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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성지개발 '신앙의 등대' 삼을 것[현장탐방] 거제 공곶이 '박해바위' -한남일보 2010.06.03

작성자요한 세례자|작성시간15.02.09|조회수149 목록 댓글 0

> 기획·특집 > 특집
순교성지개발 '신앙의 등대' 삼을 것[현장탐방] 거제 공곶이 '박해바위'

 

-공곶이는 곧 세계 천주교인의 성지
-성역화 사업 본격 추진 각계 협조를

   
▲ 순교자 윤봉문(요셉)의 초상
거제시 일운면 ‘공곶이’에 신앙의 성지 ‘박해바위’라는 곳이 있다. 예구로부터 동쪽방향 약4km 쯤 거리의 언덕을 넘고 가파른 비탈길을 지나면 빽빽히 둘러 쌓인 동백나무가 하늘을 가린다. 2~3월이면 만개한 동백꽃이 관광객을 품는다. 이곳을 지나면 두 개의 바위가 바다 절벽 위에 있다. 위쪽에 가마처럼 생겼다고 ‘가마바위’, 그 아래에 바닥이 넓다하여 ‘너렁바위’, 합쳐서 ‘가마너렁바위’라 일컫는다. 이 바위에 올라서면 멀리 홍도가 보이고 밖 섬(외도) 안 섬(내도) 형제섬이 눈에 들어온다. 날씨 좋은 날은 동남방 저 멀리 대마도가 아련히 나타난다. 오른쪽에 해금강이 있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깃대봉, 서이말 등대가 보인다. 잔잔한 바다는 푸르름을 더하고 깎아지른 기암절벽이 장관이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이 바위를 ‘박해바위’ 또는 ‘만남의 바위’라고 한다. 무슨 사연일까. 1866년 천주교에 가해진 혹독한 병인박해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남 양산 사람 윤성진(尹成進, 세례명: 스테파노)과 동생 윤사우(仕佑, 다니슬라오)가 가족과 함께 박해를 피해 동래로, 부산으로 거처를 옮기며 숨어 다니다 박해가 없는 일본으로 갈 목적으로 이곳까지 왔다. 그러나 거친 풍랑 때문에 일본으로 가는 뜻은 접고 말았다. 그러나 대원군이 내린 박해의 된서리는 이곳이라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결국 가족 모두 뿔뿔이 흩어져 몸을 숨겨야했다. 이런 거운데 서로의 안부가 무척 궁금했다. 가족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헤매다 이 바위에서 부싯돌을 쳐 담배를 피울 때 이 냄새가 주위에 퍼져 사람이 있는 걸로 알고 찾아 서로 만났으니 그 감격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통영 욕지도에 가려다가도 풍랑이 심해 거제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 이후 예구 공곶이에서 머무르게 됐다. 박해를 피해 이 바위에서 만남의 기적을 이루었기에 거제지역 복음화의 씨를 뿌리게 됐으니 신자들이 의미 있는 바위로 여김은 당연하다.

   
▲ 거제지역 천주교 전래와 박해시기의 역사를 말하는 강명식옹. 6대째 천주교 가족이다.
박해를 피해 다니며 연명해 가는 이들의 삶은 비참 할 수밖에 없었다. 형 성진은 구천동 평지골 산꼭대기 빈 움막집에서 몸을 숨긴 채 초근목피로 목숨을 부지해 가다 선종했다. 동생 사우도 진목정(옥포)에서 남의 집 구들장 놓기, 날품팔이와 필묵장사로 연명했다. 어느 날 진(陳진보)씨 집에 들러 대화하다 그만 천주교 교리서를 놓고 화장실에 다녀오게 됐다. 그사이 진씨는 이 책에 흥미를 갖게 되고 자세한 설명을 들은 그는 거제 최초의 신자가된다. 세례명은 요안. 이를 계기로 사우의 둘째 아들 봉문(鳳文, 요셉. 鳳用이라고도 함)과 그의 딸 순악(順岳, 아녜스)이 결혼하게 된다. 봉문의 처가살이도 이때부터다. 밤엔 바다에 나가 고기를 낚아 주린 배를 달래고 낮엔 사람을 피해 방에서 묵상으로 일관했다. 사실 이 지역은 거제를 통틀어 해초, 고동, 소라, 전복 등 해산물이 풍부한 곳으로 알려진다. 장남 경문(景文, 베드로. 京瑞라고도 함)은 친하게 지낸 한정선(韓廷善, 바오로)을 전도, 거제의 두 번째 교우가 된다. 경문은 주관옥(원선시오)의 둘째 딸 또금(又金, 아델라)이와 결혼한다. 이 무렵 부친 윤사우는 길을 떠나 함안 가등이 에서 살다 1883년 선종했다.

그런데, 한 곳에 너무 오래 숨어 지낸 탓일까. 결국 봉문은 관원들에게 붙잡혀 천주학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통영으로 압송되었고 여기서 받은 문초와 형벌은 혹독했다. 또 진주로 이송돼 4개월간의 이루 말 할 수 없는 문초와 혹형을 당하다 끝내 순교했다. 올가미를 씌운 머리를 널 틈으로 넣어 교살한 것이다. 장재리(長在里)의 장씨라는 회장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암장한 것을 후손들이 진목정(옥포) 족박골 가파른 산에 이장, 오늘에 이른다.

당시 ‘천주학을 버리라’ ‘배교하라’는 강요가 있지만 그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은 신앙수호는 후손들에게 ‘신앙의 등대’가 되고 있다고 한다. 죽음을 이긴 신앙의 승리. 그래서 그는 시성시복(諡聖諡福)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신앙의 승리를 일궈낸 그는 죽지 않았고, 다시 부활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을 추진하는 올곧은 신앙인이 있다. 강명식(姜明植, 79. 바오로)옹. 증조부에서 손자까지 6대째 천주교 집안이다. 예구에서 박해바위로 가는 중간 지점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 그에게 성역화 사업 추진 계획을 들어봤다.

   
▲ 거제 공곶이에서 중심을 성역화 사업이 추진된다고 설명하는 강옹
-윤봉문(요셉)에 대한 시성시복이 추진되고 있다면서요.

“우선 복자위에 올라야 하고 그래서 124위 시복부터 조사 중에 있는데 윤요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절차를 거쳐 금년 내로 교황청에 자료가 접수되리라 봅니다.”

-시성이 되자면 신앙적인 기적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103위성인 시성처럼 전래 200년 역사에 괄목한 성장을 이룩한 것은 하느님의 뜻과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셨다는 점을 평가하고 있다고 봐요. 현재 천주교 한국신자는 500만이 넘고 거제지역은 6개 본당에 16,000여명이지요.”

-성역화 사업은 어떻게 추진되고 있나요.

“금년부터 마산교구에서 ‘윤봉문(요셉) 순교자 순례 길’이라고 공식명칭을 지정했어요. 이제부터 성지개발이 시작되는 것이죠. 옥포에서 예구공소- 공곶이- 서이말- 가마너렁바위(박해 바위)에 이르기 까지 순례코스가 될 겁니다. 이미 지난 5월 마산교구내 각 본당 청년연합회 간부 등 100여명이 성지순례를 시작 했습니다. 또 윤요셉의 묘소가 가파른 곳에 있어 공곶이에 이장하려 합니다. 거제 박물관 뒤쪽에 모실 계획입니다. 현재 공곶이 가파른 언덕의 계단 설치도 그의 형 경문(베드로)이 앞으로 순례자가 많이 올 것을 예상한 아이디어 였어요. 제가 30대 초에 진주에서 이곳에 왔는데 아마 이런 일을 할 사명이 있어서 왔는가 생각합니다.”

-성역화가 이루어지면 교회와 지역에 어떤 점에서 도움이 됩니까.

“우선 목숨을 바치면서 지켜온 신앙은 신자들에게 많은 깨우침을 줄 것입니다. 천주교는 교황을 중심한 단일 종교입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성인이 나오고 성지가 지정되면 곧 한국은 물론 세계적인 성지가 된다는 점에서 크게 유익한 일이 많이 생길 것으로 기대 됩니다. 세계 천주교인들의 성지순례코스가 될 수 있단 말입니다. 성역화가 잘 이루어 질 수 있도록 거제시를 비롯한 정부와 각계각층, 시민들의 협조를 바랍니다.”

강옹의 가족은 모두가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다. 삼촌과 동생이 신부, 고모가 수녀, 조카가 수사로 있다. 일가친척, 외가친척을 합쳐 25명 정도가 성직자 수도자다. 장모는 순교자 윤봉문의 외손녀. 뿐만 아니라 부인 지상악(池相岳, 75) 여사도 외삼촌, 고모가 각각 신부, 수녀로 있다.

 

http://www.hannam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9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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