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2장
오순절 성전에 모인 백성에게 회심의 간증을 함,
백성들이 죽이려 함
(찬송 315장)
2024-7-25, 목
맥락과 의미
21장에서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끝내면서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21장부터 사도행전의 끝인 28장까지 바울은 계속 로마 군대의 호송을 받습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까지 가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에베소에 있던 19:21에 처음 나옵니다. “내가 거기(예루살렘)로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부르실 때, 그분은 바울이 이방인과 임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택함 받았다고 알려주셨습니다(9:15).
22 장에서 바울은 로마 군대의 호송을 받으며 오순절에 성전에 몰려든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1. 바울이 사도로 부름 받은 과정을 성전에 모인 사람에게 증거(1-21절)
2.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함, 로마 천부장이 따로 심문함(22-30절)
1. 바울이 사도로 부름 받은 과정을 성전에 모인 사람에게 증거(1-21절)
1)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기독교인을 핍박하던 바울(1-4절)
바울은 성전과 로마 주둔군의 망대를 연결하는 계단에 섰습니다. 로마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섰습니다. 21장에서 로마 천부장에게 헬라어로 말했기 때문에 이런 기회를 얻었습니다.
2절, 바울은 “히브리 말”(정확히는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방언인 아람어)로 말을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복음을 증거하게 된 경위를 변호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말(아람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조용히 들었습니다. 바울이 헬라어와 아람어를 적절한 때에 사용하는 지혜가 돋보입니다.
3절에서, 자신은 당시 유명한 율법교사 가말리엘 밑에서 배웠고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었다고 간증합니다. “이 도를 박해하여”(4절), 곧 기독교를 핍박하는 자였다고 말합니다.
2)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 예수님이 바울을 만남(5-16절)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러 다메섹 근처로 갈 때의 일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주 밝은 빛 가운데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는 눈의 시력을 잃었습니다.
아나니아가 그에게 와서 눈을 뜨게 해주며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예수 그리스도)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14,15절)
바울은 회개하고 세례받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복음 전파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이 새롭게 알고, 보고, 듣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그 의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바울은 스데반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 의인”(7:52)이라 증언한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바울에게 처음 나타나셨던 그리스도는 그 후에도 바울에게 눈에 보이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그에게 항상 보이게 나타나신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게 영으로 임재하시며 복음 증거를 도우셨습니다.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이 구원에서 성장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을 때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계속 알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매 순간에 그리스도는 능력으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3) 예루살렘에서 두 번째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 (17-21절)
17절부터는 그 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황홀한 중에”(11:5, 베드로가 경험한 것) 주님 예수께서 나타났던 것을 간증합니다. ‘황홀함’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이 맑으면서 눈으로 환상을 보는 상태입니다. 이 일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난 후 한참 후의 일입니다.
그동안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뒤에 바로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아닙니다.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3년동안 거기 머물렀습니다. 그 후 다시 다메섹으로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아라비아 왕이 보낸 사람들이 다메섹에 와서 유대인과 협력하여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 핍박 때문에 바울은 광주리 안에 들어가 성벽을 타고 도망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갈 1:17-18). 예루살렘에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전했습니다. 헬라적 배경이 강한 바울은 특별히 헬라파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제자(성도)들이 바울을 고향 다소로 보냈습니다(행 9:26-28).
다소로 가기 전에 예루살렘에 있을 때 주님께 받은 계시를 바울은 간증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울에게 나타나서 지시하셨습니다.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18절).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스데반을 죽일 때 증인으로 옷을 맡은 바울 자신이 여기서 전하면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21절,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지만 주님의 지시로 이방인에게로 갔습니다. 이 과정을 바울은 예루살렘에 모인 백성들에게 간증합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할 때에도 우리의 계획과 다르게 주님이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주님의 인도를 겸손히 따르도록 합시다.
2.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함, 로마 천부장이 따로 심문함(22-30절)
1)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외침: 그리스도의 고난을 반복함(22-23절)
바울이 여기까지 말하는 것을 듣고 유대인들이 말합니다.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버리자”, 곧 죽이자고 말합니다. 유대인과 로마 군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한 일을 바울에게 행합니다. “없애버리자”(22절- 눅 23:18), “떠들며”(23절- 요 18:49), “채찍질하며” (24절- 눅 18:32, 요 19:1), “심문”(24절- 요 21:12).
전에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유대인의 영웅이었던 사울(바울)이 이제 거꾸로 예수님의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바울을 처음 부르실 때 “네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고난을 받으리라”고 예고하셨습니다(행 9:16, 아나니아를 통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바울이 간증하는 진리의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첫째, 유대인들은 자신이 못 박은 예수가 부활했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예수를 “주님”(10, 19절)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존칭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여호와를 말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예수를 여호와 주님이라고 증거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둘째, 유대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죽였기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7절, “땅에 엎드러져”는 이사야서 25:12, 26:5, 29:4에서 세 번 나오는 특이한 단어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이방인들을 땅에 엎어지게 하고 먼지 속에 엎드러지게 하여 심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이방인이 받을 심판의 예언이 자신에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바울이 이방인이 당할 심판을 받았다면, 예수를 죽이고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간증이 암시하는 바를 그들이 이해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자신의 기대와 다를 때 분노하고 있는 유대인처럼 되지 맙시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가 그 분의 이름을 부를 때 살아 계셔서 능력으로 일하십니다. 우리가 엎드러져 죄를 회개하고 새롭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고 찬양하며 순종하고 나갑시다.
2) 로마 천부장의 개입으로 바울이 죽음을 면함(24-30절)
바울이 죽임을 당할 순간에 천부장이 개입합니다. 바울을 호송하여 성전 뒤에 있는 영문, 곧 로마 군부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백부장에게 명령하여 가죽 줄로 매고 채찍질하며 심문하려고 했습니다(24절).
사도 바울은 항의했습니다. “로마 시민인 나를 정식으로 재판하지도 않고 채찍질할 수 있습니까?” 이에 천부장은 큰일 났다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돈을 주고 로마 시민권을 샀지만 바울은 날 때부터 로마 시민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천부장보다 더 로마 시민이라는 것이 인정되었습니다.
로마 시민을 재판도 없이 대중 앞에서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은 로마법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천부장은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풀어주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바울을 공개적으로 심문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공회를 모았습니다.
믿고 복종할 일
바울은 자신이 헬라어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하여 로마의 천부장으로부터 유대인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또 자신의 유대인 신분과 언어 능력을 이용하여 히브리 말을 하면서 친근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이용하여 안전하게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정통 유대인 신분이나 로마 시민권을 자신의 안락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위해 그 권한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하기도 하고, 또 필요하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재산이나 신분,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서도 사용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지시하는 사명을 위해 잘 사용합시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을 증거합니다. 상황을 지혜롭게 복음 전하는 데 사용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지혜로 복음을 전합시다.
바울은 원래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할 계획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 대한 인생 계획을 갖고 계시며 우리가 그 사명을 깨닫게 하시고 또 친히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재물과 지위, 그 모든 것을 언약 관계에서 이루십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의 큰 흐름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는지 이해합시다. 매일, 순간의 사명에 집중하면서도 내 인생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목표 의식을 가집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인들 앞에서도 바울은 계속 복음 간증을 했습니다. 위험한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했습니다.
우리도 많은 고난 가운데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당하고 아픔을 겪습니다. 복음 때문에 당하는 핍박이 아니라도, 예를 들면 작은 병도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입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과 질병, 경제적 어려움, 여러 역경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알고 인내하며 나갑시다.
1. 오늘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 오늘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순종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2절, 히브리 말
그때에 보통 사람이 쓰던 히브리 방언은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와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아람어’입니다.
<참고> 바울에게 일어난 일은 십자가의 예수님께 먼저 일어난 일
바울에게 일어난 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일어난 일입니다.
“없애 버리자”(아이로, 22절- 눅 23:18, 요 19:15,15,31,31,38),
“떠들며”(크라우가조, 23절- 요 18:49,19:6,12,15),
“채찍질”(마스틱스, 마스티조, 24,25절- 마스티고오, 눅18:32, 요19:1),
“심문”(안-에타조, 24,29절- 엑-에타조, 요 21:12, 빌라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면서 그의 삶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참고> 20절, 스데반의 죽음, 예수님의 죽음과 사도들의 고난
“죽음”(안-아리에시스)과 “죽인다”(안-아이레오)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주로 예수님의 고난, 사도들의 고난, 스데반의 죽음, 바울의 고난에만 쓰인 단어입니다.
마 2:16, (헤롯이) “베들레헴의 모든 아이들을 죽이니.”
눅 22:2,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눅 23:32,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이것도 예수님의 고난과 연결됨)
행 2:23,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 설교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고 합니다.
행 5:33,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베드로의 증언을 듣고 크게 분노하면서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했습니다.
행 8:1, 스데반의 “죽임”(안-아리에시스) 당함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행 9:23,24,29,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계획했습니다.
행 22:20,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상 중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또 주(당신)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행26: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들을 옥에 가두며 또 죽일(안-아이레오)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길을 사도와 성도는 걸어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죄를 대속하고, 나아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고난의 길에 대한 모범입니다.
<참고> 바울이 스데반을 죽인 일이 바울의 복음 전도에 중요한 동기가 됨
바울은 그가 복음 전도자로 부름받은 것을 간증할 때마다 스데반을 죽인 것을 말합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바울의 복음 열정을 계속 불타오르게 했습니다.
8:1, 바울은 스데반의 “죽임”(안-아리에시스)당함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순-유도케오).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 중에 나타난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22:20, “또 주(당신)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순-유도케오) 그 죽이는(안-아이레오)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참고> 7절, 땅에 엎드러져
“땅에 엎드러져”(에드라포스)는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에서 세 번(이사야 25:12, 26:5, 29:4) 나옵니다. 이방인들이 땅에 엎드려질 때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