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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홈피자료]하느님의 종’ 윤봉문 요셉 순교자 묘지 이장-교구보(가톨릭마산)> 인터뷰&특집 2013.05.03 10:48 저자 미디어국

작성자요한 세례자|작성시간15.02.15|조회수55 목록 댓글 0

지난 2013년 4월 20일(토)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윤봉문 순교자 묘
지 이장을 위해 주교님을 비롯한 관계자들과 신자 100여 명은 순교자 묘지
에 모여 순교자 유해 발굴 과정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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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6시 30분, 기본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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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40분, 시작성가, 시복시성 기도문 바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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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43분, 이장 관련자 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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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46분, 본격 발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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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 20분, 유골이 전체적으로 드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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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시 28분, 교구장 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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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3시 30분, 지세포 성지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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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3시 38분, 묘소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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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3시 50분, 하관 완료

    
이번 순교자 묘지 이장은 거제지구 사제단과 신자들이 묘소 이장의 타
당성이 담긴 청원서를 교구장 주교님께 올리면서부터 준비되어 왔다. 시복
시성 주교 특별위원회 마산교구 담당사제 이성현 요한 신부는 묘지 이장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하느님의 종 순교자 윤봉문 요셉의 묘소 이장 청원서’
를 주교님께 제출하였다.

   
청원서의 내용을 보면, 현 위치(거제시 옥포 2동 1509-2)에 있는 순교자의 묘
소는 산세가 높고 터가 좁아 신자들의 접근이 어려울 뿐 아니라, 순교자가
안장된 윤씨 가문의 선산이 타인에게 매도되어 순교자를 모시기에 적합하
지 않는다는 것이 이장의 사유이다.

    
주교님은 청원서의 내용을 검토하시고 묘소를 이장하는 것이 합당하다
고 판단하여 ‘하느님의 종’ 윤봉문 요셉 묘소 이장을 위한 교구장 교령敎令
과 훈령을 2013년 4월 18일에 발표함으로써 묘지 이장이 현실화되었다.
새로운 이장터는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 산 103-12에 위치한다. 이곳은
2000년 9월부터 거제지구 사제단과 신자들이 윤봉문 순교자 묘소 이장과
성지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던 곳이며, 주변 경관이 수려할 뿐 아니라
신자들의 접근이 용이해 대규모 신심행사를 거행하기에 적절한 곳이다.

 

 

윤봉문 순교자

 

윤봉문 요셉은 경상북도 경주 인근에서 윤사우 스타니슬라오와 막달레나의 둘째 아들로 태
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족은 1866년의 병인박해로 재산을 몰수당한 뒤
양산으로 이주하였다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거제도로 건너가 정착하였다. 요셉
의 부친 윤사우는 비밀리에 천주교 신앙을 전하고 다녔는데, 우연한 기회에 옥포에 있던 진진부
요한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입교시키게 된다.이러한 인연으로 윤봉문 요셉은 장성한 뒤 진요
한의 사위가 되어 옥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1888년 거제도에서 박해가 일어나 윤봉문은
다른 교우 2명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그 혼자만 통영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
다. 그러나 그는 모진 형벌에도 배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상부의 지시로 진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도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지만,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순교자는
1888년 4월 1일 진주 감옥에서 교살絞殺당해 당시 3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순교자의 유해는 진주 장재리 공소의 교우들이 거두어 공소 뒷산에 가맹장하였다가 10년 뒤
인 1898년경 거제도 옥포 앞산의 족박골에 안장하였다.

 

윤봉문 요셉 순교자 묘지 이장의 의미와 우리의 자세

신앙의 자유를 찾아 헤매던 여정처럼 순교자의 인생도 죽어서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찾아 헤매는 모습이다. 순교
자의 유해가 남의 땅에 모셔져 접근이 어렵던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거제 교우들이 순교자의 희생과 신앙을 기리
고 하느님 백성이 순교자의 신심에 더욱더 잘 접근할 수 있게 하려고 2013년 4월 20일 그가 거제에 처음으로 발을
내려놓은 지세포 인근 산자락에 순교자의 묘를 이장하게 되었다.

    
이장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순교자의 유골이 너무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에 놀라워하였다. 아울러 다른 유골
에 비해 우측 골반뼈와 꼬리뼈가 많이 상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점과 발목 밑으로 뼈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는 점은 순교자의 고문이 얼마나 심했던가를 짐작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
낸 순교자는 어쩌면 이곳 지세포로 다시 돌아오고 싶으셨는지 모른다. 그 순수하고 맑게 신앙하던 처음처럼 돌아
가고 싶어서 그렇게 백골이 되어 기다리고 계셨던 건 아닐까.

   
최근 시복시성 움직임으로 마산교구 신앙의 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이 각 지구에서 일어난다. 성지聖址 개발의 목
소리가 한층 더 커지는 모습이다. 하지만 성지聖址는 개발이 아니라, 회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신앙 선조들이 죽으
면서까지 증언하셨던 그 신앙의 모습을 오늘날 우리 삶의 자리에서 다시 찾는 것이 진정한 시복시성을 준비하는
자세일 것이다.

 


한국천주교회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마산교구 담당사제 이성현 요한 신부

 

 

 

저희들 마산교구 홈피 교구보(가톨릭마산)에 미디어국에서 등록한 내용을옮겨왔습니다.
미디어국에서 쉽게 이해할수 있도록 순교자의 파묘,발굴, 이장 모습과 내용을 잘올려주셔서

이해를 돕고자 내용옮겨왔습니다. 아래 링크주소는 교구보를 방문해 원문을 보시면 더 좋을듯하여

주소올려봅니다. 미디억국 담당자님들께서 수고가 정말 많으셨네요 감사드립니다.

 

http://cathms.kr/xe/gallery_2/16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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