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0장
복음 전파하고 듣는 것을 통해 자라는 하나님 나라,
사랑의 봉사의 의무
(찬송 449장)
2022-12-15, 목
맥락과 의미
누가복음 10장은 9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9장에서 예수님은 열두 명의 제자를 파송했습니다. 이제10장에서는 70명을 따로 파송하십니다. 예수님 은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 말씀을 전하십니다. 10장의 마지막은 “그분의 말씀(39절)을 잘 듣는 모범적인 성도 마리아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1. 70명의 제자 파송: 권위있는 복음의 전파와 제자들의 구원(1-24절)
2.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마리아의 말씀 사랑(25-40절)
1. 70명의 제자 파송: 권위있는 복음의 전파와 제자들의 구원(1-24절)
70명 제자를 “그분이 가시려는 마을과 장소로 앞서 보내십니다.”(1절) 9:51에서 시작된 예루살렘을 통과하여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여행이 계속됩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도, 신약의 사도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계속 전합니다. 그 말씀과 함께 주님이 오십니다. 제자들이 먼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주님은 뒤따라 오십니다.
지금도 교회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분이 오십니다. 가정에서 가장의 인도로 부모의 인도로 말씀을 읽는 이유도, 그분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전파를 뒤따라서, 말씀 전파와 함께 그분은 오셨습니다. 그리고 계속 오시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통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몸을 가지고 오시고 있습니다. 천사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몸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된 곳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실 것입니다.
4절에 길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도 하지 말라.” 복음 전하는 일의 긴급함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경제적으로 많이 준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은 당연히 인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저것 안부를 물으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삶에서 비본질적인 일에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맙시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집중합시다. 천국에 긴급한 일들을 하는 제자들과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나라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인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집에 가든지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생각하지 말라. 평안을 빌어 주라. 그 사람이 받을 자격이 있으면 평안이 머물 것이다.” 받을 자격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이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받으면 평화가 그의 것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이렇게 축복하는 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하물며 함께 평생 살도록 한 내 남편, 내 아내는 더 축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부모님, 나의 자녀, 우리 교회의 성도들, 더욱더 축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자들은 그들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공급하는 것으로 먹고 삽니다.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7절). 제자들과 또 우리 시대 목사들이 복음을 힘껏 전하면, 하나님께서 공급하십니다. 믿음의 성도들을 통해서 공급하십니다.
성도는 제자와 목사를 경제적으로 지원할 때,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의무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받는 제자와 목사는 경제적인 것을 공급하는 주님께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또 교회에 감사해야 합니다.
또 “한 마을에 들어가서 그들이 복음을 받으면 거기 머물러 있으라. 그들이 주는 것을 먹으라. 그들의 병을 고치라.”(9절) 영적인 복을 전달하는 것과 함께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나눔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복음을 전파자에게 물질을 제공하고, 다시 복음 전파자는 병을 치료하며 축복을 전해줍니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 위에 가까이 왔다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어느 동네든지 아무도 영접하지 않으면 거기 머물 수가 없습니다. 억지로 거기 있지 않고 다른 데로 떠나면서 발에 먼지를 텁니다. “이 도시는 하나님 나라와 관계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합니다.
9절과 11절에서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왔다”고 전파하는 제자들을 영접하고 말씀을 받는 사람들은 “너희에게(너희 위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선언해 줍니다(9절).
제자와 하나님 나라와 말씀을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너희 위에” 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11절)”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거절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는 왔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거절하는 자들은 그 나라의 복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 나라가 온 것을 그냥 알고 끝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하나님 나라는 계속 나아갑니다. 그 복음을 받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교회를 이루고 하나님 나라가 자라갑니다. 복음을 전하는 성도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겸손하면서도 당당합니다.
복음대로 살아가는 성도들도 사람들이 우리의 하나님 나라적 삶을 조롱할 때 속으로 당당히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당신들 위에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들 위에는 왔다. 당신들이 함께 살고 있는 나의 가정, 나의 교회, 내가 일하는 직장의 이 업무 위에는 하나님 나라의 평화와 기쁨이 이미 온 것을 아시오.”
복음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의 도시들은 과거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큰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역을 행했던 그 벳새다와 가버나움에 대해서 더 큰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영으로만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아들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서(히브리서 1;1-2) 하나님 나라는 더 선명히, 더 확실하게 이 땅에 왔습니다. 더 풍성한 복음이 전파되는 이 시대에 복음을 거절한 자들에게는 더 큰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하십니다. “유대 땅에 행한 능력과 복음을 두로와 시돈과 같은 이방 지역에 행했으면 받아들였을 것이다.” 두로 시돈 등 이방 지역과 온 세계의 이방 민족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날이 올 것을 암시적으로 가르칩니다. 원래 이방인인 우리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16절에 제자와 교회의 권위를 선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요즘으로 치면 복음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여러분, 성도들입니다. 우리 성도와 목사의 말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들입니다. 또 하나님을 받는 자들입니다. 제자들과 그들의 전한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옵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을 거절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거절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복음 말씀을 듣고 하나님 나라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을 감사합시다. 우리가 경제적인 것들로 많이 고생하고 또 고민을 많이 할 때도 이것을 감사합시다. 우리의 하나님 나라적 삶을 사람들이 무시할 때, 생각합시다. “당신들은 내가 믿는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다. 하나님과 그 분의 나라를 배척하고 있다.”
70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너무 기뻐하며 말합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굴복했습니다.”(17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래. 잘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귀신이 너희에게 굴복하는 것보다도 너희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즐거워하라.”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 귀신이 세력을 떨치지만 주께서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귀신을 물리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귀신을 무너뜨리는 것도 하나님 나라에서 할 일입니다. 그러나 더 가치있는 것은 우리가 그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21-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말 중요한 감사 기도를 드리십니다. 아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감동되어서 하늘을 향하여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린아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들 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어린아이는 순수하게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입니다. 그러나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이것을 받지 못합니다.
지혜가 많고 지식이 많은 자들은 복음 말씀도 잘 이해할 것 같습니다. 또 더 잘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하나님은 그들에게 감춰져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하나님 나라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21절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또 22절에 아들의 소원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돈이나 지식이나 외모의 탁월성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님을 나타내십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들 하나님께서 그렇게 뜻하시고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만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계시의 내용은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신비의 교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 중에 어떤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들을 그 신비한 교제 가운데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고 듣는 자들은 참으로 복됩니다.
우리 성도님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 마음에 간직한 것이 참으로 복됩니다. 영적 세계가 내 마음에 가득히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2.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마리아의 말씀 사랑(25-40절)
이제 25절부터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사랑의 실천이고, 두 번째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1)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의 실천(25-27절)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어떻게 해야 내가 천국을 얻겠습니까?” 했습니다. “얻는다”는 “기업을 상속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어떻게 쓰여져 있느냐?” 다시 묻습니다. 율법사는 아주 잘 대답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고 쓰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하십니다. “잘 대답했다. 그대로 행하라.”
이 사람은 다시 묻습니다.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길에서 강도를 만나서 쓰러져 누워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그것을 보고 그냥 지나갑니다. 레위인도 그냥 지나갑니다.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불쌍히 여기고 이 사람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말도 하지 않고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이 복음을 듣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게 될 날이 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그림처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입니까?” 율법사는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36-37절) 우리의 참 이웃은 누구입니까? 나에게 잘해주는 것이 이웃이 아닙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나의 이웃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으로 나를 도와줄 것인가?”보다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를 생각합시다. 교회 안에서도 그 생각을 가집시다. 나의 가족에게도 어떻게 가족에게 좋은 이웃이 될 것인가를 생각합시다. 나아가서 우리 교회 전체가 지역 사회에 대해서 좋은 이웃이 되도록 합시다.
2) 마리아의 하나님과 말씀 사랑(38-42절)
그런데 이 비유만 들으면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랑의 실천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복음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집, 나사로의 집입니다. 그 집에 들어 가셨습니다.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그때 예수님께서 언니 마르다에게 이야기합니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분주하고 근심하는데 그러나 한 가지가 더 중요하다. 그것은 말씀을 듣는 것이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했다. 결코 빼앗기지 않으리라.” 분주한 것은 “마음이 나누어진다”는 뜻입니다. 마르다는 말씀을 듣고 주님을 즐거워하는 일로부터 마음이 분산되었습니다.
‘좋은 편’은 기업으로 분배해 주시는 땅을 말합니다. 마리아 자신에게 분배된 것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계시록 22:19,20에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더하거나 제하는 사람은, 생명 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함(기업)을 빼앗는다’에 반복됩니다. 마리아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을 것입니다. 말씀을 간직하는 사람은 영생의 생명 나무에 참여합니다.
교회의 일은 복음 전파와 몸으로 하는 섬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말씀을 잘 듣고 그 다음에 섬겨야 합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22:27, 막 10:45). 우리 주님을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는 것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섬김을 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예배도 “섬김”입니다. 예배에서도 우리가 섬기기 전에 주님이 먼저 섬겨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찬양하고 기도하며 드리기 전에, 주님이 먼저 말씀을 통해 먹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이 사랑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죄용서 하셨다는 이 은혜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사랑으로 마음이 먼저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해되고 안정되고 평안함이 없이 봉사하면 마르다처럼 됩니다. 음식을 준비하는 일에만 분주합니다. 마음에 염려와 걱정 가운데 봉사합니다. 그러면, “주님, 왜 저 형제 자매는 봉사하지 않게 내버려 둡니까?” 형제 자매를 정죄합니다. 주님께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주님과 교회를 위해 섬기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다툼이 없고 겸손하게 행해야 합니다(빌 2:3). 그러나 문제는 남들을 섬기는 우리 자신은 죄인이고 약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주님으로부터 계속 죄용서 받아야 합니다. 먼저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공급받아야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목사가 하는 것이 말씀 전파입니다. 장로는 성도들이 말씀에 따라 살수 있도록 권면하고 때로는 책망도 합니다. 집사가 하는 일은 구제를 하고 성도를 돌봅니다. 주일에 몸으로 하는 봉사를 우리 모든 성도들이 서로에 대해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핵심이 되는 것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사도들이 말씀에 전무하도록 하기 위해서 구제할 일을 도울 사람들을 세웠습니다(행 6:1-6). 우리도 몸으로 섬기는 일을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복음입니다. 말씀이 풍요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무 분주해서 말씀을 듣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믿고 복종할 일
우리는 제자들이 전해준 말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주님이며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습니다. 교회와 성도는 귀신을 쫓아 내고, 가난한 사람을 섬기는 일, 많이 섬기는 일 등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기본이 되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잘 배우는 일입니다.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점점 배우고 말씀 가운데서 그 나라를 누리는 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섬김과 사역과 성취는 하나님과의 신비한 연합의 표현으로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을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나는 세상으로 파송받은 예수님의 제자로 복음의 비밀을 마음에 품고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도움이 필요한 주위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어주고 있습니까? 예배와 삶 가운데 예수님의 섬김을 먼저 풍성히 누리고 계십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4절,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열왕기 하 4:29
전에 엘리사도 죽은 아이를 살리러 자기 제자 게하시를 보내면서 말했습니다.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라. 사람이 인사하더라도 대답하지 말라.” (왕하 4:29)
<참고> 40절, “준비하는”(디아코니아), “일하게”(디아코네오)=식탁봉사, 집사적 일
40절에 여기 준비하는 일이라는 것은 ‘디아코노스’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집사적 일을 말합니다. 언니 마르다는 화가 났습니다. “선생님, 내 동생한테 나를 혼자 일하게 내버려 두지 말게 해주세요.” 이 ‘일한다’도 ‘디아코노스’ 봉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