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전 9:1~10)
어차피 죽을 인생?(1~3절)
예상치 못한 사고나 질병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 성도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당황합니다. 의롭고 경건하게 산 사람의 죽음이 악하고 불경건하게 산 사람의 죽음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면(2절) 왜 그렇게 의롭게 살려고 몸부림쳐야 할까요? 선인과 죄인을 가리지 않고 다가오는 죽음이 모든 사람의 삶을 평등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라면, 삶의 의미고 뭐고 할 것 없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어차피 죽을 인생인데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서 많은 사람은 이런 죽음의 부조리 앞에서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갑니다.”(3절)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이렇게 살 가능성이 큽니다.(창 8:21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가 정말 삶을 잘 살았는지,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십니다. 미래는 우리의 것이 아니기에 우리가 산 삶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혜롭고 의롭게 산다고 해도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할지 미워할지 알 수 없습니다(1절). 혹은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모습만 보아서는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 중에 누구를 더 사랑하시는지를 알기가 어려운 때도 있습니다(1절). 죽기 전에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보면 악인이 반드시 저주를 받고 의인이 반드시 복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삶의 외형적 결과나 죽는 모습만 보아서는 과연 하나님께서 의인과 지혜자의 손을 들어주셨는지를 알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계시며 어떤 의인이나 지혜자의 삶도 헛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입니다.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4~6절)
4-6절 산자가 죽은 자보다 낫다
4절 산자들에게 소망이 있다
이유 1: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 (비참한 삶도 죽음보다는 낫다)
5절 이유 2: 산 자들은 죽을 것을 알지만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이유 3: 죽은 자들은 잊혀서 다시는 상을 받을 기회가 없다.
6절 이유 4: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져 이 땅의 모든 일 중에서 그들의 몫은 없다.
상황이 이쯤 되면 허무나 쾌락에 빠지는 것이 정상적으로 보일 것입니다. 도덕이고 신앙이고 다 버리고 하고 싶은 일 마음대로 하다가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죽음을 앞두고 있기에 도리어 그 삶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살아 있을 때라야 삶에 대한 소망(‘확신’ 혹은 ‘기대’)이 있고,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더 낫다’고 합니다(4절). 왜냐하면 산 자만이 죽음이 올 것을 알기 때문에 삶을 좀 더 소중하고 의미 있게 살 기회를 얻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삶을 잘 살아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더 이상 주어지지 않습니다(5절; 11:7). 사람들은 죽은 자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아무리 힘과 권력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화려하고 멋있게 살다가 죽었다 하더라도, 죽은 자는 사랑도 미움도 시기도 할 수 없습니다(6절, 1절 참조, 프레드릭스, 280). 죽은 자는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어떤 몫이나 상을 받을 기회를 영원히 상실하고 말았습니다(6절). 그래서 우리의 삶의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어도 살아 있다는 것 자체는 매우 소중합니다.
종과 주인의 대화
어차피 죽을 바에는 악하고 미친 듯이 살다가 죽자고 하는 사람은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더 낫습니다(4:2). 그런 삶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살아서 숨 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땅에서의 삶의 기간만이 하나님 나라에 영원한 의미를 남길 수 있는 기회이며,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가 영원한 하나님의 상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결정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죽음은 지옥 불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옮겨 갈 기회를 앗아가 버립니다. 화려하게 죽은 사람보다는 고통스러운 생명이라도 붙어 있는 사람에게 더 소망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삶을 제대로 살 기회, 영원한 의미를 남길 기회가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라(7~10절)
7-10절 결론적 훈계: 열심히 살되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라
7절 훈계: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시라
이유: 하나님께서 너의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기에
8절 훈계: 항상 깨끗한 옷을 입으라
훈계: 항상 머리에 향 기름을 바르라
9절 훈계: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인생을 누리라
(부연: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주신 모든 헛된 날)
이유: 그것이 네가 ‘해 아래에서’ 평생에 수고하고 얻은 몫이기 때문에
10절 훈계: 네 손이 일을 얻는(발견하다, 마차) 대로 힘을 다해서 하여라
이유: 네가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계획도 지식도 지혜도 없으므로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예측할 수 없는 우리의 미래 앞에서 어떻게 해야 영원한 의미를 남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일까요? 전도자는 다시 한번 더 ‘현재’를 누리며 기쁘게 살라고 충고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고를 기쁘게 받으시고(인정해주셔서) 허락하신 열매들을 마음껏 누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수고해서 얻는 소득이나 결과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수고했음을 인정하시는 표라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래서 전도자는 그 수고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음식을 즐겁게 먹고 마시라고 합니다(7절). 우중충하게 살지 말고 좋은 옷도 입고 머리에는 기름도 바르라고 합니다(8절). 사치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릴 줄 아는 여유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헛된(짧은) 평생의 모든 날’이지만 노동과 쉼의 반복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의미와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가라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살아있기에 누릴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에 우리가 수고한 몫이고 유익입니다.
두 번째는, 혼자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라고 합니다. 혼자서는 참 기쁨을 누릴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들, 가족들과 성도들을 사랑하면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복들을 누리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라는 말입니다(9절). 세상의 명예를 얻고 위대한 업적을 쌓기 위해서 아내와 남편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을 열심히 하라고 합니다(10절). 그 일은 이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즉 이 세상을 돌보고 가꾸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며(창 1:27~28; 2:20), 타락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후에는 일도, 일에 대한 계획도, 지혜나 지식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6절 참조).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계획을 따라 최선을 다해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소명)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영원한 의미를 남기는 삶입니다.
팀 켈러 일과 영성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다” 일은 종류에 상관없이 모두 고귀하다. “일터에서 주님의 매뉴얼을 따라 야심차게 일하라“ 일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수단이다.
일은 단순히 밥벌이가 아니라 목적이 있는 소명이다. 일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종이다. 일은 섭리를 이뤄 가시는 창조주의 주요한 도구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 세상을 유지해 가는 주님의 방식이다. (루터) 크리스천의 노동은 거룩한 창조 사역의 연장이다.
자신만을 위해 일하지 말고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땀방울을 흘리라. 일은 이웃을 사랑하는 수단이다.
11:7-12:8 젊음의 날을 누리라
7 빛과 해
8 어두운 날을 생각하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다
9 네 젊음을 즐기라
하나님이 심판하실 줄 알라
10 네 젊음을 즐기라
젊은 시절이 다 헛되다
12:1 어두운 날이 오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
12:2 해와 빛과 달과 별들
빛을 볼 수 있을 때 즐거워하라(7~8절)
7절 젊은 날(혹은 살아 있음)의 좋음에 대한 비유
“빛은 실로 달콤하고,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은 좋다”
8절 훈계 1(간접명령) 사람은 많은 인생의 날들을 즐거워해야 한다
훈계 2(간접명령) 캄캄한 날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유: 캄캄한 날들[12:1~7]이 많고 다가올 일들은 다 헛되기 때문)
전도자는 빛을 누리고 해를 보는 것은 정말로 달콤하고 즐거운 일이라고 노래합니다(7절). 그러기에 해를 볼 수 있는 동안에는 항상 즐거워하라고 충고합니다. 왜냐하면 캄캄한 날이 곧 닥쳐올 것이기 때문입니다(8절). ‘캄캄한 날’이란 12장에서 묘사하는 노년의 때이며,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빛을 누린다는 것은 젊음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각 연령에 맞게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캄캄한 날(죽음이 가까운 노년에) 좀 편하게 살자고, 밝고 젊은 날을 노동과 고생으로만 희생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젊은 날이 지나면 ‘캄캄한 날’이 곧 닥치는데 죽음이 가까운 그 날들까지 삶을 누리지 못하면 그야말로 인생은 허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8 하반 절, “다가올 날은 다 헛되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하자는 것이 아니라 젊음의 때에 누려야 할 것을 충분히 누리라는 말입니다. 지금 내게 비치는 빛을 감사하고, 내게 주신 젊음과 힘을 기쁘게 사용하고, 젊은이만이 할 수 있는 모험을 하라는 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때그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들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청년이면 젊음을, 중년이면 성숙함을, 노년이면 지혜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젊음을 누리고 근심과 악을 멀리하라(9~10절)
9절 훈계 3(명령) “청년이여, 네 젊은 날을 즐거워하라”
훈계 4(간접명령) “네 청년의 날들을 좋게 하라”
훈계 5(명령)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훈계 6(명령) “이 모든 일들에 대해 하나님이 너를 심판하실 것을 알라”(긍정적, 부정적? 책임 있는 즐거움[롱맨]? 제대로 즐기지 않는 것에 대한 심판[바솔로뮤, Seow, 탈무드, 즐거움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10절 훈계 7(명령) “네 마음에서 근심을 제거하라” “네 몸에서 고통(악)을 떨쳐버리라” (이유: ‘젊음’이나 ‘검은 머리’가 헛되기(짧기) 때문)
“청년이 젊을 때 자신의 삶을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늙으면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늙으면 젊을 때 놓쳐버린 즐거움을 절대로 만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늙을 때까지 살아 있을지 절대로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Kruger, Qoheleth, 198. 그레이다누스로부터 재인용.
“모든 사람은 자신이 살면서 보았으나 누리지 못한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해명해야 한다.” 탈무드(y. Qidd. 4:12)
9절에서 전도자는 좀 더 분명하게 자신의 교훈을 표현합니다. “청년이여 네 젊은 날을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9절) 젊을 때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 보라는 것입니다. 젊을 때만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라는 말입니다. 꼭 청년 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죽음이 닥쳐오기 전에 우리에게 누리라고 주신 날들에 적합한 일들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우리를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9절). 심판이 있으므로 젊을 때 아무것도 하지 말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젊을 때 하라고 하신 일을 꼭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의 날이 가까이 오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매 순간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알고 감사하며, 매일 매일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일들을 빠짐없이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죽음이 다가와도 후회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과 심판은 우리의 삶을 나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게 합니다. 젊음을 가치 있게 보내게 합니다.
젊음과 삶의 모든 순간을 즐거워하기 위해서는 근심과 악(혹은 고통)을 우리 몸에서 떠나게 해야 합니다. 즉 미래에 대한 근심이나 죄나 고통으로 젊음의 날을 힘들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10절).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너무나 많은 근심을 지고 삽니다. 늘 미래를 위해 쫓기는 삶을 삽니다. 젊음을 즐기기보다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고통 가운데 보냅니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공부의 짐에 짓눌려 있습니다. 청년들은 취업 때문에 대부분의 젊음을 소비합니다. 젊음을 누릴 시간이 없습니다. 또 근심과 걱정이 많을수록 젊은이들은 죄악의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과도한 스트레스를 쉽게 풀 수 있는 쾌락의 도구들에 손을 댑니다. 해결책은 젊음을 누리는 것입니다. 젊음을 누리는 것으로 공부도 하고 취업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도한 염려와 고통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어른들은, 교회는 젊은이들이 건강하게 젊음을 누리는 방법들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젊을 때 꼭 해야 할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어야 합니다. 데이트하고, 결혼 준비하고, 사회인으로서 역할을 감당하고,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 등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어야 합니다. 사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청년의 때는 너무나 빨리 지나가기 때문입니다(“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10절 [짧다]). 한순간도 우리가 그냥 보낼 시간은 없습니다. 비치는 빛을 즐거워하고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맡기신 일들을 기쁨으로 감당해야 아름다운 종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1-7절에 대한 세 가지 해석 방법: 풍유적(늙음, 탈굼, 탈무드, 이븐 에즈라, 델리취), 문자적(장례식 상황 묘사, C. Taylor, Anat), 상징적 해석(장례식 -> 우주적 규모의 재난 암시 ->노년의 고통과 죽음 암시하지만 풍유적이지는 않다, Fox, 344-49, 바솔로뮤, Seow).
죽음이 이르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1~2절)
12:1 훈계8(명령) “청년의 날들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번역: 그러므로 너의 청년의 날들에 너의 힘을 누리라-TNK]
첫째, 재앙의 날들이 이르기 전에
둘째,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다가오기 전에
2절 셋째, 해와 빛(11:7)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넷째,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전도자는 ‘곤고한 날,’ 즉 죽음이 오기 전에 우리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합니다(1절). 죽음이 다가오면 아무런 낙도 없고, 해와 빛과 달과 별들도 볼 수 없습니다(2절, 11:7, 8). 비가 온 뒤에도 태양의 빛줄기는 더 이상 비취지 않고 구름만 몰려오는 날들이 될 것입니다(2절).
그래서 전도자는 죽음의 때가 오기 전, 즉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하고 기도만 하면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죽음이 이르기 전에 창조주께서 내게 주신 삶을 충분히 누리라는 말입니다(11:9~10).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하루하루를 허락하시는 창조주의 뜻을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먼 미래를 위해서 현재 누려야 할 모든 것들을 희생하고 살다가는 순식간에 닥치는 죽음 앞에서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은 우리에게 시간과 일과 지혜와 사람들을 선물로 주신 창조주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조금이라도 일찍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이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비결입니다.
지금 바쁘게 하는 일을 잠시 내려놓고 지금 내게 창조주 하나님께서 누리라고 주신 것들이 무엇인지를 묵상하십시오. 죽음의 날이 이르기 전에, 지금 나에게 주신 일과 사람들과 젊음과 자연을 누리십시오. 지금 꼭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을 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인정받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전도자는 죽음의 날들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허무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그림처럼 묘사합니다(알레고리화, 풍유법).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노년의 쇠약함을 어두운 상징들로 비유합니다. 먼저,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 즉 팔다리가 떨리고, ‘힘 있는 자들,’ 허리가 구부러집니다. 또 ‘맷돌질하는 자들,’ 즉 이가 적어져서 씹는 일이 힘들어지고, ‘창들로 내다보는 자,’ 눈이 어두워집니다(3절). ‘길거리 문들,’ 즉 귀가 잘 안 들리게 되고, ‘맷돌 소리,’ 씹는 일이 적어집니다. 작은 새의 소리에도 일어날 정도로 잠이 없어지고, ‘노래하는 여자들,’ 즉 목소리도 쇠하게 됩니다(4절). 노쇠하게 되면 높은 곳을 오르기가 겁이 나고 길거리에 나다니는 것도 주저하게 됩니다(5절). ‘살구나무꽃’처럼 흰 머리가 나게 되고, 메뚜기 같이 가벼운 것도 짐이 되고, 신체적인 욕구들도 사라지게 됩니다.
죽음은 ‘영원한 집’인 무덤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조문객들의 방문만을 남길 뿐입니다(5절).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두레박 줄) 바퀴(도르래)가 우물 위에서 깨지는’ 것처럼 우리를 붙들고 있던 소중한 생명의 끈이 끊어지고, 흙으로 만들어졌던 우리의 육체가 깨지는 것이 죽음입니다(6절). 모든 활동이 끝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흙으로 만든 우리의 육체가 다시 땅으로 돌아가지 전에, 우리의 호흡이 그 호흡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전에(숨을 거두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그분을 기억해야 합니다(7절). 창조주께서 지금 허락하신 삶을 누려야 합니다.
전도자가 어둡게 묘사한 ‘죽음의 현상’은 우리를 좌절시키지 않습니다. 도리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줍니다.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영원한 의미를 남길 수 있는 날은 지금임을 알려줍니다. 죽음의 음산함이 우리를 덮치기 전에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의미 있게 누리십시오.
헛되이 죽지 마라(8절)
‘헛되고 헛되다’로 글을 시작한(1:2) 전도자는 다시 ‘헛되고 헛되다’로 글을 마무리 합니다. 전자가 야망에 사로잡혀 헛되게 수고만 하는 삶의 허무를 지적한 것이라면, 후자는 삶을 누리지도 못하고 맞이하는 헛된 죽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언은 우리의 삶을 허무주의로 몰아가지 않고 삶에 대한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인생이기에 현재의 삶을 충분히 누리라고 웅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까지 주시면서까지 건져내신 우리의 삶을 소중하게 살라는 충고입니다. 헛되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간들, 사람들, 일들, 환경들을 최선을 다해서 누려야 합니다. 잃었다가 돌려받은 귀한 생명, 헛되이 죽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매 순간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12:13-14절 결론적 교훈: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들을 지키라(일인칭, 하나님에 대한 언급으로 마무리)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13~14절)
마지막으로 에필로그는 전도서의 요약이자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훈계로 결론을 내립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13절)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우리의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3:14, 5:7, 7:18, 8:12). 내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목적하시는 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안내하는 길이 아닌 하나님께서 안내하시는 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의 고난과 삶의 회의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다스림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의식하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14절).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전도서의 교훈들을 비롯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려고 애쓰게 됩니다(13절). 심판 때문에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이 최선의 길이고 최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십니까? 말씀을 듣는 대로 실천하십니까? 허무한 인생을 허무하지 않게 만드는 최종적 결론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그분의 말씀대로 사십시오. 그러면 때로 안개 속에 서 있는 것 같을지라도 참으로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그런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