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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田惠麟) 평전(評傳)

작성자 Marina|작성시간11.07.02|조회수352 목록 댓글 0

 

 
전혜린(田惠麟) 평전(評傳)
 
불꽃처럼 살다간 영혼의 집시 전혜린
오늘도 슈바빙 의 가로등은 짙어진 우윳빛 안개와
모색(暮色) 속에서 그 등이 하나 둘씩 켜지고 있다
 

    전혜린 (田惠麟 1934∼1965)
 
 

 
.......................
 
1934. 1. 1 평남 순천~1965. 1. 11 서울.
수필가·번역가.
독일 문학작품을 번역했고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내용의 수필을 썼다. 법률가인
아버지 봉덕(鳳德)의 1남7녀 중 맏딸로 태어나 경기여자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53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해 다니다가 3학년 때 독일로 가서 1959년 뮌헨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했다. 1959년 귀국하여 서울대 법대와 이화여자대학교 강사로 있다가 1964년 성균관대학교 조교수가 되었다.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번역분과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31세에 자살했다. 독일 유학 때부터 번역을 시작했으며 문장이 정확하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았다. 번역집으로 〈생의 한가운데〉(1961)·〈데미안〉(1964) 등이 있고, 특히 재독문학가인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1959)를 번역해서 유명하다. 유고수필집으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6)가 있으며, 1976년 대문출판사에서 일기를 간추려서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1976)를 펴냈다.
 
약력 
1934년 1월1일 (일요일) 평안남도 순천 출생
1952년 경기 여중고 졸업
1952년 서울대 법대 입학
1955년 법대 3년 재학중 독일유학(뮌헨 대)
1959년 뭔 헨대 독문과 졸업 후 귀국(5년간 체류)
1959년 25세에 서울법대, 이화여대 강사 성균관대학 교수
1965년 1월 10일 (일요일) 31세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
많은 번역작품을 남김

그녀의 작품 세계
 
번역작품 -어떤 미소(F.사강) 1956
               한 소녀의 걸어간 길(E.시나벨) 1958
               압록강은 흐른다(이미록) 1959
               파비안(E.케스트너) 1960
               생의 한가운데(L.린저) 1961
               에밀리에(H.게스턴) 1963
               태양병(H.노바크) 1965
               그래도 인간은 산다(W.막시모프)
               그 외 다수
 
유작집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66
             비장일기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1968
             목마른 계절. 
 
....................................
 
전혜린 님의 주변 인물에 대한
묘사는 절제하고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본 전혜린 :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규동 저서(위대한 콤플렉스上 16명의 문필가. 학자. 예술인)
중에서 전혜린 편을 소개한다.
 
위대함 이란 정상과 이상이 모두 합치고 의식과 무의식이 소용돌이 치면서 시대나
문화적 환경에서 달구어 질 때 몇 십만에 하나 몇 백만에 하나 꼴로 이룩되는 것을 말한다.
적어도 그런 사람들은 개인을 위해서 산 사람들은 아니다. 개인을 뛰어넘어
인간의 가능성의 한계에 도전했던 사람들이다.
 
학문이 넓지 못하고 재주가 많지 못한 필자가 그런 인간의 위대성을 감히 분석 시도
한다는 것은 외람된 일인지도 모른다. 또한 도리어 왜곡된 인간성을 부각시키는 오류를
범할까 염려되기도 한다.
 
다만 하나의 의도가 있다면 상식의 세계를 벗어난 특출한
인간들을 주마간산 식으로 나마 발견해 봄으로서 무한한 인간의 가능성과 다양성을
확인해보고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 생활에서 잠시나마 청량제 역할이 되었으면 한다.
라고 저자는 머리글에서 밝혔다. (저자의 글머리 중에서)
 
전혜린님의 삶과 글을 소개하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이규동박사 의 글을 올리는데 혹시 전혜린님 에게 누가 될까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전혜린님 의 삶의 철학은 확고 부동하고 투명하여 별다른 거부감은 없으
리라 믿고 그 내용을 일부 공개한다.
 
[내용 일부]
 
완전한 삶을 추구했으나 끝내 자살로서 짧은 생을 마친 냉철한 지성의 소유자
전혜린 그녀의 내면에는 신처럼 여긴 아버지에 대한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나르시시즘을 초극 하려는 갈등이......
 
(일제 해방 후)
 
전혜린은 서른 한 살의 짧은 생애를 살다가 전설의 베일 속으로 사라져 갔다.
안이하고 평범한 삶을 경멸하고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 로서 전 생애를 인식(認識)에
바치고 싶다는 열광적 소망으로 짧은 생애를 이어간 그녀는 그런 뜻에서 천재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녀는 본질적으로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섬세한 여성이었다. 절대로
평범해서는 안되고 완전한 순간들의 삶을 염원하던 그녀는 단조롭게 전개되는
일상생활에는 너무 무력한 지성인 이기도 했다. 인생에 대해서 그녀는 극단적인
욕심쟁이였다
 
비범과 평범을 한꺼번에 소유하고 싶었던 나르시스트 였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절대와 완전에의 지향은 어느 땐 예속적 이리만큼 강렬했다. 그것은 그녀의
지성이나 의식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심층 심리적 문제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는 일기나 에세이의 곳곳에서 편지의 어느 곳에서나 날카로운 자기
성찰을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는 (권위에의 예속)은
그녀 필생의 소망 이었던 한편의 작품을 쓰고 싶다는 아주 겸손 하다면 겸손한
소망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완전에의 집착 때문이다. 그녀 말마따나 조금의 유머도 흡입할 수 없었던
그녀의 지성 -이것은 넓은 뜻으론 심적 방어라 할 수 있다. - 은 작품을 쓰기엔 너무
방어적 이었다. 지성의 너무 많은 지배, 그것은 철학적, 관념적, 아니면 명상적
태도를 지향 할 수는 있어도 적어도 작품 세계로의 전개에는 부적합할 경우가 많다.
 
그녀의 일기나 수상(隨想)록의 곳곳에는 보들레르, 헷세, 지드, 빠스째르나끄, 린저,
니체, 등 최고의 문학인이나 철학가에 대한 경도와 더불어 그들 글의 단편들이
실려있다. 또한 그녀는 그런 몇몇 작가들의 번역 문학으로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런 누구를 몰라도 가능하다. 너무 많은 지성의
소유자는 그 권위에의 콤플렉스 때문에 작품을 쓰지 못한다. 작품을 쓰기엔 너무나
지성적인 것이다. 전혜린은 영감을 위하여 일상성을 피하고 비범한 생활을 영위하기를
열망했다. 허지만 그녀의 비극은 그녀가 일생 동안 초극하려던 아버지 콤플렉스 그리고
지성의 포로였다는 점에 있다.
 
(출생과 성장)
 
전혜린은 아버지 전봉덕(田鳳德) 과 어머니 김순해(金珣海)의 8남매(1남 7녀)의 맏딸로
1934년 1월1일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전봉덕은 당시 고등문관시험,
사법, 행정 양 과에 합격한 최고 엘리트였다. 아마 전혜린의 남다른 지성은 아버지
쪽에서 물려 받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작은 체구였지만 지성적인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대갓집
맏며느리답게 귀티가 나는 체구가 큰 여성이었다. 전혜린의 지성은 타고난 것이지만
그녀의 아버지의 남다른 훈도에 의해서 더욱 빛난 것이 되었다. 지성을 몹시 높게
평가한 그녀의 아버지는 맏딸에게 끔찍이도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전혜린은 서너 살 때부터 한글 책과 일어 책을 전부 읽을 수 있도록 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전혜린의 어린 시절은 그녀의 회상에 따르면(소공주)처럼 키워졌다.
(백 러시아 계의 양복점에서 소공녀가 입을 것 같은 원피스를 내게 사준 것도 아버지였다)
고 되 뇌 인다. 한편 어머니와의 관계는 소상한 바는 아니지만 그녀의 양육상의 문제에서
부모간 의견 대립이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계실 때는 나에게 심부름을 한번 못 시켰다. 손에 물 하나 안 튀기고
내 방에서 공부만 하는 것-아버지가 한없이 아낌없이 사다 주는 책을 읽는 것이 내 생활의
전부였다)(나는 응석받이 어린애 spoiled child이었다. 나에 대한 편견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주 말다툼 하는 것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아스팔트 킨트)
 
전혜린은 스스로(고향 없는 아이) (아스팔트 킨트Asphalt-kind 아스팔트만 보고 자란
도회의 고향 없는 아이들) 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과연 그녀 말마따나 그녀의 성장과정은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이동했기 때문에 딱히 고향이란 고정관념을 가질 만한 고향이
없었는지 모른다.
 
... (먼데에 대한 그리움, 어디론가 멀리 미지의 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은 그때부터
내 마음에 싹튼 것 같다. 그때부터 내 눈은 실향병의 눈, 슬픈 눈으로 된 것 같다)고
되 뇌이고 있는 것이다... 
 
(회색노트의 교환)
 
(내 한마디는 아버지에게는 지상 명령이었고 나는 젊고 아름다웠던 남들이 천재라
불렀던 아버지를, 그리고 나를 무제한하게 사랑하고 나의 모든 것을 무조건 다 옹호한
아버지를 신처럼 숭배했었다) 자신에 의해서 스스로 표현되고 있는 이런 아버지에의
경도- 이것은 정신분석학의 초보적 지식만 있어도 누구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라고
말 할 수 있는 부류이다.
 
그랬기에 경기여고를 거쳐 아버지가 원하는 전국의 수재들만 모이는 서울대학 법대에
입학 할 때까지 줄곧 관립학교의 모범생 코스를 일관했다. (여학교에 들어오면서 세계는
조금씩 좁아져 갔다. 시야가 한계를 긋기 시작했다. 이유 없는 모순감과 고뇌가 싹 텃고
무서운 인식 욕에 사로 잡혔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었다. 파우스트 처럼)...
 
(그리고 마음의 벗이 생겼다. 주혜는 폐쇄적이고 건조한 성품인 나와 반대로 조화적이고
다정한 소녀였다. 우리는 별로 얘기를 안 했으나 늘 편지를 교환했다... 또 마르땡 뒤아르
의 (회색노트)를 읽고는 주혜와 나는 당장에 회색노트를 교환하기로 하여 매일 한 사람
이 집에 가져가서 일기를 쓰고 난 다음날 그 노트를 상대방의 책상 속에 넣고 있었다.
 
이 노트를 우리는 몇 년이나 교환했었다. 그 당시 그 노트와 주혜는 나의 전 생활을
의미 하고 있었던 같다) 이런 교우관계 패턴은 그 당시뿐 아니라 평생 동안
지속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열렬한 속삭임과 편지교환의 정열로 이어졌던 것이다.
 
(출발하기 위한 출발)
 
이런 열렬한 우정 관계와 (노트 교환) 의 카타르시스는 그 후에도 전혜린의 전 생활의
한 특징을 이루며 계속된다. 그녀의 친교가 R여사(전혜린 평전의 저자)나 누이동생 채린,
그와 친교가 있었던 몇 사람과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곳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위에도 언급한 바 부녀간의 밀착된 관계를 청산 하려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친구와의 관계를 갖게 했다는 것이다.
 
전혜린이 서울법대 3학년 때 친구 주혜의 알선으로 처음으로 부모와 고국을 떠나
(출발하기 위해 출발했다)는 서독 행에는 아버지의 예속을 단절하고 좀더(자유스러워
지려는 인식)의 무의식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런 인식의 출발이
훗날 이국 땅 뮌헨에서 출산을 앞둔 어느 날 다음과 같은 심경변화를 보인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위해 하신 모든 것에 대해 어머니께 감사 드린다. 어머니는
사랑스럽고 선량한 분이다. 인간으로서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훨씬 가치를 지니고
계시다. 나는 아버지를 동정할 수 있고 이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그를 사랑 하거나
존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아버지는 어머니같이
한 인간을 위해 공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그의 행복이고 운명이다.
 
종전의 어머니에 대해서 갖고 있던 부정적인 태도가 없어지고 그대신 아버지에 대한
냉담 하리만큼 달라진 인식의 변화는 어디에서 연유된 것일까? 그 중 (아버지는
어머니 같이 한 인간을 위해서 공헌하지 않는다) 는 말은 출산을 앞둔 여성으로서
어머니에 대한 공감과 더불어 아버지의 그녀에 대한 기대나 사랑이 곧 아버지의
나르시시즘 의 결과였다는 것을 직감 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즉 나르시시즘의 비 생산적인 사랑 - 아마도 한국남자 일반의 것인지도 모르는 -
에 대한 실망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나르시시즘적 경향은 공교롭게도
전혜린의 본질에도 있었다. 어쩌면 전혜린의 후반 인생은 이런 본질과의
투쟁 이었는지 모른다.
 
(뭔헨 체류)
 
전혜린의 뮌헨 체류기간은 1955년부터 1959까지 5년간 이었다. 5년이란 세월은
31세를 일기로 삶을 마친 전혜린 에게는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더욱 그간에 겪은
정신적 변모는 그녀의 후반기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던 것이 사실이다. 서울법대
시절의 전공인 법철학에서 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뮌헨에서 법학도 K씨와
결혼했고 딸 정화를 얻은 후 1959년 귀국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겪은 최초의 고독과 뮌헨 이라는 고풍스러운 학원도시의
정신적인 자유로움에 접했다는 사실이다. 전혜린은 이곳에서 카톨릭에 귀의 했다고
한다. (내가 독일의 땅을 처음 밟은 것은 가을도 깊은 시월이었다. 하늘은 회색 이었고
불투명하게 두꺼웠다. 공기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힐 물기에 가득 차 있었고
무겁고 칙칙했다) 우울하면서도 장중한 서곡처럼 회상되는 전혜린의 뮌헨 생활은
그녀 말마따나 (고국까지의 거리)를 실감 하면서 자기를 인식해야 했던 절실한 고독의 시기였다.
 
......이국 땅에서 그녀가 빈방을 얻고 짙어진 안개와 어둑해지는 모색(暮色)속에서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던 광경을 회상하면서 (내가 유럽을 그리워한다면 안개와 가스등 때문인
것이다) 라고 잘라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뮌헨의 가을과 안개와 가로등의 첫 만남이
얼마나 그녀에게 깊이 각인 되었던가를 짐작 할 수 있다...... 
 
(자유의 향기)
 
그러나 그녀가 무엇보다 뮌헨에서 경도된 것은 그곳을 지배하고 있는 독특한 자유의
향기에 관한 것이다. (돈, 소시민적 인습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과 그들로부터
자유로움의 의식이 어떤 화제 사이에도 그들을 침묵 속에 굳게 맺어져 일종의 분위기를
빚어내고 있는) 자유로움에 관한 것이다...... 
 
이런 풍토는 우선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체질적인 위화감을 느끼게 하지 않았을까?
앞서도 말했지만 전혜린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까지를 부모가 원하던 관립학교만을 시종일관
했고 또한 8남매의 맏딸로서 아버지의 강한 기대 속에서 자랐던 그녀가 난생 처음
부모와 고국을 떠나 이국 땅에 발을 디뎠다는 것은 큰 충격 이었다.
 
...근친애적近親愛的) 집착을 단절하기 위한 출발이었기에  (고국에의 거리를 실감하게 하는)
뮌헨의 자유로움은 전혜린에게 스스로 자초한 일종의 유배(流配)와 같은 뜻이 있었다.
(의식의 세계에서 나는 결국 언제나 아버지를 대상으로 지식을 쌓아 올렸던 것 같다.
마치 제단 앞에 향불을 갖다 쌓듯) 이런 전혜린의 인식은
그녀가 곧 오이디푸스 갈등의 숙명성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작은 모반(謀反)
 
전혜린이 아버지의 고착에서 벗어나려는 무의식적 노력은 언제나 그녀 의식의
밑바닥에서 준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몇 가지 예 중엔
고교 때의 친우 주혜와의 교우관계, 동생 채란에 대한 압도적 이고도 일방적인 애정,
결혼과 출산 과정을 통한 모정(母情)에의 재 인식 등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심리적
인과론으로 중요했던 것은 뮌헨에서 의 출발 이었다.
 
이것은 어떤 뜻으로는 그녀가 인식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동기에서 의 아버지에 대한
모반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뮌헨에의 출발의 동기가 되었던
친우 주혜와의 관계를 상기해 보자. 고교 때 그토록 의지하던 친구 주혜는 대학 2학년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나는 미치도록 슬펐다. 주혜는 뜨거운 여름날
가족과 함께 불행한 모습으로 그러나 새로운 생활에의 기대에 넘쳐서 비행기에 올랐다 그날의 더위......)
간결하게 절제된 필치로 묘사된 이 이별의 장면은 그럴수록 당시의 상실감을 절실하게 전달해 준다.
 
그런 친우의 이별이 있은 후 전혜린은 역시 (대학 3년을 마친 후 나는 출발했다. 남독의 대도시인
뮌헨에서 뮌헨대학 문리과 대학 제1학년에 입학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지고 있는 이 글 (목마른 계절)에는 기실 심리적 인과론이 크게
맥박치고 있다.
 
즉 주혜와의 견딜 수 없는 이별 후 그것을 계기로 - 물론 이것이 전적인 이유는 아니겠지만-
법대 3년을 마치고 뮌헨으로 떠난 것이다. 공교롭게도 뮌헨에의 유학은 주혜 아버지에
의해서 알선되었던 것이니 더욱 심리적 동기가 우연이 아님을 시사해 준다.
 
그러기에 고독을 씹으며 견디던 뮌헨의 자유롭고 천재적이며 예술적인 분위기와 안개와
가스등의 몽환적 분위기는 이향자(離鄕者) 전혜린에겐 제2의 정신적 고향으로 각인될만한 곳이었다.
 
(변신으로 의 노력)
 
... 우유 빛 안개 속에서 등불이 켜진다는 사실, 전혜린의 정신적 혼란에 더 없는 안도의
불빛 이었을 것이다. 전혜린은 그곳에서 다시 태어나려고 몸부림 친다. 법학이란 전공으로
다져진 두뇌를 문학적인 것으로 세뇌하기 위해 전혜린은 고독과 불면, 불안과 싸우면서
노력을 경주해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녀가 (작품다운 작품 한편을 쓰고 싶다)는 소박 하면서도 간절한 소망의
뜻을 짐작 할 수 있다. 작품이란 이런 경우 단순한 스토리가 아니라 무의식적 갈등들의 탈출구
이며 기존의 정신적 유산의 청산 이랄 수 있다. 역설적인 표현이 될지 모르지만 그처럼
간절한 소망이 있었기에 오히려 전혜린은 작품을 쓰지 못했는지 모른다.
......남다른 독서 열, 그리고 풍부한 감수성, 예리한 관찰력, 탐욕스러우리만큼 강한 인식에의
집착, 결코 평범치 않으려는 귀족 성 등 모두 문학적 창조력을 발휘하는데 좋은 바탕
들이다...... 그녀의 일기나 수상의 도처에는 자기 인식의 성실성과 지성이 번뜩이고 있고
또 이들 위대한 작가나 사상가의 경구와 인용문이 수놓아져 있다. 거기엔 그녀의 풍요로운
지식의 보고가 펼쳐져 있고 또한 단편적인 시구들도 나열되어있다.
 
(결혼 생활)
 
뮌헨에서의 안개와 가스등의 고독에 가려져서 자칫 간과되기 쉬운 사실 하나가 있다.
즉, 뮌헨에서의 법학도 K씨와의 결혼 및 그 결과 임신 출산으로 이어지는 어머니로의 행로
이다. 물론 이 사실은 그녀의 일기나 수상의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고 또한 굳이 은폐
되었던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전혜린=뮌헨=안개와 가스등=고독) 이라는 연상 과정으로 보면 남편 될 K가
전혜린이 독일에 도착한지 불과 6개월 후에 뮌헨에 왔다는 사실은 언뜻 기이한
느낌마저 준다. 전혜린 하면 뮌헨에서의 절대적 고독을 연상하게 되는 것인데
불과 반년 만에 K와 결혼 했고 그것도 이미 예정 되었던 사실 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반년 후에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뜻밖에 후에 나의 남편이 된 K가 뮌헨에 왔다.
그간 두 집 사이에는 교류가 생겨 우리를 결혼 시킬 것을 합의하고 있었다. 어느 신혼부부
에게나 있는 두 개의 개성이 달라서 둥글어질 때까지의 마찰은 물론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젊었고 대체로 행복했다. 먹거나 입는 것보다는 책을 사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을 중시하고 좋아하는 우리의 공동요소는 그대로 허용되고 유지 되었다.
그 점에서 우리는 언제나 의견이 완전히 일치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가령 수입의 반을 넘는 책 한 권을 사기를 우리는 한번도 주저해 본일이 없다.
그대신 언제나 가난했고 가난이 우리에게는 재미가 있었다
-이 글은 1962년 (여원(女苑))지에 실린 글이다-
 
이로 보면 우선 절대적으로 평범치 않으려는 그녀의 의지가 결혼생활에도 반영되고 있다는
점과 전혜린의 결혼과 파혼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느낌마저를 갖게 한다.
 
(공동적 요소라는 것)
 
한편 전혜린의 고독감은 K와의 결혼이란 제한에 의해서도 그리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한 사람과의 만남. 더욱 이국에서 남편이 될 사람과의 만남이 그처럼
객관적으로 짤막하게 언급되고 있는 사실을 전혜린의 경우 결혼이 그녀의 절대 영혼의
고독을 메우기에는 무력했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물론 거기에는 (우리는 젊었고 대체로 행복했다)는 개연적인 행복론이 기술되고 있지만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우리)라는 표현이다. (먹거나 입는 것 보다는 책을 사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을 중시하고 좋아하는 우리의 근본적 공동요소)라는 강조는 언뜻 전혜린 나름대로
의 결혼에 대한 소망 같은 것이 깃들여 있는 것 같아서 흥미롭다.
 
이런 경우 남편인 K가 이 (우리)라는 말투에 공감을 했는지 미지수다. 지성적이고 이해성
이 있는 남자 라면 물론 전혜린의 말마따나 먹고 입는 것보다 책을 사는 것과 읽는 것의
중요성쯤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결혼생활이 상보적(相補的)인 것이고 따라서 부부의 어느
한쪽은 보다 더 가정적 이어야 한다 할 때 (우리)란 말로서 지적 생활만을 강조하고 있는
이 신랑신부의 결혼생활은 애초부터 극히 비 생활적인 요소가 잠재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물론 결혼 초의 신선한 애정과 기대는 그런 모순이나 어떤 결핍 감을 그리 큰 것으로 생각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고, 또 그러기를 바라는 심정일수 있다. 필자는 이런 경우 불란서의
지성 사르트르 와 보봐르여사의 자유스런 임의계약 (任意契約)형식의 공동생활을 상기해
본다. 전혜린은 우리의 (근본적 공동요소)에서 그런 생활을 그려보았는지 모른다.
 
물론 K나 전혜린 모두가 거기에 버금 하는 지성의 소유자였다. K는 자상한 일면과 애정도
기지고 있었다. 산모가 입원한 병원에 손수 끊인 미역국과 초밥을 만들어 가지고 오기도
했다. 오랫동안 편지가 오지 않으면 (죽었니?)하는 말 한마디를 적어 보내는 유머센스도
가지고 있던 사람이다. 하지만 이들의 결혼생활은 다분히 관념적인 (우리의 공동요소)에도
불구하고 귀국 후 파탄에 이른다.
 
(장녀(長女) 콤플렉스)
 
이쯤에서 필자는 전혜린의 장녀 콤플렉스에 대해서 언급해 보려 한다. 전혜린 자신도 자기가
8남매의 장녀로서 (일반적으로 장녀가 그렇듯이 나도 매우 부모에 의지하고 있고 부모를
무서워하면서 밀착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녀는(아버지를 대상으로 마치
제단 앞에 향불을 쌓듯 지식을 쌓아 올렸다)고 말한다.
 
이때 장녀였기에 아버지를 숭배 하면서도 두려워했고 또한 (아버지를 대상으로
향불을 쌓듯 지식을 쌓아 올렸다)는 뜻은 정신 분석학적으로는 부성(父性)을 지식과 동일시
(同一視)하면서 무의식 적으로는 그녀가 남성화(男性化)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남성(男性)콤플렉스 인 것이다.
 
장녀가 모두 전혜린의 경우처럼 남성 콤플렉스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전통사회에서는 다분히 이런 등식이 성립될 소지가 많다...... 게다가 전혜린의 경우처럼 장녀로
태어나고 재질이 다른 자녀보다 뛰어나고 특히 지성적인 부친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을
경우엔 남다른 부친고착(父親固着)이 이룩될 수 있다. 또한 이런 부녀관계는 엘렉트라
콤플렉스 와 등식관계가 된다는 점도 정신 분석학적으로 옳다.
 
......전혜린은 상징적으로 말한다면 그런 아버지(권위 또는 지성)에 예속 되어서 이를 뛰어
넘지 못했다. 전혜린의 남다른 자기인식과 광적 이리만큼 집요했던 나르시시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끝내 이런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데는 필자 생각으로는 이 장녀라는
역할이 큰 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동생 채린에의 애정)
 
뮌헨의 출발이 친우 주혜의 알선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것이 아버지의 작은 모반 이었다는
사실도 앞서 언급했다. 그럴 경우 K와의 결혼은 분명히 그런 모반에 대한 타협의 산물이다.
여기서 양가의 신성한 결혼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심사는 없다. 다만 전혜린의 부친에의
예속성과 일상성(日常性)의 한계점 같은 것을 지적해 보고 싶을 뿐이다.
 
즉 혜린의 결혼은 아버지에의 거역에 대한 일조의 타협의 산물이다. 뮌헨 에서의 자유로움은
결혼이라는 전제, 즉, 부친과의 타협에 의해서 이룩된 것이다. 아버지의 지상명령은 끝내
뮌헨에서 까지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했다. 그녀의 절대적 자유의 기간은 6개월에
-그것도 집행유예적인 뜻의 -불과 했다.
 
여기서 필자는 전혜린이 K와의 부부생활에 대해서 언급할 때 사용하는(우리) 라는 표현에
다시 주목하여 본다. 결국 이때의 (우리)란 (나)의 강조에 불과하다. 상대방의 (나)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투의 (우리)이다. 이에는 친하지 않는 사람과의 사이에서는 결코 통용
될 수 없는 친밀성, 다른 말로 감히 말한다면 나르시시즘의 일방통행적인 분신 성이
나타나 있다.
 
이런 나르시시즘의 분신(分身)의 고통은 동생 채린에의 편지에 잘 나타나고 있다. 고국을
떠나 독일로 떠날 때 채린에게 부친 편지에 잘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헤어진다. 지금 가슴
이 찢긴다. 채린아 ! 마지막을 마음껏 불러본다. 20년간의 애정과 존경의 전부를
이 일순에 기울인다) (독일로 떠나면서 서울1955년 8월24일)
 
같은 편지에 다음과 같은 표현도 있다(넓은 우주 속, 풀 포기와 같이 수가 많고 똑같이 평범한 사람들
-수억 - 가운데서 나는 한 동생을 가졌고 사랑했고 존경했다. 너는 얼마나 나를
내포하며 나는 또 얼마나 너를 내포하는지! -중략- 아무에게도 뺏길 수 없는 나의 단 하나
의 소유가 있다면 그것은 너다. 너에 대한 나의 애정이다) 이처럼 전혜린의 (너와 나)의 관계는
(우리)라는 (분신적 관계)에서 연유된 관계이고 또한 전혜린의 나르시시즘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나르시시즘의 대상애)
 
......내면은 극히 갈등적이고 수면에 비치는 자기 모습에 매료 되었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나르시소스처럼 자기 고뇌적 이고 파괴적인 요소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한데 전혜린의 경우 나르시시즘은 어느 면에서 (생명에 대해서 본질적인 것)이고 또한 자아의
강화를 위해서는 나르시시즘적 방어 기제가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인식 과정에서는
그것이 부정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죽음과 연관되고 있는 면이 많다.
 
(만약 내가 죽거든 채린이에게 나의 기념품으로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니체 전집을
남기겠다)는 말고 하고 있는데 이런 죽음에 대한 언급들은 아마도 나르시시즘의 배리(背理)
와 관련이 되는 것들이다. 이와 더불어 전혜린의 나르시시즘 은 위에서 말한 장녀 콤플렉스
때문에 그 어느 쪽으로도 완성되지 못한 나르시시즘의 비극을 낳게 했다.
(전혜린의 죽음)
 
......죽음에 관한 종말에 언급하면서 이 글을 그치려 한다. 전혜린은 1965년 1월10일 31세를
일기로 짧은 생애를 닫았다. 전혜린의 죽음은 자살 이라는 말도 있고 수면제 과용이란
말도 있다. 그 무렵 전혜린은 남편 K와의 이혼상태(1964년 6월 합의이혼)였다.
딸 정화를 데리고 친정에 있었는데 공적 생활로는 성균관 대학교 조교수로 임명된 지 얼마
안되던 때였다. 다만 전혜린의 후년의 일기나 수상 등을 보면 죽음, 권태. 우울. 불안, 등에
관한 어휘가 수없이 많이 나타나 있다.
 
그래서 그 무렵의 전혜린은 그런 극단적인 (치우친 성격)으로는 일상성을 용납 하기엔
부담스러웠던 나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거의 일관해서 (완전한 삶에의 순간)을
추구 하면서도 한편(무명으로 남을 용기)도 없었던 그녀 - 그것은 곧 현실에 대해서도
남다른 집착이 있었다는 모순을 노정 하고 있다. 이런 모순된 양가성(兩價性)은 삶의 어느
순간 자기 파괴본능의 위협으로 급전환 할 수도 있다.
 
나르시시즘적 경향은 대인관계를 어렵게 한다. 자기외적 범주에 속하는 친밀한 관계의 몇몇
사람 이외에는(속물성에 대한 혐오)를 느낄 수밖에 없다. 전혜린으로서는 결국 생의 종말
은 나르시시트의 그것 이었다. -이상-

 
[전혜린 작품 살펴보기]
 
그녀는 유학 중 독문학 .불문학, 영문학, 연극, 번역, 수필, 일본어 등 에 정통 했으며
서울대 법대 3년인 21세때 독일로 유학을 하여 5년 만에 귀국 25세부터 서울대, 이화여대
강사 성균관대 교수(31살로 자살 직전까지)를 지내는 등 천재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 했으며 수많은 원서를 번역 하였다
 
그녀의 일과는 시종일관 독서와 번역의 연속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중에 나와있는
그녀의 일기 등은 전부 영어. 일어. 불어. 독일어로 쓰여진 것으로 출판을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그냥 본인의 일상을 그대로 써 내려간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가 있으며
거의 외국어로 쓰여진 글들을 출판사에서 번역을 하여 출판을 했다.
 
그녀의 작품 (목마른 계절)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에서 몇 가지만 살펴 본다
 
1.   남편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A. 초속 (남이 뭐래도 개의치 않는) B. 재산 C. 사회적 자유 (직업의 자유스러움)
D. 광적인 로맨티시즘 이 있을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우리의 남편들 에게는
A.B.C.D의 어느 요건 중 하나 또는 전부가 없는 것이 보통이며 그 부족이 우리의 잠정적인
안정에 크게 기여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따라서 이 각박한 현실 하에 여자로서 두 개의
생존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하나는: 여자로서의 자기를 백 퍼센트 의식하고 자기를 하나의 물(物). 육체로 보는 전적인
자기 포기의 타자 의존적인 생활 방식이며, 또 하나는: 자기를 인간으로(여자이기 전에)의식하고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사회 내에서 실현시켜 나가보려는 외롭고 괴롭지만 떳떳하기는 한,
두 가지 방법이다. (목마른 계절-남자 그 영원한 보헤미안 -중에서 1963년)
 
2.    6월23일
 
가끔 몹시도 피곤할 때면 기대서 울고 위로 받을 한 사람을 갖고 싶어진다.
나는 생후 한번도 위안 자를 갖지 못했다. 어머니가 무엇인지 모르고 자라왔다.
고독이 가슴속에서 병균으로 번식했다. 모든 것에서 거짓을 모든 사람 들에게 극단의
이기주의 밖에는 볼 수가 없어진다. 꽃 향기만 무겁게 공기에 얽혀 있는 밤,
온 갓 꺾지 못한 생의 격동과 정열에의 회한이 나를 엄습한다.
다르게 살고 싶다! 좀더 숨쉬면서!  좀더 나와 가깝게!
 
3.    7월 26일
 
비늘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다.
노을이 장밋빛으로 하늘을 붉히고 있다.
무언지 허전하고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난다.
나무라도 돌이라도 굳은 것을 안고 엉엉 울거나 막 취해서 웃고 싶은 느낌!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데 서 나오는 허망.
 
4.    1959년 2월 23일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야기시키는 본질적 기분(우울. 권태, 공허, 자포자기 등)과
싸워야만 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생을 이 생을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 일회적인 생을 열망해야 한다. 나는 이 내적 기분을 극복 해야 한다.
아니면 내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
 
5, 2월 28일
 
너무나 지치고 지쳐서 진절머리가 난다.
많은 곳에 밑줄이 그어진 내 책을 누군가가
읽는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그 누군가가 정신적인 욕구가 없는 무미건조한 인간일 경우 나는 분명 까다롭다.
나에게 완전히 낮 선 사람이 내 책을 샅샅이 뒤지는 것이 싫다.
오늘 저녁 나는 완전히 신경과민 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내 책을 몹시도 사랑한다.
그것은 내 관념의 일부이기 때문에......
 
6.    1월 1일 (오후 11시)
 
오늘 아침 헤르만 헷세의 편지에 즐겁게 놀랐다.
그 속에는 석장의 그림 엽서와 헷세의 축하 인사가 들어 있었다 정말,
정말 그의 친절에 감사를 드린다. 설날 아침에 헷세 한데서 편지를 받았다는 것.
기분 좋은 일이다...... 
 
7.    1월 4일
 
5분 동안 산보를 했다. 영국공원은 온통 눈 속에 하얗게 파묻혀 있었다.
허파 가득히 상쾌하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 마셨다.
파스째르나끄의 문장들은 아주 번역하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난 그를 미치게 좋아한다.
 
8.    1월 5일
 
오늘 나에게 세가지 놀라운 일 ...... 
A. 인경 에게 서 내 생일 카드
B. 해영 (채린의 친구) 에게서 카드 (손수 그린)
C. 집에서 소포 (김. 오징어) 오늘은 약 7시간 동안 번역을 하였다.
지독하게 피곤하다. 무엇보다도 몸이......
 
9.    1월 7일
 
오늘은 한 페이지 밖에 번역을 할 수가 없었다. 몸이 아프고,
땀이 쏟아져서...... 
 
10.   1월 9일 (눈)
 
(지바고)를 오늘 읽었다. 아름답지만 역시 어렵다.
내가 꼭 사야만 하는 것은
@아기의 배내옷
@아마도 요람과 잠재우는 바구니 하나
@평상복
@코르셋 한 벌도 아마.. 그러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다.
 
11.   1월 15일(큰눈)
 
모든 평범한 것, 사소한 것, 게으른 것, 목적 없는 것, 무기력한 것.
비굴한 것을 나는 증오한다! 
자기 성장에 대해 아무 사고도 지출하지 않는 나무를 나는 증오한다. 경멸한다.
모든 유동하지 않는 것. 정지한 것은 퇴폐다.
저열한 충동으로만 살고 거기에도 만족하지 않는 여자를 나는 증오한다.
나무는 하늘 높이 높이 치솟고자 발 돋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별에 까지 닿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그것이 허락되지 않더라도 동경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에로스---닿을 수 없는 것, 불가능한 것의 추구---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고 그저 좀 교활한 동물일 뿐이다. 오늘은 열심히 번역을 하였다. ---
약 8 시간 동안, 죽고 싶게 피곤하다. 번역이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역이다.
많은 신경의 소모와 육체적인 지속성을 그것은 요구한다.
오늘은 파스째르나끄의 멋진 시를 발견했다...... 
 
12.   남자와 남편은 다르다
 
결혼 후와 전에 안 달라진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끝없이 아내의 저주를 감수한 소크라테스 정도가 아닐는지?
이 달라진다는 것---자아의 동일성을 침식 당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결혼을 포기한 사람들도 많다.
키에르케고르나 그릴파르처 가 약혼을 파기한 이유가 다만 '자아에 대한 계속적인 방해' 가 싫었고
'자기 내부에 있는 고독에의 요구'를 채우기 위해서라고 일기 속에 고백하고 있는 것 그 좋은 예다.
 
나도 물론 달라졌다. 외적으로 볼 때 일견 큰 변동이 안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첫째로 나는 시집살이를 해본 일이 없다. 그리고 남편을 받드는 아내도 아니다.
이것은 나의 환경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고 또 내 천성에서 오는 결함인지도 모른다.
'남편에 의한 남편을 위한 남편의 생활을 내가 영위하고 있다' 고 말할 양심은 나에게는 없다.

'남편 곁에서' '남편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나의 결혼생활을 표현 하기에 보다 적절한 문구인 것 같다.
어떤 평론가는 '여자는 남편하고 결혼하는 것이지 남자하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정말로 지언이다. 나는 남편과 결혼했다.
그리고 그 남편 속에서 '남자'를 추상해 내려고 노력해 보았다.
내가 현재까지 미혼 이었다면 나는 물론 계속해서 미혼일 것이다...... 
 
13.   2월 23일
 
이 불안은 심리적 육체적 불안보다 훨씬 커다란 것이다.
권태, 단조, 획일......나는 친구가 하나도 없다. 주혜나 채린이가 내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것이 나에겐 미지의 것이고 섬뜩한 것이지만 진심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죽음은 적어도 모든 것을 엄패시킨다. 그러면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것을 보고 듣고 할 필요가 없다.
죽음은 하나의 싸늘하고 검은 거대한 만 트이다.
 
죽음 -오토 프리드리히 볼로프-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죽음을 생각할 때 압도되고 전율하는 불안이다.
거기에는 육체적인 불안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엄습해 들어오는 어지럽고
섬뜩한 감정이 문제가 된다.  그것이 생명적인 존재의 존속에 대한 공포 벌거벗은 부재에 대한 공포다.
 
14.   3월 1일
 
3월이다. 오늘은 따뜻한 날이었다.
산보를 했다. 뮬러(Muller)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만두와 샐러드를 곁들인 돼지불고기. 오후엔 집안 일을 했다.
세탁, 설거지, 방 청소......노을이 새빨갛게 타는 내방의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운 일이 있다.
너무나 광경이 아름다워서였다. 새벽에 닭이 일제히 울 때 느꼈던 생명의 환희의 야생적 즐거움......
그리움과 먼 곳으로 훌훌 떠나버리고 싶은 갈망......
바흐만의 시구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 곳으로 떠나고 싶은 것이다.
-목마른 계절 30p-
 
나의 언니 전혜린/ 동생 전채린의 글
 
끈기와 탄력과 집중력과 결단성을 갖고 언니는 생을 긍정했다. 생의 완벽성을 구했다.
고집에 가까울 만큼 열심히 살았다. 매 순간마다에 포함되어 있는 가장 강렬한 것,
또는 그 어떤 짙은 것을 끄집어 내려 했다. 힘으로, 위험으로,
혹은 욕망 이라는 방법으로 생의 아주 작은 한 조각도 자기에게서 새어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쟁취된 매 순간을 지속 시 켜려고 애썼다.
 
또한 언니의 생은 자기의 모든 것을 (지식과 정열과 그리고 사랑을)모든 이에게 쏟아 부은 일생이며,
꿈과 기쁨과 괴로움이 터질 듯이 팽팽하게 찬 일생이었다. 자기의 생을 완전히 자유롭게 살려고
노력했다. 언니의 생은 자유로 우려는 정신과 현실 세계와 대결 해 나가는 투쟁 과정 이었다.
한마디로 언니가 살아간 길은 창조적인 땀에 젖은 걸음걸이였다. 이것이 언니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자유에의 승리인지도 모른다. 언니는 완전히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다.
 
언니의 세계는 비전(vision)을 볼 줄 아는 꿰뚫는 강한 직관력으로 신비한 자연현상 이나
생명 현상에 통해 있는 것 갔었다. 이러한 사고는 늘 우리들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저편의 아득한 경지를 감수하고 있는 것 갔었다. 그리하여 언니의 충만한 생의 알맹이로는
더 이상 이 세상 안에 설수 없어 이 세상 밖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다.
이렇게 형성된 세계였기 때문에 아무도 언니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나도 그 몰 이해자 중의 하나이다. 헉슬러가 로렌스의 인물과 사상을 말했던 글의 한 구절처럼
나도 말할 수 있으리라. '마지막 2년 동안의 언니는 이를테면 한 개의 불꽃 이었다.
기적과 같은 불꽃이었다. 왜냐하면 이 불꽃은 기름이 완전히 없어진 등잔에서 천연히 타고 있으니까'
라고 언니는 30년 전 1월 1일 일요일에 낳았고 1965년 1월 10일 같은 일요일 아침에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을 떠났다. 지금 언니는 경기도 안양 조남리에 있는 선산에 잠들어 있다.
불꽃처럼 살고 갔으나 그가 사랑하던 우리들 속에 뿌려놓은 언어와 고독과 사랑의 씨는 
우리 속에 자라나서 숲을 이루고 그 숲은 우리와 함께 커갈 것이다.  -동생 전채린-
 
위 글은  (그리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의 저서 머리글 에 올린 동생 전채린의 글이다 
 

 






           전혜린의 그림
 


전혜린이 장 아제베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2통
그녀는 1965년 1월6일 새벽과 정오에 이 편지들을 마지막으로 썼고 
4일 뒤인 1월10일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을 떠났다.
 
장 아제베도 에게

1965년 1월6일 새벽 4시...... 어제 집에 오자마자 네 액자를 걸었다.
방안에 가득 찬 있는 것 같은 네 냄새, 갑자기 네 편지(내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전부(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를 벽에 붙이고 싶은 광적인 충동에 사로 잡혔다.
나는 왜 너를 좋아할까?
 
비길 수 없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너를 좋아해, 너를 단념하는 일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어,
너의 사랑스러운 눈, 귀여운 미소, 몇 시간만 못 보아도 금단현상(禁斷現象- 아편 흡입 자들이 느낀다는)이 일어나는 것 같다. 목소리 라도 들어야 가슴이 끊는 뜨거운 것이 가라앉는다.
너의 곧은 성격, 거침없는 태도, 남자다운 기상, 총명, 활기, 지적 호기심, 사랑스러운 얼굴,
나는 너의 모습을 사랑한다
 
(Ich liebe alles an dir) 내가 이런 옛날 투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 좀 쑥스럽고 우스운 것 같다.
그렇지만 죠르조 상드(G.sand)가 뮈세(Musset)와 베니스에 간 나이인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나는 좀 더 불태워야 한다고 분발(?)해 본다. 나의 지병인 페시미즘(Pessimisus)을
고쳐줄 사람은 너 밖에 없다. 생명의 애착을 만들어줄 사람은 오직 너야. 오늘밤 이런 것을 읽었다.
사랑은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이란 한 개의 육체와 영혼이 분열하여 탄소, 수소, 질소, 산소
기타의 각 원소로 환원 할 때 그것을 막는 것이 사랑이야. 어느 자살자의 수기중의 일구(一句)야.
 
장 아제베도 !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도록 도와줘! 정말 너의 도움이 필요해
나도 생명이 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가능하면 생명을 지속하고 싶어
그런데 가끔 그 줄이 끊어지려고 하는 때가 있어, 그럴 때면 나는 미치고 말아,
내속에 있는 악마(Totesse hnsucht)를 나도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있어, 악마를 쫓아줄 사람은 바로 너야 나를 살게 해줘...... 
 
다시 장에게 /1965년 1월 6일 정오 경
 
눈이 멎지 않고 내리고 있어 눈 속을 헤매고 싶어. 너는 무얼 하니? 모든 일에 구토를 느껴.
단지 의외로 (태양 병)의 번역이 나를 몰두시키고 있어 이런 내용 이런 느낌이란다. 태양병균---
비 정상적인 강한 열 속에서만 생존하는/ 나는 토오라는 표범과 사는 말레이 여자 마라와 만났다.
/ 토오는 나를 미워한다. / 나는 마라 몰래 토오에게 구하기 힘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아직 따스한 암소고기를 먹인다. 다시 야생으로 돌아가 길들지 말라고/ 갈색피부의 마라---
이 여자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여자를 소유하고 있기는 하나/ 나 ......
토오를 내쫓아 마라...나는 토오가 없으면 잠이 안 와요/ 나는 토오를 미워한다.
토오는 마라의 애정의 일부를 뺏고 있다. /
 
우리는 대륙의 절반을 뒤덮고 있는 열 파의 한가운데 있는데 춥다.
/ 흰 여자가 흰 남자를 사랑할 때는 어떻게 하나요? 갈색 남자가 갈색 여자를 사랑할 때는?
/ 내 심장은 전쟁을 원하고 있다. 나는 마라를 사랑한다. /마라는 일어선다. 나체로 갈색으로 사랑하면서
/ 나는 태양 병이 무섭다. /그리고 우리의 피는 소리를 지른다.
/ 호수 한가운데서 나는 세계를 향하여 소리 질렀다. 마라! /마라. 우리의 사랑은 안 죽어
/ 태양은 나를 죽일 것이다. /갑자기 광적인 생각이 엄습해 온다. 죽음이 구제를 갖다 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숲의 화재는 광기다. 사랑하는 불 사랑하는 숲이여 너는 죽어야 한다.
/ 나는 마라를 고통 없이 사랑할 수 있으리라.
/나는 한계 위에 서있다. 아, 마라, 진한 향내 나는 나는 H. 노바크의 이 열 같은 표현 속에
나는 서늘함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에서)
...
지식과 정열과 사랑을 모든 이에게 쏟아 부으며 한때 청춘의 우상으로서
지금도 그녀의 영혼이 젊은이들의 가슴을 적신다. 1세기에 한번 나올까 하는 예리한 지성으로
감동을 안겨주었던 그 이상의 천재 전혜린은 잊을 수 없는 영원한 마음의 벗이다.
그녀의 짧았던 삶을 애도 한다.
 
가로등에 흩날리는 붉은 단풍잎이 소리 없이 내려 앉으며 고요하게 깊어가는 가을밤.
불현듯 그녀가 남긴 저서들을 다시 뒤적이면서 그녀의 혼을 새롭게 더듬는다는 것은 하나의 전율이며 
이 밤이 나에게 안겨주는 또 하나의 고독이다.
 
홍엽 속 진한 커피 향 풍기는 이 깊어가는 가을날, 그녀가 고독하게 음악을 즐겼던
지금은 대학로의 이색지대로 버림받은 (학림다방) 창가 반대편 의 저~ 구석 편에서 그녀가 좋아했던
(쇼스타코비치 의 심포니 5번) 과  (바그너 의 탄호이저 서곡) 등 쾌쾌 묵은 LP판의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그녀와 함께 음악을 듣고 싶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 (1965년 1월 9일 토요일) 
영하 10도의 날씨에 이 학림다방의 난롯가에서 벗들을 만났다고 한다.
가로등 불빛이 하나 둘 켜지는 초저녁 안개 낀 독일 슈바빙 거리를 그녀와 걷고 싶다. 그녀는 말했다 
‘남에게 보여서 부끄러운 사랑은 마약 밀매상 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없느니만 못하다.
대낮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라야 한다’
...
이 가을밤 내가 전혜린에 집착 하다니 참으로 가을은 이상한 계절이다. -끝- 
2006년 10/25 솔잎새
 
 
 
하늘이 주신 시간에
시간을 보태고
사랑에 사랑을 보탠 다음
눈감아 여기 잠든 이
전혜린 여사여
 
경기도 안양시 조남리 선산에 위치한 전혜린 님의 비문은
시인 김남조 여사가 작시함.
 
 

. 하루에서 人生을 .. Happy Day..! Marina...

 

瑪利娜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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