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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 교회는

고신교단 약사(略史)

작성자축제|작성시간22.08.25|조회수421 목록 댓글 0

고신교단 약사(略史)

 

한국 장로교회의 시작

한국과 기독교와의 접촉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회와의 첫 접촉은 1832년 내한하였던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만주를 징검다리로 한 서구 교회와의 간헐적인 접촉이 계속되었다.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기독교 선교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1876년의 개항(開港)이었다. 개항은 선교사들의 내한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1884년 알렌의 내한과 이듬해의 언더우드, 헤론 등이 내한함으로서 미국 북장로교회의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1889년에는 호주교회의 한국선교가 시작되었고,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교회가,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회가 각각 한국선교를 시작하였다. 미국과 호주, 캐나다에서 온 4장로교 선교부는 각기 분담된 지역에서 활동했으나 연합하여 1907년 대한 예수교장로회 독노회(獨老會)를 구성하였다. 노회가 조직된 지 5년 후인 1912년에는 7개 노회의 조직과 함께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구성하였다.

 

일제 시대의 신사참배 강요와 자유주의 신학의 출현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 한지 불과 25년이 못되어 1910년 일제는 한국을 강점하였고, 한국기독교는 일제의 식민통치하에 놓이게 된다. 이 기간동안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일관되게 추진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탄압이 1930년대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였다. 안타깝게도 장로회 총회는 친일적인 태도로 신사참배를 승인하고 적극 동참하는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였다.

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아등(我等: 우리들)은 신사(神社)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려행(勵行: 힘껏 실행)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있어서 총후(銃後: 전쟁 때의 후방에서) 황국 신민으로서 적성(赤誠: 온 정성)을 다하기로 기한다(다짐한다).
소화13년(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   )안은 해설
1938년 27회 총회 결의 이후 총회의 타락
1. 1939년 일제의 내선일체 식민 정책에 적극 협력할 것을 결의하는 성명서 채택
2. 1940년부터 공적인 교회 회의 때 신사참배의 정례화
3. 1940년 총회 상치위원회 신설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의 서사제창의 실천이행, 이를 위한 교회법, 교리, 의식 재검토 --> 순정 일본적 기독교화
4. 1942년 1월 찬송가 개정, 사도신경삭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를 삭제

한편, 대다수 교회 지도자들의 우상숭배에도 불구하고 순교의 각오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사와 성도들이 있었다. 당시 신사참배 반대로 2천명이 투옥되었고, 주기철, 최상림, 이현속 등 30여 명은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해방 후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20여명의 신사참배 거부자들은 광복과 함께 출옥하였다. 그들 중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손명복 전도사, 이인재 전도사, 그리고 조수옥 권사 등이 고신교단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930년대에 대두된 진보적 신학의 대두는 신사참배 문제와 함께 한국교회에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였다. 이전까지 내한한 초기 선교사들은 대체적으로 복음주의적인 혹은 보수적인 선교사들이었다. 그러나 주로 캐나다 선교부를 통해 파종된 ‘다른 전통’은 1930년대부터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940년대에 와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보수적인 입장의 신학운동이 퇴조하고 자유주의 신학이 그 지경을 넓혀 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해방 후 교회 쇄신 운동과 고려신학교 개교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다. 해방된 조국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일제하에서 범한 신앙적, 민족적 범과를 청산하고 교회재건, 곧 영적쇄신을 통해 새로운 교회를 건설해 가는 일이었다. 한국교회에서의 교회쇄신운동은 부산․경남지역, 곧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즉 한상동, 주남선 등 출옥한 인사들이 1946년 남하하여 회개와 자숙을 요구하고 진정한 교회 쇄신을 시도하였다. 이들은 참다운 신학교육 없이는 한국교회를 재건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신학교 재건을 통한 한국 교회 재건을 구상하였다.

이들은 이 구상에 따라 1946년 5월 신학교 설립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였고, 6월 13일부터 8월 10일까지 2개월간 진해에서 제1회 신학강좌를 개설하였는데, 이 강좌가 고려신학교 개교로 이어지는 신학교육의 시작이었다. 고려신학교가 정식 개교된 때는 1946년 9월 20일이었다. 박형룡과 박윤선은 교수로 초빙되었다. 고려신학교는 개혁주의 신학교육을 통한 목회자 양성이 목표였을 뿐 만 아니라 해방 후 교회재건운동과 영적 쇄신운동의 동력원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경남노회의 분열과 총회로부터의 축출

해방 후 경남지방에서는 교회재건을 주장하는 인사들(주로 출옥한 신사불참배론자들)과 신속한 변신을 통해 교회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자들(주로 친일적인 교권주의자들)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전자는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바른 신학의 확립, 회개와 자숙을 통한 교회 쇄신운동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후자에 하당하는 김길창(金吉昌), 권남선(權南善) 목사 등 친일적 인사들은 교회재건 원칙을 거부하고 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1949년 3월 8일 부산 항서교회당에서 기존의 교회조직을 이탈하여 또 하나의 경남노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한국장로교회 분열의 시작이었다.

당시 장로교 총회는 김길창 목사가 임의로 조직한 경남노회 문제를 정당하게 처리하지 못했다. 오히려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경남노회(이를 ‘법통노회’라고 했다) 대표들을 총회에서 축출하는 오류를 범했다.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기득권을 행사하면서 반민특위(反民特委)가 와해되고 결국 민족정기를 바로잡지 못했듯이, 한국 교계에도 친일적 교권주의자들이 자숙하지 않고 교권을 장악함으로서 신앙 정기가 서지 못했고 교회쇄신운동은 도리어 탄압을 받게 된 것이다.

 

고신교단의 조직과 발전

1951년 5월 피난지 부산의 중앙교회에서 모인 총회에서 부당하게 축출된 인사들, 곧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경남법통노회 인사들은 1952년 9월 11일 진주 성남교회당에서 총노회(總老會)를 조직하였다. 이때 발표된 총로회 설립 취지와 목적은 다음과 같다.

취지: 현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본 장로회 정신을 떠나서 이(異) 교파적으로 흐름으로 이를 바로 잡아 참된 예수교 장로회 총회로 계승하기 위하여 총로회를 조직함.
목적: 전통적인 대한 예수교장로회 정신을 지지하는 전국교회를 규합하여 통괄하며 개혁주의 신앙운동을 하여 법통노회를 장차 계승키로 함.

총노회가 조직될 당시 소속 교회는 320여개 교회였고 이중 90%정도가 부산. 경남 지역에 위치한 교회였다. 그러나 점차 타 지역으로도 교세가 확장되었다. 1956년까지 여섯 개 노회가 조직되어 그해 9월 20일에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고신)가 조직되었다. 이 당시 교단에 속한 교회는 568개 처, 목사는 111명, 전도사 252명, 장로 157명, 세례교인수는 15,350명으로 보고되었다.

총노회를 조직한 교회는 이를 기념하여 대만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는데 그 결과로 1958년 김영진 목사를 대만에 정식 파송하였다. 이것이 고신교단의 선교운동의 시작이었다. 고신교단은 단순히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신앙적 유산만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과 개혁주의 교회건설 그리고 개인생활의 순결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교단으로 출범하게 된 것이다.

2022년 현재 고신교단은 설립 70년을 맞이하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장로교회로서 2,000여 지역교회와 40만의 성도로 이루어져 있다. 산하에는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복음병원과 같은 교육, 의료 기관들이 있다. 또 세계 60여개 나라에 약 5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또 주간 신문인「기독교보」와 월간지인「월간고신」을 발간하고 있다.

 

고신교단의 신학적 배경

첫째,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 (개혁주의 신학)

신학은 신앙적 삶과 교회적 생활을 결정해 주는 것이므로 개인이나 단체의 신학이 어떠하냐 하는 점은 그 개인과 단체의 삶과 신앙, 교회적 생활을 결정해 준다. 한국교회는 1930년대를 경과해 가면서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고 그 결과 신사참배 요구를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해방 이후 고려신학교 설립은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개혁주의 신학을 확립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써 바른 신학운동의 일환이었고, 바른 생활과 바른 교회를 세우려는 근본 동기를 지니고 있었다.

 

둘째, 신사참배 반대 투쟁을 통한 생활의 순결 (개혁주의적 생활)

일제하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교회의 본질적 신앙을 지키려는 숭고한 싸움이었다. 그들은 박해를 받고 투옥 되었으나 그것은 영광스러운 고난이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신앙의 정절과 생활의 순결을 지키려는 거룩한 투쟁이었고 바른 생활을 위한 경건한 투쟁이었다. 고신교회는 교리만 강조하지 많고 바른 삶을 동시에 강조한다. 그 바른 삶이란 건실한 교리적 기초 위에서 순결과 거룩을 추구하고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이다.

 

셋째, 회개와 자숙을 통한 교회 재건(쇄신) 운동 (개혁주의 교회건설)

해방 후 교회정화와 영적 쇄신운동, 곧 교회 재건운동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새롭게 하기 위한 불가피한 요청이었다. 이것은 또한 교회 개혁을 위한 투쟁으로서 바른 교회운동이었다. 고신교회는 해방 이후 단지 외형적 재건만을 추구하지 않고 내면적 갱신과 쇄신을 요구하고 이를 지지해 왔다. 일제 하에서의 상황, 곧 자유주의 신학의 유입, 배교적인 신사참배를 생각해 볼 때 해방이후의 교회의 정화와 영적 쇄신은 긴박한 과제였다.

 

참고: 이상규, “한국 장로교회와 고신의 전통,” 『고신총회 소개와 전망』(서울: 총회출판국,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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