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5장
죄인들을 불러 거룩하게 하고 복음 전파자로 부르심
(찬송 363장)
2022-12-9, 금
맥락과 의미
5장에서는 네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신 일, 두 번째는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 세 번째는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 네 번째는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불러주신 일입니다. 이 세리 레위가 아마 마태복음을 쓴 마태라고 추측됩니다.
이 전체 이야기는 하나의 메세지입니다. 첫 번째와 끝에는 제자를 부르신 일이 있고 가운데 두 이야기는 병자를 고치신 일입니다. 죄인이요 병자인 사람들 고치고 깨끗케 해 주셔서(죄-8,20,23,30,32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셨습니다. 또 그들 중에 얼마는 복음을 전하는 제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부활 승천 하셔서 그분의 몸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러나 신성의 능력으로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서 이 땅의 교회 안에서 계속 이 일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 죄를 용서하십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하나님 나라 일을 하게 하십니다.
1. 죄인인 어부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심(1-11절)
2.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심(12-16절)
3. 죄인인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치심(17-26절)
4. 죄인인 세리를 제자로 부르시고 죄인들과 친구 되심(27-32절)
5. 금식과 기쁨의 잔치: 예수님께서 여시는 새 시대(33-39절)
1. 죄인인 어부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심(1-11절)
베드로는 전에도 예수님을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4장에 베드로의 장모님을 예수님께서 고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장모님과 같은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에는 갈릴리 호수가에 서서 무리들을 가르쳤습니다. 베드로의 배, 그리고 다른 한 배(야고보와 요한의 배)가 그냥 서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어부들은 밤새 일했지만, 별 수확이 없었습니다. 허전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부탁하여 그의 배를 탔습니다. 호수가에 있는 무리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깊은 데로 가시오. 거기서 그물을 던지시오.”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인 선생님, 밤새 수고해도 하나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말씀에 따라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5절) 베드로 자신의 수고가 고기를 잡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과 주권적 능력이 고기를 잡게 할까요?
굉장히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놀라서 말합니다. 8절에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왜 죄인이라고 고백합니까? 예수님께서 기적으로 이 일을 하셨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9절) 두려워했습니다. “인하여”는 말씀에 의지하여( 5절) 와 같은 말입니다.
말씀에 따라 행할 때 고기 잡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떡이나 고기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고기도 잡아먹고 살게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적을 행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놀라움이 베드로와 또 그와 함께 있는 사람에게 임했습니다(9절).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앞에 그는 무릎을 꿇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말씀을 듣고 믿고 복종할 때 그 말씀과 함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영광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도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 고백합니다. 자기의 죄인됨을 알고서 나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들여 주십니다. 자기 죄를 깨닫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이제 사람을 살리는 어부가 될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모든 성도가 자기 재산을 다 버려야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 사역자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야 됩니다. 세상 재산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라야 됩니다. 우리 교회 목사가 그런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또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 중에 목사의 일로 부르심 받아 영혼 구원하는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이 나오기를 기도합시다.
목회가 아닌 일반 직업에 종사하는 성도도 사실은 주님을 만난 다음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이제는 자기 직업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습니다. 내 욕심을 따라 일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일합니다. 베드로는 어부라는 자기 직업 안에서 일하시는 기적의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직업 활동을 하는 성도는 그 직업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경험합니다.
2.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심(12-16절)
두 번째로, 문둥병자를 고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 있는 부분에 손을 대고서 고치셨습니다. 원래 구약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자에 손을 대면 불결해집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꾸로입니다. 예수님의 거룩이 문둥병자에게 옮아가는 새로운 시대를 여셨습니다. 지금도 문둥병자와 같이 죄와 비참으로 썩어가는 우리에게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린 피 묻은 손을 대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죄인이요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이 환영하여서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명령하셨습니다. “율법에 따라서 제사장에게 자기의 깨끗하게 한 것을 보이고 예물을 드리라.”(레위기 14:2-32) “드린다”는 것은 바로 성전에 제물을 드릴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문둥병자는 이제 그 자신이 성전에 들어갈 수 있고, 제물을 드릴 수 있는 거룩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을 치유하신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영적 깨우침을 주는 비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케 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 거룩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시는 분임을 이 기적이 나타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말씀을 들을 때 우리를 계속 정결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거룩한 성전인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 나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주일 예배 때, 성도들의 모임 때 자기 죄를 회개하고 거룩함에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3. 죄인인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치심(17-26절)
세 번째 이야기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일입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18절), “들여놓고, 들여갈”(18, 19절, )은 예물을 “드린다(페로14절)”와 같은 말입니다. 중풍병자 그를 그리스도께 드리는 제물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고 죄용서하여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로 바치십니다. 성전에서 찬양하기 전에 예수님께 먼저 죄용서 받고 정결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체적 병도 치유해 주시지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선언하십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비난하는 마음으로 서로 말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죄를 사할 수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신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 예수님은 “내가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중풍병자를 고쳐주겠다.” 하시며 고쳐 주셨습니다.
중풍병이 나은 이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 (26절). 그리고 사람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오늘날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합니다. 놀라운 일도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병고치는 기적의 참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죄 사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표적) 병을 고치셨습니다. 물론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기적을 내리실 때에는 기적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모두가 경험한 기적이 있습니다. 죄용서의 기적입니다. 병이 낫는 것보다 큰 기적, 죄용서의 은혜를 받았으니 하나님을 찬송하고 살아갑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죄용서 받고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병이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합시다.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낫게 해 주시거나, 병의 의미를 깨우쳐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다같이 하나님께 치유받고 은혜를 주시면서도, 베드로는 전임 복음 전파자로 부르셨고, 문둥병자와 중풍병자는 집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성도 중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목사로 부르시지만, 대부분의 성도는 학교로, 직장으로 보내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가정과 직장과 교회가 각자의 삶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곳입니다. 일상의 모든 일은 목사가 설교하는 것과 똑같이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림이 있기를 바랍니다.
4. 죄인인 세리를 제자로 부르시고 죄인들과 친구 되심(27-32절)
마지막으로 세리를 부르신 이야기입니다. 그때 세리는 아주 악명 높은 직업입니다. 세리는 월급이 따로 없고 자기가 걷은 세금 중에 일부를 월급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많은 세금을 뺏아갔습니다. 더구나 로마 식민의 나라에다 세금을 거두어 주었기 때문에 세리는 죄인과 동일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리와 같이 먹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비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자기들과 같은 선생 중에 하나로 알았는데 어떻게 죄인들과 먹을 수 있는가 하고 따졌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하십니다. “병든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 없다. 나는 영혼의 의사이며 의인을 부르려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 왔다.”
무서운 말입니다. “너희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의인이라 생각하고 자기가 죄인됨을 알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다. 여기 있는 세리는 자기들이 죄인임을 알고 나에게 왔다. 그들은 회개하며, 나는 그를 제자로 불렀다.” 그때 예수님과 함께 모인 세리와 죄인들이 다 회개하였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에게 먼저 사랑으로 다가가서 자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석처럼 이끌려서 점점 자신들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회개로 나갔을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오십니다.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죄인임을 알고서 겸손히 주님께 나아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죄를 볼 때 비난하고만 있지 맙시다. 죄 가운데 있는 불신자들을 피하지 맙시다. 주님을 향한 믿음안에 거룩해지고, 주님의 능력 안에 강하여 져서 사랑으로 다가갑시다. 그들과 친구가 되어 함께 먹고, 복음을 나눕시다.
5. 금식과 기쁨의 잔치: 예수님께서 여시는 새 시대(33-39절)
1) 금식에 대한 바른 이해(33-35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예수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신랑이 있을 동안에는 신랑의 친구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 그 때에는 금식하라.” 지금 우리는 신랑을 빼앗긴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몸으로는 우리와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서 기도할 때, 더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합시다.
다른 면에서 우리는 항상 신랑과 혼인 잔치를 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도와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금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에서 신비하게 영으로 임재하시고 우리와 교제하십니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잔치입니다. 죄용서의 기쁨으로 참여합시다.
2) 새 술은 새 부대에(36-39절)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옷에는 새 천조각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새 시대를 여셨습니다. 잔치의 기쁨이 있는 하나님 나라를 여셨습니다. 예수님이 여신 새 시대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옛것과 새것을 섞으면 좋지 않은 결과를 낳습니다. 새 옷에서 천 한조각을 찢어서 낡은 옷에 대면 어떻게 됩니까? 새 옷을 찢어 못 쓰게 합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으면 포도주가 쏟아집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예수님이 오게 하신 이 새시대에는 죄인들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는 시대입니다. 사랑으로 하나 되는 시대입니다. 형식적인 종교 의식으로서 금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교제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 금식합니다. 그 금식 가운데서도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묵은 포도주만 좋다고 하고 새 포도주를 싫어하는 사람(39절)은 참으로 불쌍한 자들입니다. 과거의 전통과 자기들의 입맛을 자랑하는 바리새인들입니다.
믿고 복종할 일
우리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셔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 죄인들 가운데 용서받은 자들을 예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와 목사로 불러 주셨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여셨습니다. 기뼈합시다.
성찬의 잔치에 참여한 우리들은 일상을 살아갈 때도 천국의 기쁨 가운데 살아갑니다. 물론 이 땅에는 죄와 고통과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주님께 기도하고 죄가 있으면 주님께 죄용서를 간구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죄 때문에 슬퍼하고 우울하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죄용서를 기뻐하고 감사합시다. 고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합시다. 매일 잔치처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이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을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나는 예수님께 부름받은 제자로서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죄를 용서하고 모든 상처를 치유하시며 제자 삼으신 은혜에 감사하며, 오늘도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삽시다.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5절, “말씀에 따라” 고기 잡음-“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모든 말씀으로”(마 4:4)
“말씀에 따라”는 마태복음 4:4에 나오는 말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돌로 떡을 만들라고 시험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말씀에 따라) 살 것이니라.”(마 4:4)고 대답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된다고 말하셨습니다.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생계를 위해 수고하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시험 내용을 기록한 것을 누가복음 4장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4:4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신 부분만 인용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따라 살 것이다”는 누가복음 5:5에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 말합니다.
“당신(예수님)의 말씀에 따라”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당신(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바꾸어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듯이, 이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와의 시험을 이기게 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무리들에게, 베드로에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1절).
마태복음 4:4에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살리라”는 말을 누가복음 5: 10절에서 “사람을 살리는 자가 되리라”로 나옵니다. 베드로는 사람이 떡이나 고기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예수님을 따를 때 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참고> 9절, “주여 나를 떠나소서” -두려워 한 베드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베드로가 예수님을 두려워 예수님 앞에 엎드린 것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가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린 것과 같습니다(출 4:6).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본 이사야의 두려움입니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주를 뵈었기 때문이다.”(사 6:5)
<참고> 10절 사람을 취하리라(살린다. 죠그레오)=기생 라합과 가족을 살려줌(수 2:12, 9:20)
사람을 “취하리라(살린다)”는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을 죽이면서 기생 라합을 살려줄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여호수아 2:13). 하나님의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을 죽었지만, 라합과 그녀의 가족은 살려주었습니다. 가나안 민족 중에서 기브온 민족을 살려준 것을 말합니다(여호수아 9: 20). 베드로와 예수님의 제자들도 죄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로부터 사람을 살려내는 어부가 될 것입니다.
<참고> 18, 19절 중풍병자를 메고, 들여 놓고=성전에서 예물을 드림(14절)
중풍병자를 “메고”(페로, 18절), “들여놓고, 들여갈”(18, 19절, 에이스-페로), 이것은 다 예물을 “드린다(페로, 14절)”와 같은 표현입니다.
이 중풍병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독사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26절). 그리고 사람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오늘날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합니다. 놀라운 일(파라-독사, 26절)도 영광이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