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도서방

[추천]지극히 글쓴이 취향인 시집 추천드려요!

작성자이구아나|작성시간17.10.14|조회수1,100 목록 댓글 2




막차의 시간
김소연


버스가 출발의 형식으로써
우리를 지나쳐버렸다

멀어졌지만
저것은 출발을 한 것이다

멀어지는 방식은 모두 비슷하다
뒷모양을 오래 쳐다보게 한다

버스는 한 번 설 때마다 모두의 어깨를 흔든다
집에 갈 수만 있다면 이 흔들림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아침이면 방에서 나를 꺼냈다가
밤이면 다시 그 방으로 넣어주는 커다란 손길
은혜로운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고구마를 키운 이후로
시간도 얼마나 무럭무럭 자라는지를 알게 되듯
슬픔 뒤에 더 기다란 슬픔이 오는 게 느껴지듯

무언가가 무성하게 자라지만
예감은 불가능해진다

휙휙 지나쳐 가는 것들이
내 입김에 흐려질 때

차가운 유리창을 다시 손바닥으로 쓰윽 닦을 때
불행히도 한 치 앞이 다시 보인다

몸이 따뜻해지는 일을 차분하게 해본다
단추를 채우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둔다







지하 1F에 대해서
김행숙


여기서는 네 개의 층을 볼 수 있다. 옥상은 쏟아질 듯한 산을 밀어내고 있다. 대성고등학교 건물 일층과 지층은 한남연립 마동이 가리고 있다.
지하에 대해서라면 한남연립 마동 베란다에서 욕망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당신의 지하를 구경할 수 있는 베란다를 욕망한 때가 있었다. 거기서도 널어놓은 팬티는 잘 마르는가?

당신은 방학 중인가? 대성고등학교 남자애들은 방학 중이다. 빈 교실에 왜 커튼은 마스크처럼 입을 막는가? 당신은 정말 방학 중인가? 혹시?

마스크 뒤에서 사내애가 자위를 하고 있다. 나는 세상에 꼴리는 게 많아. 이유 따위는 없어. 입을 조금 열었지만 그는 불특정한 남자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커튼이 약간 구겨졌다가 괜찮아, 하면서 팽팽해졌다.

학교 옥상은 죽지 않고 병신이 될까 봐 무서운 곳이었다. 당신은 어디 있는가? 나는 갈 데까지 갔어도 당신의 지하를 구경할 수 있는 베란다는 욕망의 영역이다.
나는 저녁에 화분을 사러 나갈 것이다. 나는 베란다의 여자답게 꽂힐 것이다. 물 주러 오는 남자는 병신이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狂人行路
심보선


길 위에서 나는 두려워졌다. 대낮인데도 어둠이 날 찝쩍댔다. 어젯밤 잠 속에선 채 익지 않은 꿈을 씹어 먹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병에 담아둔 꽃이 다 뜯겨 있었다. 신물 대신 꽃물이 올라오고 발바닥에 혓바늘이 돋았다. 걸음이 떠듬대며 발자국을 고백했다. 나는 두려워졌다. 아무 병(病) 속으로 잠적하고 싶어졌다. 마침 길가에 <藝人>이라는 지하 다방이 있었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전날 샀던 시집을 한 장 한 장 찢으며 넘겼다. 나는 두려워졌다. 종업원이 유리컵에 물을 담아왔다. 거기에 코를 박고 죽고 싶어졌다. 맛을 보니 짭짤했다. 바닷물인가? 아님 너무 많은 이들이 코를 박아서 이미 콧물인가? 나는 두려워졌다. 산다는 게 꼭 누가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것 같았다. 한숨을 쉬니 입김이 뿌옇게 피어올랐다. 누군가 내 안에서 줄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내 안의 소금 원피스
김혜순


슬픔을 참으면 몸에서 소금이 난다
짜디짠 당신의 표정
일평생 바다의 격렬한 타격에 강타당한 외로운 섬
같은 짐승의 눈빛

짧은 속눈썹 울타리 사이
파랑주의보 높아 바닷물 들이치는 날도 있었지만
소금의 건축이 허물어지지는 않았다
따가운 흐느낌처럼 손끝에서 피던 소금꽃

소금, 내 고꾸라진 그림자를 가루 내어 가로등 아래 뿌렸다
소금, 내 몸속에서 유전하는 바다의 건축

소금, 우리는 부둥켜안고 서로의
몸속에서 바다를 채집하려 했다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염전이 문을 열었다
나는 아침부터 바다의 건축이 올라오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몸속에 입었다
소금 원피스 한 벌









임솔아


더러워졌다.
물병에 낀 물때를 물로 씻었다.

투명한 공기는 어떤 식으로 바나나를 만지는가. 멍들게 하는가. 멍이 들면 바나나는 맛있어지겠지.
창문을 씻어주던 어제의 빗물은 뚜렷한 얼룩을 오늘의 창문에 남긴다.

언젠가부터 어린 내가 스토커처럼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닌다. 꺼지라고 병신아, 아이는 물컹하게 운다. 보란 듯이 내 앞에서 멍든 얼굴을 구긴다. 구겨진 아이가 내 앞에 있고는 한다.
사랑받고 싶은 날에는 사람들에게 그 어린 나를 내세운다. 사람들은 나를 안아준다.

구겨진 신문지로 간신히 창문의 얼룩을 지웠다. 창밖을 내다보다
멍든 바나나를 먹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작은별 | 작성시간 17.10.20 읽은 것도 있고 읽고 싶은 것도 있네요 ㅎㅎ 다 읽고 싶어요!
  • 작성자프래니 | 작성시간 17.12.12 제 취향인 것들이 가득...좋아하는 시인들 이름 나와서 순간 기뻤어요. 덕분에 임솔아 시인의 시집도 알아가네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