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7장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직분을 다하며 세상에 집착하지 말라
(찬송 3장)
2022-12-23, 금
맥락과 의미
누가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여행 중에 제자도를 가르치는 것이 계속됩니다. 9장 51절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느니라”로 시작해서 19장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까지 걸어가십 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가십니다. 실제적으로 걸어가셨지만 비유와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인생길입니다. 제자들도 우리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십자가를 지고 천국을 향해 여행합니다.
1. 교회: 용서와 믿음의 공동체(1-10절)
2. 치유받은 나병환자 10명 중한 명만 영적인 구원(11-19절)
3. 교회 안에 이미 온 하나님 나라, 재림에 의해 완성(20-37절)
1. 교회: 용서와 믿음의 공동체(1-10절)
첫 부분에 이야기하는 것은 교회 안의 형제 자매들의 관계에 대해서입니다. 우리가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는 실족케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1-2절). 실족케 한다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나가는 것을 어렵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혹은 우리의 실수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실 때, 제자 공동체를 실족케 할 가롯 유다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실족케 하느니 차라리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지우는 게 낫습니다. 연자맷돌은 곡식 껍질을 벗기기 위해 소의 목에 매어서 돌리는 큰 돌을 말합니다. 큰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경고가 됩니다. 위로도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 뜻대로 살아갈 때 우리를 실족케 하는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겁니다.
둘째, 범죄한 형제들을 사랑으로 잘 권면해야 합니다. 회개할 때 용서해야 합니다(3-4절). 죄를 짓는 성도를 보고도, 그들에게 상처를 주면 안되겠다는 마음으로 내버려 두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렇게 죄를 방임하면 그 사람을 더 실족하게 합니다. 죄에서 돌이키도록 사랑으로 책망해야 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회개하면 언제든지 용서해야 됩니다. 참으로 여기서 성령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을 불필요하게 실족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상처를 주는 것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돌아오도록 권면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그 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5-6절: 5절에서는 믿음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너희가 믿음이 있으면, 뽕나무가 뿌리 뽑혀서 바다에 던지우라 (심겨 져라)고 말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여기 믿음은 구원 얻는 믿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능력을 행하는 믿음을 말합니다(고린도전서 12장 9절에서 말하는 믿음). 사역을 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사도인 그들에게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 그 능력을 행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뽕나무를 보고 “바다에 심어져라.”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에서 약속한 것에 대해서 믿고 신뢰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나의 마음의 표현이 아니라 항상 객관적인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믿고 나아가서 삶에서 기적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시키신 일들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때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합시다. 믿음으로 한 발자국 내딛기를 바랍니다.
7-10절: 7절부터는 사역자의 자세에 대해서 말합니다. 제자들도 우리 모두도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이 종들처럼 일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여기 비유에서 말하는 종은 고용된 사람이 아닙니다 노예입니다. 주인이 죽일 권한도 있는 노예입니다. 종이 들에서 힘껏 일하고 집에 들어오면 주인은 “그래 수고했다. 앉아서 식사해라.” 하지 않습니다. 종은 다시 주인을 위해서 식사를 준비해야 됩니다.
우리도 죽을 때까지 주님을 위해서 일합니다. 우리는 조금 일하다가 마치 군대에서 제대한 사람처럼 인생을 편하게 지내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 목사님은 종종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군대에서 복무하는 사람과 똑같다.”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생명을 다하여서 주님을 위하여서 일해야 됩니다.
우리가 종으로서 열심히 일한다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례, 즉 감사할 의무가 있을까요? 주님이 우리에게 감사하실 것을 기대해야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종은 자기가 일한 후에 칭찬이나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의 위대한 일로 불러주신 것에 감사하며 나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상 준다는 말이 종종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상을 준다는 것은 공로에 대한 상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와 언약을 맺고 우리가 지켜야 할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이 언약의 말씀을 지키면 복을 줄 것이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로 스스로 자발적으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자유로운 의지의 결정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복을 주실 준비를 하시고, 우리에게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수고한 것에 대해서 복을 내리신다 해서,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받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우리는 은혜로만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죄용서 받고 구원받은 우리들은 주님 앞에 신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약속대로 참 인생의 행복을 주십니다. 내세의 행복도 주십니다.
2. 치유받은 나병환자 10명 중한 명만 영적인 구원(11-19절)
11절부터는 나병 환자 열 명의 치유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열 명이 와서 고쳐 달라 했습니다. 주님께서 고쳐 주지도 않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예물을 드리라.” 그들이 가는 중에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 열 명중한 사람만 다시 돌아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돌아온다는 것은 회개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병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자기 죄를 회개하고 감사와 찬양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다른 9명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 시대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고 육체적 질병을 낫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좋은 데 취직하고 물질적 복을 누리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물질적 복을 주십니다. 그 물질의 복을 받는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 믿음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시작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까지 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을 얻는 믿음이 아닙니다.
참된 구원을 얻는 믿음으로 성장하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깊이 뿌리내리게 해 주신 믿음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이 땅의 현실적인 복만 받으려고 하지 맙시다. 현실적인 복도 영원한 구원을 향해서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면서 구원에서 성장합시다.
3. 교회 안에 이미 온 하나님 나라, 재림에 의해 완성(20-37절)
1) 바리새인에게 대답 (20-21절)
20절부터는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옵니까?” 바리새인들이 질문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바리새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고 보이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기대했듯이 로마로부터 정치적 해방되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되는 그 자체는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말하고 있을 때 그들 안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들 안에 와 계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왕권을 받아서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행동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왔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 분의 나라는 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바로 교회의 모임 안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습니다. 세상의 정치적 경제적 질서가 아무리 좋아지거나 혹은 나빠지더라도 하나님 나라가 교회 안에 있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성도의 삶 안에, 성도의 가정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우리 힘을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제자들에게 가르치심(22-35절)
22-25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 대신에 인자(그 사람의 아들)에 대해 4번이나 말합니다(22,24,26,30절). 하나님 나라의 복은 이 사회가 좋아진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일하시는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는 옵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다. 번개가 한 곳에서 번쩍이면 온 땅에 비치는 것과 같다.” 이 세상 한 곳이 아니라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는 옵니다.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옵니다. 예수님 께서 다시 재림할 때를 이야기합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도 사실 물질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도 물질적으로 한 지역에 예수님이 왔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번개가 번쩍하듯이 온 세상에 눈에 보이게 하나님 나라가 회복될 것입니다.
“인자가 영광 중에 재림하기 전에 먼저, 인자가 고난받고 세상에서 버림받아야 된다.”(25절)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는 오고 있습니다. 죄용서와 죽음을 이기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나가고 있을 때, 하나님 나라는 더 진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다스리고 있으면서 이 땅에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과 함께 교회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성도는 교회 안에서 죄를 고백하고 사망의 세력을 이기고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됩니다. 우리 주님이 재림하실 정확한 때와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 바로 이 시간 주님이 재림하는 것처럼 기대하면서 매일 준비해야 됩니다.
26-30절: 이 세상의 일상적인 삶이 계속되는 어느 순간에 인자이신 주님은 갑자기 오십니다. 노아의 심판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먹고 마시고 장가 가고 시집가고 일상적인 일을 했습니다. 그것은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일만을 하고 있을 때, 그것은 악한 것으로 됩니다. 롯의 때에도 사고 팔고 즐기고 집짓는 가운데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즐거움만을 추구할 때, 즐거움이 우상이 됩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의 활동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일상의 일 가운데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는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롯은 그 멸망의 도시 바깥으로 나가게 했습니다. 노아와 롯은 이미 세상과 다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 이상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시대가 정말 롯의 시대, 노아 때와 같아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쾌락에 빠져 있습니까? 이렇게 잘 사는데도 얼마나 더 잘 살려고 눈이 어두워져 있습니까? 주님의 오실 때가 가까워져 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신다는 신호가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 짓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홍수가 온다는 경고였습니다. 이민자 롯의 삶이 소돔 고모라에게 경고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노아에게만, 롯에게만 구원받을 수 있는 복음을 전해주셔서 그들이 대비하도록 했습니다. 일시적인 이 땅의 물질들을 유용하게 사용해야 되지만 영혼이 거기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
31-35절: 어떻게 그 날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먹고 사는 것 가운데 그 이상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려 가지 말라. 롯의 아내처럼 어리석게 되지 말라. 뒤돌아 가지 말라. “예수님이 재림하여 심판하실 때, 그 분을 맞아야지 이 땅의 물질에 미련을 두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 분이 오심을 기다리는 지금부터 물질에 마음이 매여서는 안 됩니다.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오히려 죽을 각오를 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자들은 생명을 얻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32-33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의 죄악된 욕망을 부인합시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주신만큼 자족합시다. 주께서 놓으라 하면 과감히 놓고 떠나야 합니다. ‘조금만 죄를 지으면, 눈감으면, 부자가 될 수 있는데.’ 그 유혹을 과감히 던지고 떠나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주님께서 주신 복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참된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우리의 중심에 두고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 오시는 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같이 일하던 사람 중 한 사람은 버림 당함을 받고 한 사람만 하나님 나라로 데려감을 당합니다. 지금 우리와 친한 사람 가운데, 심지어 가족 가운데도 함께 천국 가지 못하고 갈라지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과 같아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양심으로 지시한 그대로 나아가십시오. 사람들과 경쟁하고 성공하고 똑같아지는 것이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항상 그것을 초월한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두고 떠나는 자세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3) 제자들의 질문과 주님의 대답(37절)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언제”오는 가를 물었습니다(20절). 이제 제자들은 “주님 그럼 어디에?”라고 묻습니다. 37절에 “주검(시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시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듯이 재림의 날의 징조가 분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둘째 의미는, 독수리가 시체 곁에 모이듯이, 구원받은 성도는 주님의 몸에 모인다는 뜻입니다. “주검”은 보통 시체를 말하는 단어가 아니라 그냥 “몸(소마)”입니다. “인자의 몸”이 있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그 몸 주위로 성도들은 교회로 모입니다.
주님은 성찬에서 제자들에게 빵과 함께 주님의 몸을 주십니다.” 이것은 내 몸이다”(22:19).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소마, 몸)”을 달라고 하여 장례지냅니다(23:52,53). 부활하신 후 그 분의 몸(시체, 소마, 24:3,23)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 나셨습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게시지만, 이 땅에 주님의 몸인 교회(엡 1:23)를 두셨습니다.
주 예수께서 전에 이 세상에 몸으로 계실 때도, 지금 하늘에 계실 때도 주님이 있는 곳에 교회가 모입니다. 교회가 있는 그 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시며 교회와 함께 계셨습니다. 지금도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선포되는 그 곳에 주님은 함께 하십니다. 말씀을 전하는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성도는 다른 곳에 가지 않습니다. 바로 교회에서 말씀을 배우고 예배하면서 교회와 함께 천국을 향해 나갑니다.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때, 복음 안에 교회가 일치되어 나아갈 때,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믿고 복종할 일
그리스도의 복음 약속을 믿고, 그 분의 오심을 기다리며 살아갑시다. 복음이 전파되는 교회에 주님은 이미 성령님을 통해 함께 계십니다. 교회의 성도의 믿음이 성장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오히려 죄를 짓는 성도를 권면합시다. 회개하면 계속 용서합시다.
이 땅의 물질과 성취를 우상처럼 경배하고 매이지 맙시다.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주신 것에 자족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살아갑시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용합시다. 이미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온 사람답게 세상과 다르게 삽시다.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그 분의 나라를 회복하실 때 기쁨으로 환영하기 위해 위를 바라봅시다. 과거의 죄와 탐욕의 삶을 향해 뒤돌아가 가지 맙시다. 오시는 종말의 축복을 향해 앞으로 나갑시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는 그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