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6장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로운 나라: 사람의 해방, 마음과 말과 행동에 나타나는 은혜의 선함 2022-12-10, 토
작성자축제작성시간22.12.09조회수57 목록 댓글 0누가복음6장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로운 나라:
사람의 해방, 마음과 말과 행동에 나타나는 은혜의 선함
(찬송 180장)
2022-12-10, 토
맥락과 의미
누가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여러 제자들 가운데 열두 제자, 즉 사도를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들이 어떻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될지를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그 사도들을 부르시는 분도 예수님이요, 사도적 삶의 모범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 안식일의 바른 의미(1-11절)
2.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가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 가르치심(12-49절)
1. 안식일의 바른 의미(1-11절)
첫 번째 이야기는 안식일 이야기입니다.
1)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1-5절)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배가 고팠습니다. 밀이삭을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주신 공동체의 민법에는 배고픈 사람은 남의 밭에 들어가 곡식을 먹어도 됩니다(신 23:25).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도둑질했다고 문제 삼은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일했다고 문제를 삼았습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데, 왜 안식일에 일을 했느냐?” 그러나 안식일에 이삭을 비벼 먹지 말라는 법을 하나님이 주신 적은 없습니다. 안식일에 가난한 사람들도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남의 밭에 들어가 이삭을 비벼 먹는 것은 정당합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겠다는 열심이 많았습니다. 문제는, 율법주의, 의식주의를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명령하지도 않고 금지하지도 않는 것을 규칙으로 만들었습니다. 율법의 전체 정신으로 보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행동(안식일에 남의 밭에서 이삭 비벼 먹는 일)을 사람의 생각으로 금지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이 안식일에 들에 있는 것을 먹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자기들은 부자니까 미리 준비한 곡식과 식사로 안식일에도 밥을 먹으면서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 말씀을 통해 설명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도망갈 때 성막에 들어가서 성소 안에 놓은 진설병을 먹었습니다(삼상 21:1-6). 자기 부하들에게도 주었습니다. 진설병은 성전 안에 차려 놓은 (진설한) 떡 (병)입니다.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떡입니다. 그런데도 제사장이 아닌 다윗과 그의 군인들이 먹은 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설명합니다.
5절에 “인자 (the Son of Man)은 안식일의 주인이다.”고 하십니다.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안식일의 참 뜻을 바로 가르치시는 권한이 있는 분입니다. 다윗이 왕으로서 구약 율법에 금한 것을 대제사장의 양심적 판단에 의해 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로서, 구약 율법을 새롭게 개정하는 일도 하십니다.
둘째,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다윗왕은 그의 부하 군인들에게 안식일에 성전을 통해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과 교회의 주인으로서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참 양식과 기쁨을 주십니다. 참된 자유와 쉼을 누리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제자들의 삶에서 참 해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참 해방을 방해되는 것이 자기 의를 자랑하는 율법주의입니다. 이 함정에 빠진 자들은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놓칩니다. 자기도 율법의 짐에 눌려 고통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천국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우리 모두 주일에는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쉬면서 참 자유를 누리기 바랍니다.
2) 안식일에 병을 고치심 (6-11절)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셨습니다. 이번에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안식일의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 주신 해방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도 쉬어야 합니다. 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 다른 사람도 안식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새 나라인 교회가 할 일입니다. 안식일(주일)은 새 나라의 삶을 가장 분명히 나타내는 날입니다. 주일에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자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을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노기가 가득했습니다. “노기”는 우리 말로 화를 낸다는 뜻입니다. 41절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와 연관됩니다. 지식이 바르지 못하고 그 결과 의지와 감성이 비뚤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깨닫지 못해서 예수님께 화를 내었습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운 사람들입니다. 병 때문에 짓눌려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병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을 반대합니다. 이들은 마음이 아주 캄캄해져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까 서로 의논했습니다. 참된 해방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그들은 순종해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삶의 방식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에 저항했습니다.
우리도 조심합시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배우기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조그만 말씀의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맙시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친 삶을 부인하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합시다.
2.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가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 가르치심(12-49절)
1) 열 두제자들을 부르시고 많은 무리를 가르치고 병 고치심 (12-19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가르침을 주십니다. 13절에 많은 제자들 중에 열 둘을 대표로 세우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에게 일종의 인턴십을 시키며 함께 사역을 하십니다.
17절에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으로부터 많은 백성이 와서 배우기도 하고 병고침을 얻었습니다. 5:17에서도 갈릴리 유대 예루살렘으로부터 많은 사람이 왔습니다. 원래 말씀을 배우기 위해서 어디에 가야 합니까? 성전에 가야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 모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새로운 성전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가 바로 새로운 성전입니다.
예수님은 병도 고쳐 주시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병 고치는 것은 가르침을 위한 준비라 할 수 있습니다. 가르침은 영적인 고침입니다. 영적인 치유 때문에 육체적인 치유가 의미를 가집니다. 육체적 병은 나아도 죄를 지으면 영혼은 더 망가집니다.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됩니다.”(눅 11:26)
2) 제자의 삶에 대한 가르침: 고난을 즐거워하라 (20-26절)
제자의 삶에 대해 가르칩니다. 첫 번째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복입니다. “이 땅에서 우는 자들은 복이 있다. 이 땅의 가난한 자들은 부유할 것이다. 사람들이 미워하면 복이 있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 것이다.” 이 땅은 잠깐입니다. 길어야 백 년입니다. 이 땅은 다음 시대를 위한 준비하는 때입니다. 다음 시대를 지금 이 곳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윤리보다 훨씬 높은 천국 윤리로 살아갑니다. 너무 높기 때문에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비난하고 싫어합니다. 그 때문에 종종 손해도 봅니다. 심지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직장도 잃는 일도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기뻐하라, 기뻐하라, 기뻐하라.” 세 번이나 말합니다. 23절에 보면 “그 날에는 기뻐하고 뛰놀라.” 그 날이라는 것은 지금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멀리하고 악하다 버릴 때는 기뻐하고 뛰놀라.” 자, 이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여 기뻐합시다.
우리 자녀들도 어릴 때부터 고난가운데 강하도록 가르칩시다. 사람들에게 욕먹고 비난당하고 따돌림을 당하면 기가 죽는 연약한 아이로 키우면 안 됩니다. 진리에 굳게 섰을 때 욕을 먹고 따돌림 받으면 주님께서 함께 있는 것을 알고 기뻐하는 강한 아이들로 키웁시다. 그럴 때 성령께서 위로를 주시는 것을 우리 자녀들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부모들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헛된 야망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 때 인정받으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인정받지 않아도 우리는 즐거워해야 됩니다. 그러나 거꾸로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했느니라.”
항상 부유하고 항상 기쁘고 항상 인정받으려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바랍니다.
3)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라 (27-49절)
제자의 삶에 대한 두 번째 교훈은 “대가를 바라지 말고 빌려주고 원수에 대해서도 선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35절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새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거래 관계로만 살아서 안 됩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거래 관계에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참된 사명은 거래 관계를 넘어서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이 세상 위에, 너머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선함과 의로움과 좋은 것, 은혜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종종 손해 보며 삽니다. 이 좁을 길을 걸으며 천국으로 여행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어떻게 됩니까? “너희에게 줄 것이다. 후히 주고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게 줄 것이다”(38절). 지금 잃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될 것을 즐거워합시다. 그것을 바라고 소망하며 즐거워합시다. 제자인 우리들이 선생이신 주님과 같이 되면 좋지 않습니까? (39절). 선생님,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 고난을 받으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는 하늘로 가셔서 하늘 우편에 다스리고 계십니다.
마음에 쌓은 것이 바로 열매로 나옵니다(45절). 마음에 쌓은 것이 행동으로 나오고 말로 나옵니다. 오늘 가르침을 그대로 간직합시다. 성령으로 마음에 가득 쌓읍시다. 마음에 가득 쌓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성품이 우리의 말로 나오도록 합시다. 우리 가운데 은혜가 많고 가득한 선함이 행동으로 나오기 바랍니다.
마음에 진리가 가득할 때 행위가 나옵니다. 듣기만 하고 행위가 나오지 않는 사람은 마음에 쌓인 말씀과 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풍파가 올 때 넘어집니다. 그리고 주님 재림하실 때 완전히 넘어져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마음에 진리가 가득 쌓여있고 진실되게 살아가는 성도는 다릅니다. 어떤 풍파 가운데서도 오히려 강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오실 때 견고한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쉴 것입니다. 위로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2:25) 안에서 시작된 위로는 천국에서 더 완전해질 것입니다(16:25). 성도에게 고난은 오히려 우리를 연단시킬 것입니다.
믿고 복종할 일
주일에 예배하고 쉬는 참 기쁨이 있기 바랍니다. 우리가 쉬면서 힘되는 대로 다른 사람도 섬깁시다. 그들도 죄에서 육체적 고통에서 해방되도록 도웁시다. 우리가 섬길 사람은 누구일까요? 어떻게 섬길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새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새 나라의 백성으로서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세상에서 손해 볼 일도 있습니다. 비난받을 때도 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고난받을 때 기뻐하도록 합시다. 누구에게나 후하게 사랑을 베푸는 자세를 가집시다. 나 자신이 더 후하게 대해 주어야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어쩌면 가장 가까운 가족에 대해서 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로써 하나님 나라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고생을 견디고 그 가운데에서도 참으로 주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천국의 기쁨 미리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을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나는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참된 쉼을 누리고 있습니까?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 주시는 은혜를 누리면서 기쁨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깁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