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와 경쟁으로 얼룩진 세상(전 4:1~6) - 해 아래 새 것이 없는 이유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는 세상(1~3절)
우리 인생에 고통을 주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의 불의함입니다. 세상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주로 권력을 가진 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1절). 권력이나 힘 앞에서 불의는 정당화되고, 공평과 정의는 무력하게 됩니다. 가장 공의로워야 할 재판정, 정부, 국회, 기업 할 것 없이 모두 권력을 쥔 사람들의 눈치를 살핍니다. 약자들은 아무리 억울하게 재산을 빼앗기고,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학대당해도, 돈이 없으면 정당한 재판을 받을 수조차 없습니다. 국제적으로 인권이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소수 인종과 여성들과 노인들과 아이들과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과 학대는 여전히 심각한 상태입니다.
학대당하는 자들의 고통을 더 악화시키는 것은 그들을 위로할 자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약자들의 눈물을 닦아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편에 서서 권력자들로부터 그들을 지켜주려고 하는 사람들을 찾기 힘들다는 것입니다(1절). 학대당하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그 고통을 헤아려주고 그런 고통에서 건져줄 사람마저 없는 삶이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2절). 평생 학대만 당하다가 죽을 인생이라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3절).
이런 부조리한 세상의 모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학대하는 자들로부터 그들을 건져내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억압과 학대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권력자들이 약자들을 학대하는 이 세상의 악한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시기 위해서,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섬기시고 그들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학대와 억압과 착취의 고통 가운데서 죽지 못해 살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생명과 위로와 희망이 되신 것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약자들이 학대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받아 생명과 위로를 얻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있기에 이 세상은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만이 학대받는 약자들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 편에 서서 그분들의 권익을 위해서 삶을 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고, 성령께서 그렇게 살도록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학대받는 자들의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자처럼 학대받는 인생의 허무를 노래하는 자들이 살 희망을 품고, 하나님 안에서 참된 위로를 얻도록 해야 합니다.
혹시 나는 힘없는 자녀들을 학대하는 부모는 아닙니까? 연약한 아내를 무시하는 남편은 아닙니까? 부하 직원을 부려 먹는 상관은 아닙니까? 약한 자들을 더 귀하게 여기고, 그들의 처지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섬기는 위로자가 되십시오. 그렇게 할 때 세상은 살만한 곳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경쟁으로 말미암는 쉼 없는 수고(4~6절)
해 아래 있는 인생들이 겪고 있는 또 다른 부조리는 ‘경쟁과 시기심에서 비롯된 쉼 없는 수고’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듯이 이 세상 사람들의 많은 수고와 성공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쟁심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습니다(4절). 국가나 기업은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 ‘무한 경쟁’을 유도하여 좀 더 나은 업적을 이루려고 합니다. 친구를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중고등학생들이나 초등학생들조차도 점점 친구를 경쟁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현실입니다. 대학생들은 좁은 취업의 문을 뚫기 위해서, 직장인들은 승진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 기업들은 서로 고객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경쟁합니다. 서로를 깎아내리고, 서로 정보를 숨기고, 남을 짓밟고 올라서려고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이런 과도한 경쟁과 수고는 일하기 싫어서 자기 살을 파먹는 게으름만큼이나(5절)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런 수고는 우리 자신을 쉬지 못하게 합니다. 두 손 가득 움켜쥐었으면서도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에 대한 시기심 때문에 쉬지 못하고 일을 합니다(6절). 이것은 자신을 노예처럼 부리는 또 다른 형태의 학대입니다. 참으로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이 헛된 수고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 아파하지 않고, 한 손에만 가득해도 자신이 일한 것에 만족하며 평안하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혹시 다른 사람에 대한 시샘 때문에 쉬지 못하고 자신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쉬어야 할 때 쉬고 계십니까? 경쟁심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십시오.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하기 위해서 내 수고가 사용되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나와 이웃이 모두 행복해질 것입니다.
쉽게 끊어지지 않는 세 겹 줄 (전 4:9~12): 학대와 시기와 경쟁에 대한 해결책
함께 하여 좋은 상을 얻는 수고(9~12절)
9절 “둘이 하나보다 더 낫다” 이유 1: 수고에 대한 더 나은 보상을 얻을 것
10절 이유 2: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일으켜 줌” 대조
“홀로 있고 일으켜 줄 다른[두 번째] 사람이 없는 것은 불행” (‘없다’*1)
11절 이유 3: “둘이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 누우면 따뜻하지 않다”
12절 이유 4: “혼자로는 못 이겨도 둘이면 이길 수 있고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결론: 연합과 협력이 (시기심으로? 4절) 혼자 일하는 자보다 훨씬 더 좋은 열매를 맺는다
전도자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얼마나 좋은지를 강조합니다. 사실 혼자서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는 둘 이상의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일할 때 훨씬 더 크고 아름다운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9절). 왜냐하면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붙들어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10절).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혼자보다 훨씬 더 따뜻한 것처럼, 함께 일하는 것이 훨씬 더 기쁘고 행복합니다(11절). 어려움이 닥쳐와도 한 사람은 쉽게 넘어질 수 있지만 두세 사람이 힘을 합치면 잘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의 줄은 쉽게 끊어지지만 세 겹으로 꼰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12절).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길은 마음을 함께 나눌 가족과 친구를 갖는 것(결혼)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서 함께 수고할 동역자들을 갖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마음을 나누고 의지할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할 수 있는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섬기고 일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어려움 앞에서도 낙심치 않고 함께 손을 붙들고 기도할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일을 함께 하기 위해서 마음과 생명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과 재물을 나누기 위해서 힘을 합하는 공동체입니다. 어려움을 함께 이기기 위해 함께 기도의 손을 모으는 공동체입니다.
요한복음 19:25-27.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
자칫하면 자신의 필요에 빠져서 자신만을 위해서 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럴수록 더욱더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고, 함께 힘을 모아 나누기 위해서 일하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들이 ‘세 겹줄’ 공동체가 되어 함께 섬기는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위해서 땀을 흘리는 우리에게 공동체로서 하나이신 삼위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과 행복이 넘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