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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윤봉문

순교자 윤봉문 요셉 치명기

작성자제채윤|작성시간15.03.31|조회수462 목록 댓글 0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자료집 제5집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 시성 주교 특별위원회

 

 

 

 

124. 윤봉문(尹鳳文, 요셉) : 1852 ~ 1888

 

1) 『병인치명사적』 권18, 42~43쪽

 

윤(봉문) 요셉

본디 양산 사람으로 거제(巨濟)와 살더니, 무자년(1888년) 군난에 통영(統營)포교에게 잡혀 중영(中營)에 갇혔다가 진주(晋州)진영으로 이수를 왔더니, 연장 구연팔이 잡아들여 물어 가로되 “네가 무엇을 하느뇨?” 답 왈 “천주교를 하노라.” 영장이 또 문 왈 “네가 천주교를 하면 일러 보라”하거늘 천주 십계를 이르니, 영장이 또 문 왈 “네가 천주교를 누구에게 배웠느뇨?” 요셉이 답 왈 “양대인(洋大人, 즉 서양 선교사)에게 배웠노라.” 영장이 또 문 왈 “ 네가 그러면 진서(眞書, 즉 한문)로 배웠느냐? 언문으로 배웠느냐?”하거늘 요셉이 답 왈 “언문으로 배웠노라”하니, 영장이 왈 “ 언문으로 배웠으면 가짜를 배웠구나” 하고 또 가로되 “너는 윗 관(官)에서 도적으로 죽이라는 본부가 있는 고로 내가 죽이겠노라”하니, 요셉이 답 왈 “ 지금 천주교하는 사람을 죽일진대. 영문으로 초보(草報)하여 회보(回報)후에 죽여 주소” 하니, 영장이 왈 “네 말이 쓸데없다”하고 오문(午門, 즉 남문)으로 보내 가둔 후에 모든 하인에게 분부하여 가로되 “이 일을 누설치 말라”하고 옥중에서 가만히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37세요, 무자 2월 20일(양력 4월 1일)이더라.

증인 동진규 외인 진영 장교라. 지금 살아 있고, 이 사정은 진주 비라실 장 도밍고(도미니코)가 동진규에게 친히 들었느니라.

 

 

 

 

 

 

 

 

 

 

 

2) 로베르 신부의 보고서

 

① 1887~1888년도 연말 보고서

 

저는 처음으로 거제에 갈 수 있었습니다. 거제도는 한 지역을 이룰 정도로 아주 드넓은 섬으로 이곳에는 부사(府使)와 별장(別將)이라 불리는 여러 무관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매우 엄격한 태도를 보이는 포졸들 때문에 섬을 들어가기는 몹시 힘들었지만 제가 소지한 여권(즉 호조)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저는 작은 배 한 척을 구할 수 있었고, 경비대의 감시가 있기는 했지만 공소가 마련된 마을까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외교인들도 곧 제가 도착한 것을 알게 되었는데, 새 신자들의 집들이 비신자들의 집들에 둘러 싸여 있어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외교인들은 제가 도착한 저녁부터 저를 보러왔고, 제게 무수한 질문들을, 가령 제나라는 어디이고, 그곳에 두고 온 제 부모들은 어떤 사람인지, 또 제가 이 섬에 여행을 온 목적은 무엇이고, 제 나이는 얼마인지 등을 물었습니다. 이런 질문들에 저는 모두가 만족할 정도로 답을 해 주었고, 이내 저의 복사를 시켜 교리를 설명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교리가 찬탄할 만하다고 여겼고, 입교하고 싶다는 뜻을 보였으며, 이를 위해 교회 서적을 달라고 청했고, 저는 그들에게 나눠주도록 했습니다. 그 다음날 이들 외교인들은 교리문답 시간은 물론이고 세례 의식에도 참석했습니다. 때마침 바로 그 날 회장이 세례성사를 받을 영세자 15명을 준비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들 외교인들은 제가 떠날 때에도 인사를 하러 왔고 모두가 천주교인들이 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두 달 뒤 저는 그들이 약속을 지켜 그들 중 40명 이상이 기도문과 교리문답을 배우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귀가 그 같은 진실의 완벽한 승리에 대해 대단히 질투를 하여 그로부터 몇 달 뒤 이 신생 교우촌을 위에서부터 바닥까지 완전히 와해시켰습니다.

 

한 순교자의 이야기를 전해야겠기에 저는 앞서 말씀드린 사실들을 되풀이해야겠습니다. 즉, 윤씨 가족에 의해 이 섬에 천주교가 도입된 때부터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양산 지역 출신의 윤(사우)스타니슬라오는 1866년 대박해가 일어나자 아내와 당시 16~18세 가량이던 두 아들(즉 윤경문 베드로와 윤봉문 요셉)을 데리고 거제도로 들어와 은거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다시 들어왔을 때 그는 함안 지역으로 가 정착했습니다. 하지만 외교인들과 혼인한 그의 두 아들은 여전히 거제도에 남겨 두었습니다. 그는 수차례 성체성사를 받았으며, 회장으로 임명되어 열의를 갖고 인근 지역의 외교인 개종에 힘썼습니다. 그가 사는 마을 안에서만 한 해 성인 영세자가 30명까지 될 정도였습니다. 그의 아들들도 매년 부활절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부친은 살아 생전과 같은 모습으로, 즉 열심한 교인으로 사망했고, 그의 맏아들인 (윤경문) 요한(베드로의 잘못)이 부친이 살던 지역의 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에게 그의 동생인 (윤봉문)베드로(요셉의 잘못)[진주에서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한 그 베드로입니다]와 함께 거제도 주민들의 개종 일을 맡겼습니다. 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교리문답과 기도문을 열심히 익힌 열심한 이들에게 영세의 혜택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곳 사람들이 섬밖에 나가는 것은 절대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에 뭍으로 나와 영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십여 명 영세자를 준비 시키면 직접 가겠다고 확언했습니다. 이 두 용맹한 새 신자들은 제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고, 신의 섭리가 베푸신 아주 특별한 도우심으로 그들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성인 영세자 15명을 준비시킨 후 그들은 섬에서 저를 맞이했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교리를 가르친 모든 이들과 함께 그들의 집에서 성체성사를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했기에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누렸으며, 다시금 보다 많은 섬 주민들에게 신앙을 줄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마귀가 그들의 선의를 방해했고, 그들이 그토록 애써 일군 것들을 뒤엎었습니다.

 

제가 섬에 도착하자마자 회장의 동생인 윤(봉문)베드로(요셉의 잘못)가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웃한 항구(즉 통영)의 무관에게 세차례나 붙잡혔습니다. 베드로(요셉의 잘못)는 대담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아주 비열하게 자유를 얻느니 감옥이 더 낫다며 배교를 거부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몸값으로 요구한 100냥을 내려하지 않자, 그의 집에서 압수했던 교회 서적들을 돌려주며 그를 돌려보냈습니다. 그 뒤 여러 달이 지나도록 다시 그를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섬을 떠난 후 이웃에 살던 잔반(殘班)하나가 윤 베드로(요셉의 잘못)로부터 돈을 갈취하려는 목적으로 하인들을 보내어 그를 잡아오도록 했습니다. 그 자는 100냥을 자신에게 내지 않으면 부사가 직접 베드로(요셉의 잘못)를 체포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요셉의 잘못)는 그들을 따라가는 것은 물론이고, 요구받은 금액을 내는 것은 더더욱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그 잔반도 애써 때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제)읍의 아전들의 친구였기에 포졸 몇 명을 어렵지 않게 구했고, 우리의 새 신자는 또다시 체포되어 이번에는 읍의 진영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무수한 방식으로 그를 위협한 후[그를 때리지 못했는데 당국이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80냥만 준다면 풀어주겠다며, 그렇게만 하면 장래에 그나 그의 마을 주민들이 두려워할 게 전혀 없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요셉의 잘못)는 자신만큼이나 그가 교리를 가르친 젊은 새 신자들이 평온히 살도록 80냥짜리 어음에 서명하는데 동의했고 이후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합의한 금액이 지불된 지 얼마 못가서 이번에는 부사가 직접 내린 체포령이라며 포졸들이 두 번째로 찾아 왔습니다. 망설임 없이 회장이었던 그의 형(즉 윤경문 베드로)이 그들을 따라 관아로 갔습니다. 사교(邪敎)를 따른다는 부사의 비난에 요한(베드로의 잘못)은 거듭 ‘자신은 사교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고, 전날처럼 곤장을 맞고 투옥되었습니다. 이틀이 지나자 부사는 그를 다시 심문은 하지 않고 읍 밖으로 내쫓으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맨 처음 베드로(요셉의 잘못)를 붙잡았다가 한 푼도 갈취하지 않았던 그 유명한 (통영의) 무관이 다른 이들이 자신보다 능숙하게 60냥을 얻어냈다는 소식을 접하자, 통영의 통제사를 찾아가 거제도에 사는 윤씨 가족이 임금님이 금하는 천주교를 실천하고 있다는 이유를 대며 그들을 체포하도록 체포 영장을 내려 달라고 청했습니다. 이에 통제사는 그와 관련해 수도로부터 어떠한 지시도 받은 바 없다며 그를 돌려 보냈습니다. 통제사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자, 그는 이번에 영장을 찾아 갔습니다. 통제사가 자리를 비우고 있던 터였는데, 영장은 거제도의 천주교도인들을 체포하라며 포졸들을 보냈습니다. 이 소식에 윤 베드로(요셉의 잘못)는 그를 석방하고자 최선을 다했던 담당 지역의 부사에게 호소했으나, 그 역시 통영 포졸들의 수와 잔악성에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베드로(요셉의 잘못)는 다른 신자 두명과 마을의 외교인 몇 명과 함께 또 다시 체포되었으며, 가옥들은 약탈당하고 소 22마리도 호랑이보다 더 잔악한 자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모든 주민들이 이미 도망을 친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고, 용감한 자들이 되길 바란 이들만이 포박되어 매를 맞고 형방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이송 도중 윤 베드로(요셉의 잘못)와 함께 붙잡힌 신자 두 명중 한 명이 바다로 몸을 던졌습니다. 갖은 노력 끝에 그를 건졌지만 반쯤 죽은 상태였습니다. 포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 그를 돌보라며 그의 아들을 풀어 주었고, 그 결과 베드로(요셉의 잘못)만이 몇몇 외교인과 함께 이송되었습니다.

 

영장 앞에 끌려간 우리의 새 신자(즉 윤봉문 요셉)는 천주교인임을 고백했고, 자신과 함께 붙잡힌 외교인들은 천주교를 실천하지 않으니 그들에게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청은 받아들여졌고, 이어 공범을 대라는 법정 명령에 그는 침묵을 지켰습니다. 수 차례 고문을 받았으나 그는 일말의 약함도 보이지 않았으며, 끝내는 밀고를 받아내고자 그의 입을 때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주교의 큰 스승님께서 서울에 계시는데, 백(白)대감[블랑 주교의 조선식 이름]이라 불립니다. 당신들이 할 수 있다면 그 분을 잡아 오시지요?” 그런 다음 그는 다시 감옥으로 보내졌습니다. 또 다른 심문을 받는 도중 배교를 하면 그 대가로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하자,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습니다. “싫소, 나는 하느님을, 천지와 천인과 인간을 창조하신 분을 절대 부인하지 않겠소. 자기 부친이나 부사나 임금을 부인하는 사람을 뭐라 하겠소? 하물며 생사의 주인님을 어찌 모른다고 할 수 있겠소?” 영장은 본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대구 감사에게 의뢰했고, 감사는 이러한 답을 보내왔습니다. “천주교인들은 모두 도둑들이니 진주로 보내 처형토록 하시오.” 그리하여 베드로(요셉의 잘못)는 이 마지막 법정으로 이송되었고, 그가 실천한 것이 무엇이냐는 영장의 질문에 우리의 새 신자는 큰 목소리로 천주십계와 성교사규(聖敎四規)를 암송했습니다. 이에 영장이 다시금 묻기를 “그 하찮은 것들은 모두 어디서 익혔는가? 한문 서적들을 통해서인가 아니면 한글 서적들을 통해서인가?” “한글 서적들을 통해 천주교를 익혔소.” “그렇다면 자네는 도둑일세. 도둑들만이 그런 것을 배울 수 있으니, 자네는 죽어 마땅하네.” 그러자 베드로(요셉의 잘못)는 대꾸하기를 “ 거의 온 세상 모든 곳에서 따르고 있는 종교를 따른다 하여 어찌 저를 죽일 수 있습니까? 임금께 여쭤보십시오. 만일 그분께서 제게 사형을 내리신다면 저는 제가 흠숭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죽는 것을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이에 영장은 되풀이 하여 말하기를 “자네는 도둑일세. 자네의 말 자체가 자네가 유죄임을 판결하고 있네.” 그런 다음 영장은 감옥의 쪽문으로 베드로(요셉의 잘못)를 보내도록 한 다음 간수들에게 밤사이 윤 베드로(요셉의 잘못)를 교살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그같은 명령은 즉시 이행되었다. 이튿날 아침부터 방이 붙여졌는데, 거제도에서 붙잡힌 큰 도둑을 사형에 처했다는 내용이었다. ······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다. 이 말이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위해 흘린 윤 베드로(요셉의 잘못)의 피가 거제도에서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게 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우리의 성교회는 악마와 그 권속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들에서처럼 거제도에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운좋게도 이 거룩한 순교자를 알았고, 수 차례 그에게 성사를 거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가 열심하고 건실하며, 비신자들의 개종에 대한 열의가 가득했던 신자임을 아주 자신있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이미 저는 그를 눈여겨 보았고, 그가 저를 도와 섬 지역의 신앙 전파에 힘써 주리라 여겼습니다. 분명 선하신 하느님께서 그의 선의에 흡족하시어 그를 제게서 앗아가시는 대신 가장 충실한 벗들에게만 마련하신 월계관을 주시려고 했나 봅니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의 경우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지요. 저희로서는 오로지 신성한 섭리의 숨은 계획에 겸허하게 순종할 뿐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선의로 하늘나라에서 저희를 위한 최고의 중재자가 되길 바라셨습니다.

 

 

② 1888~1889년도 연말보고서

 

지난해 제가 처음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거제도에서 저는 20여명의 새 신자들에게 영세를 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제가 생각했던 대로 장래에 대한 희망이 많은 신생 교우촌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윤(봉문) 요셉의 순교 이후, 우리의 젊은 교우들은 그들의 소유물을, 재산과 가옥을 모두 잃었고, 법에 호소할 방도도 몰랐습니다. 이 불우한 이들은 오랫동안 수도로부터 도움이 있기를 기대했으나 소용이 없어지자 대부분 낙심하여 신앙 실천을 포기했습니다. 그럼에도 몇몇 열심한 이들은 적어도 그들의 집은 돌려 받으리라 계속 희망하며 여전히 신앙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올해 서울에서의 제 노력이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한다면 이 휼륭한 신생 교우촌이 단순히 멋진 꽃에 그치지 않을까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너무도 약하여 첫 햇살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대낮의 열기에 시들어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3) 김후상의 <거제도 천주교 연혁>

 

(윤경문 베드로 회장은) 1887년(정해년) 11월 15일에 로베르 김 (보록) 신부를 모시고 (거제) 진목정(榛木亭)에 와서 성사를 보니, 그때에 새로 영세한 자 15인이더라. 이 해도 다 저물고, 어느덧 1888년(무자년) 춘절을 당하여 대지에는 꽃 소식을 전하는 봄바람이 훈훈한 향기를 뿌리거늘, 비애많은 베드로에게는 뜻 아니한 찬서리가 내려 거제부사 박병용(朴炳容)으로부터 이름모를 호출장이 왔다.

베드로 관병을 쫓아 관전에 들어가니 이유 모를 곤장 3대를 내리친 후 “이후 찾을 때까지 돌아가서 있거라” 하는지라. 부득이 쓰라린 가슴을 눌러 안고 돌아가 소문을 들으니, 진목정에 주모(朱某)란 자가 아주(鵝州) 윤씨(尹氏) 가문에 취처하였더니, 거기 상피(相避)사건이 돌발하여 이것이 관아에 알려진 바 되어 나졸들이 죄인을 잡으러 나왔더니, 주모의 관계인 줄 인증하고 2월 7일에 진목정 주모의 집을 포위하니, 그들은 당면한 화를 면하려고 전화위복의 무슨 음모를 꾸미고서 나졸들과 무슨 귓속을 하고 주씨와 아내 윤씨가 공동 타작 마당에 나서서 “야, 이 천주학(天主學)쟁이 놈들아, 너희 때문에 내 자식 죽고 뭇(사람) 죽음하겠다. 천주학을 하려면 너희나 하지 왜 남까지 못살게 하느냐”고 고래고래 소리질러 죽을 듯이 날뛰니, 나졸들은 곧 달려들어 (베드로의) 동생 요셉 용봉(즉 윤봉문)과 진 요왕(陳壽富 사도 요한)과 주남이(朱南伊)외인과 덤박골 산중에 7일간 피신하던 도마(韓祥弼 토마스)를 잡아 결박하고 ‘동료와 친척을 대라’고 추열함에 혹은 금전으로 속량(贖良)하고, 그리 못하는 이는 기어이 잡혀 가게 되었다 하는지라.

베드로 이에 곤장 맞은 일과 이 군난이 관명(官命)인지 아닌지 진상을 알아보아 구원의 손을 뻗치기 위하여 즉시 서울 길을 잡아드니 그간 동생(즉 윤봉문 요셉)과 처자의 안부가 궁금하여 떠나온 고향 거제 하늘을 자주 바라보더라. 이때 한 다두(韓仁斗 타대오)는 갖은 고생을 다하여 가며 대구 새방골(大邱 上里洞)에 은신하신 로베르 김 신부님께 사정을 품달하는 중이더라.

베드로 서울에 이르러 백 주교(白 Jean Blanc)께 세세 전말을 주달하고 돌아오니, 슬프다, 그동안에 동생 요셉(鳳用, 즉 윤봉문)은 천주학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통영(統營)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은 후에 필경 진주(晋州)로 이송될 때 굵은 칡으로 발 뒷꿈치를 자못 꿰어 끄니 그 아픔이 지극하여 견디기 어렵더라. 그러나 요셉은 더욱 용맹을 다하여 바야흐로 진주 옥에 이르러 지루한 3개월 간에 갖은 문초와 혹형을 당하니 그 고생이 오죽하며, 오랫동안 옥중에서 의복과 여러 가지 불편함을 어찌 다 말하리오! 필경 널(널빤지)틈으로 올가미를 넣어 교살하니, 고난의 끝이요 영광의 빨마를 잡음이더라.

그동안의 자세한 사정은 모르거니와 비라실(長在里) 장(長)회장이 그 시체를 거두어 안장하였더니, 그 후에 후손들이 진목정 족박골(足泊谷)산으로 이장하니, 그 아들과 한가지로 성당을 건너보며 영화로운 부활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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