나온 걸까?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黃圭源 | 작성시간 07.11.21 유회장님…장문의 さむらい에 대한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길어 다시 들어와 마자 읽어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작성자유덕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11.21 뉴지렌드에 있는 친구가 보내온 글입니다.황규원선생님 글을 보고 곡도 함께 인용했습니다.너무 긴것같은데 그대로 옮겼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